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그 때 그 아이들 그 모습
조글로미디어(ZOGLO) 2017년12월11일 15시46분    조회:997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61)

◇김동화(연길)

30수년전 그 때 그 학생들과 함께 남긴 기념사진

세월은 류수와 같다더니만 정말 만질 수도 걷잡을 수도 없는 것이 바로 시간의 흐름인가 본다.

어언 70을 코앞에 두고 보니 가끔씩 따르는 크고 작은 추억들로 머리를 메운다. 올해 제33회 교사절을 즐겁게 보내면서 ‘그 때 그 아이들 그 모습’이 어쩐지 새삼스레 머리에 떠오른다.

2015년, 나는 처가집 일로 한국 땅을 다시 밟게 되였다. 이튿날 저녁, 안해가 전화를 받더니 “당신의 학생이라는데” 하며 나에게 핸드폰을 넘겨주는 것이였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리향자입니다.” 전에 듣어본 목소리였다. 석문진중심학교 때 향자의 딸를 가르치면서 다른 학생들에 비하여 접촉 시간이 좀 많았던 것이다. 향자는 돌아오는 휴일날에 동창애들이 선생님을 뵙자고 하는데 어떠냐는 것이였다. 이국땅에서 정말 뜻밖의 고마운 일이였다. 하지만 내가 입국전 감기에 걸린 상태라 콜록이는 모습을 애들 앞에 보이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그들은 나의 건강상태를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 말이다(1998년 전국 조선족소학생들의 도움으로 제2차 심장판막의식수술을 성공적으로 받았음).

한둘이면 몰라도 여럿이 함께 시간 내기란 쉽지 않겠지만 애들은 쾌히 나의 제의를 받아들이고 날자를 뒤로 미루었다.

나는 1981년 11월에 장흥향 도안학교에서 석문진 남류학교로 전근되였는데 2년 후 병이 발작하여 현병원에 가 입원치료를 받게 되였다. 그러던 6월의 어느 일요일, 이날 따라 비가 하염없이 쏟아졌는데 수동이란 50리나 되는 시골에서 비닐쪼각을 쓰고 달려와 나의 병실을 찾아주었던, 사랑하고 아끼였던 소학교 3, 4, 5학년 때 나의 학생애들이다.

눈 껌벅 사이 두주일이 지났다. 더는 시간을 미룰 수 없었다. 애들의 정해놓은 수원역 ‘외할머니네 초두부집’을 찾았다. 오영옥, 리향자, 리홍국, 리룡남, 리종국 다섯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국에서 만난 그 기쁨이야말로 서로 오래 그리던 부모 자식간의 만남 같았다. 이중에서도 룡남이는 30여년 만이라 자아소개를 해서야 알아볼 수 있었다. 향자는 “계획 대로 전번에 모였으면 3~4명의 애들을 더 만나볼 수 있었는데 일로 중국에 들어가고 어떤 애들은 회사의 청가가 힘들어 참석하지 못해 몹시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전명자는 인천 친척 결혼집에 갔다 낯을 보이고 돌아오겠다고 약속을 했으니 좀 늦게라도 꼭 올 것입니다.” 라며 점심상을 올리였다.

안도현 석문진중심소학교 교원 시절

나는 애들과 한덩어리가 되여 점심을 나누며 지난 옛 추억들을 허물없이 풀어놓았다. 당시 학급에는 17명의 아이들이 있었는데 남학생이란 김명관, 리룡남, 리홍국 셋 뿐이여서 항상 녀자애들이 우세였다. 호상 허물이 없는 것이 동창들이라더니 어렸을 때의 자기들의 마음속의 말들을 거짓 없이 털어놓아 한바탕 웃어도 보고 때론 묵묵히 침묵도 지켰다. 그것은 몇해 전에 리월선이가 한국에서 일하다 몸이 불편하여 중국에 돌아간 것이 그만 병이 악화되여 저세상으로 갔다는 것이였다. 듣는 순간 나는 “40대 중반인 애를 벌써 데려가다니, 하나님도 너무 무정하다.”며 한탄하였다. 월선이는 정말 훌륭한 애였다.

한창 애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한 아주머니가 우리 좌석에 나타났다. 애들은 구령이나 부르듯이 “명자 왔구나.” 하며 음성을 높였다. 명자? 내 머리속에 있는 명자는 성질이 활달하고 학급에서도 키가 제일 큰 김옥선이 다음이였다. 그래서 명자는 키가 크고 체질이 좋고 운동을 즐겨 운동선수로 발전했으면 좋겠다고 외웠었다. 하지만 오늘의 명자는 그 키에다 몸이 좀 난 곱상스러운 녀자의 매력을 소유했다. “선생님, 저를 알 만합니까? 이렇게 건강한 모습을 보니 고맙습니다. 언녕 선생님을 찾아뵈여야 했는데.” 라며 손을 덥석 잡는 것이였다.

