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홀로서기] '봉사는 나의 신성하고도 영원한 직업입니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17년12월12일 11시27분    조회:851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한국서 홀로서기∼나는 이렇게 살았다〕

9년을 하루와 같이 문화봉사를 해온 석복순녀사의 감동 스토리

석복순(맨 앞)강사가 춤을 가르치고 있다

돌이켜보니 내가 2007년 둘째딸을 따라 한국에 올 때 나이가 예순이였으니 10년이 지난 오늘 어언 일흔이라는 고희의 나이로 되였다. 그간 줄곧 소외된 사람들에게 춤을 가르치는 것으로 문화봉사를 해오면서 고생도 많았고 힘든 일도 푸술했지만 즐거움과 행복감에 젖어있은 시간이 더 많은 것으로 기억된다.

한국에 와서 뭘하며 또 어떻게 살아갈가? 당시 한국땅을 밟고 나니 괜히 생각만 착잡했다. 중국에 있을 때 인공관절수술을 한 후로 건강이 별로 좋지 않은 데다가 원래 과분하게 힘든 일을 해본 적 없는 나로서는 한국에서 고된 일을 하며 산다는 게 불가능한 일이였다.

한동안 별로 할 일 없이 집에만 붙박혀있으면서 이 궁리 저 궁리 해봤지만 뭘 해야 할지 뾰족한 수가 나지 않았다. 너무 무미건조했다. 주위에서 돈 번다고 바삐 돌아치는 사람들이 눈에 띌 적마다 안타까운 나머지 한숨만 나갔다. 중국에 다시 돌아가려는 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한국에 딸들이 있고 게다가 중국에서의 사업을 접은 상태에서 되돌아간다는 것도 현실적이 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최씨라는 한 녀성이 누구한테서 소식을 듣고 찾아와 자신이 중국에 있을 때 춤을 좀 췄는데 함께 춤강사를 하면 어떻겠는가고 제안했다. 그 말에 귀가 솔깃했다. 나는 중국에 있을 때 음식점을 경영했는데 아는 사람이 꽤 많았고 사회활동도 비교적 빈번했다. 허나 주위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무언가 부족한 감을 느꼈다. 그리고 음식점만 경영한다는 것도 따분했다. 궁리 끝에 춤이라도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였다.

우선 서점에 가 무용 관련 책을 사 보고 이전부터 잘 아는 사이였던 전해자선생을 찾아 정식으로 무용을 배우기 시작했다. 나의 인식은 무용은 하나의 교제수단이며 특히는 건강에 리롭다는 것이였다.

민무로부터 사교무까지 배웠는데 재미가 있었다. 한동안 배운 후에는 무도장 출입까지 했는데 시간이 감에 따라 그 수준도 올라가 더욱 많은 사람들과 교제를 하면서 별다른 삶의 보람을 느꼈다. 그러니 나의 우세라면 춤을 알고 있다는 점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누구한테 춤을 배워준단 말인가? 그리고 춤을 배워주면 수익이라도 생길가? 최씨 녀성한테 의문을 제기했더니 우선 시작하고 보자는 의견이였다.

그 때부터 나는 누구한테 춤을 배워줄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였다. 그러던중 나이 지긋해보이는 몇몇 녀성들을 만나게 되였는데 알고  보니 자식들은 모두 일하러 다니고 본인들은 할 일 없이 집에서 멋적게 보낸다고 했다.

이들과 심심풀이도 할겸 운동도 할겸 춤을 배워보려는 의향이 없는가고 물었더니 그게 좋겠다며 쾌히 승낙하는 것이였다.

나는 그 날부터 이전에 배운 춤동작을 바탕으로 춤교수안을 짜기 시작했다. 비록 몇명 안되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에게 내가 알고 있는 춤을 전수한다는 게 생각만 해도 벅차고 흥분된 기분이였다.

나는 건강체조, 건강댄스, 건강무용, 중국의 전통춤 양걸을 비롯해 다양하게 준비하였다. 당시에는 돈을 번다거나 무슨 리익을 챙긴다는 생각은 할 수 없었다. 나한테 하는 일이 생겼다는 게 너무나 다행스럽게 생각되였기 때문이다.

