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할아버진 내가 모셔야겠소!”
조글로미디어(ZOGLO) 2017년11월14일 07시31분    조회:1127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52)

◇박명규(연길)

할아버지를 모시던 세월의 필자 박명규와 태봉선 부부의 모습

“할아버진 내가 모셔야겠소.” 이것은 44년 전 내가 북경병원으로 확진하러 떠나면서 가족들에게 한 말이였다.

어쩌면 엉클어진, 엉망이 된 가문의 뿌리를 정리하고 싶었던 아름다운 마음속에서 울려나온 말이였으리라.

할아버지는 40세에 할머니 그리고 외동아들인 아버지와 며느리인 나의 어머니를 정든 고향땅에 남겨두고 두만강을 건너 지금의 연길시 조양천진에 정착하였다. 정착하여 몇년 동안 열심히 일하여 생활이 유족하였는데 운명의 작간이랄가 코구멍만 보이는 납작코에 성격이 괴벽한 작은할머니를 얻어 생활했다. 광복 전해 할아버지 소식을 처음 접한 아버지는 상황이 어떠하든 할아버지를 따라 살아야 한다는 주장으로 조선에 남은 식구들을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너 조양천진에 입주하고 기차역 부근에 집을 잡았다.

나는 7살에 처음 할아버지를 뵙게 되였고 며칠 후 작은할머니는 다른 집에서 나와 동갑내기인 7살짜리 녀자애를 업어다가 딸로 박선옥이라 이름을 지었다. 그 애를 20여년 길러 시집 보냈는데 야속하게도 키워준 부모와 소식을 끊어버렸다. 두 로인은 조양천진민정에서 내주는 생활비로 로후를 보냈다.

입주한 두달 후인 1945년 11월 8일, 세살 된 작은손자 생일을 쇠여주려고 할머니는 좁쌀 한되 얻으려다 작은할머니와의 분쟁이 큰 싸움으로 변하여 몸져누운 것이 일주일 만에 화병으로 세상 뜨셨다. 할머니를 잃고 아픈 마음으로 살던 아버지도 1961년 연길 부대비행장에서 일하시다 병으로 돌아갔다. 자기 피줄로 만든 가정에 깊은 상처만 남겨놓고 장장 40년이란 긴 세월을 담벽을 쌓고 원흉으로 살아온 할아버지였다.

나는 연길시건설국에서 사업하다가 1970년 인민공원 총무로 전근되면서 몸에 낭충이 발견되였고 여러 면의 치료를 받았지만 효과를 보지 못했다. 1973년 7월의 어느 날 작은할머니가 갑자기 뇌출혈로 사망되자 할아버지는 의지할 데 없는 쓸쓸한 곤경에 직면하게 되였다.

할아버지 과거가 어떠했든 할아버지는 내가 모시겠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나의 건강을 급선무로 하는 가족이지만 확고한 나의 주장인지라 동의와 지지를 하였다. 안해가 할아버지를 모셔다 안치하는 일을 책임지고 나는 급급히 단위 위생소의 김의사와 함께 북경으로 떠났다. 북경병원의 진단을 가지고 그 길로 용한 의사가 있다는 내몽골로 향했다.

두주일이 되여 집에 돌아오니 엉거주춤 일어서며 제일 먼저 반기는 사람이 할아버지였다. 손자를 애타게 기다린 얼굴에는 손자 집에 있는 불편함과 송구스러움이 한눈에 안겨왔다. 82세의 할아버지를 모시는 우리 집(연길시 신흥가 6거 39조)은 30평방메터 되는 단층집에 4대가 사는 대가정이 되였고 규칙적이고 질서 있던 생활방식이 몽땅 바뀌여졌다.

우리 부부가 생활하던 웃방에 할아버지를 모셨고 부억칸에 어머니와 안해가 아이 둘을 데리고 3대가 누우면 비좁아서 돌아눕기도 힘들었다. 나는 아예 직장 숙소에 자리를 옮기다 보니 30대 초반부터 우리 부부는 잠자리를 가르게 되였다.

하루는 할아버지의 아침 밥상이 그대로 물려나왔다. 할아버지께서 이앓이가 심하여 씹지 못하는 것이였다. 바삐 서둘러 공원치과에 가서 검사하니 치아 한대는 충치가 심하여 뽑아야 하고 나머지 몇대는 치료하면 될 수 있다고 했다. 치과의사는 고령에 틀이를 많이 하는데 이처럼 많은 건강한 치아를 가진 분은 드물다며 할아버지가 치아관리를 잘했다고 칭찬했다. 일주일간 죽을 대접하며 치료에 효과를 보아 정상적으로 식사할 수 있었다.