“오히려 내가 더 민안한 거지.” 뜨겁게 맞아주는 애들을 만나며 전에 그들을 위해 한 일이 너무나 적은 것이 사실 죄송스러웠다. 명자와는 꼭 35년 만에 만났으니 길에서 마주쳐도 모르고 지났을 것이다. 누구인가 “쟤는 인젠 할머니가 되였습니다.” “인제는 할머니가 될 때도 됐지, 축하해.” 나는 치하해주었다. 그러나 명자는 “선생님 앞에서 무슨 말 그렇게 하냐.”라며 부끄러워하는 태도였다. 세월이란 흐름은 빠른 것이다. 애들이 커 어른이 되고 어른이 나이 먹어 로인이 되는 것은 필연적 자연현상이다. 인젠 애들도 한급씩 추고 있었다.

한창 웃음꽃을 피우며 회포를 나누는데 홍국이가 스마트폰를 넘겨주는 것이였다. 영상에 오른 애는 다름 아닌 반장이였던 김명관이였다. 전에 복실이, 영옥이랑 연길에서 몇차례 만난 적이 있다. 훤칠한 키꼴에 둥글넙죽한 얼굴, 곱슬머리에다 특수한 구레나룻은 사나이다운 매력을 과시하였다. 명관이는 갑자기 일로 귀국하다 보니 자리를 함께 못해 아쉽다는 것이였다. 후에 방정숙, 신미화, 정명자, 김명옥이와의 전화통화로 또한 인상 깊다. 임계남과 리계남도 선후로 만나게 되였다.

당시 학급에는 17명 학생(남 3명)이 있었는데 현재 한국에 있는 동창생이 12명이나 된다고 하였다. 정말 놀랍기도 하고 리해도 갔다.

애들은 서로 지난 일들로 웃음꽃을 피웠다. 4, 5학년 때 학급에서는 한해는 학교 뒤에 100여평방 되는 밭에다 피마주를 심고, 한해는 수동마을 동쪽 비탈밭에다 떡호박, 메호박을 심고 관찰실험활동을 벌렸다. 피마주는 조를 나누어 이랑을 떼주고 학생마다 포기를 주어 자체로 심고 관리 관찰하도록 하였는데 자람새를 관찰하던 그 때 그 모습들이 그대로 생생히 떠오른다.

학생들과 즐거운 들놀이의 한 때

이외에도 애들이 많이 외우는 것은 휴식일이거나 여유시간에 야외에 나가 벌린 오락성 유희 활동들이거나 동식물 관찰활동, 로동실천활동들이였다. 이에 나는 “너희들이 나를 잊지 않고 또 친근해질 수 있는 것이 곧바로 그런 저그만한 활동들이였구나.” 하는 느낌과 함께 교원으로서 응당한 일들이 애들에게 오늘까지 잊혀지지 않는 동년시절의 한순간을 그려놓았을 줄은 몰랐다.

애들은 분위기를 바꾸자며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보니 전에 어렸을 때의 애들이 아니였다. 활달하고 이야기도 곧 잘하며 노래도 가수들 못지 않게 잘 불러 분위기가 한결 흥성하였다. 나도 애들과 함께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는 순간들은 그들과 함께 젊게 보내는 뜨는 기분이였다.

애들이 또 3차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몸도 따라주지 않았지만 그들에게 자기들 끼리의 공간을 주고저 사양했다. “친구들, 죄송스럽지만 나는 오늘 여기까지만 참석하겠습니다.” 애들은 거듭 만류했지만 끝내는 나의 뜻을 존중해주었다. 나는 애들이 태워주는 택시에 앉았다. 차창 밖에서 애들이 손 저어 “선생님 안녕히, 몸 건강하세요.”라며 바래는 모습과 웨침소리를 듣는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났다. 머리에 흰서리가 내리고 남자라 해서 눈물이 가을 논바닥마냥 다 말라든 건 아니다. 정으로 흐르는 이 눈물은 바로 ‘정물’인가 본다. 그것도 중학교도 아닌 소학교 때의 아이들, 중국도 아닌 한국에서 만나준다는 것은 정말 조련찮은 꿈이 아닌 현실이였다.

