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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심녀성컵] 내 가슴에 새겨진 모성애(최영숙)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10월16일 15시20분    조회:8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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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상수상작
 
 
 
내 가슴에 새겨진 모성애
 
최 영 숙 (연길)
 
 
얼마 전 “엄마가 많이 심해졌소. 이젠 며칠 버틸 것 같지 못하오.”라는 막내 녀동생의 전화를 받고 나는 연길시광영원 특별간호실에 급히 달려갔다. 내가 도착했을 때 계모는 두눈을 지그시 감고 얼굴을 찡그린 채 침대에 누워계셨다. 
 
 
“엄마, 엄마…”
 
 
내가 다급하게 몇번을 불러서야 겨우 눈을 뜬 계모는 뭔가 어렴풋이 보이는지 눈을 껌뻑이며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나지막하게 중얼거리였다.
 
 
“큰딸이 바쁠 텐데 왔구만…”
 
 
안깐힘을 다해 웃몸을 약간 일으키더니 온 얼굴에 웃음을 띠고 내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계모, 그러더니 이내 내 두손을 꼭 잡아서 당신 가슴에 갖다 대고 놓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이야기보따리를 쉬임없이 풀어놓으련만 두눈을 꼭 감은 채 가쁜숨만 몰아쉰다.
 

 

세살 때 전염병으로 어머니를 여읜 계모는 외할머니 손에서 자라다가 외할머니마저 세상을 뜨자 고모들 집을 떠다니며 살았다고 한다. 열다섯살에 고모의 중매로 시집을 가서 아이 둘을 낳았는데 그 두 아이가 모두 요절하고 말았다. 전쟁에 참가했던 남편마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게 되자 계모는 결국 자식 둘이 딸린 우리 아버지한테 재가하여 자식 셋을 낳고 시부모를 모시며 평생 동안 숱한 고생을 하면서 살아왔다.
 
 
그처럼 큰 불행을 겪고도 계모는 완강한 의력과 불요불굴의 강인한 집념으로 남자들과 어깨나란히 일하면서 석현진, 도문시, 나아가 우리 주 모범으로 당선되는 영광을 누렸으며 주인민대표대회 대표까지 되였다. 어디 그 뿐이랴. '문화대혁명' 후기에 부녀로서 농촌창고보관원일을 너무 잘하여 그 사적이 《연변일보》에 실리고 참관단이 우리 마을을 여러번 방문하기도 했다.
 
자세히 돌이켜보니 비록 평생을 농촌에 뿌리 박고 살았지만 계모가 걸어온 파란만장한 인생길은 허구에 의해 씌여진 그 어느 드라마보다 더 굴곡적이고 감동적이였던 것 같다.
 
 
두눈을 꼭 감은 채 꼼짝 않고 누워계시는 계모의 얼굴을 바라보노라니 이제 오래지 않으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해나며 저도 모르게 나와 계모 사이에 있었던 슬프고 기뻤던 일들이 머리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1964년 겨울방학의 어느 날, 나는 오빠를 따라 처음으로 연길역에서 기차를 타고 도문시 수남대대 토성리에 있는 외가집으로 놀러 가게 되였다.
 
바로 그 때 나는 한집에서 살고 있는 아름답고 능력 있는 공산당원 엄마가 내 친엄마가 아니라 계모라는 엄청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였다.
 
그 때로부터 나의 눈치보기 생활이 시작되였다.
 
하지만 나의 걱정과 달리 계모는 전처 자식인 오빠와 나를 자기가 낳은 세 자식 못지 않게 지극정성으로 대해주었다. 그런데도 나는 내내 마음의 탕개를 늦출 수가 없었고 의심과 경계로 늘 마음 한구석에서 불안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결국 내가 열세살이 되던 해에 큰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아래마을에 살던 옥주라는 친구가 부모 따라 연길로 가게 되자 우리 몇몇 친구들은 연길에 가서 사진을 찍어 영원한 기념으로 남기자고 약속했다.
 
