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30)
◇윤성문(통화)
1959년 여름에 찍은 가족사진. 뒤줄 오른쪽 첫 사람이 갓 대학에 입학했을 때의 필자.
현재의 필자 |
이 사진은 내가 대학교에 간다고 온 가정이 기뻐하면서 한집안 식구가 모두 사진관에 찾아가서 찍은 사진이다. 이 사진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삼촌어머니는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되고 없지만 우리들은 각기 제 살림살이에 손자손녀를 보아가며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나는 농민의 아들이고 농민의 손자다. 내가 6살 때에 어머니가 병으로 세상을 하직하고 9살 때 아버지도 병으로 돌아가다나니 우리 두 형제는 부모 없는 아이로 되였다. 우리는 착하고 부지런한 윤태린 삼종할아버지의 은하에서 공부하였다. 할아버지께서는 어려운 살림에서 우리 두 형제를 모두 대학까지 공부시켰고 국가의 사업일군으로 성장시켰다.
나의 친할아버지의 성명은 윤태벽인데 윤태린할아버지와는 6촌형제 지간이였다. 그들은 매하구 화성촌에서 함께 살면서 가깝게 지냈다.
그 때 우리 가정은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와 우리 삼형제까지 여섯식구가 행복하게 생활하였다. 나는 3대 장손이여서 귀여움과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자랐다.
그래도 교육을 떠날 수 없으니 5살 때부터 할아버지의 긴 담배대 앞에 꿇어앉아 〈천자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나는 다섯살 때에 이미 천자문을 내리읽어 동네에서 신동으로 이름이 났었다. 때로는 할아버지한테 “오줌 누고 오겠어요.” 하고는 나가서 장난에 미쳐 놀다가 돌아오군 했다. 그럴 때마다 할아버지 앞에 엎디여 긴 담배대에 얻어맞기가 일쑤였다.
그래도 그렇게 배운 〈천자문〉 덕분에 한어공부에 기초를 닦게 되였고 조한 2중언어 공부에도 큰 도움을 받아 후날 길림성2중언어연구회 리사까지 되였다.
1947년 우리 집에는 무서운 재난이 떨어졌다. 3년내에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남동생 하나 이렇게 넷이 선후하여 생명을 잃고 9살 되는 나와 6살 되는 동생만이 남게 되였다.
이 때 윤태린할아버지께서 두말없이 우리 두 형제를 데려다가 친자식처럼 키우고 소학교로부터 대학까지 공부시켰다. 그 은혜는 바다보다도 깊다.
윤태린할아버지는 매하구를 해방하는 전쟁에서도 해방군을 도와 남몰래 큰 공을 세운 사람이였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함께 키짝으로 문을 가리고 밥을 지어 해방군을 대접하군 했다. 이것은 남몰래 한 일이여서 할아버지가 매하구 해방의 공신인 줄을 누구도 몰랐다. 할아버지는 또 사평전투 시기에는 담가대에 참가하여 비발치는 총탄을 무릅쓰고 부상병을 담가에 나르기도 했다. 이로 하여 그는 일등공을 세우고 돌아왔다.
1957년 중학시절에 나는 여름방학이면 집에 돌아와 할아버지의 꼴짐 지는 일을 도왔다. 한번은 할아버지가 꼴짐을 지고 도랑을 건너다가 넘지 못하고 그만 물에 빠졌다. 할아버지는 “후유…” 한숨을 쉬면서 “이제는 늙었구나!” 하고 한탄하였다. 학교에 돌아와서 나는 한탄하는 그이의 모습이 그냥 눈에 보이는 것 같아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다. 당시 가정이 곤난한 학생들은 중도에서 학업을 그만두고 집에 돌아가 부모를 도와 일했다. 나는 년로하신 할아버지가 힘겹게 일하는 모습이 떠오르면서 계속 공부하는 것이 너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할아버지께 나도 돌아가 할아버지를 도와 일하겠다고 편지를 썼다. 할아버지의 회답은 간단하고도 힘이 있었다.
“배움이란 때 있느니라. 때 지나면 못 배워. 내 걱정은 그만두고 열심히 잘 배우거라!”
이 한마디에 나는 계속하여 열심히 공부하여 마침내 중앙민족대학까지 졸업하고 민족교육 사업에 빛을 내게 되였다.
삼종할아버지의 몸에는 조국과 민족에 대한 무한한 충성이 간직되여있었고 교육을 중시하는 우리 민족의 우수한 전통이 빛나고 있었으며 혈육에 대한 사랑이 슴배여있었다. 나는 이런 삼종할아버지를 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삼종할아버지의 은혜는 내 가슴 속에 깊이깊이 아로새겨져있다. 나는 할아버지의 고상한 인격을 영원히 꽃피워나가는 것을 사명으로 지금껏 살아왔고 평생 그렇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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