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금을 주고도 못 살 인생수업
조글로미디어(ZOGLO) 2017년12월5일 09시50분    조회:657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58)

◇전영실(연길)

등산길에서의 필자 전영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취업통지서를 받고 우전국 인사과로 등록하러 갔던 때의 일이 어제런듯 눈앞에 삼삼하다.

한 나이 지긋한 책임일군이 반가이 맞아주며 “동무는 무슨 특장이 있소?” “어떤 일을 하고 싶소?” 하며 상냥히 물어왔다. 당시 나는 리상과 포부로 충만된 랑랑 19세, 아무런 주저도 없이 미리 암기했던 말을 념불 외우듯 줄줄 내리외웠다.

“혁명이 수요하는 곳이면 곧 제가 가고 싶은 곳입니다. 가장 간고한 곳에 보내주십시오.”

기실 우전사업은 내가 그다지 바라던 것은 아니였는데 그렇게 판에 찍은듯이 외워댔으니 지금 생각하면 황당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문화대혁명’이 갓 결속된 그 때의 시대인 만큼 모든 사람들의 언어구사가 대체로 정치적 색채거나 공식적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시기라 나도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나의 말을 들은 책임일군은 “좋소! 좋소! 교환수로 배치하겠소. 어떻게 하나 일 잘해주오.”라고 말하며 등록표를 건네주었다. 등록 후 나는 휘장이 달린 모자에 견장이 달린 상의, 스커트까지 전부 초록색으로 된 우정제복을 받았다. 그 때로부터 나는 교환수로 되여 국내외 수많은 전신 사용호들을 상대로 업무를 취급하게 되였다.

당시 모든 장거리전화는 교환수가 련결하고 끊고 해야 했는데 조작이 시끄럽고 복잡하였다. 레시바를 끼고 눈은 신호등을 주시하고 오른손은 다이얄을 돌리고 왼손으로는 끊임없이 키를 제끼고 귀로는 상대방이 통화를 시작했는지 들어야 하고 입으로는 끊임없이 말해야 하는 등 5섯가지 동작을 동시에 해야 했다.

연길시의 전화번호도 머리속에 환해야 장거리전화를 척척 걸어줄 수 있었고 번호를 숙달하게 암기해야 신속, 준확, 기밀, 안전하게 일할 수 있었다.

나는 먹과 붓, 백지를 사다가 여러 단위의 번호를 다닥다닥 적어 집안의 벽에다 붙여놓고는 구들을 닦으면서도 외우고 밥을 지으면서도 외우고 신을 신으면서도 외우고, 외우고 또 외웠다.

교환수로 일하던 초기의 일이다. 한번은 북경의 손님에게 연길백화점에 련계해준다는 것이 그만 화장터에 련계해주어 엄한 질책을 받은 적이 있다. 얼마나 죄송했던지, 나는 연신 사과하면서 잘못을 용서해달라고 빌고 빌었다. 수자 하나의 차이로, 3061을 3016으로 착각하고 련계해줬던 것이다. 이렇게 질책받고 힘들 때면 “내가 왜 이렇게 우전국 ‘녀자탄광’이란 곳에 왔는가” 하면서 동요도 없지 않았지만 교훈으로 삼고 닫는 말에 채찍질하는 정신으로 업무에 더욱 열중했다.

번호 외우기도 무턱대고 외우는 것이 아니라 형상을 보고 외웠다. 병원에 가면 등록실, 진찰실, 급진, 외과, 내과, 입원처… 백화에 가면 1층, 2층, 3층 하면서, 또 상점을 지나가면 상점 간판을 보고 외우고 또 식초공장상표, 북산음료공장상표 등을 뜯어서 다시 책에 붙여놓으면 백프로 기억되였다. 옷을 입으면 옷공장 번호, 밥을 할 때면 량식창고 번호, 가마를 씻을 때면 가마공장 번호… 이렇게 길가에서나 집에서나 리용할 수 있는 일체 공간과 장소를 빼놓지 않고 리용해 외웠다. 하여 울지도 웃지도 못할 에피소드도 많았다.

한번은 파마점에서 건발기를 쓴 채로 귀는 건발기 소리에 들리지 않지만 입은 밖에 있는 줄 모르고 중얼중얼 30분이나 소리 치며 번호를 외웠다. 건발기를 벗으니 기다리던 손님들이 물어왔다. “제 교환수요?” “우, 어케 아십니까?” “이자 우렁차게 번호를 외우더구만…”

에피소드도 많았고 힘들 때도 정말 많았다.