다섯살 때 할머니와 오빠와 함께 사진을 찍은 뒤로 쭉 사진을 찍었던 기억이 없었던 터라 연길에 가서 사진을 찍는다니 너무나 신난 나머지 친구들과 약속한 날부터 마음이 너무 설레여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정작 연길 가서 사진을 찍겠다는 말을 꺼내려니 망설여졌다. 서발장대 휘둘러도 거칠 게 하나 없는 형편에 아홉식구가 배를 곯지 않는 것도 대단한 일인데 어찌 감히 그런 사치를 누리겠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닷새 동안 끙끙 속을 앓으면서 이궁리저궁리 해보았지만 합당한 리유를 찾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더 말하지 않으면 안될 긴박한 시점에 이르러서야 겨우 말을 빙빙 돌려 연길에 가도 되겠는가고 계모한테 슬쩍 여쭈었는데 글쎄 단칼에 거절을 당할 줄이야. 어정쩡해 서있는 나를 보고 아버지가 왜 갑자기 연길에 가려느냐고 물었다.
 
내가 실토정했더니 아버지는 생각 밖으로 넉냥짜리 길림성 량표 한장에 돈 50전까지 쥐여주면서 흔쾌히 허락하였다. 그런데 옆에서 지켜보던 계모가 “앞으로도 그냥 그렇게 챙겨줍소.”라고 말하는 바람에 “내가 저 애한테 돈 한번 못 주냐?” 하고 아버지가 버럭 화를 내며 아침밥상을 뒤엎었고 삽시에 집안 분위기가 팽팽해지면서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결국 다른 애들은 모두 연길로 떠났지만 나만 홀로 남아 온 오전 웃방에서 웃옷을 뒤집어쓰고 왕왕 소리내여 슬프게 울었다. 할머니가 내 잔등을 어루쓸며 울지 말라고 다독였지만 서러운 마음은 쉽사리 가셔지지 않았다.
 
‘계모는 어디까지나 계모구나. 절대로 전처 자식을 친자식처럼 사랑할 수 없구나.’ 하는 고까운 생각이 내 머리속을 꽉 메웠다.
 
사실 그 날 계모도 일하러 나가지 않고 정주간에 조용히 누워 흐느꼈다는 사실을 썩 후에야 알았다.
 
 
 
그 이튿날부터 나는 집에서 입을 꼭 다물고 벙어리처럼 지냈다. 계모가 예전보다 더 다정하게 불러도 눈길 한번 주지 않았고 묻는 말에만 마지못해 대꾸했다. 집에 들어가는 것조차 싫어서 밖에서 숙제를 하고 책을 보면서 시간을 질질 끌기 일쑤였다. 친구들과 별의별 장난을 다하면서 신나게 놀기만 하고 늘 할머니를 도와 하던 일들도 하지 않았다.
 
며칠 후 말없이 지켜보던 계모가 나를 불렀다.
 
“영숙아, 그 날 일은 미안하다. 그런데 너도 잘 알잖니, 우리 집 형편이 너희들 공책 사주기에도 변변치 않다는 걸… 그런데 종래로 애들한테 관심 없던 너네 아버지가 사진 찍으러 가겠다는 너한테 오십전이란 큰돈을 주니 나도 모르게 말이 이상하게 튀여나가드라…”
 
“내가… 얼마나… 그 사진 찍고 싶었는데…”
 
서러운 마음에 눈물이 또다시 내 볼을 적셨고 꺽꺽거리며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니 맘 모르는 게 아니야. 그 날 그토록 서럽게 우는 널 보면서 조금만 참았던 걸 하고 많이 후회했어. 그런데 영숙아, 하나만 알아다오. 절대로 내가 후에미여서, 네가 미워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걸. 그리고 앞으로 내가 잘할 테니 지나간 일은 잊어주렴. 할머니도 저렇게 고생을 하는데 큰딸인 네가 좀 도와줬으면 하는 바람이야.”
 
그 뒤로 계모는 과연 약속 대로 매사에 신중을 기울였다.
 
