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춘시에서 조선족들이 결혼식과 회갑연을 올리거나 큰 행사를 치를 때면 장춘시명계식품유한회사에서는 빠짐없이 순대, 찰떡 등 조선족 전통음식을 제공한다. 음식에서 인정이 오간다고 여기서 조선족과 조선족사회를 위해 자기의 저그마한 성의를 보여주려는 명계식품회사 계영철 사장의 모습이 돋보인다.
행사뿐만이 아니다. 로인협회나 학교측에 감사하다는 의미로 무작정 음식을 들고 가는 계영철이다. 요즘 심심풀이로 사양하고 있는 토종닭들도 계영철의 착한 마음을 담고 이웃에 무료로 전해지고 있다.
올해로 15년째 식품제조업계에서 분투하면서 자리를 잡은 명계식품이지만 기타 자수성가했던 기업인들과 다를 바가 없이 계영철도 처음에는 역시 단돈 몇푼으로 창업을 시작했다.
두살에 가정의 기둥이던 아버지가 돌아가고 19살 나던 해에는 어머니까지 반신불수로 들어눕다나니 젊은 계영철의 어깨에 놓인 짐은 산처럼 무거웠다.
게다가 기업을 해본 경험도 없고 손에 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계영철에게 남은 것이란 오직 젊은 나이뿐이였다. 사실 그에게는 젊은 나이가 엄청 큰 자산이였다.
남들이 식당을 해서 돈을 버는데 나라고 못할가? 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1989년, 28살의 총각 계영철은 여기저기서 500원, 1000원씩 꾸어 겨우 오천원을 장만해가지고 대련에 가서 음식점을 꾸렸다.
그런데 음식점 운영은 생각과는 판판 달랐다. 반년 남짓이 운영하고 보니 수익이 별로 없었다. 더 이상 운영하다간 본전마저 까먹을 형편이였다. 아쉬운 대로 음식점을 그만 접고 집으로 돌아왔다.
“리자를 계산해주기로 하고 돈을 꿨는데 본전도 겨우 갚는 신세가 되였습니다. 그래도 다들 저의 처지를 동정해주면서 리해해주니 고마웠습니다.”
그후 계영철은 심양에서 보이라공으로 있으면서 배연기를 만들어 팔기도 했고 막로동도 하면서 최하층 인간수업을 체험했다.
”그때 저희 앞집에 살던 아주머니가 떡을 만들어 팔더군요. 잘하면 돈을 많이 벌 것 같았습니다.”
그 때로부터 계영철은 떡에 대해 애착을 가지게 되였고 떡으로 창업해보려고 작심했다. 심양에서 1년 가까이 갖은 고생을 겪고나서 고향인 장춘에 돌아와서는 가슴속에 품었던 떡 창업을 시도해보았다.
집에서 7-8키로메터 떨어진 장춘백화점 부근을 삼륜차로 액화가스며 쌀이며 날라서는 현장에서 직접 떡을 쳐서 팔았다.
“거기서 정말 잘 팔렸지요.”라고 계영철은 웃으며 말했지만 그 웃음 뒤에 어쩔 수 없었던 그 때의 아쉬움이 그대로 묻어나왔다. 비가 오면 못 나가, 바람이 불면 못 나가, 추우면 못 나가 그러다 보니 진작 떡을 팔 수 있는 날은 손꼽을 수 있었고 못 나가는 날이면 그 동안 모았던 돈을 까먹게 된다. 그래서 계영철은 떡장사를 접고 말았다.
계영철은 그렇게 또 몇년을 장춘의 여기저기서 막로동을 하면서 생계를 근근히 유지했다. 그러다가 2003년에 계영철은 자신의 전부 재산인 몇백원을 들고 아계식품가공부를 꾸렸다. 자금이 딸리는터라 떡국을 만드는 기계마저도 지인을 통해 외상으로 매입했다. 그렇게 자그만한 가정집에다 떡국 기계를 앉히고 떡국을 가공해 자전거에 싣고 장춘시내의 조선족들이 산다는 골목과 조선족음식점을 일일히 찾아다닌면서 팔았다.
