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금을 주고도 못 살 인생수업
조글로미디어(ZOGLO) 2017년12월5일 09시50분    조회:664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58)

◇전영실(연길)

등산길에서의 필자 전영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취업통지서를 받고 우전국 인사과로 등록하러 갔던 때의 일이 어제런듯 눈앞에 삼삼하다.

한 나이 지긋한 책임일군이 반가이 맞아주며 “동무는 무슨 특장이 있소?” “어떤 일을 하고 싶소?” 하며 상냥히 물어왔다. 당시 나는 리상과 포부로 충만된 랑랑 19세, 아무런 주저도 없이 미리 암기했던 말을 념불 외우듯 줄줄 내리외웠다.

“혁명이 수요하는 곳이면 곧 제가 가고 싶은 곳입니다. 가장 간고한 곳에 보내주십시오.”

기실 우전사업은 내가 그다지 바라던 것은 아니였는데 그렇게 판에 찍은듯이 외워댔으니 지금 생각하면 황당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문화대혁명’이 갓 결속된 그 때의 시대인 만큼 모든 사람들의 언어구사가 대체로 정치적 색채거나 공식적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시기라 나도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나의 말을 들은 책임일군은 “좋소! 좋소! 교환수로 배치하겠소. 어떻게 하나 일 잘해주오.”라고 말하며 등록표를 건네주었다. 등록 후 나는 휘장이 달린 모자에 견장이 달린 상의, 스커트까지 전부 초록색으로 된 우정제복을 받았다. 그 때로부터 나는 교환수로 되여 국내외 수많은 전신 사용호들을 상대로 업무를 취급하게 되였다.

당시 모든 장거리전화는 교환수가 련결하고 끊고 해야 했는데 조작이 시끄럽고 복잡하였다. 레시바를 끼고 눈은 신호등을 주시하고 오른손은 다이얄을 돌리고 왼손으로는 끊임없이 키를 제끼고 귀로는 상대방이 통화를 시작했는지 들어야 하고 입으로는 끊임없이 말해야 하는 등 5섯가지 동작을 동시에 해야 했다.

연길시의 전화번호도 머리속에 환해야 장거리전화를 척척 걸어줄 수 있었고 번호를 숙달하게 암기해야 신속, 준확, 기밀, 안전하게 일할 수 있었다.

나는 먹과 붓, 백지를 사다가 여러 단위의 번호를 다닥다닥 적어 집안의 벽에다 붙여놓고는 구들을 닦으면서도 외우고 밥을 지으면서도 외우고 신을 신으면서도 외우고, 외우고 또 외웠다.

교환수로 일하던 초기의 일이다. 한번은 북경의 손님에게 연길백화점에 련계해준다는 것이 그만 화장터에 련계해주어 엄한 질책을 받은 적이 있다. 얼마나 죄송했던지, 나는 연신 사과하면서 잘못을 용서해달라고 빌고 빌었다. 수자 하나의 차이로, 3061을 3016으로 착각하고 련계해줬던 것이다. 이렇게 질책받고 힘들 때면 “내가 왜 이렇게 우전국 ‘녀자탄광’이란 곳에 왔는가” 하면서 동요도 없지 않았지만 교훈으로 삼고 닫는 말에 채찍질하는 정신으로 업무에 더욱 열중했다.

번호 외우기도 무턱대고 외우는 것이 아니라 형상을 보고 외웠다. 병원에 가면 등록실, 진찰실, 급진, 외과, 내과, 입원처… 백화에 가면 1층, 2층, 3층 하면서, 또 상점을 지나가면 상점 간판을 보고 외우고 또 식초공장상표, 북산음료공장상표 등을 뜯어서 다시 책에 붙여놓으면 백프로 기억되였다. 옷을 입으면 옷공장 번호, 밥을 할 때면 량식창고 번호, 가마를 씻을 때면 가마공장 번호… 이렇게 길가에서나 집에서나 리용할 수 있는 일체 공간과 장소를 빼놓지 않고 리용해 외웠다. 하여 울지도 웃지도 못할 에피소드도 많았다.

