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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상기23]일본인들의 장례식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3월13일 09시13분    조회: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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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전 나리타공항에 도착한 첫날부터 대변인으로 나서준 히사타케(久武)씨, 내가 처음으로 접촉한 일본인이였던 그가 직장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 2007년 여름이였다.

마지막 병문안을 갔다 온 후 한달만에 전화를 받고 숙야(通夜)장소에 갔다.

생전에 리론적인 변론을 즐겼던 히사타케씨는 약물치료를 거부하고 물리치료를 견지하면서 자기식대로 인생을 마무리지었다. 암이라는 진단을 받은 반년 후부터 자신이 경영하는 회사에 대한 인수인계, 정리를 시작하였으며 처자들에 대한 유산처리 등 자기가 떠난 후에 마무리 지어질 일들을 하나하나 미리 처리하는 일상을 보냈다.

숙야장에서 만난 그의 아들이 이런 말을 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가 장례식장을 미리 정해놓고 참석할 분들 20명만 이름을 적어놓았습니다.”

유일하게 가족 아닌 지인으로 참가하게 된 우리 가족이였다. 아니 히사타케씨한테 우리는 가족이였을 것이다.

일본인들이 고인을 보내는 의식인 츠야(通夜)와 장례식은 이틀에 걸쳐 진행된다.

장례식 전날 저녁에는 가족친지들과 가까운 지인들이 선향을 피우고 승려의 독경을 들으며 ‘고인을 지킨다’ 혹은 ‘고인과 함께 보낸다’는 숙야의식을 가지는데 이것이 츠야(通夜)이다. 대부분 경우에 고인과 함께 마지막 음식을 나눈다는 의미로 잠간씩이라도 음식을 먹게 된다.

시간을 낼 수 없으면 숙야에만 참석하는 경우도 있지만 가족장인만큼 우리는 이튿날 장례식에도 참가했다.

조용하고 정중한 장례식장에서는 고인이 생전에 즐겼던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국화꽃으로 장식된 제단에는 웃는 히사타케씨의 영정사진이 모셔져 있었다. 역시 본인이 생전에 정했다는 사진이였다.

3면 조각으로 된 목제 관 속에 누워 있는 히사타케씨의 얼굴은 익살스러웠던 생전의 기억을 불러올만큼 그대로였다. 하얀 국화꽃을 고인의 머리 맡에 올리면서 마지막 모습을 기억에 담으려고 한참을 응시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돌아간 사람의 유체를 똑똑히 본 적은 그 때가 처음이였다.

일본인들에게는 흔히 있는 습관이다. 돌아간 사람에 대한 애달픔과 생전에 가졌던 정분을 귀하게 여기여 고인의 유체에 한사람 한사람 인사를 하는 것이다.

생전에 있었던 고인과의 추억과 앞으로의 계획 등을 들으면서 화장이 끝날 때까지 한시간 정도 가족들과의 시간을 보냈다.

다음엔 (拾骨)습골절차, 즉 오코츠아게(お骨上げ)였다.

가까운 가족만이 참가할 수 있는 절차에도 우리를 참가시키라는 히사타께씨의 당부가 있었다 한다. 생전에 문화의 차이에 대해 늘 이야기를 나누었던, 일본인의 장례문화를 알려주려는 고인의 깊은 뜻이였다.

친족부터 순서대로 두사람이 동시에 저가락으로 골회를 집어서 납골항아리에 넣는 의식이였다. 다리부분으로부터 머리에로의 순서로 진행되는중 남편과 나는 제일 마지막 차례로 오코츠아게를 마쳤다.

그렇게 가족처럼 가까웠던 히사타케씨를 하늘나라로 보냈다.

처음 나리타공항에서 일본에서의 적응방법에 대해 하나하나 알려주었던 그는 세상을 떠나면서도 중요한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 셈이다.

상상외로 너무 정중하고 품위가 있는 일본의 장례식문화였다.

당연하게 조문객들은 거의 모두가 검은색 복장에 검은 색 양말, 검은색 넥타이, 녀성분들은 구두와 가방도 빛이 나지 않는 검은색 소재의 걸로 착용하였다.

갑자기 생기는 상사가 걱정이 되여서 장례식 때 입을 상복만은 제때제때 드라이클리닝을 해 두어야 한다고 습관처럼 말하는 주부들의 말도 늘 들어왔듯이 고인을 보내는 매너중의 하나인 상복을 갖추지 않는 일본인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용한 일본인들인만큼 장례식장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대외인을 부르지 않은 가족장인데도 고별식은 시종 정숙한 분위기 속에서 조용히 진행되였다. 약간의 흐느낌소리가 들리고 눈굽을 찍는 모습들이 보이는 가운데 소리내여 통곡하는 사람을 볼 수가 없었다. 친족을 영영 보내는, 리성을 잃을만도 한 고별식에서 소리내여 우는 사람을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일본인들의 장례식문화에는 ‘울지 않는 일본인’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무사(武士)시대로부터 우는 모습,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이 사무라이가족의 미덕으로 전해 내려왔다고 하는데 그것이 일반인들 속에서도 깊이 침투되여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자기 감정에 충실하여 가족을 잃은 슬픔을 통곡하는 형식으로 달래이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만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리해할 수 없는 행동이라 한다.

장례식장은 슬픔을 공유하는 장소이기전에 공적인 장소라고 생각하는 일본인들. 눈물을 감추고 슬픔을 견디는 마음가짐으로 장례식에 참석해준 사람들에게 불편을 끼쳐드리는 것을 자제하며 고인에게 안심하고 떠날 수 있도록 기품 있고 의젓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가족의 의무라고 여기는 일본인들이다.

후에 안 일이지만 법률상 사망후 24시간이내에는 화장을 못하기 때문에 사망진단서를 받은 당날에는 유체를 집에다 모시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리하여 친족들만 모이는 그 때에 고인과의 리별을 충분하게 한다고들 한다.

히사타케씨를 보낸 이듬해인 2008년에 일본영화 《굿' 바이: Good & Bye》(おくりびと)가 개봉되였다. 제 81회 미국아카데미상 최우수외국어영화상을 받은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일본의 장례식문화에 대해 더욱 상세하게 료해할 수 있게 되였다.

고인에 대한 공경함과 참가자들에 대한 배려에 머리가 숙여짐과 동시에 울지 않는 일본인, 아니 울지 못하는 일본인들을 두고 ‘참고 견디다가 슬픔의 방식을 잊어버리고 마는것이 아닐가’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기도 하다.

/길림신문 일본특파원 리홍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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