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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진 내가 모셔야겠소!”
조글로미디어(ZOGLO) 2017년11월14일 07시31분    조회: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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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52)

◇박명규(연길)

할아버지를 모시던 세월의 필자 박명규와 태봉선 부부의 모습

“할아버진 내가 모셔야겠소.” 이것은 44년 전 내가 북경병원으로 확진하러 떠나면서 가족들에게 한 말이였다.

어쩌면 엉클어진, 엉망이 된 가문의 뿌리를 정리하고 싶었던 아름다운 마음속에서 울려나온 말이였으리라.

할아버지는 40세에 할머니 그리고 외동아들인 아버지와 며느리인 나의 어머니를 정든 고향땅에 남겨두고 두만강을 건너 지금의 연길시 조양천진에 정착하였다. 정착하여 몇년 동안 열심히 일하여 생활이 유족하였는데 운명의 작간이랄가 코구멍만 보이는 납작코에 성격이 괴벽한 작은할머니를 얻어 생활했다. 광복 전해 할아버지 소식을 처음 접한 아버지는 상황이 어떠하든 할아버지를 따라 살아야 한다는 주장으로 조선에 남은 식구들을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너 조양천진에 입주하고 기차역 부근에 집을 잡았다.

나는 7살에 처음 할아버지를 뵙게 되였고 며칠 후 작은할머니는 다른 집에서 나와 동갑내기인 7살짜리 녀자애를 업어다가 딸로 박선옥이라 이름을 지었다. 그 애를 20여년 길러 시집 보냈는데 야속하게도 키워준 부모와 소식을 끊어버렸다. 두 로인은 조양천진민정에서 내주는 생활비로 로후를 보냈다.

입주한 두달 후인 1945년 11월 8일, 세살 된 작은손자 생일을 쇠여주려고 할머니는 좁쌀 한되 얻으려다 작은할머니와의 분쟁이 큰 싸움으로 변하여 몸져누운 것이 일주일 만에 화병으로 세상 뜨셨다. 할머니를 잃고 아픈 마음으로 살던 아버지도 1961년 연길 부대비행장에서 일하시다 병으로 돌아갔다. 자기 피줄로 만든 가정에 깊은 상처만 남겨놓고 장장 40년이란 긴 세월을 담벽을 쌓고 원흉으로 살아온 할아버지였다.

나는 연길시건설국에서 사업하다가 1970년 인민공원 총무로 전근되면서 몸에 낭충이 발견되였고 여러 면의 치료를 받았지만 효과를 보지 못했다. 1973년 7월의 어느 날 작은할머니가 갑자기 뇌출혈로 사망되자 할아버지는 의지할 데 없는 쓸쓸한 곤경에 직면하게 되였다.

할아버지 과거가 어떠했든 할아버지는 내가 모시겠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나의 건강을 급선무로 하는 가족이지만 확고한 나의 주장인지라 동의와 지지를 하였다. 안해가 할아버지를 모셔다 안치하는 일을 책임지고 나는 급급히 단위 위생소의 김의사와 함께 북경으로 떠났다. 북경병원의 진단을 가지고 그 길로 용한 의사가 있다는 내몽골로 향했다.

두주일이 되여 집에 돌아오니 엉거주춤 일어서며 제일 먼저 반기는 사람이 할아버지였다. 손자를 애타게 기다린 얼굴에는 손자 집에 있는 불편함과 송구스러움이 한눈에 안겨왔다. 82세의 할아버지를 모시는 우리 집(연길시 신흥가 6거 39조)은 30평방메터 되는 단층집에 4대가 사는 대가정이 되였고 규칙적이고 질서 있던 생활방식이 몽땅 바뀌여졌다.

우리 부부가 생활하던 웃방에 할아버지를 모셨고 부억칸에 어머니와 안해가 아이 둘을 데리고 3대가 누우면 비좁아서 돌아눕기도 힘들었다. 나는 아예 직장 숙소에 자리를 옮기다 보니 30대 초반부터 우리 부부는 잠자리를 가르게 되였다.

하루는 할아버지의 아침 밥상이 그대로 물려나왔다. 할아버지께서 이앓이가 심하여 씹지 못하는 것이였다. 바삐 서둘러 공원치과에 가서 검사하니 치아 한대는 충치가 심하여 뽑아야 하고 나머지 몇대는 치료하면 될 수 있다고 했다. 치과의사는 고령에 틀이를 많이 하는데 이처럼 많은 건강한 치아를 가진 분은 드물다며 할아버지가 치아관리를 잘했다고 칭찬했다. 일주일간 죽을 대접하며 치료에 효과를 보아 정상적으로 식사할 수 있었다.

내몽골의 약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내몽골에서 돌아온 반년 만에 병이 완쾌되여 건강을 찾은 기쁨과 할아버지를 모시는 선택이 명지했다는 기쁨으로 생활에 힘이 솟군 했다.

