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34)
▩리호송(연길)
필자 리호송 |
헌데 2014년 6월, 시가지 중심에 자리 잡고 있던 단위가 연길공항 부근으로 이사 가면서부터 나는 매일 29선 공공뻐스를 타고 출퇴근하게 되였다. 뻐스가 연서거리와 연서교를 달릴 때마다 차창 너머로 언뜻언뜻 스쳐지나는, 길 량옆에 쭉 늘어선 우람진 소나무와 그 사이에 펼쳐진 원림록화대, 즐비하게 들어선 아빠트의 정경을 눈 주어 바라보면서 추억에 빠질 때가 많다.
이 거리와 다리는 지난 세기 70년대 말기에 탄생하여 41년 좌우의 력사를 가지고 있는데 연길의 남과 북을 련결하는 주요한 교통 중추이다. 전에 이 거리의 제일 높은 집은 연길방직공장 종업원 아빠트로서 고작 4층이였다. 지금은 10층 이상 현대화한 아빠트가 즐비하게 들어섰다. 전에 비하면 천지개벽의 변화를 가져왔다.
한 도시의 아름다움은 낮에는 도시의 원림록화가 잘되였는가를 보고 밤에는 불빛세계를 보고 판단할 수 있다. 민족 특색이 다분한 가로등, 서양식 뻐스 정차장, LED등으로 장식된 연서교, 아롱다롱 채색으로 단장된 아빠트 륜곽 등띠, 모두가 연길의 밤하늘에 이채를 돋구어주며 조선족자치주 수부인 연길의 색다른 매력과 독특한 풍모를 보여준다.
연서거리와 연서교를 연길 발전의 축도라면 연길은 40여년의 개혁개방을 거쳐 천지개벽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력사와 더불어 날마다 새롭게 변모하는 연길시의 모습을 보면서 어제날의 일들이 기억의 씨앗으로 되여 마음속에서 움터오른다.
지난 20세기 70년대 중기에 연길시혁명위원회(지금의 연길시인민정부)에서는 연길시 서쪽 교외인 소영공사 공신대대와 부르하통하 남안의 장백공사 연하대대 사이에 부르하통하를 가로지나는 대형 다리 공사를 벌렸다.
그제날의 연길시는 오늘과 달랐다. 그 때는 도시라고 부르기는 했지만 시교인 공신촌 부근에는 둥그스름한 벼짚 지붕에 새하얗게 벽을 칠한 깨끗한 초가마을이 군데군데 있고 지금의 연서거리는 배추밭이였으며 그 서쪽에 연길방직공장이 금방 기둥을 박고 일떠서고 있었다. 부르하통하 남쪽 연하촌에는 부대 병영이 자리를 잡고 병영 서쪽은 푸르른 논판으로 둘러싸여있었다.
다리는 위만주국 시기 일본인들이 다리를 놓다가 기둥만 세우고 만 바로 그 동쪽에 건설공사를 시작하였다.
1976년 5월의 어느 날, 학교에서는 우리 소학교 졸업학년 학생들을 동원하여 부르하통하 강바닥에서 다리 공사에 수요되는 모래를 치고 자갈을 줏는 의무로동을 하였다. 그 때 우리 나이는 고작 12살 혹은 13살 나는 애숭이 소선대원들이였다. 그 시절 학교에는 로동자 선전대와 빈하중농 선전대가 진주해서 주로 공부를 배워주는 게 아니라 쩍하면 학생들을 조직하여 주변 생산대에 내려가 농민들을 도와 일했다. 모내기도 하고 기음도 매고 가을에는 옥수수도 뜯었을 뿐만 아니라 또 매년 연집강 바닥과 부르하통하 강바닥에 가서 전쟁준비 모래와 자갈을 치고 줏기도 하였다. 그 때는 ‘문을 열고 공부’하는 때이니 그렇게 하는 것이 례사였다.
모래 치기와 자갈 줏기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우리는 아침 일찍 집에서 준비한 도시락을 싸들고 등교하여서는 줄을 지어 부르하통하 강바닥에 이르렀다. 우리는 자체로 준미한 삽, 채, 호미, 괭이, 쪽지게, 광주리 등을 들고 소조별로 목청껏 구호를 웨치면서 너나없이 모래를 치고 자갈을 줏고 팠다. 모두들 옷이 땀에 흠뻑 젖는 것 쯤은 다반사이고 신을 신고 물속에 들어가서 자갈을 줏다 보면 물에 빠지면서 바지가 엉덩이까지 젖어오르기도 했다. 그러면 아예 바지를 벗어 목에 걸쳐메고 팬티 바람에도 신나게 일하였다. 하루간의 로동으로 모두가 기진맥진했지만 산더미 같은 모래산과 자갈산을 만든 기쁨은 컸다.