한번은 파마점에서 건발기를 쓴 채로 귀는 건발기 소리에 들리지 않지만 입은 밖에 있는 줄 모르고 중얼중얼 30분이나 소리 치며 번호를 외웠다. 건발기를 벗으니 기다리던 손님들이 물어왔다. “제 교환수요?” “우, 어케 아십니까?” “이자 우렁차게 번호를 외우더구만…”

에피소드도 많았고 힘들 때도 정말 많았다.

2001년 통신사업이 발전됨에 따라 전화료금 체불 현상도 엄중하게 존재하여 우리 직장에서는 체불금을 받아들이도록 직원들에게 임무를 주었다.

무선전화는 이동성이 강한 데다 일단 꺼버리면 찾기 힘든 것이다. 이 임무는 근무시간외에 해야 했다. 나는 우선 컴퓨터를 통하여 사용호의 련계전화, 주소 등을 등록한 후 전화련계가 잘 안되는 사용호에 대해서는 주소에 따라 집을 찾아갔고 혹시 이주한 집이면 가두 치안주임을 찾아다니며 시내로부터 교외 등 곳들을 샅샅이 훑으면서 어둡고 위험한 층계를 오르내리며 체불된 료금을 받아들였다.

그중에서도 1,078원을 체불한 한 사용호만은 도무지 찾을 길 없어 컴퓨터로 종적을 따라 추격하듯이 그가 이전에 전화련락이 있었던 북경, 항주, 상해 등지를 꼬리를 물며 추적하여서야 끝내 사천성의 어느 한 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자기는 전화기를 분실했기에 자기와 상관이 없다며 오리발을 내밀었다. 나는 법률적 책임에 대한 도리와 상식을 곁들면서 끈질기게 달라붙어 설복했다. 결국 그 사용호는 나의 사업심에 탄복하면서 ‘정탐’이란 별명까지 달아주면서 체불했던 금액을 직접 연길에 와서 내 손에 쥐여주었다.

고생한 뒤에 빛을 보는 이러한 즐거움이 있었기에 아마 나는 힘든 줄 몰랐는가 본다.

또 한번은 2002년의 여름이였다. 때는 돌도 탄다는 삼복철, 길가의 가로수도 축 늘어지고 포장도로의 검은 골타르도 녹아서 신바닥에 붙어날 지경이였다. 내가 맡은 50호 체불호 가운데는 620원을 물지 않은 사용호가 있었는데 노트북을 신고스레 두드려서야 발전에 세집을 맡고 있다는 정보를 알아냈다. 3일 동안 련속 찾아갔지만 만날 수 없어 자전거를 타고 오불꼬불한 골목을 누비며 울퉁불퉁한 길을 땀벌창이 되여 달려서야 그의 부친이 일하고 있는 모 병원 쓰레기를 태우는 곳으로 찾아갔다. 갈증이 나고 무더위로 녹초가 된 나는 그 곳 담장안에 어지러이 널려있는 쓰레기 환경으로 더욱더 구역질이 났다. 깨진 약병, 썩은 이불, 피고름이 묻은 붕대에서 쉬파리들이 윙윙 기승을 부리고 쥐가 살판치고 악취가 코를 찔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내가 찾는 사람은 이미 퇴근한 후였다. 나는 너무 힘들어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국가의 돈을 꼭 받아들여야 한다는 일념으로 사흘을 다녀서야 끝내 그를 만났는데 생각 밖으로 자기 아들에게는 시티폰이 없다고 딱 잡아떼는 것이였다. 나는 컴퓨터의 기록 대로 그의 아들의 출생년월일을 대조하면서 근거를 잡았다. 후에 알고 보니 그의 아들이 자기 신분증으로 남에게 시티폰을 사주었던 것이였다. 이렇게 실마리를 풀어나가면서 사용호를 찾아 체불금도 받아내고 또 사용호 이름도 고치도록 설복하였다.

나는 이렇게 몸과 마음의 고달픔을 이겨내면서 이동성이 강한 시티폰 체불금 8,900여원을 받아내여 기업에 적은 힘이라도 이바지하였다.

노력과 헌신은 거짓을 몰랐다. 나는 일터에서 여러가지 선진의 영예도 많이 안았다. 더우기 2003년에는 길림성통신회사 봉사모범의 영예를 안고 북경 인민대회당에서 국가연회에 참가하는 행운도 지녔었다.

