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투구진 렴명촌 마을 주둔 사업대 대원 전봉씨의 빈곤해탈 분투기
“고향에 돌아오면 안일한 직장생활이 눈앞에 펼쳐질 거라 생각했지요. 지금껏 저는 공무원은 책상머리에만 앉아 일하는 신사스러운 직업인 줄로만 여겼어요. 알고 보니 그게 아니더라구요. 허허…”
로투구진 렴명촌 마을 주둔 사업대 대원 전봉씨(오른쪽)
애초 본인의 예상과 빗나갔지만 룡정시 로투구진 렴명촌 마을 주둔 사업대 대원 전봉씨(33살)는 오늘도 촌마을 가가호호를 오가며 빈곤해탈사업에 드바쁜 하루를 되풀이한다.
한국에서 석사연구생 공부를 마치고 회사생활을 해온 지 8년 차 되던 해, 전봉씨는 아이가 학교에 갈 나이가 되자 가장으로서 아이의 곁을 꼭 지켜줘야겠다고 생각하고 고향행을 택했다.
고향행을 결심한 그 해 마침 연변에서는 ‘천명 인재영입 프로젝트’로 인재들을 대거 수용해들이고 있던중이였다. 초빙 조건에 부합되여 2017년 5월, 그는 나서 자란 고향인 룡정시경제합작국에 배치되였다.
연장 근무를 밥 먹듯이 해대던 분망한 기업 소속인으로부터 화이트칼라(白领)는 그래도 좀더 멋스럽고 여유로울 거라 생각했던 그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것도 경제합작국에 출근한 지 보름 만이다. 로투구진 렴명촌에 마을 주둔 사업대 대원으로 내려가 빈곤해탈 공략전에 동참하라는 지시가 내려진 것이다. 전혀 예고치 못한 ‘씨나리오'였다. 말 그대로 마을 주둔, 나이 서른이 넘도록 농촌에 가본 거라곤 야외들놀이가 전부였다는 전봉씨다. 농촌에 내려가 생활을 해야 한다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그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파견 기한도 정해진 게 없었다. 렴명촌이 빈곤에서 해탈되는 날까지라는 기약 없는 기약 밖에는.
“잠시 할 말을 잃었죠. 몇번 가보지도 못했던 낯선 농촌에 내려가 살라니요.”
사업대 막내대원에서 촌민들의 든든한 해결사로
하얀 셔츠 대신 팔토시를 껴야 했고 칼주름을 놓은 양복바지 대신 바지단을 걷어올린 운동복에 발 편한 운동화가 필수 아이템이 됐다. 그가 주둔하고 있는 렴명촌에는 347가구에 958명 촌민이 살고 있는데 2016년 168가구에 347명이 빈곤호로 되면서 빈곤발생률이 36%나 되는 빈곤촌이였다.
빈곤해탈 업무에 대해 미처 료해도 하지 못한 전봉씨였지만 일단 드바쁜 일손을 도와 따라나서기로 했다. 부족한 업무지식은 짬짬이 시간나는 대로 학습을 통해 장악해가며 그는 스스로 업무지식을 쌓아갔다. 여름철이 시작되면서 폭염으로 30도를 웃도는 날씨에도 그는 한집을 여러차례씩 방문하여서라도 촌민들의 실제적인 곤난과 문제점을 기록하고 빠른 시일내에 문제점을 회보하고 해결해나섰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촌마을의 최저생활보조대상들중에 조건이 구비되는데도 장애인증을 발급받지 못해 보조금을 타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는 안타까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장애인 촌민들을 대신해 여러차례 시 관련 부문에 다녀오면서 그들이 장애인증을 발급받도록 노력해 세명의 최저생활보조대상들이 장애인 보조금을 탈 수 있도록 힘써 도왔다.
어려운 촌민들의 수호천사
일년간 촌에 머물면서 빈곤호들에 대한 료해를 쌓은 그는 언제 한번 촌민들의 사정을 그냥 지나칠 때가 없다. 어느 한번 전봉씨는 자녀의 최저생활보조를 신청하러 촌부를 찾은 촌민 정진국씨를 만났다. 한눈에도 다리가 불편해보였다. 전봉씨는 그의 상황을 자세히 캐물었다. 정진국씨는 오랜 시기 당뇨병으로 앓고 있다가 병세가 악화되였는데 당시 직업고중에 다니고 있던 딸애의 학잡비도 부족한 상황에서 배우자도 장애인인지라 수입래원이 전혀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병원에서는 당장 수술이 시급하다고 했지만 10만원이나 된다는 수술비용에 감히 엄두도 못내고 있다는 상황을 료해한 전봉씨는 로투구진 민정부문과 련락해 관련 수속을 신속히 마쳐주었고 해마다 3,000원의 보조금을 향수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러던 올해 2월, 정진국씨의 건강상태가 악화되여 더이상 수술을 지체할 수 없게 되였다. 그러나 불보듯 뻔한 정진국씨 집안살림형편. 이 때도 전봉씨가 발벗고 나섰다. 십만원의 수술비용에서 새농촌합작결산정책에 따라도 60% 밖에 의료정산을 받을 수 없었다. 나머지 4만원은 수술에 꼭 필요한 금액이였다.