2001년 통신사업이 발전됨에 따라 전화료금 체불 현상도 엄중하게 존재하여 우리 직장에서는 체불금을 받아들이도록 직원들에게 임무를 주었다.

무선전화는 이동성이 강한 데다 일단 꺼버리면 찾기 힘든 것이다. 이 임무는 근무시간외에 해야 했다. 나는 우선 컴퓨터를 통하여 사용호의 련계전화, 주소 등을 등록한 후 전화련계가 잘 안되는 사용호에 대해서는 주소에 따라 집을 찾아갔고 혹시 이주한 집이면 가두 치안주임을 찾아다니며 시내로부터 교외 등 곳들을 샅샅이 훑으면서 어둡고 위험한 층계를 오르내리며 체불된 료금을 받아들였다.

그중에서도 1,078원을 체불한 한 사용호만은 도무지 찾을 길 없어 컴퓨터로 종적을 따라 추격하듯이 그가 이전에 전화련락이 있었던 북경, 항주, 상해 등지를 꼬리를 물며 추적하여서야 끝내 사천성의 어느 한 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자기는 전화기를 분실했기에 자기와 상관이 없다며 오리발을 내밀었다. 나는 법률적 책임에 대한 도리와 상식을 곁들면서 끈질기게 달라붙어 설복했다. 결국 그 사용호는 나의 사업심에 탄복하면서 ‘정탐’이란 별명까지 달아주면서 체불했던 금액을 직접 연길에 와서 내 손에 쥐여주었다.

고생한 뒤에 빛을 보는 이러한 즐거움이 있었기에 아마 나는 힘든 줄 몰랐는가 본다.

또 한번은 2002년의 여름이였다. 때는 돌도 탄다는 삼복철, 길가의 가로수도 축 늘어지고 포장도로의 검은 골타르도 녹아서 신바닥에 붙어날 지경이였다. 내가 맡은 50호 체불호 가운데는 620원을 물지 않은 사용호가 있었는데 노트북을 신고스레 두드려서야 발전에 세집을 맡고 있다는 정보를 알아냈다. 3일 동안 련속 찾아갔지만 만날 수 없어 자전거를 타고 오불꼬불한 골목을 누비며 울퉁불퉁한 길을 땀벌창이 되여 달려서야 그의 부친이 일하고 있는 모 병원 쓰레기를 태우는 곳으로 찾아갔다. 갈증이 나고 무더위로 녹초가 된 나는 그 곳 담장안에 어지러이 널려있는 쓰레기 환경으로 더욱더 구역질이 났다. 깨진 약병, 썩은 이불, 피고름이 묻은 붕대에서 쉬파리들이 윙윙 기승을 부리고 쥐가 살판치고 악취가 코를 찔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내가 찾는 사람은 이미 퇴근한 후였다. 나는 너무 힘들어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국가의 돈을 꼭 받아들여야 한다는 일념으로 사흘을 다녀서야 끝내 그를 만났는데 생각 밖으로 자기 아들에게는 시티폰이 없다고 딱 잡아떼는 것이였다. 나는 컴퓨터의 기록 대로 그의 아들의 출생년월일을 대조하면서 근거를 잡았다. 후에 알고 보니 그의 아들이 자기 신분증으로 남에게 시티폰을 사주었던 것이였다. 이렇게 실마리를 풀어나가면서 사용호를 찾아 체불금도 받아내고 또 사용호 이름도 고치도록 설복하였다.

나는 이렇게 몸과 마음의 고달픔을 이겨내면서 이동성이 강한 시티폰 체불금 8,900여원을 받아내여 기업에 적은 힘이라도 이바지하였다.

노력과 헌신은 거짓을 몰랐다. 나는 일터에서 여러가지 선진의 영예도 많이 안았다. 더우기 2003년에는 길림성통신회사 봉사모범의 영예를 안고 북경 인민대회당에서 국가연회에 참가하는 행운도 지녔었다.

