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고향산 마루에 올라서니
조글로미디어(ZOGLO) 2017년11월27일 15시43분    조회:1388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56)

◇허인범(룡정)

안해와 함께 고향산 마루에서 평강벌을 내려다보며       /사진 신승우 찍음

9월 3일, 자치주 창립 65돐 경축의 기쁨을 안고 안해와 함께 고향산 마루에 올라서니 벼파도 설레이는 아득한 황금벌이 한눈에 안겨온다. 여기가 바로 습근평 총서기께서 당년의 ‘지서’처럼 논밭에 들어서서 벼자람새를 유심히 살피시며 백성을 관심하시던 내 고향 평강벌이다.

무공해 록색 유기입쌀 생산에 땀동이를 쏟았던 내가 나서 자란 평강벌 광동촌이 지척에 바라보이는 고향산 마루에 올라서니 무한한 감회와 끝없는 회포가 무던히도 북받친다.

1966년 여름, 고중졸업을 앞두고 나는 학급담임선생님께 지망을 ‘길림대학’이라고 써바쳤다.

“고작 썼다는 게 ‘길림대학’이냐? ‘북경대학’이라고 써!”

이렇게 명령식으로 나의 지망을 북경대학으로 결정해주시던 그 날 저녁, 뜻밖에 담임선생님께서 20리 길도 마다하지 않고 광동촌에 있는 우리 집을 문득 방문하셨다. 그는 나의 부모님께 “댁의 학생이 북경대학에 못 붙으면 제가 책임지겠습니다.”고 장담하시면서 “네가 북경대학에 못 붙으면 룡정고중에서 중점대학에 갈 학생이 없다.”고까지 하셨다.

괜히 지망을 너무 높이 썼다가 락방될가봐 며칠 고민하던 끝에 결정한 ‘길림대학’이 선생님의 기대보다 퍽 낮았다는 것을 그의 진정에서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했지만 문화대혁명은 담임선생님이 결정해주신 북경대학 꿈을 짓뭉개버렸다. 대학진학시험은 쳐보지도 못한 채 옹근 2년간 학교에서 문화대혁명만 하다가 농촌으로 내모는 회오리바람에 휘말려 나의 대학꿈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어쩌면 문화대혁명은 담임선생님께서 나의 학습성적을 너무 높이 봐주시며 주관적으로 내리신 과분한 추측을 무산시키기 위한 것이였는지도 모른다.

1968년 여름, 귀향지식청년으로 마을에 돌아와 농사일에 착수할 무렵 장기환자로 시름시름 앓던 50대 초반의 아버지는 나에게 산더미 같은 빚가리를 남겨놓았고 나중에는 불치의 병으로 돌아가셨다.

어깨를 지지누르는 빚가리를 허물어버리고저 귀향하자 나는 여름이면 수리공사장에 가서 공수를 많이 올릴 수 있는 돌 쌓기 작업을 했고 겨울이면 목재판에 가서 수입을 빨리 올릴 수 있는 집재를 하여 그 당시 나에겐 천문수자나 다름없던 빚더미를 3년 만에 거뿐하게 허물어버렸다. 이로써 사원들로부터 조련찮은 청년으로 정평이 나면서 어줍잖게나마 시골학교에서 민영교원생활을 경험하게 되였다.

1970년 내가 첫 교편을 잡은 학교는 평강벌 맨 동쪽 끝자락에 자리한 치벽진 시골의 농촌학교였다. 이곳은 바로 룡정과 화룡 경계인 비암산 높은 봉을 유유히 감돌아흐르는 해란강과 팔포구 깊은 골을 성급하게 흐르는 골물이 합류하는 곳이였다.

교편을 잡으면서 닭사양을 할 수 있는 산골의 유리한 조건을 리용하여 나는 가정살림에 보탬을 하려고 닭을 키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닭무리가 밤이면 삵 따위 짐승의 피해를 자주 받아 마리수가 적어지는 바람에 열통이 번져졌다. 스무살 안팎에 20리 통학길로 단련된 신체는 체력이 왕성했고 공사장, 목재판에서 재충전된 실팍한 몸에서는 배인 힘이 솟구치던 시절이라 내게는 무서운 게 별로 없었다.

