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아름다운 추억]연서거리, 연서교의 어제와 오늘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10월23일 14시57분    조회:1115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34)

▩리호송(연길)

 

필자 리호송

연서거리와 연서교는 연길에서 차량과 시민들로 늘 붐비는 주요한 거리의 하나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기억에 희미해질 정도로 몇년에 한번 거닐가 말가한 거리였다.

 

헌데 2014년 6월, 시가지 중심에 자리 잡고 있던 단위가 연길공항 부근으로 이사 가면서부터 나는 매일 29선 공공뻐스를 타고 출퇴근하게 되였다. 뻐스가 연서거리와 연서교를 달릴 때마다 차창 너머로 언뜻언뜻 스쳐지나는, 길 량옆에 쭉 늘어선 우람진 소나무와 그 사이에 펼쳐진 원림록화대, 즐비하게 들어선 아빠트의 정경을 눈 주어 바라보면서 추억에 빠질 때가 많다.

이 거리와 다리는 지난 세기 70년대 말기에 탄생하여 41년 좌우의 력사를 가지고 있는데 연길의 남과 북을 련결하는 주요한 교통 중추이다. 전에 이 거리의 제일 높은 집은 연길방직공장 종업원 아빠트로서 고작 4층이였다. 지금은 10층 이상 현대화한 아빠트가 즐비하게 들어섰다. 전에 비하면 천지개벽의 변화를 가져왔다.

한 도시의 아름다움은 낮에는 도시의 원림록화가 잘되였는가를 보고 밤에는 불빛세계를 보고 판단할 수 있다. 민족 특색이 다분한 가로등, 서양식 뻐스 정차장, LED등으로 장식된 연서교, 아롱다롱 채색으로 단장된 아빠트 륜곽 등띠, 모두가 연길의 밤하늘에 이채를 돋구어주며 조선족자치주 수부인 연길의 색다른 매력과 독특한 풍모를 보여준다.

연서거리와 연서교를 연길 발전의 축도라면 연길은 40여년의 개혁개방을 거쳐 천지개벽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력사와 더불어 날마다 새롭게 변모하는 연길시의 모습을 보면서 어제날의 일들이 기억의 씨앗으로 되여 마음속에서 움터오른다.

지난 20세기 70년대 중기에 연길시혁명위원회(지금의 연길시인민정부)에서는 연길시 서쪽 교외인 소영공사 공신대대와 부르하통하 남안의 장백공사 연하대대 사이에 부르하통하를 가로지나는 대형 다리 공사를 벌렸다.

그제날의 연길시는 오늘과 달랐다. 그 때는 도시라고 부르기는 했지만 시교인 공신촌 부근에는 둥그스름한 벼짚 지붕에 새하얗게 벽을 칠한 깨끗한 초가마을이 군데군데 있고 지금의 연서거리는 배추밭이였으며 그 서쪽에 연길방직공장이 금방 기둥을 박고 일떠서고 있었다. 부르하통하 남쪽 연하촌에는 부대 병영이 자리를 잡고 병영 서쪽은 푸르른 논판으로 둘러싸여있었다.

다리는 위만주국 시기 일본인들이 다리를 놓다가 기둥만 세우고 만 바로 그 동쪽에 건설공사를 시작하였다.

1976년 5월의 어느 날, 학교에서는 우리 소학교 졸업학년 학생들을 동원하여 부르하통하 강바닥에서 다리 공사에 수요되는 모래를 치고 자갈을 줏는 의무로동을 하였다. 그 때 우리 나이는 고작 12살 혹은 13살 나는 애숭이 소선대원들이였다. 그 시절 학교에는 로동자 선전대와 빈하중농 선전대가 진주해서 주로 공부를 배워주는 게 아니라 쩍하면 학생들을 조직하여 주변 생산대에 내려가 농민들을 도와 일했다. 모내기도 하고 기음도 매고 가을에는 옥수수도 뜯었을 뿐만 아니라 또 매년 연집강 바닥과 부르하통하 강바닥에 가서 전쟁준비 모래와 자갈을 치고 줏기도 하였다. 그 때는 ‘문을 열고 공부’하는 때이니 그렇게 하는 것이 례사였다.