몇년이 지나 나도 고중을 졸업하고 운 좋게 대대에서 꾸린 소학교에 교원으로 초빙받아 교단에 올라서게 되였다.
 
1976년 늦가을, 계모는 친척방문차 조선에 있는 큰어머니 댁에 다녀오게 되였다. 돌아오면서 들고 온 물건 속에는 마른명태와 낙지가 잔뜩 들어있은외 데트론이라는 검정색 바지감이 끼워있었다. 까만 데트론천은 ‘디췌량’천보다 퍽 무게 있고 고급스러워보이는 옷감이였다.
 
그런데 그런 고급천을 계모가 나에게 건네주면서 학교 옆 양복점에 가서 바지를 해입으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너무 뜻밖이여서 의아한 눈길로 계모를 쳐다보고만 있었더니 이젠 선생님이 되여 매일 교단에 올라야 하는데 지금 입고 있는 바지가 볼품없다면서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해있는 나한테 마구 밀어주었다.
 
내가 데트론바지를 입고 나서자 보는 친구들마다 “너 정말 좋은 바지 입었네.”, “야, 축 내리 서는 바지 입으니 정말 멋 있다!”라고 말하며 부러운 눈길을 보내주어 한동안 어깨가 으쓱해서 다녔다.
 
한달 후에야 나는 그 데트론천은 당시 조선에서도 흔하지 않은 고급천으로서 계모의 언니가 동생한테 큰맘 먹고 준 것이라는 사실을 귀동냥으로 얻어듣게 되였다. 사진사건으로 계모에 대해 서운했던 마음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하던 무렵 바지감까지 선물로 받고 나니 고마움이 움터올랐다.
 

 
사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작가가 되려는 소중한 꿈을 간직하고 있었다. 문학이 무엇인지 잘 몰랐음에도 우리 할머니 이야기를 글로 써서 세상에 자랑하고 싶었다. 아홉살에 좁쌀 한 마대에 팔려갔다가 열여섯살에는 본댁이 아이 못 낳는 집에 첩으로 팔려갔던 우리 할머니… 할머니를 씨받이로 사갔던 중년부부가 전염병으로 돌아가고 23살 꽃나이에 생과부가 된 할머니는 우리 할아버지한테 재가해서 아버지를 비롯한 전처 자식 넷을 친자식처럼 키웠으니 그 기구한 운명을 담은 이야기를 꼭 써내고 싶었다.
 
나는 내가 남들처럼 평범하게 산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엄마 젖도 못 먹고 자라온 비운을 가졌더라도 누구보다 멋지게 살고 싶었고 내가 살아온 인생을 글로 남기고 싶었다. 그러자면 꼭 작가가 되여야 하고 작가가 되려면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에 가서 전문지식을 섭렵해야 한다는 생각을 마음속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학입시가 회복되지 않았던 때라 대학에 가려면 추천을 받아야 하고 추천을 받자면 또 무조건 농촌에서 표현이 좋아야 했을 뿐더러 련애도 절대 해서는 안되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바로 그 무렵에 마을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사실은 아래마을에 하향을 왔던 지식청년이 어느 하루 길을 가는 나를 가로막고 쪽지 하나를 건네주었는데 펼쳐보니 고백편지였던 터라 갈기갈기 찢어 흐르는 도랑물에 던져버린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청년이 글쎄 우리 친척집에 찾아가서 제발 둘 사이를 성사시켜달라고 청을 드는 바람에 소문이 이상하게 나버렸다.
 
후에 사실의 자초지종을 알고 나서 나는 분하기 짝이 없었고 속까지 바질바질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남들이 알면 대학에 추천받는 데 부정적 영향을 받을 것이고 부모님 귀에 소문이 들어가면 죽게 혼날 것은 뻔한 일이였다. 그래서 내가 사실의 전후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들어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하루, 마침 아래마을에서 영화를 돌리게 되자 다른 식구들은 영화 보러 나갔다. 모두들 자리 비운 틈을 타서 나는 아버지, 어머니를 앉혀놓고 겨우 입을 열었다.
 