밤이 되자 나는 낮에 미리 준비해두었던 몽둥이를 들고 가만히 동정을 살폈다. 드디여 기척이 났다. 나는 닭우리에 와락 뛰여들어 몽둥이를 마구 휘둘렀다. 불의의 습격에 도망치려고 갈팡질팡 길길이 뛰던 ‘삵’은 정통을 면바로 얻어맞고 뻐드러졌다. 분이 치민 나는 그래도 성차지 않아 그 놈의 대갈통을 묵사발이 되도록 짓깨놓고 나서야 눈여겨보았다.

그런데 이게 뭐냐! 아니, 글쎄, 가죽에 동전 만한 동그란 점이 박혀있는 씨암캐 같은 표범일 줄이야! 지금 같으면 국가1급 보호동물을 잡았다고 법적 제재를 받을지 모르겠지만 육류가 엄청 부족했던 그 시기 내 몽둥이에 맞아죽은 표범은 동네 청년들의 ‘썰썰이’를 말려주기에 충분했다.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되자 교편을 잡고 있던 나는 1978년 대학입시에 무난히 통과되였다. 두 어린애의 아버지 대학생이 된 형편에서도 성취감에 기분이 붕 떴지만 농민인 안해 혼자 몸으로 생산대의 보잘 것 없는 수입으로 두 자식을 키우며 늙으신 어머님까지 모시는 것이 마음에 걸렸고 대학공부를 하는 4년간 내내 안해에게 미안한 감을 금치 못했다. 그 때 그 미열에 주눅이 들어 나는 지금 안해가 뭐라고 해도 찍소리 못하고 웃으면서 져준다.

고중시절 담임선생님과 함께(앞 두번째줄 오른쪽 두번째 사람이 필자)

하물며 내가 평강벌의 농업기술보급일군으로 뜨기 시작할 그 무렵, 농업기술보급의 길에서 뇌수종으로 정신을 잃고 까무라쳐 보름어간에 뇌수술을 두번이나 할 만큼 사선을 오락가락했던 내 머리맡에 수의까지 갖춰져있는 칠성판에서 지극한 정성으로 돌우에 꽃을 피워 끝내는 나에게 귀중한 두번째 생명을 안겨준 안해임에랴!

농업기술보급에 뜻을 두었던 나는 1982년 농업대학 졸업 후 고향에 돌아와 농업기술보급사업을 하였다. 단위당 벼수확고를 배 이상 올려 평강벌의 재록신으로 불리우며 당지 농민들의 수입 증가에 내 젊음을 불살랐다. 젊음의 패기로 선례가 없는 무공해A급 록색 유기입쌀생산에 도전장을 대담히 내던지고 농업기술보급의 상승일로를 걷기도 하였다.

따라서 화룡시동성농업기술보급소 소장으로의 승진과 더불어 각급 영예증서를 수두룩이 받아안았고 나중엔 농업부로부터 ‘벼 다수확 재배기술 완성자’라는 국가급의 묵직한 상까지 받았다. 이렇게 뉴스인물로 되여 성, 주, 시 신문방송매체에 수차 보도되면서 연변주정협위원으로도 활약하였다. 그러자 년로하신 어머님께서 못내 대견스러워하신 것은 물론 사업을 한답시고 집안 일에 뒤전인 나를 잘못 만나 손이 발이 되도록 군소리 없이 집안팎 일을 전담해온 안해마저도 ‘동무 그 때 북경대학에 가지 않길 참 잘했다’고 하였다. 사실은 가지 않은 게 아니라 못 갔던 것이지만 말이다.

항목의 탓인지는 몰라도 나는 농업기술보급일군이 부자가 됐다는 소문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한낱 기층의 가난한 농업기술보급일군에 불과한 로임족이다. 한국에 간 아들딸이 룡정시내에 마련한 집에서 살고 있는 나의 재산이라면 지금 평강벌에 있는 50평방메터의 흙집이 전부다. 비록 돈은 벌지 못했지만 내가 흘린 피와 땀이 국가주석이 다녀가신 평강벌을 걸구고 농민들이 수입을 올리는 데 다문 얼마라도 도움이 됐다면 나는 그것 만으로도 긍지감에 가슴이 뿌듯하다.

나이가 들어 퇴직은 했어도 정신상태가 날따라 맑아지는 근년이다. 하여 젊음이 불타던 아름다운 추억과 더불어 무공해A급 록색 유기입쌀 생산 성공일로의 연장선에 농민수입 증대의 불씨를 되살려본다. ‘입쌀부가가치를 높여야 농민들이 수입을 올릴 수 있다’고 하신 총서기의 높으신 뜻을 명기하고 만백성의 건강장수에 리로울 셀렌입쌀생산 꿈에 발동을 걸어 무지개 같이 눈부신 두번째 인생을 맞이할 꿈에 부풀어있다.

