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추억’ 응모작품 (28)
◇조동관(장춘)
로인회 활동에서 연설하고 있는 필자
1970년대 중엽의 어느 한 초여름의 청명한 날씨였다. 서란시를 끼고 있는 영안대대 순인소대에서는 모내기 고조에 진입했다.
하긴 하지까지 가지 않고 다문 2-3일이라도 앞당길 예산이다.
논판에 심어놓은 모들은 새파랗게 줄이 쪽쪽 서있고 아지랑이 춤추는 논에서는 사원들의 모내기가 한창이다.
줄모를 심는 사람들, 모를 뜨는 사람들, 써레질하는 손잡이뜨락또르, 모를 나르는 남정네들- 볼 만한 일판이다.
모내기는 시간성이 강하기에 실은 어린애로부터 로인에 이르기까지 총출동한 셈이다. 그중에서 20여명 주력은 줄모 심기에 여념이 없고 나이 지긋한 로인들과 학생들은 한쪽에서 따로 모내기를 하고 있다.
재미 있는 일은 줄모를 심는 사람들이 이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노래자랑을 하는 것이다. 후에는 노래하는 사람은 아예 서서 노래만 했다.
아리랑고개 넘어가는 앞집 아주머니의 노래, 노들강변 봄바람에~ 새각시의 노래, 어랑타령 부르는 김서방의 노래… 너무도 성수나고 재미난다. 노래곡이 틀려도 상관없다. 누구나 다 한곡조씩 넘기는 노래, 사원들의 속마음을 표현하는 순진한 노래들이다. 노래는 바람 타고 멀리까지 퍼져갔고 지나가는 길손들도 한참씩이나 지켜보다가는 박수까지 쳐준다.
나는 그 때 대장직을 맡았었는데 모내기를 제때에 완성하기 위한 조치로 만출근하는 사람은 장려하고 점심에는 시내 타래떡집에서 매일 일정한 수량의 타래떡을 공급하도록 해서는 일터에 나오는 사원들은 하루에 두가락씩, 어린애 젖먹이러 오는 할머니들과 논판에서 뛰노는 꼬맹이들도 한가락씩은 차례지도록 했다.
이렇게 모내기는 힘들어도 사원들의 정서를 안정시키고 흥겨운 일터로 되게 하였다.
실은 재미 있는 일은 또 있다.
애숭이들이 논뚝에서 돌아치다가 논물에 빠져 우는 애가 있는가 하면 모짐을 논에 거꾸로 박는 이도 있다. 모두가 우습고 재미 있는 일들이다.
그 때 사원들은 생산대를 자기 집으로 생각하며 이 큰 가정에 똘똘 뭉쳐서 겁나는 일이 없었다. 년수입도 좋아 한공에 2원 50전까지 되니 도시의 출근족 부럽지 않았다.
거기다가 식량은 소대 정미간에서 좋은 입쌀로 분배해주니 등 뜨시고 배 부르고 얼마나 좋은가. 그것도 도시 속에 사니 말이다.
그 때 우리 소대는 규모가 작아 량식 총생산량은 많지 않았지만 호당 량식산량은 만근에 접근했고 우리 영안대대(15개 소대)는 720만근 량식을 생산해 전 성의 모범대대로 되여 삼릉패(三菱牌) 일본 화물차까지 상으로 탔다. 그 때 우리 영안대대 량식산량은 작은 공사 둘을 초과했다.
더욱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그 해 ‘10.1’국경절에 영안대대는 40명의 관현악대를 조직해 주석대 앞을 지나며 국가를 연주해 또 한번 이름을 크게 떨친 것이다.
“아! 영안, 영안!” 감동된 시민들의 목소리다. 솔직히 말해서 그 때 전 시적으로 아직 악단이 없는 실정이였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다.
하지만 1980년대 개체농사가 시작되면서 이 모든 것은 중국 농촌의 한단락의 력사로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대대는 영안, 영춘 두개 대대로 갈라지고 내가 있던 동네와 생산대의 토지에는 수십채의 아빠트가 서고 상점, 병원도 섰다.
그간 세월은 30여년이 흘러갔다.
하지만 모내기 논판에서 불렀던 사원들의 노래- 로동의 희열과 애착이 있고 안정한 행복과 미래의 희망이 담긴 농부들의 노래는 영원히 아름다운 추억으로 나의 마음속에 길이 살아있을 것이다. 그리고 고락을 같이 했던 사원들이 한없이 그립다. 지금 그네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지…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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