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56)
◇허인범(룡정)
안해와 함께 고향산 마루에서 평강벌을 내려다보며 /사진 신승우 찍음
9월 3일, 자치주 창립 65돐 경축의 기쁨을 안고 안해와 함께 고향산 마루에 올라서니 벼파도 설레이는 아득한 황금벌이 한눈에 안겨온다. 여기가 바로 습근평 총서기께서 당년의 ‘지서’처럼 논밭에 들어서서 벼자람새를 유심히 살피시며 백성을 관심하시던 내 고향 평강벌이다.
무공해 록색 유기입쌀 생산에 땀동이를 쏟았던 내가 나서 자란 평강벌 광동촌이 지척에 바라보이는 고향산 마루에 올라서니 무한한 감회와 끝없는 회포가 무던히도 북받친다.
1966년 여름, 고중졸업을 앞두고 나는 학급담임선생님께 지망을 ‘길림대학’이라고 써바쳤다.
“고작 썼다는 게 ‘길림대학’이냐? ‘북경대학’이라고 써!”
이렇게 명령식으로 나의 지망을 북경대학으로 결정해주시던 그 날 저녁, 뜻밖에 담임선생님께서 20리 길도 마다하지 않고 광동촌에 있는 우리 집을 문득 방문하셨다. 그는 나의 부모님께 “댁의 학생이 북경대학에 못 붙으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고 장담하시면서 “네가 북경대학에 못 붙으면 룡정고중에서 중점대학에 갈 학생이 없다.”고까지 하셨다.
괜히 지망을 너무 높이 썼다가 락방될가봐 며칠 고민하던 끝에 결정한 ‘길림대학’이 선생님의 기대보다 퍽 낮았다는 것을 그의 진정에서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했지만 문화대혁명은 담임선생님이 결정해주신 북경대학 꿈을 짓뭉개버렸다. 대학진학시험은 쳐보지도 못한 채 옹근 2년간 학교에서 문화대혁명만 하다가 농촌으로 내모는 회오리바람에 휘말려 나의 대학꿈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어쩌면 문화대혁명은 담임선생님께서 나의 학습성적을 너무 높이 봐주시며 주관적으로 내리신 과분한 추측을 무산시키기 위한 것이였는지도 모른다.
1968년 여름, 귀향지식청년으로 마을에 돌아와 농사일에 착수할 무렵 장기환자로 시름시름 앓던 50대 초반의 아버지는 나에게 산더미 같은 빚가리를 남겨놓았고 나중에는 불치의 병으로 돌아가셨다.
어깨를 지지누르는 빚가리를 허물어버리고저 귀향하자 나는 여름이면 수리공사장에 가서 공수를 많이 올릴 수 있는 돌 쌓기 작업을 했고 겨울이면 목재판에 가서 수입을 빨리 올릴 수 있는 집재를 하여 그 당시 나에겐 천문수자나 다름없던 빚더미를 3년 만에 거뿐하게 허물어버렸다. 이로써 사원들로부터 조련찮은 청년으로 정평이 나면서 어줍잖게나마 시골학교에서 민영교원생활을 경험하게 되였다.
1970년 내가 첫 교편을 잡은 학교는 평강벌 맨 동쪽 끝자락에 자리한 치벽진 시골의 농촌학교였다. 이곳은 바로 룡정과 화룡 경계인 비암산 높은 봉을 유유히 감돌아흐르는 해란강과 팔포구 깊은 골을 성급하게 흐르는 골물이 합류하는 곳이였다.
교편을 잡으면서 닭사양을 할 수 있는 산골의 유리한 조건을 리용하여 나는 가정살림에 보탬을 하려고 닭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닭무리가 밤이면 삵 따위 짐승의 피해를 자주 받아 마리수가 적어지는 바람에 열통이 번져졌다. 스무살 안팎에 20리 통학길로 단련된 신체는 체력이 왕성했고 공사장, 목재판에서 재충전된 실팍한 몸에서는 배인 힘이 솟구치던 시절이라 내게는 무서운 게 별로 없었다.
밤이 되자 나는 낮에 미리 준비해두었던 몽둥이를 들고 가만히 동정을 살폈다. 드디여 기척이 났다. 나는 닭우리에 와락 뛰여들어 몽둥이를 마구 휘둘렀다. 불의의 습격에 도망치려고 갈팡질팡 길길이 뛰던 ‘삵’은 정통을 면바로 얻어맞고 뻐드러졌다. 분이 치민 나는 그래도 성차지 않아 그 놈의 대갈통을 묵사발이 되도록 짓깨놓고 나서야 눈여겨보았다.