길림신문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백성이야기65]  대련리공대학 부속고급중학교 김종식 특급교사의 성장이야기     수학교육연구에서 최고상인 ‘소보청수학교육상”을 받아안은 대련리공대학 부속중학교 김종식   락제생으로부터 수학교육연구분야에서 최고상인 ‘소보청(苏步青)수학교육상'을 받아안은 김종식(5...
  • 2017-12-01
  • 한 10년쯤전에는 고향의 지인들한테서 이런 이야기를 듣군 했었다. “일본에서는 밥 값을 제각기 낸다며? 사람들이 왜 그렇게 인정머리 없어? 니들은 그러지 말라…” 물론, 우리도 아주 오래동안은 그것을 접수하지 못하고 고향친구들 모임에서 와리깡(割勘),즉 터치페이라는 말을 꺼내지 못했었다. 무사...
  • 2017-11-27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57) ◇김홍련(장춘) 장가계에서 려행 친구들 함께(앞사람이 필자 김홍련) 2011년 10월 25일, 열네살 천진란만하던 소녀시절에 만난 우리 동창생들이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배낭을 메고 연길에서 떠나 천애지각 해남도까지 바라고 려행을 시작했다. 퇴직비로 생활하는 우...
  • 2017-11-27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56) ◇허인범(룡정) 안해와 함께 고향산 마루에서 평강벌을 내려다보며       /사진 신승우 찍음 9월 3일, 자치주 창립 65돐 경축의 기쁨을 안고 안해와 함께 고향산 마루에 올라서니 벼파도 설레이는 아득한 황금벌이 한눈에 안겨온다. 여기가...
  • 2017-11-27
  • 일본 지진에서 맺어진 고마운 인연 2011년 3월 11일 오후에 발생한 일본 동북지방의 태평양 해역 지진은 그 후에 일어난 쓰나미, 그리고 빈번한 여진과 더불어 사람들의 생활을 구축해왔던 기반시설에 큰 타격을 주었다. 우선 교통기관이 중단되였고 일부 지방의 통신이 차단되였으며 정전으로 모든 시설이 혼란상태에 빠졌...
  • 2017-11-24
  • 2011년 3월 11일 금요일, 기억 속에서 도무지 지울 수 없는 날이다. 그날 나는 지인들과 함께 레스토랑에서 조금 늦어진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다. 주위는 식사하는 손님들과 커피타임중의 손님들로 법석하였다. 오후 2시 40분 쯤 (후에 14시 46분으로 밝혀 졌음)되였을 때, 레스토랑 건물이 상하로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
  • 2017-11-24
  •   화기애애한 분위기속의 '김치' 수업. 19일 아침, 스테인리스(不锈钢) 소재로 꾸며진 은빛 주방에 오미자, 둥굴레 등 약재와 고운 빛갈을 자랑하는 매실 효소, 사과 효소 등이 담겨진 유리병이 나란히 줄지어 서있었다. 이곳은 바로 연길시 북산가두 단산사회구역에 위치한 사랑난로 약선료리공방. 료리와 사...
  • 2017-11-23
  •     ▲ 사진, 동포언론사 및 동포단체 대표들이 17일 오후 포항시청을 직접 방문해 ‘포항지진 피해 사랑나눔 성금 접수처’에 성금을 전달하고 있다. 왼쪽부터 재한동포문인협회 류재순 회장, 한중포커스신문 문현택 대표, 중국동포타운신문 김정룡 편집장, 포항시청 성금접수처 관계자, 중국동포한마음...
  • 2017-11-23
  •    (흑룡강신문=하얼빈)심양은 동북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우리 나라 중심도시중 하나이다. 이 고유한 큰 도회지의 한 모퉁이에 조선족이 한데 모여사는 서탑거리가 있다.   나는 늙으막에 다병하고 고적하여 정든 고향을 떠나 자식 따라 심양에 와서 만년을 보내고 있다. 딸집 이웃에 집을 잡다보니 동릉의...
  • 2017-11-21
  • 상가들이 빼곡이 들어선 일본 도쿄의 한 상업거리(자료사진) 일본에서의 서비스업은 “손님은 왕이다”를 넘어 “손님은 신(神)이다” 를 기본원칙으로 한다. 매일 오픈전의 미팅에서 “어서 오세요”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잠간만 기다려주세요&...
  • 2017-11-17
