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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학예대학 연구생 입학통지서를 받고 2000년 3월 30일에 상해 홍교공항에서 출발하여 도쿄 나리타공항에 내렸다.
미래에 대한 희망과 꿈, 앞으로 견뎌내고 이겨내야 할 고난에 대한 걱정과 결심을 지니고서 떠난 길이였다.
지금 생각하면 미지의 환경, 그것도 낯설은 일본이라는 외국땅에 녀자의 홀몸으로 떠난 용기와 힘에 나 스스로도 대견하기 그지없다.
가끔 일본사람들은 나에게 일본에 온 리유와 동기를 묻는다. 그러면 자기네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라며 중국녀성들은 강하다고 말한다.
학교 바로 곁에 있는 화장실과 욕실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타타미 요죠우한(畳四畳半) 작은 집에서 일본류학생활이 시작되였다.
처음 슈퍼에 가서 쌀을 사려고 보니 당시 중국쌀가격의 거의 10배 되는 가격에 깜짝 놀라 며칠동안은 갖고 간 미숫가루만 먹었다. 영양실조 탓인지 일본에 온 며칠후에 독감에 걸려서 학생시절 빼곤 없었던 고열과 몸살이 나서 꼼작 못하고 누워 있었다.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 외로움과 서러움으로 괴로웠고 마음은 불안으로 무겁기만 했다. 학교교정에 만발한 아름다운 사쿠라도 나에겐 아무런 흥미도, 기쁨도 가져다 주지 못했다.
중국에서 갖고 간 돈도 푹푹 줄어드니 일본에 와서 며칠이 안 지나 일을 찾기 시작했다. 일군모집이라고 붙여놓은 가게에 막무가내로 들어가서 면접 받았다. 처음으로 아르바이트일에 응모해서 시작한 일은 새로 오픈한 라면가게였다.
난생 처음으로 하는 육체로동이였지만 힘든 줄 모르고 점심부터 밤 12시까지 일했다. 힘보다는 의지로 했던 것 같다. 일이 끝나서 집에 오면 지쳐서 그냥 쓰러져 자기가 일쑤였다.
한번은 물을 끓이려고 가스곤로불을 켜놓고 잠들어 버렸는데 깨여 났을때는 주전자안에 물이 다 끓어 없어진 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재가 발생하지 않은 일이 신기하고 행운이였다.
지금도 그때일을 생각하면 오싹 소름이 끼친다. 연구생은 비정규적인 학생이기때문에 교통비 등 학생할인도 없고 장학금도 못 받는다.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정규적인 학생이 되는 대학원생이 되여야 한다. 그래서 아르바이트하면서 9월에 있는 대학원 시험준비를 했다. 류학생활에서 제일 힘들었던 시간이였다.
연구생자격으로 일본에 와서 반년이 지나가면 석사시험을 치느냐 아니면 힘든 류학생활을 그만두고 중국에 돌아가느냐 두갈래로 갈라진다.
거의 매일 붙어있다싶이 사이좋게 지내던 상해에서 온 녀자애는 진학을 포기하고 중국에 돌아가버렸다. 대학원 입학시험을 볼려고 결정한 나도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면 상해에 돌아가기로 하고 자기한테 단 한번이라는 기회를 주기로 결심하고 최선을 다해서 시험준비를 했다.
대학원생합격명단 발표란 앞에서 찍은 사진
그런데 행운스럽게 10월에 발표한 시험결과 합격란에 나의 이름이 있었다. 큰 안도의 숨이 나왔다.
대학원에 입학해서 학교에서 한명만 추천하는 재단 장학생 시험에도 도전했는데 운에 운이 연달아 필기시험과 면접시험을 거쳐서 뽑히게 되였다.
이것이 나의 일본류학생활에 큰 위안과 도움이 되였고 전환점이였다.
대학원생이 되면서 학교에서 조직한 류학생들을 위한 활동과 려행, 재단의 장학생들을 위한 일년에 두번의 일본 국내려행과 교류를 통해서 일본의 문화를 더 한층 깊이 료해하는 기회였으며 시야를 넓힐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2년간의 재단장학금과 먼저 일본에 온 대학시절의 후배 소개로 중국과 한국에서 온 학생들의 학교적응생활을 위한 일본어지도를 하면서 경제적인 근심걱정이 없이 석사과정도 무사히 마치고 졸업할수 있었다.
류학생들에 대한 일본의 교육제도에 감사하는 마음과 일본에서 류학생활을 하면서 받은 혜택과 은혜에 보답하려는 마음으로 중국과 일본의 경제문화교류와 사업에 작은 힘이나마 이바지할수있는 나 자신에 보람을 느끼며 오늘도 열심히 살고있다.
/재일 조선족류학생 김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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