처음에는 하루에 십원어치도 못 팔 때가 있었다. 심지어 그냥 맛을 보라고 무료로 주면서 홍보까지 했다. 배를 굶어가면서, 악렬한 날씨를 이겨내면서 애쓴 보람으로 두달만에 오토바이를 사게 되였고 또 그뒤로 10개월이 지나 5,000원을 주고 중고차를 갖추게 되였다.
계영철은 명계식품이 성공하기까지는 자기의 부지런한 노력을 빼놓을 수 없지만 또 다른 한면으로는 좋은 분들을 만났기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처음에 전통음식으로 창업을 시작하기로 했지만 기술도 없었고 주변에 도와줄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조선족이 많은 연길에 가면 기술을 배울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무작정 순대와 떡을 만드는 기술을 배우려고 직원들을 거느리고 연길 서시장을 찾아갔다.
운도 좋았는지 서시장에서 떡을 파는 한 할머니를 만나게 되였다. 무턱대고 떡을 만드는 기술을 가르쳐 달라는 귀찮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씨 착한 그 할머니도 그냥 며칠간 떡 가공 기술을 배워주었다.
기술을 다 배웠다고 생각한 계영철은 돌아와서 그대로 해보았지만 도무지 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그 서시장 떡집 할머니가 갑자기 장춘에 나타났다. 그 할머니는 일주일 동안이나 계영철이네 집에 머물면서 계영철에게 차근차근 기술을 가르쳐 끝내 자기절로 합격된 제품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계영철은 너무도 고마워 그 할머니에게 사례비로 2,000원을 드렸지만 할머니는 극구 사양했다. 그는 돈 때문이라면 아예 오지도 않았을거라고 말하면서 오히려 계영철더러 열심히 일해 큰 식품기업을 일떠세우라고 당부했다.
기자가 명계식품이 성공하게 된 비결에 대해 묻자 계영철은 부지런한 노력, 힘들 때 도움을 주는 지인외에 음식의 품질 안전이라고 대답했다.
“품질을 보장하는 것이 모든 장사군들이 가져야 할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계영철은 이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경영리념에 대해 풀이했다.
현재 명계식품에 들어가는 매 한가지 원자재는 모두 엄선된 재료들이다. 훌륭한 원자재에 갖은 정성을 다해 소비자들이 만족해하는 전통음식을 만드는 것이 명계식품의 경영리념이란다.
“올해에 200만원을 투입했습니다.”
계영철은 올해로 15년 째 경영하면서 벌어들인 돈 200만원을 전부 공장의 확대생산에 투입했다. 기계도 전부 한국에서 수입했다. 가공 공예는 더는 말할 나위가 없이 좋으며 품질이나 맛도 조선족들의 구미에 맞는다.
현재 회사는 1,100평방메터의 공장건물에서 10명의 숙련공을 거느리고 규모생산을 하고 있다.
회사에서 생산한 민속음식은 동북3성은 물론 북경이나 연태 등 조선족 산재지역에서도 주문이 뒤따르고 있다.
명계식품은 연길시 미스터닭갈비와 오래동안 거래를 하고 있다. 계영철의 소개에 따르면 미스터닭갈비에서 자신의 요구에 부합되는 떡국을 찾고저 많은 지역을 다녀봤지만 명계식품의 떡꾹을 초월하는 제품을 보지 못했다. 그렇게 시작한 거래가 몇년을 이어 왔고 매번의 거래도 톤단위이다.
“아직도 많이 부족합니다. 더 많은 아이디어가 있기는 하지만 재력이 제한되여 감히 벌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의향이 있는 분들은 언제든지 련락하세요. 같이 꿈을 키워갑시다.”
계영철은 이렇게 말하면서 함께 손잡고 더 큰 미래를 펼쳐나갈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주었다.
/길림신문 유경봉, 정현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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