길림신문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외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어디에 있든지 생활상황이 어떠한지를 막론하고 설을 쇨 때에는 고향에 돌아와 가족들과 한자리에 모이게 된다. 음력설기간 기자는 외지에서 사업하고 학습하는 안도현의 4명 귀향인원을 만나 이들이 고향에 대한 기대와 정감을 느껴보았다.   시민 마우붕은 지난해 대학을 졸업한 후...
  • 2018-02-27
  • [백성이야기71]수집인생의 “화분”으로 빚어내는 “황금꿀” 연변장백산우취협회 리사 김영일선생의 수집인생 이야기 들어본다 모아왔던 수집품들을 작품으로 승화시킬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김영일선생 “언제든지 시간 나면 놀러오슈…” 매주 주말이면 장이 서는 연길의 한 골동품...
  • 2018-02-26
  •       음력설을 맞아 위챗 채팅그룹마다 따뜻한 새해덕담과 명절인사로 가득찼다. 이 가운데 16일 안산시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는 자체 채팅그룹에서 ‘온정’을 주제로한 사진교류활동을 벌렸다. 회원들이 채팅그룹에 적극 공유한 가족사진, 설날밥상사진을 투표에 따라 1, 2, 3등을 ...
  • 2018-02-24
  • 북경에서 대학을 마치고 상해에 있는 일본회사에서 8년간 일하다가 작은 집도 사고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했다. 그런데 그런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니 생활에 대한 격정과 자극이 없었고 더 발전이 없을것 같은 따분한 현재가 권태로워졌다. 그래서 현실을 타개하는 길을 선택한것이 바로 일본류학이였다.   일본 도쿄...
  • 2018-02-23
  • 사랑하는 딸과 함께 한 윤화씨 중국에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고향 은행에서 여유롭게 일하던 나한테 일본류학을 소개해준 것은 같은 은행을 퇴직하고 일본류학을 떠난 후배였다. 그 당시에는 류학신청에서도 떨어지는 경우가 많은지라 나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부모와 회사를 속이고 일본류학 신청을 시작했다.그런데 예산...
  • 2018-02-22
  •      ‘미(美)+청(青)’ 사진관 4년만에 9개 가맹점 거느려   한번도 만난적이 없는 당신에게 다가서는 김개강 사장   (흑룡강신문=하얼빈)정명자 기자=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촬영했던 90년대, 스튜디오이자 사진 현상소(照片冲洗店)였던 사진관은 어디서든 쉽게 볼수 있었다.   하지...
  • 2018-02-12
  • 일본에 온 지 어느덧 17년, 내 인생의 거의 절반, 그것도 제일 찬란한 20대와 30대를 일본에서 지내왔다. 돌이켜보면 힘든 적도 있었고 슬픈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좋았던 거같다. 누구나 다 있는 20대와 30대를 많은 이야기로 수놓았으니 지나온 날들도 행복했고 현재도 행복하고 앞으로도 행복할 것이다.   연변대학...
  • 2018-02-09
  • 내가 일본에 와서부터 자주 듣는 말이 있다.    “넌 일본에 살아서 참 좋겠다.”  일본에 살면서 얼마나 많이 외로운데, 서러울때는 또 얼마나 많았는데…그러나 끝내는 무거운 미소로 묵인하고 만다.  “그래, 나 너무 좋아. 찢어지게 가난하던 촌년이 일본에 와서 출세했으니...
  • 2018-02-05
  • 남영권씨 가족 “세월이 류수”라는 말이 지금은 리해가 간다. 일본에 온지 벌써 20년이 되였다. 일본의 버블경제가 무너지고 이른바 잃어버린 20년 바로 그 시기를 나는 일본땅에서 보냈다. 우연한 기회에 친구의 덕분에 사이타마켄(埼玉県)에 있는 일본어학교의 입학통지서를 받게 된 나는 부모님이 챙겨준 일...
  • 2018-02-05
  •     (흑룡강신문=하얼빈)1932년 4월 조상봉씨의 셋째 아들로 태여난 나는 다섯살때 어머니를 잃고 12살때 기둥같이 믿던 아버지마저 급성장염으로 돌아가셨다. 동년시절 한창 공부할 나이에 지주의 머슴질도 해보고 학도공으로 힘겨운 나날을 보내던 나는 조직의 배양으로 1952년 10월에 사업에 참가하고 입당을 하...