그런데 이게 뭐냐! 아니, 글쎄, 가죽에 동전 만한 동그란 점이 박혀있는 씨암캐 같은 표범일 줄이야! 지금 같으면 국가1급 보호동물을 잡았다고 법적 제재를 받을지 모르겠지만 육류가 엄청 부족했던 그 시기 내 몽둥이에 맞아죽은 표범은 동네 청년들의 ‘썰썰이’를 말려주기에 충분했다.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되자 교편을 잡고 있던 나는 1978년 대학입시에 무난히 통과되였다. 두 어린애의 아버지 대학생이 된 형편에서도 성취감에 기분이 붕 떴지만 농민인 안해 혼자 몸으로 생산대의 보잘 것 없는 수입으로 두 자식을 키우며 늙으신 어머님까지 모시는 것이 마음에 걸렸고 대학공부를 하는 4년간 내내 안해에게 미안한 감을 금치 못했다. 그 때 그 미열에 주눅이 들어 나는 지금 안해가 뭐라고 해도 찍소리 못하고 웃으면서 져준다.
고중시절 담임선생님과 함께(앞 두번째줄 오른쪽 두번째 사람이 필자)
하물며 내가 평강벌의 농업기술보급일군으로 뜨기 시작할 그 무렵, 농업기술보급의 길에서 뇌수종으로 정신을 잃고 까무라쳐 보름어간에 뇌수술을 두번이나 할 만큼 사선을 오락가락했던 내 머리맡에 수의까지 갖춰져있는 칠성판에서 지극한 정성으로 돌우에 꽃을 피워 끝내는 나에게 귀중한 두번째 생명을 안겨준 안해임에랴!
농업기술보급에 뜻을 두었던 나는 1982년 농업대학 졸업 후 고향에 돌아와 농업기술보급사업을 하였다. 단위당 벼수확고를 배 이상 올려 평강벌의 재록신으로 불리우며 당지 농민들의 수입 증가에 내 젊음을 불살랐다. 젊음의 패기로 선례가 없는 무공해A급 록색 유기입쌀생산에 도전장을 대담히 내던지고 농업기술보급의 상승일로를 걷기도 하였다.
따라서 화룡시동성농업기술보급소 소장으로의 승진과 더불어 각급 영예증서를 수두룩이 받아안았고 나중엔 농업부로부터 ‘벼 다수확 재배기술 완성자’라는 국가급의 묵직한 상까지 받았다. 이렇게 뉴스인물로 되여 성, 주, 시 신문방송매체에 수차 보도되면서 연변주정협위원으로도 활약하였다. 그러자 년로하신 어머님께서 못내 대견스러워하신 것은 물론 사업을 한답시고 집안 일에 뒤전인 나를 잘못 만나 손이 발이 되도록 군소리 없이 집안팎 일을 전담해온 안해마저도 ‘동무 그 때 북경대학에 가지 않길 참 잘했다’고 하였다. 사실은 가지 않은 게 아니라 못 갔던 것이지만 말이다.
항목의 탓인지는 몰라도 나는 농업기술보급일군이 부자가 됐다는 소문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한낱 기층의 가난한 농업기술보급일군에 불과한 로임족이다. 한국에 간 아들딸이 룡정시내에 마련한 집에서 살고 있는 나의 재산이라면 지금 평강벌에 있는 50평방메터의 흙집이 전부다. 비록 돈은 벌지 못했지만 내가 흘린 피와 땀이 국가주석이 다녀가신 평강벌을 걸구고 농민들이 수입을 올리는 데 다문 얼마라도 도움이 됐다면 나는 그것 만으로도 긍지감에 가슴이 뿌듯하다.
나이가 들어 퇴직은 했어도 정신상태가 날따라 맑아지는 근년이다. 하여 젊음이 불타던 아름다운 추억과 더불어 무공해A급 록색 유기입쌀 생산 성공일로의 연장선에 농민수입 증대의 불씨를 되살려본다. ‘입쌀부가가치를 높여야 농민들이 수입을 올릴 수 있다’고 하신 총서기의 높으신 뜻을 명기하고 만백성의 건강장수에 리로울 셀렌입쌀생산 꿈에 발동을 걸어 무지개 같이 눈부신 두번째 인생을 맞이할 꿈에 부풀어있다.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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