“아버지, 어머니, 나는 꼭 대학에 가야 하기에 농촌에서 절대 련애 같은 걸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 아래마을의 한 지식청년이 자꾸 날 따라다닙니다. 어떤 소문이…”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구들에 앉아있던 아버지가 벌떡 일어나며 비자루를 거머쥐더니 나한테 달려들었다.
 
“네 년이 어떻게 설치구 다녔기에 벌써 남자가 따라다녀?”
 
비자루가 내 어깨에 떨어지려는 순간 눈치 빠른 계모가 얼른 막아나섰다.
 
“이거 봅소, 이재 들으니 야 잘못한 게 하나두 없구만 왜 이럼두?”
 
“자고로 녀자들이 처신 잘하면 남자들이 얼씬도 못하우.”
 
“이재 같이 들었재쿠 뭠두. 쟤는 련애할 생각도 없는데 그 남자가 일방적으로 따라다녔다 하잼두?”
 
아버지는 더 이상 말을 않고 혼자 분을 삭이느라 씩씩거리고 있었다.
 
“자식이 부모를 믿고 말하면 잘 듣고 일깨우든지 혼내든지 해야지 세마디 안짝에 비깡대부터 쥐면 어쩜두?”
 
“니 말 알아들었으니까 빨리 영화구경이나 가자.”
 
계모는 무서워 부들부들 떠는 나를 떠밀고 밖으로 나와버렸다. 그제서야 나는 숨이 활 나왔다.
 
계모 덕분에 아버지한테 얻어터질 번한 곤경에서 벗어났다. 다시 생각해봐도 무턱대고 화부터 내는 친아버지보다 사리가 밝고 아량 깊은 계모가 훨씬 좋고 고마웠다.
 
이윽고 어둑스레한 밤길을 걸으며 계모가 물었다.
 
“영숙아, 너 방금 말한 대로 꼭 대학에 갈 거지?”
 
“네.”
 
“그래, 세상에 노력해서 안되는 일이 없네라. 꼭 대학에 가거라. 내 너를 믿는다.”
 
 
어쩐지 계모의 “믿는다”는 그 말 한마디에 가슴이 찡해나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시상식에서 수상소감을 발표하는 최영숙(오른쪽 첫번째)
 
 
 
1977년, 대학입시제도가 회복되면서 우리 젊은이들에게 희망의 문이 활짝 열렸다. 나는 운이 좋게도 사범전문대학에 붙었다. 비록 내가 그렇게 원하던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는 아니였지만 좋아하는 교원사업을 그냥 할 수 있다는 리유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거기다 사범학교에 가서 한학급의 총명하고 착한 남자를 만나 서로 사랑에 빠지면서 결혼까지 약속하게 되였다.
 
결혼식을 한달 앞둔 어느 날, 칼바람이 쌩쌩 불어치는 엄동설한에 약혼자가 장춘으로 출장 가게 되여 나는 배웅하러 함께 역전으로 나갔다. 4선 뻐스에서 내리니 눈보라가 어찌나 세게 몰아치는지 코끝이 단통 얼어들고 눈도 바로 뜰 수 없었다.
 
‘이럴 때 마스크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약혼자와 함께 손 잡고 대합실을 향해 걸어가는데 멀리에서 검은색 솜옷을 입고 머리에 수건을 빙빙 두른 키가 자그마한 녀인이 발을 동동 구르며 오가는 행인들을 가로막고 서서 뭐라 중얼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왼손에 새하얀 마스크를 가득 들고 오른손으로 마스크를 가리키며 무엇이라 설명중인 것 같았다.
 
추위 속에 땔감을 보낸다는 게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구나 하고 감탄하며 약혼자 손을 잡아끌고 앞으로 바싹 다가가 물었다.
 
“커우쪼 이거 둬챈?(마스크 하나에 얼마예요?)”
 