나의 진정한 한국생활은 바로 이렇게 시작되였다. 매일 한낮부터 저녁까지 춤동작을 연구하느라 바삐 보냈고 이튿날 아침 6시부터 한시간 반 동안 가까운 공원에서 열심히 춤을 가르쳤다.

처음에는 3, 4명이 모이던 것이 점점 인원이 늘어나 한달가량 지나서는 수십명이 되였다. 좋은 계절에는 최고 100명 이상도 되였다. 그중에는 암환자도 있고 치매로 고생하는 사람, 장기환자로 병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이를 보면 최고 81세 되는 로인이 있는가 하면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일을 못하는 50대도 있었다. 대부분은 소외된 사람들이였다. 또한 자식들을 모두 시집장가 보내놓고 어느 구식진 곳에서 생활하는, 의지가지없는 사람들이 다수였다. 이들한테서 수고비를 받는다거나 무얼 바란다는 건 모종의 죄로 인식되였다.

몇번인가 춤을 가르치는 도중에 난데없이 경찰이 나타나 활동을 중지하라는 통고를 받을 때도 있었다. 당지 주민으로부터 떠들썩한다는 신고가 들어와 부득불 제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였다. 이럴 때면 곧 활동장소를 옮겨야 한다. 중국에는 공공장소에서 춤을 추는 사례가 많으나 한국은 그렇지 않다. 역시 문화가 다르고 삶의 방식이 다르기에 당지인들이 신고하는 데 대해 리해는 갔다. 지금까지도 우리한테는 고정된 활동장소가 없으며 잠간 아침시간만을 리용해 단체활동을 할 뿐이다.

나는 춤을 배워준외에도 생활쓰레기 처리 상식, 치매방지 등 생활상식 교육도 진행하고 사회뉴스 학습시간도 가진다. 좀 따분할 때면 재미있는 유희를 만들어 즐기기도 한다.

나는 단지 내가 하는 일이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다는 데서 보람을 느꼈을 뿐이다. 록음기가 없으면 내 돈으로 사고 때로 어느 행사에 가도 내가 경비를 장만했다. 요즘은 대원들이 달마다 회비 3,000원을 낸다. 이 돈으로 1년에 4차 정도 들놀이를 가기도 한다. 나는 춤을 배우는 사람들을 무어 한중문화예술교류협회(회장 이(리)용주)의 소속으로 부녀협회를 설립했다. 간혹 두만강예술단(역시 한중문화예술교류협회 소속)과 함께 공연도 하면서 더욱 보람을 느낀다.

주위 사람들이 나의 생활비는 어디에서 오는가고 묻는다. 물론 중국에 있을 때 돈은 좀 벌었지만 그 돈으로 한국에서 생활하기란 역부족이다. 자랑하고 싶은 것은 마음이 착한 나의 네 딸이다. 엄마가 하는 일을 리해해줄 뿐만 아니라 꼬박꼬박 생활비를 챙겨준다. 딸들이 하는 말이 엄마의 건강이 자신들에 대한 제일 큰 도움이 된단다. 이처럼 기특한 딸을 둔 내가 너무도 행복하다.

벌써 9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때로는 건강이 좋지 않아 지팽이를 짚고 나오면서도 오늘까지 문화봉사를 견지했다는 데서 자호를 느낀다. 거의 10년을 하루와 같이 무료봉사를 해온 나를 두고 주위 사람들이 리해가 가지 않는다고 말할 때가 있다. 허나 물질적으로 득이 된 건 없지만 나를 포함해 그간 나한테서 춤을 배운 사람들이 건강 하나만은 잘 챙겼으니 이보다 더 큰 득이 또 어디 있겠는가!

봉사는 나의 신성한 직업으로 되였고 나는 오늘 봉사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 되였다. 봉사는 나를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모든 소외된 사람들의 건강과 행복을 위한 것이기에 이 세상 가장 숭고하고 신성한 직업이라 거듭 웨치고 싶다.

