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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온 지 어언 19년이 된다. 그동안의 일본에서의 생활을 돌이켜보면 내가 걸어온 길 자체가 바로 일본에서의 나의 성장과정이 아닐가 싶은 느낌이 든다. 물론 10명중 7명은 나와 같은 길을 걸어오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1999년 5월, 녀동생과 같이 바다를 건너 일본땅에 발을 내딛고 나서부터 지금까지의 일들... 집 구하기, 아르바이트 찾기, 진학, 학업견지, 취직, 사업실패, 결혼, 육아 등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는 한 장면 한 장면, 20대 꽃청춘 때 류학생으로 일본에 와서 40대 중년에 들어선 지금에는 지나간 모든 희로애락이 모두 소중한 재산으로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다.인생의 한개 전환점이 된 일본류학에서 또 하나의 전환점인 조선족잡지 《무지개》 잡지 운영과 사업실패가 여전히 나한테는 많은 추억을 남겨주고 거기에서 나 또한 성장한 것 같다.
2001년부터 2005년 사이 당시에 우리 조선족류학생들한테는 고독을 달래고 취학, 취직 등 여러 정보를 교류하는 재일조선족 최초의 커뮤니티사이트 ‘쉼터’가 있었다. 그리고 일년에 한번씩 조직하는 천지협회 운동회와 송년회가 있었다.
취직해서 2년이 되던 2005년 년말에 우연히 천지협회의 조선족송년회에서 당시 창간한 지 한달 밖에 되지 않았던 조선족잡지 "무지개"의 사장을 만나게 되였다.
어릴 때부터 좋아하던 책을 내 손으로 편집하고 싶어 택한 것이 보통전공보다 2배나 비싼 학비를 내는 미술학교의 그래픽디자인전공이였다.
무료잡지를 하고 있고 그것도 우리 조선족만의 유일만 잡지라고 듣는 순간부터 같이 일해보고 싶다고 회사 퇴근 후나 휴일에 나가서 도와줄 수 있다고 적극 어필했다. 마침 디자이너가 없던 터라 사장은 기뻐하며 환영했고 그렇게 나와 "무지개"의 3년의 인연이 이어졌다.
재일 조선족들을 위한 조선족잡지"무지개"
일주일에 시간 나는 대로 몇번 나가다 결국 사장의 요청에 의해 3년 다니던 일본회사에 사표를 내고 잡지사에 취직했다. 일본소식들을 간단히 적기도 하고 중국과 해외 조선족들 기사를 편집하고 디자인을 하며 내 손 거쳐 마감한 데이터가 인쇄공장에서 이쁘게 인쇄돼여 나올때마다 희열을 느끼군 했다.
회사에 전직해 두달이 될 때 사장의 개인사정으로 잡지사를 닫는가, 내가 계속 이어서 운영하는가 하는 기로에 서게 되였다. 결국은 책에 대한, 우리 민족 잡지에 대한 나의 사랑이 이기고 내가 "무지개" 잡지를 짊어지고 가기로 결정됐다.
오직 열정과 땀으로만 유지된 "무지개"였다. 말 그대로 1인기업으로 혼자서 편집하고 혼자서 광고 따오고 혼자서 광고 디자인하고 혼자서 기사를 쓰는 매일이 이어지고 매달 25일 마감날 쯤에는 원고와 광고가 완성되지 못해 사무실에서 자고 먹고 하는 날도 수두룩했다.
매달 드는 어마어마한 인쇄비는 적은 광고비로 메우긴 터무니없이 부족했고 내 자신은 월급을 가지지도 못했다. 없는 자금에 녀동생과 지인들한테서 체면 무릅쓰고 꾸었고 그것을 갚는 기간도 상당히 길었다.
하지만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만족감에 에너지는 항상 넘쳐났고 친구들과 앉으면 우리 재일조선족사회의 비젼을 그리며 열렬히 토론하고 모색하면서 잡지의 장래에 대해 희망에 들떠있었다.
글쓰기 좋아하는 친구들한테 부탁해 매주 영화감상문을 발표하기도 하고 재일조선족 사장, 류학생 등을 매달마다 취재해서 오리지널 특집을 내기도 했다. 표지사진은 사진관을 운영하던 카와스튜디오(현 아키라스튜디오)에서 무료로 모델을 찾아서 찍어주군 했다.
2006년에는 취재신분으로 요청받아 간 자리에서 현재 재일조선족 대표적 무역인단체인 월드옥타 치바지회의 창립식을 지켜보며 제1대 회장 박경홍의 력사적 순간을 사진에 담기도 했다. 그 후 2008년에는 현 재일조선족녀성회의 전정선 회장과 함께 우리 녀성들과 어린이들을 위한 단체인 재일조선족녀성회를 설립하고 각종 활동과 모임을 조직했다.
조선족잡지 "무지개"로 인해 재일조선족의 여러 단체와 훌륭한 분들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그 때에는 류학으로 와서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해 일하다 창업하는 분들이 유독 많았고 또 IT분야의 불황으로 어려움 겪는 사업자들이 대부분이였다.
그 때의 불경기의 영향과 나 자신의 사업능력 부족으로 3년간 안깐힘을 쓰면서 간신히 유지되던 "무지개" 잡지는 열정 하나만으로는 버티지 못한 채, 결국 내 손에서 떠나보내야 했다.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
30대 초반을 그렇게 좋아하는 일에 열정을 다 붓고 두손 털고 일어나서 조용히 인쇄물디자인을 하는 일을 시작했다. 원래 거래하던 손님들과 옥타 치바지회의 반가운 인연들은 다 나의 고마운 손님들이였다. 모두가 "무지개" 덕분이였다.
30대 후반에 결혼하고 출산, 육아로 가정주부 생활을 하면서도 내가 디자인일을 계속 할 수 있었던 건 모두가 그런 아름답고 고마운 인연과 인맥 덕분이다.
나는 항상 말한다. “저는 인복이 많아요”
일본에서의 지난 19년간 나는 그렇게 성장해왔고 아마 앞으로도 쭉 이어서 부족함 채우며 그렇게 성장해갈거라 믿어마지 않는다.
/글: 재일조선족 문영화
/원고기획: 길림신문 일본특파원 리홍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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