전봉씨는 자신의 소속단위인 룡정시경제합작국 간부와 동료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 모금을 통해 4,700원을 마련했고 연변TV ‘사랑으로 가는 길’에도 제보하여 후원금 8,000원을 얻게 되였다. 이 밖에 연변주민정국에도 신청하여 2만원의 구조자금을 확보할 수 있었다. 조금 더 필요한 금액은 의연모금어플인 ‘물방울’앱으로 정진국씨의 사연을 올렸더니 이틀 사이 누리군들이 치료비에 보태라며 한푼, 두푼 모은 2,000원의 후원금을 보내왔다. 백방으로 모은 4만원의 수술비용을 전봉씨는 정진국씨 손에 쥐여주며 수술을 독촉했다. 수술을 잘 마칠 수 있었던 촌민 정진국씨는 현재 건강을 많이 회복한 상태라며 더없이 기뻐했다.
“전에는 미처 타인의 고통을 헤아릴 줄 몰랐어요. 농촌에 내려와 촌민들과 어울려서 생활해보니 우리가 미처 몰랐던 그들의 진정한 고충을 공감하고 그들을 돕고 싶어졌어요.”
지난해 7월, 로투구진은 크게 홍수재해를 입었는데 렴명촌에도 10여가구가 홍수에 집을 잃었다. 그는 촌민들을 도와 홍수방지에 앞장서 촌민들의 삶의 터전을 지켰고 구조물자를 보내기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빈곤촌민 위험주택 개조 때도 돈이 없어 우물을 파지 못해 식수를 해결 못하는 사정을 헤아리고 마을 주둔 사업대 대원들과 촌민위원회에서 적극적으로 도와나서 빈곤촌민에게 우물을 파주어 식수를 해결해주기도 했다.
혁신적인 정보기술로 업무효률 제고
다년간 한국 광고회사에서 근무했던 그는 컴퓨터기술도 남달랐다. 매일 촌민들의 집에 방문 갈 때면 한뼘씩 되는 자료들을 무겁게 손에 들고 다니는 대원들을 보고 그는 좀더 혁신적인 방법을 고안했다. 이틀밤을 지새며 그는 렴명촌 빈곤호들의 수치관리시스템을 만들어내 휴대폰으로 그것을 체크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해냈다.
사이트에 수록된 촌민소조는 일목료연하게 분조가 되여있었고 매 촌민의 정보가 빼곡히 들어있었다. 또한 휴대폰으로 사이트를 가장 빨리 열 수 있는 바코드를 설치해 시간을 단축하고 편리를 제공했으며 언제 어디서나 즉석에서 손쉽게 정보를 수록, 검색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그는 혁신적인 사유와 선진적인 기술 실천으로 마을 주둔 사업대들의 편리를 도모해 업무효률이 크게 높아지기도 했다.
“고향에 돌아왔지만 여전히 아이 곁을 지켜주지 못해요.”
고향에 돌아왔는데도 그는 여전히 아이와 떨어져 지내고 있다. 주말마다 아이와 만나 놀아주겠다던 약속도 세주일째 지키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승용차로 고작 25분 거리지만 그는 마을 주둔 임무를 철저히 완수하기 위함이란다. 촌부의 공동한 노력으로 세번의 조사 확인과 식별을 거쳐 렴명촌에는 현재 빈곤호 85가구에 142명으로 대폭 줄어들기도 했다. 또한 올해 10월말까지 빈곤호가 2017년 최신 수치를 갱신하고 12월초에 모든 정밀수치를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했다.
“전원에서의 공무원 생활은 상상조차 못했죠. 그래도 고향에 돌아온 걸 후회 안합니다. 고향마을에 아직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였습니다. 비록 지금은 시간이 모자라 아이와 놀아줄 시간이 없지만 우리 촌민들이 빈곤에서 전부 해탈되면 그 때 저도 모범아빠의 자리를 돌아가려고 해요.”
든든한 아빠의 역할을 못해 아이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지만 한편으로는 빈곤퇴치 완수률에 가슴이 뿌듯해난다는 전봉씨는 말한다.
“예상했던 것과 많이 다른 저의 직장생활이지만 빈곤해탈 실현을 곧 눈앞에 두고 있는 촌민들과 사업대 대원들은 꼭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거든요.”
취재를 마치면서도 유난히 그의 낡은 팔토시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오늘도 굽이진 촌마을 길을 따라 걸으며 해볕에 그을가 얇은 팔토시를 착용했으면서도 자신은 진정한 나무가 되여 촌민들의 서늘한 그늘이 되여주고 있었다.
/길림신문 김영화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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