모래 치기와 자갈 줏기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우리는 아침 일찍 집에서 준비한 도시락을 싸들고 등교하여서는 줄을 지어 부르하통하 강바닥에 이르렀다. 우리는 자체로 준미한 삽, 채, 호미, 괭이, 쪽지게, 광주리 등을 들고 소조별로 목청껏 구호를 웨치면서 너나없이 모래를 치고 자갈을 줏고 팠다. 모두들 옷이 땀에 흠뻑 젖는 것 쯤은 다반사이고 신을 신고 물속에 들어가서 자갈을 줏다 보면 물에 빠지면서 바지가 엉덩이까지 젖어오르기도 했다. 그러면 아예 바지를 벗어 목에 걸쳐메고 팬티 바람에도 신나게 일하였다. 하루간의 로동으로 모두가 기진맥진했지만 산더미 같은 모래산과 자갈산을 만든 기쁨은 컸다.

그 시절 못살아 잘 먹지 못하고 잘 입지 못하였지만 로동중에서 누구 하나 ‘노랑질’하지 않고 연길의 다리 건설에 자기의 저그마나한 힘이라도 바치겠다는 일념 뿐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절의 순진한 마음과 깨끗한 로동열정은 현재 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정신적 재부였다.

1977년 10월 1일 연신교 통차의식에서 시민들의 경축대오

이 다리는 1977년 10월 1일에 준공 개통되였는데 공복식 쌍곡 아치형 (空腹式双曲拱桥)다리로서 길이는 249메터, 너비는 19메터이다. 그중 차길 너비는 14메터이고 량켠에 각기 2.5메터 너비의 보도가 있다. 연길시에서 해방 후 처음으로 새로 건설하는 다리라고 하여 이름을 연신교(延新桥)라고 불렀다는 말도 있고 연하촌의 ‘연’자와 공신촌의 ‘신’자를 따서 연신교라고 불렀다는 말도 전해졌다.

80년대초 연길시 도시발전의 부단한 확장과 더불어 공신촌과 연길방직공장, 연변대학, 연길시비단공장, 연길시맥주공장을 포함한 서쪽구역이 연서가두 행정구역에 귀속되면서 연길시제약공장 남쪽 거리가 연서거리로 되고 1984년에 연신교를 연서교로 개칭하였다.

연서교는 그 후에 여러번 수선을 거쳤으나 아치형 다리 모양에는 변화가 없고 다리 란간이 점점 현대감이 흘러넘치게 멋지게 장식되였다.

세월이 흘러 1981년 11월 초순의 어느 날 오전, 고중에서 공부하던 우리 학생들은 오후에 연길시제약공장 남쪽 거리 량켠에(그 때는 거리의 명칭이 없었음) 가서 식수로동을 한다는 통지를 받았다. 아마 립동 전날로 기억되는데 나는 담임선생님과 초동삼에 무슨 식수 로동을 하는가고 물었다. 선생님은 소나무를 옮겨심는데 곡괭이와 삽을 준비하라면서 소나무는 다른 나무에 비하여 독특한 특성이 있어 사름률을 높이자면 나무가 동면한 초동삼에 옮겨심어야 한다고 했다. 게다가 소나무는 방향이 있어서 산에서 어떤 자세와 방향으로 자랐으면 옮겨심을 때에도 꼭같은 자세와 방향으로 심어야 한다면서 소나무는 옮겨심어서 3년 후에야 비로소 그 결과를 알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오후 1시경에 우리는 삽과 곡괭이를 지니고 연길방직공장 종업원 주택 부근에 도착하여 원림관리처 사업일군의 상세한 설명을 들은 후 땅을 파기 시작하였다. 겨울에 구뎅이를 파기란 쉬운 일이 아니였다. 소나무 심을 구뎅이는 넓고 깊었는데 우리는 반나절이 되여서도 구뎅이 하나를 파기 힘들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바쁘다거나 맥이 없다는 군소리 없이 해가 저문 저녁 어슬녘까지 구뎅이를 팠다. 손에 물집이 지고 어깨가 뻣뻣하고 아팠지만 그래도 뭔가 도시를 위해서 했다는 데서 자부심을 느꼈다.

이렇게 련속 이틀, 오전에는 공부하고 오후에는 구뎅이를 파고 소나무를 심었는데 그 때 심은 소나무가 무성하게 자라서 연서거리의 독특한 풍경을 이루고 있다. 연서교를 건설할 때와 소나무를 심던 그 날이 어제 같은데 어언간 각기 42년이라는 세월과 37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다. 나는 연서거리와 연서교 건설 발전과 함게 성장해왔으며 또한 개혁개방의 40여년간 연서거리와 연서교 건설 발전의 경력자, 견증자이기도 하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업에 참가한 지도 30여년이 지난 오늘, 그 때의 일을 되새기면 감개무량하다. 열정과 패기로 끓는 그 시절 우리의 저그마한 의무로동이나마 오늘날 아름다운 연길의 모습에 한몫 했다는 긍지감을 느끼면서 로동이야말로 가장 아름답고 오늘의 행복한 생활은 우리의 신근한 로동으로 바꾸어온 것이라는 도리를 터득하게 된다.

