“자전거기자” 손화섭, 18년사이에 자전거 6대 바꾸다
“자전거기자” 손화섭(오른쪽)이 취재하는 곳에는 늘 자전거가 따라다닌다.
76세의 고령임에도 열심히 기사를 써서 신문잡지에 발표하는 사람이 있다. 그것도 뻐스도 아닌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말이다. 그가 바로 여러 매체의 공동한 통신원이자 특약기자인 룡정시통신협회 손화섭 회장이다.
손화섭은 6살에 어머니를, 10살에 아버지를 여의면서 하루아침에 의지가지 없는 혈혈단신으로 되였다. 그때가 바로 1952년이였는데 한 마을에 살던 한화춘(52세)이라는 마음씨 고운 녀성이 그를 불쌍히 여겨 입양하여 키워주었다. 손화섭은 이렇게 그의 손에서 자라 장가를 가고 가정을 이루었다.
손화섭은 다년간 선후로 룡정시 용신향, 동불사진의 농전소 소장 겸 당지부서기로 사업하다가 1997년 8월에 정년퇴직하게 된다.
열심히 일해 오던 그는 정작 퇴직하게 되자 인생의 적막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자기를 인젠 성 쌓고 남은 돌신세로 생각하니 마음이 저으기 답답하고 불안해났다. 게다가 매일 아무일도 하지 않고 허무한 시간을 보내자고 하니 손에 당장 가시가 돋을 것만 같아 도저히 안절부절 못했다.
‘아직 기력도 좋고 정신력도 좋은데 무엇이든 사회에 유익한 일을 해야 하지 않을가? 내가 학교를 다닐 때 글쓰기에 흥취가 있었는데 글을 써서 신문사에 보내면 어떨가?’
2015년 년말총화모임에서 총화발언을 하고 있는 손화섭 회장.
그래서 선택한 것이 글쓰기였다. 그런데 신문기사를 쓰기란 그리 쉽지 않았다. 정작 글을 쓰자고 하니 무엇부터 써야 하고 어떻게 취재를 해야 할지 궁리가 잘 떠오르지 않았다. 고민하던 끝에 그는 경험이 풍부한 통신원들과 글쓰기열성자들을 찾아 이것저것 물어 가면서 하나하나 배우고 또 배웠다.
그렇게 쓴 글 <김기택로인 렬사기념비에 꽃과 나무를 심고>가 《연변일보》에 실렸는데 이것이 그가 쓴 첫 신문기사였다. 이에 신심을 얻은 그는 어디에 좋은 취재거리가 있다하면 아무리 피곤하고 바쁜 일이 있더라도 두말없이 자전거를 타고 취재길에 오르군 했다. 자전거는 그때로부터 그의 제일 친근한 “반려”로 되였다.
동불사에 있을 때인 2003년, 삼복철의 어느 날이였다. 룡정시 조양천진에 가서 취재할 일이 있었는데 뻐스를 타면 시간도 맞지 않거니와 뻐스에서 내려 또 여러 곳으로 다녀야 했다. 그는 아예 무더위를 피해 새벽 4시에 자전거를 타고 길을 물어 가면서 먼저 삼성촌 제6촌민소조의 김창순로인을 찾아 취재하였다.
김창순로인은 1982년에 호도거리를 시작하여서부터 염소사양을 하였는데 13마리의 염소를 300마리로 늘였으며 연변농학원 교수의 지도하에 염소의 우량종을 번식시키는 인공수정실험에 성공하여 국가 농업부, 상업부, 공업부로부터 <전국 염소사양기지건설 및 모범사양전문호>라는 영예칭호를 수여받은 분이다.
그 다음으로 조양천진에 가서 조양천진 로인협회 최려천 회장을 만나 로인협회를 룡정시 우수로인협회로 이끌어온 사적을 취재하였으며 그 로인협회를 통해 태동촌 로인협회의 활동이 아주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는 것과 광석촌에서 연길시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지리적 우세를 리용하여 남새농사를 잘 해 촌민들이 수입을 톡톡히 올리고 있다는 보도선색을 잡게 되였다.
손화섭은 그 이튿날로 또 다시 취재길에 올랐다. 역시 새벽 4시에 자전거를 타고 태동촌, 광석촌으로 향했다. 전공으로 일할 때는 체력이 좋아 매일마다 자전거를 탔고 그런대로 견딜 수 있었지만 60세가 넘은 나이에 수십리 되는 농촌길 그것도 울퉁불퉁한 흙길을 자전거로 이동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였다. 련속 이틀간 자전거를 탄 손화섭의 손과 발에는 물집이 지고 허리가 시큰시큰해났으며 사맥이 나른해졌다. 그날 손화섭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그만 몸을 가누지 못한 채 온돌에 폭 꼬꾸라지면서 신음소리를 끙끙 냈다. 그때 그 광경을 바라보던 그의 안해는 참다못해 한마디 바가지를 긁었다.
“왜 자기몸을 아끼지 않고 그렇게 무리하게 구세요?”
“내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소? 농민들의 사적을 글로 쓰는 것도 나의 책임이요.”
손화섭은 이렇게 말하면서 두눈을 맥없이 내리깔며 꿈나라로 들어갔다.
그후 그가 매일같이 농촌마을을 누비며 취재해 쓴 수많은 기사들이《길림신문》,《흑룡강신문》,《중앙인민방송》 등 매체를 통해 륙속 발표되였다. 손화섭의 이름은 일약 신문지상을 통해 방송전파를 타고 널리 알려졌다.
손화섭은 하면 할 수록 힘이 났다. 자전거는 타면 탈 수록 성수가 났다.
