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로부터 대학교 2학년까지 제1외국어로 일본어를 배운 나였지만 일본 땅을 밟은 지 두달이 되도록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한달 만에 귀는 조금씩 열리는 듯 했지만 소리가 대담하게 나오지 않았다. 뱅뱅 도는 생각을 일단 머리 속에서 일어로 번역한 다음에 떠벅벅 중얼거리는 정도였고 상대 일본인의 반응에서 거의 절반은 의미가 통하지 않음을 감촉하군 했다.
하여 때론 초인종 소리에 겁 먹고 이루스(居留守), 즉 집에 있으면서 없는 듯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서 숨 죽이고 지낸 시간도 적지 않았다. 텔레비죤 드라마가 생활용어를 기억하는 데 제일 좋은 선생이기도 했다.
요즘과는 달리 일본 류학붐이 갓 시작된 90년대 후반에는 류학생이 그리 많지 않은 탓으로 지방에는 중국인이 그리 흔치 않았다. 다행히 치바(千葉)에 정착한 지 거의 2년에 가까운 남편 덕에 드나드는 친절한 일본인들이 많았다.
야스코(왼쪽)씨네 집에서(1996년)
어느 하루 중국어를 배우겠다고 지인이 친구를 데리고 왔었다. 40대 초반에 겉 모습은 우리 고향의 이모들과 비슷한 분위기의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저 처음으로 중국사람 만났는데 여태 상상하던 것과 너무 다르네요.”
“뭐가?”
실례인지도 모르고 드라마에서 많이 본 생활용어로 짧게 물었다.
“중국사람 하면 초록색을 떠올리군 했는데 분위기가 우리하구 똑 같네요!”
“내가 군복을 입은 홍위병시대 사람인가?” 속으로 중얼거릴 뿐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한참 익숙해진 분위기 속에서 그녀가 또 한마디.
“실례이지만 중국에 전기가 있어요? 사과랑 귤이랑 과일도 있어요?” 참, 중국에 대해서 이렇게도 모르다니…
“ありますよ!全部 あります。”(있습니다! 다 있습니다.)
갑자기 머리 속의 시스템을 경과하지 않고 직접 일본어가 내 입에서 튀여나왔다.
너무 어이없으면 말문이 트이는가? 내심 놀랍기도 했고 기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중국에 대한 잘못된 편견만 들었던 그녀의 순진한 질문이였는데…
그렇게 그날부터 나는 일어로 대화를 대담히 할수 있게 되였다. 처음으로 나라는 중국사람을 상대로 중국어를 배운 타다 야스코(多田靖子)씨와 매일 대화하면서 아마도 내가 일본어를 더 많이 배운 것 같다.
여태 20년 지기 친구로 가까이 보내는 야스코씨는 한해에 한번씩 중국려행을 하게 되였고 발음에 엄격했던 나 때문에 현지대화에도 “没问题”(문제 없다)라고 늘 감사해 하고 있다.
/길림신문 일본특파원 리홍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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