  • 2018-02-05
  • 정성을 몰부어  꽃떡을 빚고 있는 김몽 지난 한해가 막 저물어가고 있는 그때 남방의 대도시 광주에서 한 40대 조선족녀성이 연길 “궁중떡향기” 공방으로 앙금플라워 꽃떡공예를 배우러 찾아왔다. 이름은 “김몽“이라 했고 이미 광주에서 17년간“고향떡집”을 경영해왔다고 했다. ...
  • 2018-02-01
  • 편집자의 말: “일본생활수기”시리즈를 내면서 1983년 당시 일본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내각이 “류학생 10만명 계획”을 세운 후 세계로 향한 일본 고등교육의 대문이 열렸다. 80년대 국비류학, 사비류학으로 시작된 조선족의 일본에로의 이동은 낯설고 물선 이국땅에서 정착의 시대를 넘어...
  • 2018-02-01
  • "기층 당지부서기로서 군중과 한마음이 되여 백성들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련다." 이는 촌에 내려가 제1서기 직무를 맡고 있는 장백조선족자치현심계국 당지부서기 박선렬의 심중 고백이다. 금년에 39살에 나는 박선렬은 지난해 5월, 현 조직부문의 배치에 따라 십사도구진 망천아신촌에 내려가 촌당지부 제1서기 직무...
  • 2018-01-22
  •         (흑룡강신문=하얼빈)렴청화 연변특파원= 룡정시 로투구진 동불에 들어서는 길목은 버드나무로 즐비하다. 마을 입구에서 우정국까지 나무가 500-600미터쯤 줄지어선 모습은 동불사회구역로인협회 회원들이 '마을가꾸기'의 일환으로 일궈낸 풍경이다.   그들이 마을을 ...
  • 2018-01-17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71) ◇한해동(장춘)   필자 한해동  벌써 80고개를 훨씬 넘은 나는 늘 지난날의 일들을 회억하게 된다. 후회되는 일도 많고 자랑스런 일도 적지 않다. 인생은 마치 흘러가는 물과도 같아 장애물에 부딪쳐도 멈추지 않고 에돌아가노라면 언젠가는 끝내 머나먼 큰 바다...
  • 2018-01-17
  • 섬나라 사람들인 일본인들은 나무 한그루, 벌레 한마리에도 무한한 애정을 갖고 있다.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힐링의 명소로 찾는 일본정원, 늪을 중심으로 정원석과 자연의 나무, 풀로 꾸며진 그 곳에 가면 ‘인간을 자연의 일부'라고 여기는 일본인들의 감성을 짙게 느끼게 된다. 자연을 가까이에 하려는 일본...
  • 2018-01-17
  • 한국에서 딸에게 편지를 쓰는 장면 안녕? 사랑하는 내 딸 지월아, 엄마는 우리 딸이 너무나 보고 싶구나! 너의 편지를 보고 우리 딸이 씩씩하고 건강하게 커줘서 엄마는 정말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구나! 그리고 공부도 잘하고 여러 방면에서 모두 우수해서 엄마는 너무나 기쁘고 우리 딸이 자랑스럽다. 우리 딸이 가장 필...
  • 2018-01-10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70) ◇서문만옥(길림) 문우들과 함께 있는 필자(왼쪽 첫 사람) 올해 내 나이 75세,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며 아버지(서문화봉씨)의 령전 앞에서 “아버지의 꿈을 제가 이루었어요!”라고 떳떳이 말할 수 있어 가슴이 뿌듯해진다. 나는 아버지의 꿈대로 한평생 우리말...
  • 2018-01-09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69) ◇리송규(훈춘) 학생시절 대련 바다가에서의 필자 소중한 추억은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 법이라 할가? 그것도 내가 가장 즐기는 바다에서 얻은 것이기에 더욱 잊을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스물 몇살 젊은 시절 장춘에서 대학교에 다닐 때 대련에 간 적이 있었다. 대...
  • 2018-01-09
‹처음  이전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