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45)
◇황영성(장백)
최삼룡평론가(우), 리혜선작가(좌)와 함께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활동중 압록강변에서(가운데 사람이 필자 황영성).
1998년에 연변작가협회 제7차 대표대회가 연길시에서 열렸는데 나도 대표로 참가하게 되였다. 그 회의에서 김학천이 주석으로 선거되였고 우광훈 등 몇명이 부주석으로 선거되였다.
회의가 끝난 후 최삼룡평론가는 나의 손목을 잡아끌면서 자기네 집으로 가자고 했다. 최삼룡평론가의 손에 이끌려 그의 집으로 갔는데 얼마나 무섭게 말리는지 나는 아무 것도 사들지 못하고 빈손으로 갔다.
교원사업을 하고 있던 사모님께서 나를 매우 반갑게 맞아주었다.
“우리 마누라가 맘씨 고우니 우리 집에서 마음 푹 놓고 며칠 묵어. 우리는 더 많이 이야기해야 해.”
당시 60세인 최삼룡평론가이지만 여전히 젊음의 활력으로 넘쳤다. 중국조선족의 이름난 평론가임에도 틀을 차리지 않고 나를 동년배의 친구처럼 허물없이 대해주었다.
“선생님께서 15년 전부터 저에게 써보낸 여러 통의 편지를 저는 아직 보관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저의 평론글도 여러편 선생님네 잡지에 발표시켜주었습니다.”
최삼룡평론가와는 1997년도 소설창작회의에서 처음으로 만났는데 우리는 서로 첫 만남으로 너무 흥분했었다.
우리는 최삼룡평론가의 서재에서 이야기를 계속했는데 최삼룡평론가는 불쑥 이런 말을 꺼냈다.
“넌 리혼 후 지금껏 독신으로 분투해오고 있는데 정말 쉽지 않아. 그래 가정 꾸릴 생각은 없어?”
“없습니다!”
“그래도 가정을 꾸려야지. 가정을 꾸리라구.”
“저는 독신으로 문학과 미술에 혼신을 다 바치겠습니다.”
“정 독신으로 가겠다면 나도 더 못 말리지.”
최삼룡평론가는 나더러 세상의 적지 않은 예술가들이 독신으로 빛났다면서 만일 내가 확고히 가겠다면 그 길에서 크게 성공하라고 격려했다.
그는 내가 여러 단위에서 요청해도 가지 않고 여전히 소학교란 작은 곳에 있겠다는 나의 견해에도 동의했다.
“내가 마흔세살 때 출판사 부총편집 벼슬과 사회과학연구소 소장 벼슬, 그리고 《문학과 예술》잡지 주필 벼슬을 했어도 그런 허상 같은 벼슬은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필요 없어. 사람은 벼슬자리에서 자신의 인격을 흐릴 수 있지. 안타까운 것은 이전에 이런 도리를 깊이 몰라 참된 삶을 살지 못했어. 참된 인격과 덕성을 가진 인생만이 성공된 인생이야! …영성인 책을 많이 보는데 너와 접촉하면 마음을 계속 비우는 것 같애.”
“저는 불교책도 적지 않게 읽었습니다.”
밤중인데 최삼룡평론가에게 한국에서 계속 전화가 걸려오고 있었다. 퍽 바삐 보내는 평론가다.
새벽 두시가 되여서야 우리는 이야기를 끝내지 못한 아쉬움을 품고 자리에 누웠다. 잠이 오지 않았다.
최삼룡평론가는 아침 일찍 일어났다. 새벽마다 산보하는 좋은 습관이 있는 그였다. 나도 아침 일찍 일어나 최삼룡평론가와 사모님과 함께 아침시장으로 산보했다. 사모님은 최삼룡평론가와 대학 동창생인데 저명한 시인인 박화선생의 사촌녀동생이다. 사모님은 나에게 오곡밥을 해주겠다며 여러가지 잡곡과 여러가지 남새를 샀다.
연변대학의 석사연구생으로 평론의 길에 들어선 최삼룡평론가의 막내아들도 내 앞에서 줄곧 웃는 얼굴이였다.
나와 최삼룡평론가의 이야기는 낮을 이어 저녁에도 서재에서 계속되였다. 그의 서재에는 책이 얼마나 많은지 너무 부러웠다. 박식한 학자답게 책이 산더미처럼 많았다. 우리의 이야기는 밤새껏 해도 끝이 없었다.
“영성아, 내가 너의 중편소설을 평론한 글을 봤지?”
“봤습니다. 정말 잘 썼습니다.”
최삼룡평론가는 중국조선족 작가들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했는데 특히 김혁작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김혁은 문학을 종교처럼 여기는 전도유망한 젊은 작가야! 그는 앞으로 크게 일어날 거야.”
그는 나를 바라보며 이런 말도 했다.
“영성이 너도 소설을 개성이 강하게 잘 써. 너는 문학도 하고 미술도 하는 재능 있는 젊은이야.”
“저는 많이 배우고 많이 노력해야 합니다.”
“너는 의지력과 정신력이 퍽 강해.”
“저는 아직 멀었습니다”
나와 최삼룡평론가는 또다시 새벽 두시까지 즐겁게 이야기했다.
남성작가와 남성화가들이 모이면 녀자에 대하여 많이 이야기하군 하는데 최삼룡평론가도 례외가 아니였다.
아침이였다. 역시 푸짐한 밥상이였다.
아침식사 후 떠나올 때 최삼룡평론가와 사모님은 나에게 거듭거듭 당부했다.
“앞으로 연길에 오면 절대 호텔에 들지 말고 꼭 우리 집에 와서 자야 한다! 연길에 오면 꼭 우리 집을 네 집으로 여겨!”
최삼룡평론가는 나의 가방에 자기의 평론집을 비롯한 여러권의 책을 넣어주었다. 그리고 그는 한국에 가서 사왔다는 고급넥타이와 고급양말과 고급내의를 나의 가방에 넣어주었다. 내가 안 받겠다고 떼를 썼지만 그는 기어이 나에게 선물로 주었다.
사모님은 나의 가방에 과일들과 광천수 그리고 수지까지 꼭꼭 눌러 넣어주었다. 너무 무섭게 굴기에 나는 돈 한푼 쓰지 못했지만 그들은 이렇게 나에게 무엇이든 더 주려고 하였다. 최삼룡평론가와 사모님은 문밖에까지 나를 바래다 주었고 택시를 불러와 택시운전수에게 돈까지 지불하고는 오래오래 서서 떠나가는 나에게 손을 저어주었다.
나는 그후 문학을 그만두고 전력으로 미술작품을 창작해온 지 10여년이나 된다. 앞으로도 미술에만 전력으로 혼신을 쏟을 것이지만 최삼룡평론가와 그의 집에서 있었던 아름다운 추억은 길이 내 기억 속에 남아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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