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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생활수기9]일본은 내 인생교과서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4월10일 00시00분    조회: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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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온 지가 어느덧 18년이 돼간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두번이나 변할 정도의 기나긴 세월이 눈깜짝 할 사이에 흘러갔다. 일본은 나에게 희망도, 행복도, 저주도, 슬픔도 배워준 희로애락의 인생교과서이다 .

나는 처음부터 그 어떤 웅대한 포부나 꿈을 가지고 일본류학을 선택한 것은 아니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의 대기업에서 비서직을 담당하면서 나름 월급도 잘 받았다. 그러던 내가 일본에 오게 된 것은 그 때 사귀던 남자친구 때문이였다.

뇌출혈로 앓고 계시는 어머니 때문에 일본어 전공을 했지만 일본류학 같은 건 엄두도 낼 수 없었다. 하지만 함께 일본에 보내달라는 남자친구의 부탁을 받고 아버지는 없는 돈을 모아서 일본수속을 해주셨고 나는 직장을 때려치우고 2000년 10월 3일, 일본으로 오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하고 싶은 전업공부도 좀더 하고 돈도 더 많이 벌어서 엄마의 병치료에도 힘을 보탤 수 있다는 황홀한 꿈을 꾸면서 나는 일본땅을 밟았다.

하지만 현실은 상상을 초월한 암담한 나날들이였다. 학교, 알바, 집 사이에서 매일매일 삼각이동을 하는 무미건조하고 여유 없는 류학생활은 내 숨통을 끊어버릴 것 같았다. 때론 내가 대학을 나오고도 왜 불고기집에서 기름연기를 뒤집어쓰면서 알바를 해야 하는지 납득이 안될  때도 있었다.

돈을 빨리 모아서 집에 보내야 하는데 아름찬 집세, 기본생활비, 학비를 내고 나면 남는 건 얼마 없었다. 학교 수업을 끝내고 매일 10시간 넘게 뛰여다니는 알바로 다리는 끊어지는 것 같았고 온몸에 몰려드는 피로도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

무엇보다도 앞길이 막막하였다. 새겨왔던 목표와는 갈수록 멀어지고 꾸어왔던 소중한 꿈마저 하루하루 색바래져가는 것에 나는 더 안타깝고 힘들었다. 나 자신이 선택한 길이였지만 어쩌면 일본생활이 정말 싫었고 손에 쥔 돈이라도 있으면 당장이라도 모든 것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쪼들리는 생활에 멘탈도 완전히 망가져 친구 하고도 니 탓 내 탓 티각태각 싸우기까지 하다가 결국은 일본까지 따라왔던 남자친구와도  헤여지고 말았다 .

나는 점차 너무나 부족한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였고 사람이 살아간다는 게 이렇게 무섭고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였다. 신성하게 주장해오던 내 사랑이며 정이며 모든 것이 현실에 부딪치는 곤난 앞에서는 그렇게 가볍고 무력한 것이였다. 물불을 가리지 않던 젊음의 충동, 쭉 잘난 척해왔던 그 옛날의 오기와 자신감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앞날에 대한 두려움, 번뇌에 사로잡혀 눈물로 베개잇을 적시며 지새운 밤도 너무 많았다. 그러면서도 저도 모르게 무슨 일이나 잠간 시간을 가지고 분석해보며 무슨 일이든 한번쯤 다시 생각을 되풀이해보는 조금은 성숙된 습관이 생겼다.

대학교 때 일본어를 전공한 나는 일본어능력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따냈다. 나는 성적표를 들고 매일이다 싶이 학원장을 찾아가서 회사에 취직시켜달라고 졸랐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드디여 기회가 생겼다.

언어학원을 졸업한 나는 학교의 추천으로 뭇사람들의 부러움을 받으면서 자그마한 회사의 무역담당으로 취직을 하게 되였다.

일본 속담에 ‘돌우에도 3년’이라는 말이 있다. 뭔가를 배우려면 경험과 교훈을 쌓는 과정이 필요하니 일본에서의 회사생활을 3년은 꼭 견지해보라고 하시던 학원장선생님의 말씀이 오늘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렇게 시작된 회사생활을 쭉 16년이나 견지해왔다.