  • 이 글은 현재 한국 고려대학교에서 비교문학과 비교문화 박사과정을 공부하고있는 한 조선족녀성(필명: 小葵-작은 해바라기)이 자신의 위챗계정에 중문으로 올린 글이다. 우리는 그녀의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삶의 한단락 경력을 빌어 우리들 인생의 깨우침을 공유하고저 이 글을 편역해 독자들에게 소...
  • 2017-11-14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53) ◇최선자(연길) 1987년 7월 22일 입당선서를 마치고 입당소개인 두분과 함께 남긴 기념사진. 왼쪽으로부터 당지부서기 경신성(한족), 필자 최선자, 교장 백경인(조선족). 1983년 3월의 어느 날, 나는 학교 령도로부터 절육수술을 받으라는 통지를 받고 아연해졌다. &ldquo...
  • 2017-11-14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52) ◇박명규(연길) 할아버지를 모시던 세월의 필자 박명규와 태봉선 부부의 모습 “할아버진 내가 모셔야겠소.” 이것은 44년 전 내가 북경병원으로 확진하러 떠나면서 가족들에게 한 말이였다. 어쩌면 엉클어진, 엉망이 된 가문의 뿌리를 정리하고 싶었던 아름다운...
  • 2017-11-14
  • 주로 중국음식과 한국음식 정도 밖에 몰랐던 나는 일본인들의 폭 넓은 음식 취향에 놀랐다. 호이꼬로(回鍋肉), 칭죠로스(青椒肉丝), 마보도후(麻婆豆腐) 등 중화료리의 료리명을 어린애들까지 술술 말하는 정도였고 처음 만나는 경우 교자(餃子)가 맛있다는 말로 수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아마 중국음식을 싫어하는 일본인...
  • 2017-11-13
  • 소학교졸업식에서 마츠시마선생님과 함께 아들애가 태여나서 여덟달만에 탁아소 생활을 시작했던 연유로 일본에 오자마자 집단생활에 제법 적응한 아들애 덕분에 엄마인 나의 일본생활은 비교적 순조로웠다. 오늘날 어엿한 직장인으로 성장한 아들애가 부모의 노력외에도 일본에서 생활하면서 고마운 일본인들과의 소중한 ...
  • 2017-11-13
  • 지도에 우리 민족 성씨로 명명된 행정촌이 있다는 사실에 언녕부터 호기심이 부쩍 동했는데 필자는 얼마전  박씨 두분 - 룡정시로혁명근거지건설추진회 박호만회장, 룡정시 모 광고공사 박청수경리와 함께 말타고 꽃구경식으로나마 박씨 성으로 이름진 박씨 마을-료녕성본계만족자치현소시(小市)진의 박보(...
  • 2017-11-13
  • 1990년대에 일본에 류학온 중국류학생들이라면 한두번쯤은 겪었을 일이 있다. 국제교류협회에서 조직한 만찬회에서 만난, 매사에 적극적인 류학생과 친절한 일본인이 근 두시간 정도에 걸친 이야기 끝에 작별인사를 하면서 일본인이 말했다. “기회가 되면 우리 집에 꼭 놀러 오세요.” 너무 기뻤던 류학생...
  • 2017-11-07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51) ◇리정화(연길) 필자 리정화 아침에 일어나 창밖을 내다보니 흰보라 날리며 하늘에서 눈이 내린다. 눈부신 꽃세례 속에서 어린애들이 오구작작 웃고 떠들며 학교를 간다. 오리털 잠바에 털목도리, 털장갑, 따뜻한 신발… 추위를 막아주는 전신무장을 하고 아빠 엄마...
  • 2017-11-07
  •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50) ◇박철원(연길) 필자 박철원 부부 오늘도 당교에서 함께 ‘충전’하며 나란히 1973년 28살에 결혼한 나는 올해 73세로 45년 혼인생활 남들의 부러움 속에서 오누이를 출세시키며 ‘잉꼬’라 불릴 만치 탄탄한 혼인생활을 이어왔다. 우리가 변치 않는 ...
  • 2017-11-07
  • 일본의 여러 지역에 많이 분포되여있는 고우반 일본에 와 본 중국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해본 일이 있을 것이다.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중국인들이 일본에 오면 편리한 점이라 할가, 친절하게 느껴지는 점이 있다. 바로 우리가 한자대국에서 왔기때문이다. 거리에 나서면 한자로 된 간판들이 보여서 생소한 감이 어느 정도...
  • 2017-11-02
‹처음  이전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