내몽골의 약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내몽골에서 돌아온 반년 만에 병이 완쾌되여 건강을 찾은 기쁨과 할아버지를 모시는 선택이 명지했다는 기쁨으로 생활에 힘이 솟군 했다.

하루는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차라 할아버지를 모시고 복무청사 국수집에 갔다. 내가 7살 처음 할아버지를 뵈였을 때 할아버지는 혈기왕성한 중장년이였댔는데 지금은 그 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백발로인이 되였다. 생각에 잠긴 사이 어느덧 랭면 두그릇이 나왔다. 소문과 같이 보기만 해도 풍성하고 입맛 돋구는 명표 고급 랭면이였다. 식사가 끝나자 할아버지는 거치른 손으로 내 손을 덥석 잡으며 “자네 내 나이 되여 나처럼 복 받으며 살리라.” 하며 눈시울이 젖어있었다. 순간 나도 뜨거운 그 무엇이 가슴 속에 흘러내리는 감을 느꼈다.

하루는 저녁 밥상을 놓고 할아버지가 소학생 증손녀의 숙제책을 찢어 담배종이로 한 송사가 나왔다. 듣고만 있던 유치원생 아들애가 웃방 책상 우의 신문으로 고깔모자를 만들어 할아버지 머리에 씌우고는 누나와 단짝이 되여 투쟁하는 것이였다. 모자가 벗겨질가봐 두손으로 받쳐들고 있는 할아버지의 모습에 모두 폭소가 터졌다. 4살 아들애의 돌발적인 발상에 나는 깜짝 놀랐다. 이튿날 ‘숙제책을 찢어 담배종이를 한 죄로 고깔모자를 쓰고 타도된’ 뉴스가 전파되여 형제들, 조카들, 이웃까지도 다 쓴 공책을 가지고 와서 저마다 익살을 부리여 집안은 흥성했다. 저녁에 집에 오니 한상자 넘치는 담배종이를 자랑하며 할아버지는 웃음 속에서 유쾌하게 보냈다.

추운 겨울 어느 날 내가 일찍 퇴근하여 집에 들어서니 마당 한구석에 똥빨래가 쌓여있고 문을 여니 어머니가 할아버지를 목욕시키는 것이였다. 며느리 손에서 목욕하자니 긴장하고 쑥스러워서였던지 나를 보자 구원의 눈길을 보냈다. 색다른 음식을 보면 미처 공동변소로 못 가고 종종 실수한 적 있었다. 손바꿈하니 같은 남자여서 온몸을 깨끗이 씻었다.

안해가 퇴근했을 때는 이미 어두웠다. 우리 둘은 손전등을 켜들고 곧추 얼음구멍으로 갔다. 얼마전 가족들의 청구에 큼직한 얼음구멍을 뚫어놓은 것이 그 해 겨울에는 이 얼음구멍이 우리 집 빨래터로 되였다. 할아버지 빨래는 한번 씻고 끓는 물에 삶아서까지 두번 씻어야 했다. 둘이 하는 일이였지만 시간이 걸렸다. 빨래를 마치고 배고픈 데다가 늦게 먹는 저녁이라서 별맛이였다.

춥고 가난했지만 그 때 그 생활이 따뜻하고 행복했다. 서로가 서로를 리해하고 서로가 힘과 마음을 합치며 살아가니 아무리 어려운 일도 다 썩썩 풀려갔다.

지금 청도에서 병원을 경영하는 동생의 딱친구 조수동이란 의사선생이 있다. 그가 연변병원에서 근무했는데 퇴근길이면 우리 집에 들려 세심히 할아버지를 진찰하군 했다. 무언가 짚이는 데가 있어서인지 하루는 일요일인 데도 집에 찾아와 할아버지를 진맥하더니 조용히 후사 준비를 하라고 귀띔했다. “내 늙어서 죽을 자리 찾아왔소.” 하던 할아버지 말씀이 있었기에 나는 관널이며 세절적인 붕대, 약솜까지 빈틈없이 준비해두었었다. 아니나 다를가 그 날 저녁 자정이 넘어 할아버지는 8년 동안 생활하던 익숙한 방에서 깨끗하고 포근한 그 잠자리에서 신음소리 한마디 없이 며느리와 손자, 손비의 배웅을 받으며 혼자만이 가는 마지막 그 길을 조용히 눈을 감으시며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셨다.

이튿날 오전 마을어구에는 자동차 한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차우에는 할아버지 유체를 실은 관, 친척 친우, 단위 분들로 꽉 차있었다. 거리와 강뚝을 오가는 길손들, 삼삼오오 떼지어 있는 사람들 속에서 자동차는 나의 안내로 조상들의 산소를 향하여 서서히 떠났다.