회사의 유일한 외국인이였던 나는 처음으로 마음을 나누는 일본인 친구가 생겼고 어머니가 돌아갔을 때에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나를 위로하여 회사의 모든 일본인 직원들이 묵도를 해주면서 슬픔의 눈물을 함께 흘렸었다. 집에 맛나는 음식을 차려놓고 따뜻하게 내 손을 잡아주면서 같이 울어주시던 이즈미상도 나는 평생 잊을 수 없다. 말수가 적고 일에서는 엄격하시지만 때론 《중국인민》이라는 잡지, 일본 조선족에 관한 뉴스가 실린 신문기사가 있으면 빨간 필로 줄까지 그어주시면서 책상 우에 챙겨주시던,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시는 회장할아버지도 잊을 수 없다. 그동안 받은 크고 작은 감동이 너무 많았다. 언젠가는 누군가 나한테 기댈 수 있는 기둥이 되고 싶고 내가 가진 걸 베풀어주는 그런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일본에서 생활하는 동안 살면서 돈이 필요하지만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으며 돈보다 중요한 것도 너무 많다는것을 배웠다. 사람은 최악의 환경에 부딪쳤을 때에야 진실을 보게 되고 더욱 더 분발하게 되는 법이며 그렇게 분발하는 시각이 제일 눈부시고 멋지다고 느껴진다.

출근을 하게 되니 학생시절과는 달리 꼬박꼬박 월급이 들어오고 그렇게 되니 돈도 차곡차곡 모여지고 여유도 많이 생겼다. 하여 2002년부터 나는 일본에 있는 조선족사회와 접촉을 하게 되였고 ‘천지협회’와 ‘쉼터’를 만나게 되면서 그동안 쌓였던 그리움 , 외로움을 덜게 되였다.

커뮤니티 사이트 ‘쉼터’라는 공간에서 의학공부를 하고 있던 남편을 만나 결혼도 하고 지금은 보배 같은 아들 둘(장남 9살, 차남 5살)을 가진 엄마가 되였다.

그러던 2011년 3월 11일, 우리는 일본 동북대지진을 겪었다. 지진으로 인한 쓰나미는 잔인하게 수없이 많은 생명을 앗아갔다. 그 날 동경은 모든 교통이 다 마비되여 뻐스나 전차가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고 인산인해를 이루며 대이동하는, 태여나서 처음 겪는 무서운 광경이였다.

다행히 회사와 집이 자전거로 10분 거리에 있어서 나는 애를 마중하여 인차 집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헌데 남편은 집에 있는 3살짜리 아들과 내가 걱정되여 일하고 있는 대학교에서 27키로나 되는 거리를 8시간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 남편을 보면서 위급하고 무섭고 불안할 때일수록 가족이 제일 큰 힘이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함께 하고 싶은 것도 내 가족이라는것을 절절히 느끼게 되였다.

김경화씨의 행복한 가정

그 때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핵복사문제 때문에 주위에는 짐을 챙겨서 일본을 잠시 떠나는 친구, 아예 모든 걸 접고 영영 일본을 떠나 귀국하는 친구들도 적지 않았다. 불안하고 착잡한 분위기 속에서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을 때 이즈미상으로부터 메일이 날아왔다,

“애들은 괜찮느냐? 부모님들 많이 걱정하시겠는데 잠간이라도 중국에 들어갔다가 안정되면 다시 여기로 돌아와도 뭐라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꼭 가족건강 잘 챙기고 몸 조심하거라…”

그 한통의 메일은 나에게 더없이 큰 힘을 주었고 사태의 위험성을 침착하게 판단하는 지혜를 주었다. 덕분에 떠도는 무서운 소문과 류언비어들도 잘 이겨내면서 꿋꿋이 일본에서의 내 자리를 지켜낼 수 있었다.

큰 포부가 있고 사업에서 성공하는 멋진 인생도 좋지만 하루하루, 한시간, 한시간, 그 시간들을 나만의 설계도로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행복으로 이어지는 지름길이 아닐가고 나름 생각해본다.

돈에 큰 욕심도 없고 사업에서 성공한 것도 없는, 아직도 많이 부족한 나지만 오늘도 일본에서 내 가족에 , 직장에 , 육아에 열심하고 일본 생활을 맘껏 즐기면서 평범하지만 소중한 하루하루를 만들어가고 있다.

/재일조선족 김경화

원고기획 길림신문 일본특파원 리홍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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