길림신문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한때 내게는 글을 쓰고 책을 읽는 일을 내놓고 별다른 취미가 따로 없었다. 같잖은 글이라도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들을 차곡차곡 글로 표현해내고 나면 모종의 희열 같은 것을 느끼군 했다. 그랬던 적이 있었다. 그런 나에게 요즘은 글을 쓰는 일이 일상이 되여버렸다. 졸업을 하고 출판사의 편집이 되고 나서, 또 지금은...
  • 2019-11-25
  • 건국 70돐 기념 특별기획: 〈일대일로의 조선족 개척자들〉(1) 글 사진/서정옥 올해 휴가는 어디로 떠날가 고민하는 나에게 남편은 지중해 남쪽 해안 나라 튀니지로 가자고 한다. 튀니지가 도대체 지구촌 어딘데? 인터넷에서 검색했다. 우리와 거의 지구 반대쪽에 있는 아프리카 최북단에 위치한 튀니지, 사하라사막이 있는...
  • 2019-11-16
  • [수기] 엄마가  준  두번째 생명 림율아 나는 우리나라 3년 자연재해시기였던 1961년 봄에 태여났다.   1959~1961년을  중국의 3년 자연재해시기 또는 3년 고난의 시기라고 한다. 이 3년 동안에 우리나라는 식량과 부식품이 극도로 결핍하여 인민들의 건강과 생명에 엄중한 해를 끼쳤다.백성들은 먹을...
  • 2019-11-14
  • 연길 세집 2017년 8월 24일 어렸을 적부터 나는 겁이 꽤 많았다. 특히 밤이 되면 변소에 가기를 그렇게 무서워했다. 그래서 항상 엄마가 아니면 아버지가 ‘보초’를 서주어야 했다. 캄캄한 시골의 재래식변소에 앉아있으면 자꾸 누군가가 뒤에 서있는 것 같고 당장이라도 밑으로부터 뭔가가 올라올 것 같은 공포...
  • 2019-11-12
  • 계림문화상 대상 수상작품 "일본에서 살기" 리홍매(일본) 머리말 1983년, 당시의 일본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내각이 ‘류학생 10만명 계획’을 세우고 세계를 향하여 일본 고등교육의 대문을 열었다. 80년대말에 이르러 활성화된 중국정부의 류학생정책으로 인하여 일본어가 널리 보급된 동북3성지역의...
  • 2019-11-12
  • 병원치료 포기 2017년 7월 21일 내 고향친구들한테는 엄마는 ‘어죽’으로 통한다. 고기잡이를 좋아하는 나, 어죽을 잘 끓이는 엄마 그래서 친구들은 우리 집에 놀러오기를 좋아했다. 놀러오면 엄마는 거의 혼자서 준비를 다해서 우리가 서쪽 강변에 나가 마음껏 천렵을 즐길 수 있도록 해주군 했다. 처음 몇번은...
  • 2019-11-11
  • “온 힘을 다해 이 아들을 한번 더 바라보던 그 눈빛”, “어느 구석을 봐도 엄마가 보이는데 어디에도 엄마가 없다는 사실이 너무 생소해 미칠 것 같았다”, “엄마 번호로 전화를 걸어본다, 엄마 위챗으로 문자를 보내본다, 잠을 자다가, 밥을 먹다가, 길을 걷다가… 엄마만 떠올리면 억...
  • 2019-11-11
  • [멀고도 가까운 문화-유체 기증](2) “무엇으로 이 은혜에 보답하겠습니까” --70년 당령(党龄)의 한춘옥 ‘마지막 공헌'으로 유체 기증을 선언   ‘한춘옥 ’이름자와 전국 통일 번호(2785)를 밝혀 발급된 건국 70돐 기념장 소장함. 기자한테 자신이 받은 건국 70돐 기념장을 ...
  • 2019-11-08
  • 편집자의 말 우리 나라에는 아직 유체 기증 사업 관련 법은 없다. 하지만 유체 기증이라는 아름다운 소행이 싹트고 있다. ‘유체 기증'은 기증인이 생전에 유체 기증 념원을 표명하고 사망 후 위탁인 혹은 집행인이 유체를 전부 혹은 부분적(장기 기증 경우)으로 의학 교수 및 연구사업에 기증하는 문명행위...
  • 2019-11-08
  • 영화 삼촌은 지난세기 50년대에 룡정 덕신중학교 학생회 회장으로 활약하면서 어린나이에 자기보다 몇살 위인 선배들앞에서 연설을 하군했는데 똑똑하다고 정평이 났으며 이름난 웅변가였다고 한다.   사진뒤면에  ...
  • 2019-11-07