48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하많은 원한을 품고 갈라졌던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한자리에 나란히 모시고 추위도 비바람도 두렵지 않게 튼튼하고 포근한 새 묘지를 만들어드렸다. 술을 붓고 절을 하는 순간 저도 몰래 눈물이 샘물처럼 쏟아졌다. 박씨 가문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장본인인 할아버지에 대한 원한, 또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할아버지에 대한 리해가 한데 어울려 흐르는 눈물이였으리라.

지난날을 회고하며 할아버지를 모신 8년을 용케도 살았다고 대견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내 나이 80에 이 좋은 세상에서 즐겁게 나날을 보내며 당년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자네 내 나이 되여 나처럼 복 받으며 살리라”는 참뜻을 되새기며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으로 지금도 가슴 속에 살아있고 손자세대에 기울어졌던 가정의 대들보를 바로세우려는 소원을 성취하여 마음은 한없이 후련하다.

길림신문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양로사업을 영원한 직책으로 여기는 ‘이쁜 아가씨’ 박진화의 이야기 “로인을 돌보고 어린 애들을 보살필수 있는 양로원, 고아원을 차리는것이 어릴적 저의 꿈이였습니다.” 아니운서라는 화려한 후광을 벗어둔채 2011년 2월, 호리원으로 탈바꿈하면서 지금 사회복리원 특수호리구역에서 주임...
  • 2018-01-03
  • 뻐스정류소에서 길다랗게 줄지어서서 순서를 기다리는 일본인들/리홍매특파원 일본인들의 줄서기를 그들의 문화라고 하기에는 너무 단순하고 조금은 망설임이 앞서는 일이다. 하지만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에 거부감이 전혀 없는 듯한 일본인들에 대해 처음에는 생소함을 느끼다가 점차 거기에 적응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
  • 2017-12-26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65) ◇서정숙(중경)     언니가 보낸 다시 돌아오지 않는 〈2016년의 렬차〉란 글을 읽으며 감개가 무량하다.   무정한 세월은 드팀없이 꾸준히도 흘러 장장 45년이 지나 그제날의 갓 사업에 참가했던 짧은 량태머리 언니도, 늦은 공부라도 하려고 학교 다니던...
  • 2017-12-25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64) ◇주청룡(룡정) 1973년, 내가 생산대대의 과학실험소조에서 일할 때였다. 그 때 우리 대대에도 주에서 공작대들이 내려와있었는데 당시 주당위 선전부 리휘 부장이 우리 공사에 온 공작대의 총 책임자로 우리 대대에 와 주둔해있었다. 그 해 여름의 어느 날 리휘 부장은 대...
  • 2017-12-25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63) ◇남걸(목단강) 1976년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목단강시전염병병원에 배치받아 의사사업을 한 지도 어언 40여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매번 백설같이 흰 의사복을 떨쳐입고 병원 각 과실(科室)을 순시할 때마다 나에게 진정한 의사자격을 가져다준 감명 깊었던 40년 전 그 날의...
  • 2017-12-19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62) ◇황혜영 (길림) 50년 전 추억의 색바랜 사진(왼쪽이 어린 시절 필자) 어제밤 비가 억수로 쏟아지더니 아침에 나가보니 아직 익지 못한 시퍼런 복숭아 열매가 나무 밑에 쭉 깔렸다. 복숭아를 볼 때마다 복숭아의 맛보다 그 씨가 어떨가 하는 생각을 먼저 해보는 나다...
  • 2017-12-19
  •   남편류학시절의 경제담보인이였던 노토 아키히로(能登昭博)씨는 대학교 졸업론문을 이라는 테마로 썼을 정도로 중국에 관심이 많은 분이다. 《아사히신문》(朝日新聞) 치바(千葉)동부지역의 판촉업무를 총괄하는 회사경영인이였던 그는 내가 일본에 온 이듬해에 새로운 사업으로 지역신문인 《호오지로》(ほお...
  • 2017-12-18
  • 일본의 선물보따리(자료사진) 어린 시절 엄마 뒤꽁무니를 따라 다니면서 눈으로 얻은 깨달음이라고 할가,“받은 그릇은 절대 빈채로 돌려 보내지 않는다”였다. 이웃사이에 주고 받고 빌리고 빌려 주고 하면서 살았던 그 시절, 동네집 잔치가 온 마을의 기쁨이였고 어느집에 상사가 나면 온 동네가 슬퍼했다. 그...
  • 2017-12-18
  • 〔한국서 홀로서기∼나는 이렇게 살았다〕 9년을 하루와 같이 문화봉사를 해온 석복순녀사의 감동 스토리 석복순(맨 앞)강사가 춤을 가르치고 있다 돌이켜보니 내가 2007년 둘째딸을 따라 한국에 올 때 나이가 예순이였으니 10년이 지난 오늘 어언 일흔이라는 고희의 나이로 되였다. 그간 줄곧 소외된 사람들에게 춤을 ...