길림신문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양로사업을 영원한 직책으로 여기는 ‘이쁜 아가씨’ 박진화의 이야기 “로인을 돌보고 어린 애들을 보살필수 있는 양로원, 고아원을 차리는것이 어릴적 저의 꿈이였습니다.” 아니운서라는 화려한 후광을 벗어둔채 2011년 2월, 호리원으로 탈바꿈하면서 지금 사회복리원 특수호리구역에서 주임...
  • 2018-01-03
  • 뻐스정류소에서 길다랗게 줄지어서서 순서를 기다리는 일본인들/리홍매특파원 일본인들의 줄서기를 그들의 문화라고 하기에는 너무 단순하고 조금은 망설임이 앞서는 일이다. 하지만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에 거부감이 전혀 없는 듯한 일본인들에 대해 처음에는 생소함을 느끼다가 점차 거기에 적응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
  • 2017-12-26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65) ◇서정숙(중경)     언니가 보낸 다시 돌아오지 않는 〈2016년의 렬차〉란 글을 읽으며 감개가 무량하다.   무정한 세월은 드팀없이 꾸준히도 흘러 장장 45년이 지나 그제날의 갓 사업에 참가했던 짧은 량태머리 언니도, 늦은 공부라도 하려고 학교 다니던...
  • 2017-12-25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64) ◇주청룡(룡정) 1973년, 내가 생산대대의 과학실험소조에서 일할 때였다. 그 때 우리 대대에도 주에서 공작대들이 내려와있었는데 당시 주당위 선전부 리휘 부장이 우리 공사에 온 공작대의 총 책임자로 우리 대대에 와 주둔해있었다. 그 해 여름의 어느 날 리휘 부장은 대...
  • 2017-12-25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63) ◇남걸(목단강) 1976년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목단강시전염병병원에 배치받아 의사사업을 한 지도 어언 40여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매번 백설같이 흰 의사복을 떨쳐입고 병원 각 과실(科室)을 순시할 때마다 나에게 진정한 의사자격을 가져다준 감명 깊었던 40년 전 그 날의...
  • 2017-12-19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62) ◇황혜영 (길림) 50년 전 추억의 색바랜 사진(왼쪽이 어린 시절 필자) 어제밤 비가 억수로 쏟아지더니 아침에 나가보니 아직 익지 못한 시퍼런 복숭아 열매가 나무 밑에 쭉 깔렸다. 복숭아를 볼 때마다 복숭아의 맛보다 그 씨가 어떨가 하는 생각을 먼저 해보는 나다...
  • 2017-12-19
  •   남편류학시절의 경제담보인이였던 노토 아키히로(能登昭博)씨는 대학교 졸업론문을 이라는 테마로 썼을 정도로 중국에 관심이 많은 분이다. 《아사히신문》(朝日新聞) 치바(千葉)동부지역의 판촉업무를 총괄하는 회사경영인이였던 그는 내가 일본에 온 이듬해에 새로운 사업으로 지역신문인 《호오지로》(ほお...
  • 2017-12-18
  • 일본의 선물보따리(자료사진) 어린 시절 엄마 뒤꽁무니를 따라 다니면서 눈으로 얻은 깨달음이라고 할가,“받은 그릇은 절대 빈채로 돌려 보내지 않는다”였다. 이웃사이에 주고 받고 빌리고 빌려 주고 하면서 살았던 그 시절, 동네집 잔치가 온 마을의 기쁨이였고 어느집에 상사가 나면 온 동네가 슬퍼했다. 그...
  • 2017-12-18
  • 〔한국서 홀로서기∼나는 이렇게 살았다〕 9년을 하루와 같이 문화봉사를 해온 석복순녀사의 감동 스토리 석복순(맨 앞)강사가 춤을 가르치고 있다 돌이켜보니 내가 2007년 둘째딸을 따라 한국에 올 때 나이가 예순이였으니 10년이 지난 오늘 어언 일흔이라는 고희의 나이로 되였다. 그간 줄곧 소외된 사람들에게 춤을 ...
  • 2017-12-12
  • (흑룡강신문=하얼빈)채복숙 기자 = "저희 기금회는 2012년에 랴오닝성민정청의 2급 법인으로 설립되어 대략 2년 여 동안 운영하다가, 2014년에 독립법인을 신청해, 2015년 1월에 정식 허가증이 내려왔습니다. 기금회가 설립되어서부터 지금까지 조선족사회의 많은 지원을 받아 왔습니다.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기부문...
  • 2017-12-12