  • 지난 10월 31일, 간단한 기부식이 무순1중 회의실에서 진행됐다. 료녕무공공구주식유한회사 리사장 장명상이10만원의 기부금을 빈곤대학생 손영택에게 전달했다. 장명상이 손영택에게 하는 두번째 기부다.   19세의 손영택과 그의 가정은 갖은 고난을 겪었다. 그의 누나는 13세 때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그는 선천성 ...
  • 2019-11-07
  • 어린시절 나의 장래희망은 박사가 되거나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현재 나는 박사재학중에 있고 간혹가다 비루한 솜씨로 쓴 글들을 투고하여 가뭄에 콩 나듯 지면에 내 이름을 올리면서 살고 있다. 우선 오해가 없도록 하자. 나의 현재 삶을 브리핑한 목적은 어렵사리 어릴적 꿈을 지키고 이루어낸 ‘성공신화의 주인공...
  • 2019-11-01
  • [청춘노트]  리은실(李银实) 필명 몽실(梦实). 1984년출생 2009년 연변대학에서 문학석사학위 취득. 현재 북경민족출판사 근무 최근에 글을 왜 쓰냐는 질문을 몇번 받았다. 글쎄다. 나는 글을 왜 쓸가? 언제나 먹기보단 잠자기를 우선시하는, 잠이 모든 문제해결의 열쇠라 생각하는 ‘잠보’가 잠을 포기하...
  • 2019-10-26
  • 지난 8월 29일, 나는 흑룡강성 계서시 계동현 계림조선족향에서 펼쳐진 약선(药膳)강습행사를 마치고 50년 만에 다시 그리운 북대황 기러기섬(雁窝岛)으로 향했다. 기러기섬은 바로 50년전인 1969년 3월에 가서 1973년 3월까지 내가 청춘열정을 쏟아부어 벼농사를 개척한 정든 고장이다.   1962년 6월 22일, 국무원...
  • 2019-10-22
  • 지난 10월 19일, 연길시도시건설투자그룹유한회사(대서양공관대상)에서 주최하고 공청단연변주위, 연변사회조직관리국, 연변9.3애심공익협회에서 주관한 “대서양공관대상 애심입쌀 3만근 전달”식이 연변체육관에서 펼쳐졌다.   10월 17일은 여섯번째로 되는“전국 빈곤층 부축의 날”이다.&nbs...
  • 2019-10-21
  • 백세 시대인 요즘엔 칠십나이는 삶의 지혜를 빛내는 황금 시절이고 삶을 새롭게 시작하는 두번째 봄이다. 공화국 창립과 동갑인 나의 칠십년 인생을 되돌아보노라면 어린시절과 그림같은 고향의 풍경이 내 머리 속에서 파노라마처럼 떠오른다. 나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된 해에 두만강 상류인 화룡현 로과향 흥남촌에서 ...
  • 2019-10-18
  • #예로부터 결혼은 인륜지대사로 꼽혔다. 그러나 점점 결혼을 늦게 하는 만혼인구 증가률이 상승하고 지어 독신주의를 선언하는 비혼족이 생겨나는 등 시대가 변하면서 요즘 세대들의 결혼관 또한 빠른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했다. 그 변화와 더불어 관점의 충돌로 인한 갈등 또한 항상 존재해 왔다. 다름 아닌 “...
  • 2019-10-12
  • "더 기다려주다가는 혼자 사는 게 더 편하다고 할가봐 걱정돼서 달려왔죠."  "급해하는 엄마 마음 리해가 돼서 함께 왔어요."... 결혼에 대한 인식이 다양해지다 보니 만혼 인구도 점차 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결혼 적령기 자녀와 부모의 ‘결혼에 관한 론쟁’도 항상 이슈로 떠오른다. “자식의 결...
  • 2019-10-08
  • - 글 / 국하 -       (흑룡강신문=도쿄) 알람 소리에 따르릉, 이불을 개는 소리 착착, 창문을 여는 소리 찰칵, 바람이 속삭이는 소리 살살, 웃집에서 걸음을 걷는 소리 쿵쾅쿵쾅, 수도물이 내려오는 소리 쏴쏴... 내 마음이 오늘도 힘내라고 하는 소리 뿅뿅.   찌르륵 찌르륵 계란후라이 지지는 소리와 같이...
  • 2019-09-24
‹처음  이전 3 4 5 6 7 8 9 10 11 12 13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