그 당시 연길에서 물건 파는 사람 대부분이 한족들이였고 또 우리 연변에 사는 사람들은 한족인지 조선족인지 분간이 안되면 먼저 한어로 묻는 습관이 있었다.
 
그런데 한참이 지났는데도 대답이 없었다.
 
“마스크 하나에 얼맘두?”
 
이번에는 약혼자가 큰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마스크를 팔던 녀인이 홱 돌아서더니 반대방향으로 휑하니 걸어갔다. 녀인의 어이없는 행동에 화가 난 나는 따라가서 마스크를 와락 잡아당겼다. 그 바람에 마스크들이 와르르 땅에 떨어졌다.
 
“왜 마스크를 사겠다는데 달아남두?”
 
하지만 뒤늦게야 녀인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던 나는 그만 입을 딱 벌리고 그 자리에 못 박힌듯 굳어졌다가 땅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동무 왜 이러우?”
 
뒤따라온 약혼자가 나를 잽싸게 안아 일으키면서 마스크를 팔던 녀인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더니 “아이, 어머이 아닙니까?” 하고 소리쳤다.
 
나는 땅에 떨어진 마스크를 하나 주어 놀란 기색이 력력한 약혼자에게 넘겨주면서 말했다.
 
“동무, 기차시간이 다되였는데 빨리 가세요.”
 
약혼자가 떠나고 나는 땅에 떨어진 마스크들을 몽땅 주어들고 계모의 팔을 붙잡고 역전 가까이에 있는 친척집에 들어갔다. 추워서 부들부들 떠는 계모를 얼른 가마목에 앉혀놓고 “엄마, 이 추운 겨울에 엄마가 왜 마스크 장사를 함두?” 하고 심문하듯 따졌다.
 
“니 엄마가 니 결혼식 례단준비에 보태겠다고 이 엄동설한에 이렇게 마스크를 판다. 벌써 한 보름 됐다.”
 
입 빠른 친척집 큰어머니가 계모 대신 대답했다.
 
“엄마, 결혼식 때문에 아무 걱정 말라구 여러번 말했잼두.”
 
“야, 아무리 그래두 그렇지. 니 말처럼 아무 것도 안해가지고 가면 연길 시내 시집에서 당연히 널 업신여길 게 아니겠니. 그리고 우리 가문을 얼마나 비웃겠니. 어른들도 계시는 집안이란 게 법이 없이 빈손으로 시집 보냈다고 말이다.”
 
“엄마, 지금 어디 옛날처럼 법을 따질 땜두. 몇년 전에 사촌언니는 호미 두개 사들고 시집 가도 너무 잘살고 있고 고모사촌오빠는 대장함에 모주석책을 넣고 장가 가도 지금 다 잘살잼두? 아버지, 엄마는 농촌에서 나를 대학에 보낸 것만 해두 대단하니까 이렇게 준비하느라 고생하지 맙소. 내 정말 아무 것도 안해가지고 시집 가겠으꾸마.”
 
“그럼 니 평생 기 못 편다.”
 
“엄마, 내 기 죽는 그런 일은 절대로 없을 거니까 쓸데없는 근심걱정하지 말고 래일 당장 집에 갑소. 그런데 마스크를 판다는 사람이 왜 마스크를 끼지 않고 이렇게 얼굴을 빨갛게 얼굼두?”
 
“마스크를 끼고 말하면 사람들이 잘 알아듣지 못해 답답하더라. 그래서 하나라도 더 팔려고…”
 
나는 난생처음으로 계모를 와락 그러안았다.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줄줄 흘렀다.
 
‘내가 뭐라고? 내가 엄마한테 뭘 잘했다고…’
 
부처님이 아닌 이상 계모도 실수할 때 있고 잘못할 때 있는 것이 정상인데 그걸 깨닫지 못하고 거의 십년 동안이나 계모의 진심을 외면하고 마음의 문을 꼭 닫은 채 살아온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해보였다.
 
나의 성화를 못이기겠는지 계모는 가져온 마스크만 다 팔면 이내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나와 약속했다.
 