/전춘봉 기자 대필 qcf2000@naver.com

부녀협회 대원들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양로사업을 영원한 직책으로 여기는 ‘이쁜 아가씨’ 박진화의 이야기 “로인을 돌보고 어린 애들을 보살필수 있는 양로원, 고아원을 차리는것이 어릴적 저의 꿈이였습니다.” 아니운서라는 화려한 후광을 벗어둔채 2011년 2월, 호리원으로 탈바꿈하면서 지금 사회복리원 특수호리구역에서 주임...
  • 2018-01-03
  • 뻐스정류소에서 길다랗게 줄지어서서 순서를 기다리는 일본인들/리홍매특파원 일본인들의 줄서기를 그들의 문화라고 하기에는 너무 단순하고 조금은 망설임이 앞서는 일이다. 하지만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에 거부감이 전혀 없는 듯한 일본인들에 대해 처음에는 생소함을 느끼다가 점차 거기에 적응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
  • 2017-12-26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65) ◇서정숙(중경)     언니가 보낸 다시 돌아오지 않는 〈2016년의 렬차〉란 글을 읽으며 감개가 무량하다.   무정한 세월은 드팀없이 꾸준히도 흘러 장장 45년이 지나 그제날의 갓 사업에 참가했던 짧은 량태머리 언니도, 늦은 공부라도 하려고 학교 다니던...
  • 2017-12-25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64) ◇주청룡(룡정) 1973년, 내가 생산대대의 과학실험소조에서 일할 때였다. 그 때 우리 대대에도 주에서 공작대들이 내려와있었는데 당시 주당위 선전부 리휘 부장이 우리 공사에 온 공작대의 총 책임자로 우리 대대에 와 주둔해있었다. 그 해 여름의 어느 날 리휘 부장은 대...
  • 2017-12-25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63) ◇남걸(목단강) 1976년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목단강시전염병병원에 배치받아 의사사업을 한 지도 어언 40여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매번 백설같이 흰 의사복을 떨쳐입고 병원 각 과실(科室)을 순시할 때마다 나에게 진정한 의사자격을 가져다준 감명 깊었던 40년 전 그 날의...
  • 2017-12-19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62) ◇황혜영 (길림) 50년 전 추억의 색바랜 사진(왼쪽이 어린 시절 필자) 어제밤 비가 억수로 쏟아지더니 아침에 나가보니 아직 익지 못한 시퍼런 복숭아 열매가 나무 밑에 쭉 깔렸다. 복숭아를 볼 때마다 복숭아의 맛보다 그 씨가 어떨가 하는 생각을 먼저 해보는 나다...
  • 2017-12-19
  •   남편류학시절의 경제담보인이였던 노토 아키히로(能登昭博)씨는 대학교 졸업론문을 이라는 테마로 썼을 정도로 중국에 관심이 많은 분이다. 《아사히신문》(朝日新聞) 치바(千葉)동부지역의 판촉업무를 총괄하는 회사경영인이였던 그는 내가 일본에 온 이듬해에 새로운 사업으로 지역신문인 《호오지로》(ほお...
  • 2017-12-18
  • 일본의 선물보따리(자료사진) 어린 시절 엄마 뒤꽁무니를 따라 다니면서 눈으로 얻은 깨달음이라고 할가,“받은 그릇은 절대 빈채로 돌려 보내지 않는다”였다. 이웃사이에 주고 받고 빌리고 빌려 주고 하면서 살았던 그 시절, 동네집 잔치가 온 마을의 기쁨이였고 어느집에 상사가 나면 온 동네가 슬퍼했다. 그...
  • 2017-12-18
  • 〔한국서 홀로서기∼나는 이렇게 살았다〕 9년을 하루와 같이 문화봉사를 해온 석복순녀사의 감동 스토리 석복순(맨 앞)강사가 춤을 가르치고 있다 돌이켜보니 내가 2007년 둘째딸을 따라 한국에 올 때 나이가 예순이였으니 10년이 지난 오늘 어언 일흔이라는 고희의 나이로 되였다. 그간 줄곧 소외된 사람들에게 춤을 ...
  • 2017-12-12
  • (흑룡강신문=하얼빈)채복숙 기자 = "저희 기금회는 2012년에 랴오닝성민정청의 2급 법인으로 설립되어 대략 2년 여 동안 운영하다가, 2014년에 독립법인을 신청해, 2015년 1월에 정식 허가증이 내려왔습니다. 기금회가 설립되어서부터 지금까지 조선족사회의 많은 지원을 받아 왔습니다.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기부문...
  • 2017-12-12