  • 2017-12-12
  • (흑룡강신문=하얼빈)채복숙 기자 = "저희 기금회는 2012년에 랴오닝성민정청의 2급 법인으로 설립되어 대략 2년 여 동안 운영하다가, 2014년에 독립법인을 신청해, 2015년 1월에 정식 허가증이 내려왔습니다. 기금회가 설립되어서부터 지금까지 조선족사회의 많은 지원을 받아 왔습니다.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기부문...
  • 2017-12-12
  • 〔한국서 홀로서기∼나는 이렇게 살았다〕 9년을 하루와 같이 문화봉사를 해온 석복순녀사의 감동 스토리 석복순(맨 앞)강사가 춤을 가르치고 있다 돌이켜보니 내가 2007년 둘째딸을 따라 한국에 올 때 나이가 예순이였으니 10년이 지난 오늘 어언 일흔이라는 고희의 나이로 되였다. 그간 줄곧 소외된 사람들에게 춤을 ...
  • 2017-12-12
  • 우리 집 가까이에 살고 있는 량씨는 일본에 온지 10년째 되는 한족 료리사이다. 어느 날 그가 찾아와서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장가 보내고 나니 빈털터리가 됐어요” 18살 때부터 료리를 배웠다는 량씨는 일본어를 전혀 접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였다. 갓 마흔살에 접어들면서 일본...
  • 2017-12-11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61) ◇김동화(연길) 30수년전 그 때 그 학생들과 함께 남긴 기념사진 세월은 류수와 같다더니만 정말 만질 수도 걷잡을 수도 없는 것이 바로 시간의 흐름인가 본다. 어언 70을 코앞에 두고 보니 가끔씩 따르는 크고 작은 추억들로 머리를 메운다. 올해 제33회 교사절을 즐...
  • 2017-12-11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60) ◇김규칠 구술 김숙자 대필 행복한 만년을 보내고 있는 김규칠 로인 부부 내 나이 금년에 80이다. 긴 세월 수많은 일들을 겪다 보니 잊혀지지 않는 사연도 많다. 그런데 요즘 인정세태가 삭막해서 그런지 그 때 그 일이 어쩐지 더 자주 떠오르군 한다. 온 나라가 문화대혁...
  • 2017-12-11
  • 〔한국서 홀로서기∼나는 이렇게 살았다〕 “나는 스승을 잘 만나 성공했다” 가수, ‘아리랑 난타’ 단장 아이수의 성공담에서 내가 한국 온 년도가 2004년이니 올해로 벌써 10년 하고도 3년이 된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는데 그간 나의 한국생활에도 적지 않는 변화가 있어 자부를 느낀다...
  • 2017-12-11
  • 며칠전 묵직한 편지봉투 하나가 우리집에 날아왔다. ‘항상 감사합니다. 더 받은 송금료 164엔을 돌려 드립니다. 또 기회가 되면 잘 부탁합니다’ 짤막한 메모용지와 함께 동전 164엔이 들어 있는 봉투였다. 나는 적혀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어서 영문을 물었다. 사실은 지인의 부탁으로 인터넷경매에서 옛...
  • 2017-12-10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59) ◇리희숙(안도) 애청자협회 열성자로 뛰고 있는 필자 리희숙 격정과 활력에 끓어넘치며 정열에 불타던 그 청춘시절, 걸탐스레 지식을 배워가며 희망과 기대에 부풀었던 학창시절을 마치고 ‘광활한 천지에는 할일이 많다’는 모주석의 지시에 따라 우리는 1965년...
  • 2017-12-05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58) ◇전영실(연길) 등산길에서의 필자 전영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취업통지서를 받고 우전국 인사과로 등록하러 갔던 때의 일이 어제런듯 눈앞에 삼삼하다. 한 나이 지긋한 책임일군이 반가이 맞아주며 “동무는 무슨 특장이 있소?” “어떤 일을 하고 싶소?” 하며...
  • 2017-12-05
  •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는 일본에 온지 일년후였다. 그때 야마모토 타마에(山本 多摩江)씨는 우리가 사는 지역의 국제교류협회 책임자였다. 영어에 능한 그녀는 외국인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았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대부분의 일본인들에 비해 적극적이고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일본...
  • 2017-12-05
  • 각 지역 촌마다 빈곤해탈 난관 공략전이 치렬하게 펼쳐지고 있는 요즘, 누구보다 마음 한켠이 조급해나는 한 젊은이가 있다. 연거퍼 몇달동안 집에 내려가지 못한 채 농촌사업터에서 빈곤해탈사업을 위해 뛰여다니느라 낮과 밤을 잊은 그는 바로 룡정시 백금향 빈곤부축판공실 주임 홍광철(33살)씨다. 룡정시 백금향 빈곤부...
  • 2017-12-01
‹처음  이전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