  • 〔한국서 홀로서기∼나는 이렇게 살았다〕 9년을 하루와 같이 문화봉사를 해온 석복순녀사의 감동 스토리 석복순(맨 앞)강사가 춤을 가르치고 있다 돌이켜보니 내가 2007년 둘째딸을 따라 한국에 올 때 나이가 예순이였으니 10년이 지난 오늘 어언 일흔이라는 고희의 나이로 되였다. 그간 줄곧 소외된 사람들에게 춤을 ...
  • 2017-12-12
  • 우리 집 가까이에 살고 있는 량씨는 일본에 온지 10년째 되는 한족 료리사이다. 어느 날 그가 찾아와서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장가 보내고 나니 빈털터리가 됐어요” 18살 때부터 료리를 배웠다는 량씨는 일본어를 전혀 접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였다. 갓 마흔살에 접어들면서 일본...
  • 2017-12-11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61) ◇김동화(연길) 30수년전 그 때 그 학생들과 함께 남긴 기념사진 세월은 류수와 같다더니만 정말 만질 수도 걷잡을 수도 없는 것이 바로 시간의 흐름인가 본다. 어언 70을 코앞에 두고 보니 가끔씩 따르는 크고 작은 추억들로 머리를 메운다. 올해 제33회 교사절을 즐...
  • 2017-12-11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60) ◇김규칠 구술 김숙자 대필 행복한 만년을 보내고 있는 김규칠 로인 부부 내 나이 금년에 80이다. 긴 세월 수많은 일들을 겪다 보니 잊혀지지 않는 사연도 많다. 그런데 요즘 인정세태가 삭막해서 그런지 그 때 그 일이 어쩐지 더 자주 떠오르군 한다. 온 나라가 문화대혁...
  • 2017-12-11
  • 〔한국서 홀로서기∼나는 이렇게 살았다〕 “나는 스승을 잘 만나 성공했다” 가수, ‘아리랑 난타’ 단장 아이수의 성공담에서 내가 한국 온 년도가 2004년이니 올해로 벌써 10년 하고도 3년이 된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는데 그간 나의 한국생활에도 적지 않는 변화가 있어 자부를 느낀다...
  • 2017-12-11
  • 며칠전 묵직한 편지봉투 하나가 우리집에 날아왔다. ‘항상 감사합니다. 더 받은 송금료 164엔을 돌려 드립니다. 또 기회가 되면 잘 부탁합니다’ 짤막한 메모용지와 함께 동전 164엔이 들어 있는 봉투였다. 나는 적혀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어서 영문을 물었다. 사실은 지인의 부탁으로 인터넷경매에서 옛...
  • 2017-12-10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59) ◇리희숙(안도) 애청자협회 열성자로 뛰고 있는 필자 리희숙 격정과 활력에 끓어넘치며 정열에 불타던 그 청춘시절, 걸탐스레 지식을 배워가며 희망과 기대에 부풀었던 학창시절을 마치고 ‘광활한 천지에는 할일이 많다’는 모주석의 지시에 따라 우리는 1965년...
  • 2017-12-05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58) ◇전영실(연길) 등산길에서의 필자 전영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취업통지서를 받고 우전국 인사과로 등록하러 갔던 때의 일이 어제런듯 눈앞에 삼삼하다. 한 나이 지긋한 책임일군이 반가이 맞아주며 “동무는 무슨 특장이 있소?” “어떤 일을 하고 싶소?” 하며...
  • 2017-12-05
  •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는 일본에 온지 일년후였다. 그때 야마모토 타마에(山本 多摩江)씨는 우리가 사는 지역의 국제교류협회 책임자였다. 영어에 능한 그녀는 외국인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았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대부분의 일본인들에 비해 적극적이고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일본...
  • 2017-12-05
  • 각 지역 촌마다 빈곤해탈 난관 공략전이 치렬하게 펼쳐지고 있는 요즘, 누구보다 마음 한켠이 조급해나는 한 젊은이가 있다. 연거퍼 몇달동안 집에 내려가지 못한 채 농촌사업터에서 빈곤해탈사업을 위해 뛰여다니느라 낮과 밤을 잊은 그는 바로 룡정시 백금향 빈곤부축판공실 주임 홍광철(33살)씨다. 룡정시 백금향 빈곤부...
  • 2017-12-01
‹처음  이전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