애들과 위챗동아리를 건립하고 국내외에 있는 사랑하는 그 때 그 아이들과 수시로 고향소식, 주위 애들의 소식을 서로 전하고 문안을 전할 때마다 하고 있는 일들이 잘 풀려가기를 두손을 꼭 모아본다.


길림신문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양로사업을 영원한 직책으로 여기는 ‘이쁜 아가씨’ 박진화의 이야기 “로인을 돌보고 어린 애들을 보살필수 있는 양로원, 고아원을 차리는것이 어릴적 저의 꿈이였습니다.” 아니운서라는 화려한 후광을 벗어둔채 2011년 2월, 호리원으로 탈바꿈하면서 지금 사회복리원 특수호리구역에서 주임...
  • 2018-01-03
  • 뻐스정류소에서 길다랗게 줄지어서서 순서를 기다리는 일본인들/리홍매특파원 일본인들의 줄서기를 그들의 문화라고 하기에는 너무 단순하고 조금은 망설임이 앞서는 일이다. 하지만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에 거부감이 전혀 없는 듯한 일본인들에 대해 처음에는 생소함을 느끼다가 점차 거기에 적응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
  • 2017-12-26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65) ◇서정숙(중경)     언니가 보낸 다시 돌아오지 않는 〈2016년의 렬차〉란 글을 읽으며 감개가 무량하다.   무정한 세월은 드팀없이 꾸준히도 흘러 장장 45년이 지나 그제날의 갓 사업에 참가했던 짧은 량태머리 언니도, 늦은 공부라도 하려고 학교 다니던...
  • 2017-12-25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64) ◇주청룡(룡정) 1973년, 내가 생산대대의 과학실험소조에서 일할 때였다. 그 때 우리 대대에도 주에서 공작대들이 내려와있었는데 당시 주당위 선전부 리휘 부장이 우리 공사에 온 공작대의 총 책임자로 우리 대대에 와 주둔해있었다. 그 해 여름의 어느 날 리휘 부장은 대...
  • 2017-12-25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63) ◇남걸(목단강) 1976년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목단강시전염병병원에 배치받아 의사사업을 한 지도 어언 40여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매번 백설같이 흰 의사복을 떨쳐입고 병원 각 과실(科室)을 순시할 때마다 나에게 진정한 의사자격을 가져다준 감명 깊었던 40년 전 그 날의...
  • 2017-12-19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62) ◇황혜영 (길림) 50년 전 추억의 색바랜 사진(왼쪽이 어린 시절 필자) 어제밤 비가 억수로 쏟아지더니 아침에 나가보니 아직 익지 못한 시퍼런 복숭아 열매가 나무 밑에 쭉 깔렸다. 복숭아를 볼 때마다 복숭아의 맛보다 그 씨가 어떨가 하는 생각을 먼저 해보는 나다...
  • 2017-12-19
  •   남편류학시절의 경제담보인이였던 노토 아키히로(能登昭博)씨는 대학교 졸업론문을 이라는 테마로 썼을 정도로 중국에 관심이 많은 분이다. 《아사히신문》(朝日新聞) 치바(千葉)동부지역의 판촉업무를 총괄하는 회사경영인이였던 그는 내가 일본에 온 이듬해에 새로운 사업으로 지역신문인 《호오지로》(ほお...
  • 2017-12-18
  • 일본의 선물보따리(자료사진) 어린 시절 엄마 뒤꽁무니를 따라 다니면서 눈으로 얻은 깨달음이라고 할가,“받은 그릇은 절대 빈채로 돌려 보내지 않는다”였다. 이웃사이에 주고 받고 빌리고 빌려 주고 하면서 살았던 그 시절, 동네집 잔치가 온 마을의 기쁨이였고 어느집에 상사가 나면 온 동네가 슬퍼했다. 그...
  • 2017-12-18
  • 〔한국서 홀로서기∼나는 이렇게 살았다〕 9년을 하루와 같이 문화봉사를 해온 석복순녀사의 감동 스토리 석복순(맨 앞)강사가 춤을 가르치고 있다 돌이켜보니 내가 2007년 둘째딸을 따라 한국에 올 때 나이가 예순이였으니 10년이 지난 오늘 어언 일흔이라는 고희의 나이로 되였다. 그간 줄곧 소외된 사람들에게 춤을 ...
  • 2017-12-12
  • (흑룡강신문=하얼빈)채복숙 기자 = "저희 기금회는 2012년에 랴오닝성민정청의 2급 법인으로 설립되어 대략 2년 여 동안 운영하다가, 2014년에 독립법인을 신청해, 2015년 1월에 정식 허가증이 내려왔습니다. 기금회가 설립되어서부터 지금까지 조선족사회의 많은 지원을 받아 왔습니다.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기부문...
  • 2017-12-12