  • 〔한국서 홀로서기∼나는 이렇게 살았다〕 9년을 하루와 같이 문화봉사를 해온 석복순녀사의 감동 스토리 석복순(맨 앞)강사가 춤을 가르치고 있다 돌이켜보니 내가 2007년 둘째딸을 따라 한국에 올 때 나이가 예순이였으니 10년이 지난 오늘 어언 일흔이라는 고희의 나이로 되였다. 그간 줄곧 소외된 사람들에게 춤을 ...
  • 2017-12-12
  • 우리 집 가까이에 살고 있는 량씨는 일본에 온지 10년째 되는 한족 료리사이다. 어느 날 그가 찾아와서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장가 보내고 나니 빈털터리가 됐어요” 18살 때부터 료리를 배웠다는 량씨는 일본어를 전혀 접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였다. 갓 마흔살에 접어들면서 일본...
  • 2017-12-11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61) ◇김동화(연길) 30수년전 그 때 그 학생들과 함께 남긴 기념사진 세월은 류수와 같다더니만 정말 만질 수도 걷잡을 수도 없는 것이 바로 시간의 흐름인가 본다. 어언 70을 코앞에 두고 보니 가끔씩 따르는 크고 작은 추억들로 머리를 메운다. 올해 제33회 교사절을 즐...
  • 2017-12-11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60) ◇김규칠 구술 김숙자 대필 행복한 만년을 보내고 있는 김규칠 로인 부부 내 나이 금년에 80이다. 긴 세월 수많은 일들을 겪다 보니 잊혀지지 않는 사연도 많다. 그런데 요즘 인정세태가 삭막해서 그런지 그 때 그 일이 어쩐지 더 자주 떠오르군 한다. 온 나라가 문화대혁...
  • 2017-12-11
  • 〔한국서 홀로서기∼나는 이렇게 살았다〕 “나는 스승을 잘 만나 성공했다” 가수, ‘아리랑 난타’ 단장 아이수의 성공담에서 내가 한국 온 년도가 2004년이니 올해로 벌써 10년 하고도 3년이 된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는데 그간 나의 한국생활에도 적지 않는 변화가 있어 자부를 느낀다...
  • 2017-12-11
  • 며칠전 묵직한 편지봉투 하나가 우리집에 날아왔다. ‘항상 감사합니다. 더 받은 송금료 164엔을 돌려 드립니다. 또 기회가 되면 잘 부탁합니다’ 짤막한 메모용지와 함께 동전 164엔이 들어 있는 봉투였다. 나는 적혀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어서 영문을 물었다. 사실은 지인의 부탁으로 인터넷경매에서 옛...
  • 2017-12-10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59) ◇리희숙(안도) 애청자협회 열성자로 뛰고 있는 필자 리희숙 격정과 활력에 끓어넘치며 정열에 불타던 그 청춘시절, 걸탐스레 지식을 배워가며 희망과 기대에 부풀었던 학창시절을 마치고 ‘광활한 천지에는 할일이 많다’는 모주석의 지시에 따라 우리는 1965년...
  • 2017-12-05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58) ◇전영실(연길) 등산길에서의 필자 전영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취업통지서를 받고 우전국 인사과로 등록하러 갔던 때의 일이 어제런듯 눈앞에 삼삼하다. 한 나이 지긋한 책임일군이 반가이 맞아주며 “동무는 무슨 특장이 있소?” “어떤 일을 하고 싶소?” 하며...
  • 2017-12-05
  •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는 일본에 온지 일년후였다. 그때 야마모토 타마에(山本 多摩江)씨는 우리가 사는 지역의 국제교류협회 책임자였다. 영어에 능한 그녀는 외국인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았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대부분의 일본인들에 비해 적극적이고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일본...
  • 2017-12-05
  • 각 지역 촌마다 빈곤해탈 난관 공략전이 치렬하게 펼쳐지고 있는 요즘, 누구보다 마음 한켠이 조급해나는 한 젊은이가 있다. 연거퍼 몇달동안 집에 내려가지 못한 채 농촌사업터에서 빈곤해탈사업을 위해 뛰여다니느라 낮과 밤을 잊은 그는 바로 룡정시 백금향 빈곤부축판공실 주임 홍광철(33살)씨다. 룡정시 백금향 빈곤부...
  • 2017-12-01
‹처음  이전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