출장 갔던 약혼자가 돌아오자 나는 조용히 말을 꺼냈다.
 
“동무, 미안하지만 결혼식 때 아무 례단도 준비하지 못할 거 같습니다. 그래도 괜찮겠지요?”
 
“당연히 괜찮지. 정말 잘 생각했소. 요 며칠 마스크를 팔던 장모님 모습이 내내 머리속에서 맴돌면서 잊혀지지 않았소. 계모라서 심리부담이 더 큰가 보오. 우리 부모님한테는 내가 잘 말해놓을게.”
 
내가 그렇게 만류했는데도 계모는 기어이 약간의 례단을 갖추어놓았다.
 
결혼식날, 큰절을 올리고 떠나는 나의 두손을 붙잡고 계모는 눈물이 글썽해 말씀하였다.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나쁜 기억은 본가집에 싹 다 묻어두고 오늘부터 시댁에서 새 출발 하거라. 절대로 기 죽지 말고 떳떳하게 잘살거라.”
 
결혼하고 자식 둘 낳아 키우면서 매번 계모의 도움으로 인생 고비를 무난히 넘길 수 있었다. 특히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계모는 년로하신 할아버지, 할머니를 계속 모시고 살았고 시집 간 내 걱정도 떨쳐버리지 못했다.
 
내가 난산으로 둘째를 낳고 모진 고생을 할 때에도 계모는 그 바쁜 벼씨 붓는 일을 제쳐놓고 달려와 일주일 동안 밤낮으로 시중 들었고 집에 돌아가서는 온 집 식구들의 반대도 무릅쓰고 할아버지 시중을 들고 계시는 할머니를 우리 집에 보내 애기를 돌보게 했다.
 
비록 계모는 이 세상 무수한 엄마들처럼 자식을 품에 꼭 끌어안고 다독이며 속삭일 줄은 몰랐어도 자신의 실제 행동으로 굳세게 모든 역경을 헤쳐나가며 자기 자신을 잃지 않고 당당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함을 보여주었다.
 
어릴 때부터 부지런하고 뭐든지 척척 해내는 계모의 모습을 보면서 커왔던지라 나도 언제 어디서나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뚝심으로 기 죽지 않고 당당하고 지혜롭게 내 삶에 도전하면서 살아올 수 있었다.
 