2003년 가을에 룡정에 이사온 그는 고기가 물을 만난듯이 신났다. 길도 좋고 취재거리도 많아진 것이였다. 자전거를 타고 룡정시내의 사회구역과 주변의 농촌마을들을 찾아 다니면서 10여년 사이에 수천편의 신문기사를 써서 발표하였다. 그는 약속한 일이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미루는 법이 없었다. 비오는 날 비옷을 걸치고 자전거를 타면 바지가랭이는 물론 신발이 젖기 마련이다. 그는 바지를 무릎까지 쑥 걷어 올리고 신발은 벗어 비닐주머니에 넣고 맨발바람으로 자전거를 타군 했다. 모 진의 중학교에 취재 갔을 때 마침 비가 내렸는데 비에 맞아 꼴불견이 된 그의 모습을 본 접수실 당직일군이 아예 그를 학교에 들여놓지 않아 고생하던 일은 지금도 그의 기억에 생생하단다.
2011년 7월부터 2013년 12월까지 연변1중에 다니는 외손녀를 돌봐주느라고 량주는 연길에 가서 한동안 살았다. 그사이 그는 뻐스를 타고 룡정에 먼저 간다음 다시 자전거를 타고 기층취재를 다니는 수 밖에 없었다. 그동안 그가 룡정을 다녀간 차수가 40여차에 달해 지금도 룡정-연길행 뻐스운전수들은 멀리서도 그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넨단다.
자전거를 타고 룡정거리를 누비는 “자전거기자”손화섭.
취재 가운데서 가장 감동적인 사연이라면 그는 방천길의 사적을 꼽는다. 연변맹인협회 회장사업을 맡아하는 몇년사이에 아무런 보수도 없이 많은 장애인들의 구체곤난을 해결해 준 방천길의 감동적인 사적은 항상 그를 감동시킨다고 말한다.
방천길 회장이 다년간 100여명 장애인들의 최저생활보장수속을 해주었고 60여명의 안마강습반 학비를 해결하여 주었으며 600여명의 빈곤 장애인가족 자녀들에게 100여만원의 애심성금을 모아주었는데 그중 3명은 이미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하였으며 지금 10명이 대학에 다니고 있다. 이러한 사적들은 모두 손화섭의 필끝에서 기사화되여 널리 알려졌다.
손화섭은 아무리 어려운 취재감이라도 마음만 딱 먹으면 반드시 해내고야 마는 끈질긴 성미의 소유자였다.《명의 특약신기계》잡지사 부주필, 《중국의약백과 정화총서》편집위원회 상무부주임위원, 타이전통의학연구회 리사인 김춘실 박사를 취재할 때였다. 김춘실 박사는 손화섭로인이 다섯번이나 찾아갔지만 번마다 취재를 거절하였다. 손화섭은‘열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있으랴’며 여러모로 수소문하여 그의 집위치를 알아냈고 그가 퇴근하는 시간대에 맞춰 길목에서 그를 기다려서 끝내 취재허락을 받아내고야 말았다.
2006년 283편, 2010년 271편, 2011년 255편, 2012년 312편, 2013년 273편… 이 수자는 손화섭이 매체에 발표한 년도별 수량이다. 기실 이만한 수량은 매체의 전문기자들도 따르기 힘들 정도다. 기력이 많이 떨어진 2016년에도 143편을 발표하였으니 매년 100편이상의 원고량을 올렸다. 그가 자전거를 타고 다닌 조양천진, 지신진, 동성용진은 모두 집에서 10리 이상 상거한 곳들이다. 보수적으로 손화섭이 일년에 백번씩 자전거를 타고 취재를 다녔고 하루에 평균 10여리씩 달렸다고 치면 해마다 1000리길을 자전거로 달린 셈이고 지난 18년간 만 8천리를 달린 셈이다. 그사이 그가 도적맞혔거나 낡아서 닳아떨어진 자전거만 해도 6대나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손화섭을 “자전거기자”라고들 친절히 부르고 있다. 그는 자기를 그렇게 불러주는 사람들에게 항상 고마움의 눈길을 보내주었고 자신 또한 그것으로 인해 보람을 느꼈다.
2005년부터 그는 선후로《길림신문》,《연변일보》,《종합신문》,《현대가정》 등 신문의 통신련락소를 세웠으며 2012년에는 룡정시당위 선전부의 비준으로 여러 개의 통신련락소를 통합하여 “룡정시통신협회”를 건립하였다. 그가 회장직을 맡은 이 통신협회에는 룡정시에 거주하는 여러 신문의 특약기자, 통신원들과 글쓰기열성분자 16명이 있는데 지난 한해만 해도 395편의 기사가 여러 보도매체에 발표되였다.
손화섭의 노력을 헛되지 않았다. 손화섭은 2008년에 지역매체의 우수기사상, 우수통신원의 영예를 받아안았다. 2008년에는《길림신문》“인성교육상” 학부모부분 은상을, 2011년에는《길림신문》“고운남자 미운남자” 공모 금상, 중앙인민방송국조선어부와 《로년세계》잡지사의 련합으로 펼쳐진 “추억의 돛배” 공모 3등상을 수상했다.
통신협회 회원들과 부분적인 매체 언론인들과 함께(2016년 1월 6일).
허다한 로인들은 퇴직후에 할일이 없어 낚시질하거나 마작을 놀거나 혹은 그늘진 곳에 모여앉아 한담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손화섭은 “자전거기자”답게 매일이다 싶이 자전거를 타고 취재를 다니며 글쓰기로 자신의 황혼을 불태우고 있다.
80에 가까운 년령임에도 불구하고 손화섭은 오늘도 자전거를 타고 취재길에 오른다. 석양노을은 불타오르고 자전거는 달리고 또 달린다.
길림신문 김태국기자, 주청룡특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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