  • 〔한국서 홀로서기∼나는 이렇게 살았다〕 9년을 하루와 같이 문화봉사를 해온 석복순녀사의 감동 스토리 석복순(맨 앞)강사가 춤을 가르치고 있다 돌이켜보니 내가 2007년 둘째딸을 따라 한국에 올 때 나이가 예순이였으니 10년이 지난 오늘 어언 일흔이라는 고희의 나이로 되였다. 그간 줄곧 소외된 사람들에게 춤을 ...
  • 2017-12-12
  • 우리 집 가까이에 살고 있는 량씨는 일본에 온지 10년째 되는 한족 료리사이다. 어느 날 그가 찾아와서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장가 보내고 나니 빈털터리가 됐어요” 18살 때부터 료리를 배웠다는 량씨는 일본어를 전혀 접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였다. 갓 마흔살에 접어들면서 일본...
  • 2017-12-11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61) ◇김동화(연길) 30수년전 그 때 그 학생들과 함께 남긴 기념사진 세월은 류수와 같다더니만 정말 만질 수도 걷잡을 수도 없는 것이 바로 시간의 흐름인가 본다. 어언 70을 코앞에 두고 보니 가끔씩 따르는 크고 작은 추억들로 머리를 메운다. 올해 제33회 교사절을 즐...
  • 2017-12-11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60) ◇김규칠 구술 김숙자 대필 행복한 만년을 보내고 있는 김규칠 로인 부부 내 나이 금년에 80이다. 긴 세월 수많은 일들을 겪다 보니 잊혀지지 않는 사연도 많다. 그런데 요즘 인정세태가 삭막해서 그런지 그 때 그 일이 어쩐지 더 자주 떠오르군 한다. 온 나라가 문화대혁...
  • 2017-12-11
  • 〔한국서 홀로서기∼나는 이렇게 살았다〕 “나는 스승을 잘 만나 성공했다” 가수, ‘아리랑 난타’ 단장 아이수의 성공담에서 내가 한국 온 년도가 2004년이니 올해로 벌써 10년 하고도 3년이 된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는데 그간 나의 한국생활에도 적지 않는 변화가 있어 자부를 느낀다...
  • 2017-12-11
  • 며칠전 묵직한 편지봉투 하나가 우리집에 날아왔다. ‘항상 감사합니다. 더 받은 송금료 164엔을 돌려 드립니다. 또 기회가 되면 잘 부탁합니다’ 짤막한 메모용지와 함께 동전 164엔이 들어 있는 봉투였다. 나는 적혀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어서 영문을 물었다. 사실은 지인의 부탁으로 인터넷경매에서 옛...
  • 2017-12-10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59) ◇리희숙(안도) 애청자협회 열성자로 뛰고 있는 필자 리희숙 격정과 활력에 끓어넘치며 정열에 불타던 그 청춘시절, 걸탐스레 지식을 배워가며 희망과 기대에 부풀었던 학창시절을 마치고 ‘광활한 천지에는 할일이 많다’는 모주석의 지시에 따라 우리는 1965년...
  • 2017-12-05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58) ◇전영실(연길) 등산길에서의 필자 전영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취업통지서를 받고 우전국 인사과로 등록하러 갔던 때의 일이 어제런듯 눈앞에 삼삼하다. 한 나이 지긋한 책임일군이 반가이 맞아주며 “동무는 무슨 특장이 있소?” “어떤 일을 하고 싶소?” 하며...
  • 2017-12-05
  •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는 일본에 온지 일년후였다. 그때 야마모토 타마에(山本 多摩江)씨는 우리가 사는 지역의 국제교류협회 책임자였다. 영어에 능한 그녀는 외국인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았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대부분의 일본인들에 비해 적극적이고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일본...
  • 2017-12-05
  • 각 지역 촌마다 빈곤해탈 난관 공략전이 치렬하게 펼쳐지고 있는 요즘, 누구보다 마음 한켠이 조급해나는 한 젊은이가 있다. 연거퍼 몇달동안 집에 내려가지 못한 채 농촌사업터에서 빈곤해탈사업을 위해 뛰여다니느라 낮과 밤을 잊은 그는 바로 룡정시 백금향 빈곤부축판공실 주임 홍광철(33살)씨다. 룡정시 백금향 빈곤부...
  • 2017-12-01
‹처음  이전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