어린 나이에 모성애를 잃었다고 한탄하던 내가 뒤늦게나마 계모의 사랑을 넘쳐나게 받으면서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모성애를 느끼게 되여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그래서 그 고마운 마음을 필 끝에 담아 이렇게 글로나마 표달하고저 한다. 이 글이 생사의 고비에서 몸부림치는 계모의 생전에 이 딸이 바치는 최고의 선물이 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연변녀성》 2018년 제10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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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10-23
  • 웨이하이 조선족 노인 100세 축하연 진행     (흑룡강신문=웨이하이)김명숙 기자=“산둥에 100세 조선족 노인이 있대요.”   웨이하이시에 살고 있는 조선족 김정호 노인의 100세 축하연이 지난 14일 웨이하이시 모 호텔에서 치러져 화제가 되고 있다.   웨이하이애심여성협회 회원인 임옥영 여사의 ...
  • 2018-10-22
  • —연변이 낳은 조선족 성악가 방춘월의 추구와 도전 1990년대부터 연변의 방송과 무대를 주름잡으며 독특하고 매력적인 음색으로 대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방춘월, 오늘날 그는 멋진 실력으로 성악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저명한 성악가로 활동하고 있다. 성악가 메조소프라노 방춘월은 현재 천진음악대학교의 성악교...
  • 2018-10-22
  • [가작상수상작품] 나와 로라스케트장의 인연  김경희   25년 전, 개혁개방의 거세찬 물결을 타고 나는 연변에서 제일 처음으로 체육관 실내에 로라스케트장을 운영하게 되였다.   “하루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남들이 그토록 부러워하는 좋은 직장을 잠시 그만두고 모험을 강행하며...
  • 2018-10-18
  • 은상수상작       내 가슴에 새겨진 모성애   최 영 숙 (연길)     얼마 전 “엄마가 많이 심해졌소. 이젠 며칠 버틸 것 같지 못하오.”라는 막내 녀동생의 전화를 받고 나는 연길시광영원 특별간호실에 급히 달려갔다. 내가 도착했을 때 계모는 두눈을 지그시 감고 얼굴을 찡그린...
  • 2018-10-16
  •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33) ▩김삼철(룡정) 2001년 9월, 손자와 같이 ‘7자나무’ 앞에서. 내 나이 80이 다된 지금에도 ‘7자나무’를 생각하면 어린 시절 아침 일찍 연길시장에 쌀 팔러 가는 어머니를 배웅하고 오후에는 돌아오는 어머니를 마중하던 행복했던 순간들이 영...
  • 2018-10-16
  • —가두에서 ‘나눔의 꽃’을 피워가는 홍봉옥을 만나다 기자와 이야기를 나누고있는 홍봉옥할머니 무엇인가를 꾸준히 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특히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선행을 꾸준히 한다는 것은 더욱 쉬운 일이 아니다.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주변 사람들에게 꾸준히 사...
  • 2018-10-15
  • 연변부용장학회 장학금발급의식이 10월 12일, 룡정해란강호텔에서 있었다. 이는 2008년 연변부용장학회가 설립이후로 11년째 이어져온 행사로서 올해도 39명 연변의 학생들이 장학금을 받게 되였다.   이날 부용장학회는 연변대학교의 15명 학생들과 5명의 연변과학기술대학 학생들에게 매인당 400딸라를, 룡정고...
  • 2018-10-12
  • 나는 어떤 사람일까?           초야   지인중에 부탁 고수가 있다. 자신이 잘할수 있는 일도 굳이 친구중 한놈을 시키는데, 부탁받는 친구들도 누구 하나 짜증내지 않고 일을 깔끔히 마무리짓는다. 곰곰히 생각해봤다. 자신의 일도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뒤로 미루기 일쑤인 친구들이...
  • 2018-10-10
  •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31) ▩리오로(장춘) 고중시절의 필자 어제 연길에 다녀왔다. 장춘에서 호화로운 고속렬차를 타고 두시간 17분 만에 연길서역에 도착했다. 소음이 적고 내부시설이 호화롭고 깨끗한 것도 자랑거리지만 장춘에서 연길까지 열몇시간이 걸리던 기차가 두시간 17분 만에 연길...
  • 2018-09-28
  • [편집자의 말] 제1기부터 제3기까지는 길림성 연변지역과 산재지역 학교의 학생 가족을 선정하여 영상에 담았다. 제4기에서는 흑룡강성에서 유구한 력사를 갖고 있는 해림시조선족실험소학교를 선정했다. 를 순조롭게 펴낼 수 있도록 적극적인 지지와 협조를 해주신 흑룡강성 교육학원 민족교연부와 해림시조선족실험소학교...
  • 2018-09-20
  • 장춘시에서 조선족들이 결혼식과 회갑연을 올리거나 큰 행사를 치를 때면 장춘시명계식품유한회사에서는 빠짐없이 순대, 찰떡 등 조선족 전통음식을 제공한다. 음식에서 인정이 오간다고 여기서 조선족과 조선족사회를 위해 자기의 저그마한 성의를 보여주려는 명계식품회사 계영철 사장의 모습이 돋보인다. 행사뿐만이 아...
  • 2018-09-16
  •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29) ▩김룡운(교하) 학교 열람실에서 필자 김룡운선생님 나는 산에 오르내리기를 좋아한다. 왜냐 하면 나는 동년을 산골에서 지냈기 때문이다. 60년대에 아버지가 그 좋은 장춘 도회지를 버리고 우리 자식들을 이밥이라도 실컷 먹이겠다며 하향하여 두메산골에 가서 짐을...
  • 2018-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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