하루는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차라 할아버지를 모시고 복무청사 국수집에 갔다. 내가 7살 처음 할아버지를 뵈였을 때 할아버지는 혈기왕성한 중장년이였댔는데 지금은 그 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백발로인이 되였다. 생각에 잠긴 사이 어느덧 랭면 두그릇이 나왔다. 소문과 같이 보기만 해도 풍성하고 입맛 돋구는 명표 고급 랭면이였다. 식사가 끝나자 할아버지는 거치른 손으로 내 손을 덥석 잡으며 “자네 내 나이 되여 나처럼 복 받으며 살리라.” 하며 눈시울이 젖어있었다. 순간 나도 뜨거운 그 무엇이 가슴 속에 흘러내리는 감을 느꼈다.

하루는 저녁 밥상을 놓고 할아버지가 소학생 증손녀의 숙제책을 찢어 담배종이로 한 송사가 나왔다. 듣고만 있던 유치원생 아들애가 웃방 책상 우의 신문으로 고깔모자를 만들어 할아버지 머리에 씌우고는 누나와 단짝이 되여 투쟁하는 것이였다. 모자가 벗겨질가봐 두손으로 받쳐들고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에 모두 폭소가 터졌다. 4살 아들애의 돌발적인 발상에 나는 깜짝 놀랐다. 이튿날 ‘숙제책을 찢어 담배종이를 한 죄로 고깔모자를 쓰고 타도된’ 뉴스가 전파되여 형제들, 조카들, 이웃까지도 다 쓴 공책을 가지고 와서 저마다 익살을 부리여 집안은 흥성했다. 저녁에 집에 오니 한상자 넘치는 담배종이를 자랑하며 할아버지는 웃음 속에서 유쾌하게 보냈다.

추운 겨울 어느 날 내가 일찍 퇴근하여 집에 들어서니 마당 한구석에 똥빨래가 쌓여있고 문을 여니 어머니가 할아버지를 목욕시키는 것이였다. 며느리 손에서 목욕하자니 긴장하고 쑥스러워서였던지 나를 보자 구원의 눈길을 보냈다. 색다른 음식을 보면 미처 공동변소로 못 가고 종종 실수한 적 있었다. 손바꿈하니 같은 남자여서 온몸을 깨끗이 씻었다.

안해가 퇴근했을 때는 이미 어두웠다. 우리 둘은 손전등을 켜들고 곧추 얼음구멍으로 갔다. 얼마전 가족들의 청구에 큼직한 얼음구멍을 뚫어놓은 것이 그 해 겨울에는 이 얼음구멍이 우리 집 빨래터로 되였다. 할아버지 빨래는 한번 씻고 끓는 물에 삶아서까지 두번 씻어야 했다. 둘이 하는 일이였지만 시간이 걸렸다. 빨래를 마치고 배고픈 데다가 늦게 먹는 저녁이라서 별맛이였다.

춥고 가난했지만 그 때 그 생활이 따뜻하고 행복했다. 서로가 서로를 리해하고 서로가 힘과 마음을 합치며 살아가니 아무리 어려운 일도 다 썩썩 풀려갔다.

지금 청도에서 병원을 경영하는 동생의 딱친구 조수동이란 의사선생이 있다. 그가 연변병원에서 근무했는데 퇴근길이면 우리 집에 들려 세심히 할아버지를 진찰하군 했다. 무언가 짚이는 데가 있어서인지 하루는 일요일인 데도 집에 찾아와 할아버지를 진맥하더니 조용히 후사 준비를 하라고 귀띔했다. “내 늙어서 죽을 자리 찾아왔소.” 하던 할아버지 말씀이 있었기에 나는 관널이며 세절적인 붕대, 약솜까지 빈틈없이 준비해두었었다. 아니나 다를가 그 날 저녁 자정이 넘어 할아버지는 8년 동안 생활하던 익숙한 방에서 깨끗하고 포근한 그 잠자리에서 신음소리 한마디 없이 며느리와 손자, 손비의 배웅을 받으며 혼자만이 가는 마지막 그 길을 조용히 눈을 감으시며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셨다.

이튿날 오전 마을어구에는 자동차 한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차우에는 할아버지 유체를 실은 관, 친척 친우, 단위 분들로 꽉 차있었다. 거리와 강뚝을 오가는 길손들, 삼삼오오 떼지어 있는 사람들 속에서 자동차는 나의 안내로 조상들의 산소를 향하여 서서히 떠났다.

48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하많은 원한을 품고 갈라졌던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한자리에 나란히 모시고 추위도 비바람도 두렵지 않게 튼튼하고 포근한 새 묘지를 만들어드렸다. 술을 붓고 절을 하는 순간 저도 몰래 눈물이 샘물처럼 쏟아졌다. 박씨 가문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장본인인 할아버지에 대한 원한, 또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할아버지에 대한 리해가 한데 어울려 흐르는 눈물이였으리라.

지난날을 회고하며 할아버지를 모신 8년을 용케도 살았다고 대견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내 나이 80에 이 좋은 세상에서 즐겁게 나날을 보내며 당년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자네 내 나이 되여 나처럼 복 받으며 살리라”는 참뜻을 되새기며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으로 지금도 가슴 속에 살아있고 손자세대에 기울어졌던 가정의 대들보를 바로세우려는 소원을 성취하여 마음은 한없이 후련하다.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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