그 시절 못살아 잘 먹지 못하고 잘 입지 못하였지만 로동중에서 누구 하나 ‘노랑질’하지 않고 연길의 다리 건설에 자기의 저그마나한 힘이라도 바치겠다는 일념 뿐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절의 순진한 마음과 깨끗한 로동열정은 현재 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정신적 재부였다.
1977년 10월 1일 연신교 통차의식에서 시민들의 경축대오
이 다리는 1977년 10월 1일에 준공 개통되였는데 공복식 쌍곡 아치형 (空腹式双曲拱桥)다리로서 길이는 249메터, 너비는 19메터이다. 그중 차길 너비는 14메터이고 량켠에 각기 2.5메터 너비의 보도가 있다. 연길시에서 해방 후 처음으로 새로 건설하는 다리라고 하여 이름을 연신교(延新桥)라고 불렀다는 말도 있고 연하촌의 ‘연’자와 공신촌의 ‘신’자를 따서 연신교라고 불렀다는 말도 전해졌다.
80년대초 연길시 도시발전의 부단한 확장과 더불어 공신촌과 연길방직공장, 연변대학, 연길시비단공장, 연길시맥주공장을 포함한 서쪽구역이 연서가두 행정구역에 귀속되면서 연길시제약공장 남쪽 거리가 연서거리로 되고 1984년에 연신교를 연서교로 개칭하였다.
연서교는 그 후에 여러번 수선을 거쳤으나 아치형 다리 모양에는 변화가 없고 다리 란간이 점점 현대감이 흘러넘치게 멋지게 장식되였다.
세월이 흘러 1981년 11월 초순의 어느 날 오전, 고중에서 공부하던 우리 학생들은 오후에 연길시제약공장 남쪽 거리 량켠에(그 때는 거리의 명칭이 없었음) 가서 식수로동을 한다는 통지를 받았다. 아마 립동 전날로 기억되는데 나는 담임선생님과 초동삼에 무슨 식수 로동을 하는가고 물었다. 선생님은 소나무를 옮겨심는데 곡괭이와 삽을 준비하라면서 소나무는 다른 나무에 비하여 독특한 특성이 있어 사름률을 높이자면 나무가 동면한 초동삼에 옮겨심어야 한다고 했다. 게다가 소나무는 방향이 있어서 산에서 어떤 자세와 방향으로 자랐으면 옮겨심을 때에도 꼭같은 자세와 방향으로 심어야 한다면서 소나무는 옮겨심어서 3년 후에야 비로소 그 결과를 알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오후 1시경에 우리는 삽과 곡괭이를 지니고 연길방직공장 종업원 주택 부근에 도착하여 원림관리처 사업일군의 상세한 설명을 들은 후 땅을 파기 시작하였다. 겨울에 구뎅이를 파기란 쉬운 일이 아니였다. 소나무 심을 구뎅이는 넓고 깊었는데 우리는 반나절이 되여서도 구뎅이 하나를 파기 힘들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바쁘다거나 맥이 없다는 군소리 없이 해가 저문 저녁 어슬녘까지 구뎅이를 팠다. 손에 물집이 지고 어깨가 뻣뻣하고 아팠지만 그래도 뭔가 도시를 위해서 했다는 데서 자부심을 느꼈다.
이렇게 련속 이틀, 오전에는 공부하고 오후에는 구뎅이를 파고 소나무를 심었는데 그 때 심은 소나무가 무성하게 자라서 연서거리의 독특한 풍경을 이루고 있다. 연서교를 건설할 때와 소나무를 심던 그 날이 어제 같은데 어언간 각기 42년이라는 세월과 37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갔다. 나는 연서거리와 연서교 건설 발전과 함게 성장해왔으며 또한 개혁개방의 40여년간 연서거리와 연서교 건설 발전의 경력자, 견증자이기도 하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업에 참가한 지도 30여년이 지난 오늘, 그 때의 일을 되새기면 감개무량하다. 열정과 패기로 끓는 그 시절 우리의 저그마한 의무로동이나마 오늘날 아름다운 연길의 모습에 한몫 했다는 긍지감을 느끼면서 로동이야말로 가장 아름답고 오늘의 행복한 생활은 우리의 신근한 로동으로 바꾸어온 것이라는 도리를 터득하게 된다.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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