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38)
▩김민철(연길)
하향 50주년 기념모임에서 수기 〈첫걸음〉을 발표하는 필자 김민철 |
1968년 8월 9일, 사회진출의 첫걸음은 내 평생 잊지 못할 날이다.
그 날 우리 16명 동창들은 앞가슴 넘치는 붉은꽃을 달고 연변탄광 지도자들과 부모형제들의 열렬한 배웅을 받으며 광활한 천지로 달려갔다. 이는 우리의 인생궤도를 바꿔놓는 첫걸음이였다. 그 때로부터 우리의 야들야들한 손에는 연필 대신 굵직한 호미자루가 쥐여졌고 섬약한 어깨에는 책가방 대신 묵직한 낟알마대가 자리매김했으며 앞에 놓인 길은 더는 평탄하고 널직한 등교길이 아닌 무수한 걸림돌과 가시덤불로 뒤덮인 험준한 산악길이였다.
우리를 실은 해방표 자동차는 마치 미지의 앞날에 신비감을 더해주려는듯 뽀얀 먼지를 날리며 쏜살같이 내달린다. 차 우는 벌써 흥분에 넘친 18, 19세 철부지들의 오락판이다. ‘인기’가수 방응록과 김학석의 〈논물관리원〉,〈범진령〉 등 건드러진 노래가락이 련속 터지자 학교 선전대 활약분자들이였던 김명철, 장덕선, 리경자의 멋진 춤이 따른다. 환락의 도가니였다.
우리가 웃고 떠들며 도착한 곳은 화룡현 룡수공사 화수 7대였다. 30여호 살고 있는 이 마을은 화수골안 막바지에 자리잡은 두메산골이다. 우리를 바래여 따라왔던 몇몇 부모님들은 회칠도 하지 않은 초라한 초가집이며 누더기 걸치고 담배조리하는 초췌한 농촌아낙네들, 이곳저곳에 마구 널린 소똥무지를 보고는 상심의 눈물을 흘리며 돌아갔다.
그래도 우린 좋았다. 웃고 떠들며 주위의 환경에는 누구도 그닥 관심이 없었다. 저녁무렵 촌사에서 처음이라는 성대한 환영의식을 가졌다. 온 동네 남녀로소가 모여 벌린 술판, 춤판이 또 한번 우리를 격동시켰다.
그런데 저녁 내가 류숙하기로 된 로대장 리윤수 아바이 집에 들어서며 나는 무언가 부족함을 느꼈다. 전기가 없는 것이였다. 리아바이 말에 의하면 전기 외선은 이미 마을 앞까지 늘였지만 생산대의 자금난으로 집집의 전기를 이어놓지 못했단다. 순간 나는 친구들에게 미안했다. 이곳은 내가 대표로 되여 선정한 곳이니깐. 당시는 하향운동의 초기여서 룡수공사에는 이곳을 제외하고 16명이나 되는 대부대를 받겠다는 생산대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이곳을 정했지만 전기가 없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한 것이였다.
그 날 밤 우리는 희미한 석유등잔 아래서 늦도록 이야기하다 잠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석유연기에 그을린 우리의 코구멍은 석탄굴을 방불케 하였다.
우리가 시작한 처음 일은 녀자애들은 담배잎 따기, 남자애들은 집체호 짓기 토역일이였다. 생산대에서는 우리의 안치비용을 절약하려고 초가집을 짓기로 결정했다. 우선 기둥을 세우고 수수대로 외를 엮은 다음 흙을 이겨 벽을 바르면 되였다. 시간 단축을 위하여 우리를 포함한 생산대의 중로동력이 총동원되여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일을 다그쳤다.
집체호 식구들이 투도에 영화구경을 갔다가 남긴 기념사진(앞 오른쪽 첫 사람 필자)
고된 로동에 시달려 우리는 저녁만 되면 잠자리 찾기가 바쁜데 그 때는 무슨 놈의 회의가 그렇게도 많은지 거의 매일이다 싶이 밤중까지 회의였다. 번마다 졸려서 꺼덕꺼덕하다 나니 무슨 내용이였는지 아무런 기억도 없다.
우리의 손바닥은 누구나 없이 물집투성이였고 어떤 애들은 지쳐 앓아눕기까지 했다. 다행히 탄광에서 자란 우리는 집에서도 일을 적잖게 했던 덕에 용케도 견뎌냈다. 그래도 난 친구들의 지친 모양에 마음이 무겁고 불편했다.
집체호 짓기가 마무리될 무렵 대대 안호은 주임의 제의로 안주임, 김희철 대장, 나까지 셋이서 전기문제를 해결하려고 연변탄광당위 김룡운 서기를 찾아갔다. 형편을 듣고난 김서기는 우리 광산의 자식들을 까막나라에서 살게 할 수는 없다면서 며칠 안으로 생산대의 전기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 답복했다. 전기가 들어오던 날 지식청년들 덕분에 생산대에서 돈 한푼 팔지 않고 전기를 들여왔다며 기뻐 야단이던 김대장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약 한달 남짓한 분투 끝에 200여평방 되는 집체호가 마을 중심에 덩실 솟았다. 이 때로부터 우리 16명은 한집식구가 되여 본격적인 살림살이를 하게 되였다.
처음 경험이 없는 우리는 밥 짓는 일을 당연히 녀자애들 몫으로 여겨 주방일은 녀자애들에게 도맡겼다. 그런데 생산대 일도 할라니 밥도 지을라니 녀자애들은 눈코 뜰 사이도 없었다. 더우기 키가 부엌높이 만한 똘똘이 구순복씨는 멜대로 물을 길을라 치면 설상가상이였다. 앞뒤 물통이 번갈아 땅에 부딪치며 물을 흘려 집에 오면 반통도 남지 않았다.
당시 집체호의 다섯처녀 |
밥 짓는 문제는 해결됐지만 먹거리가 큰 난제였다. 비록 하향 첫해에 나라에서 식량을 공급하기에 쌀은 문제가 아니였지만 채소가 큰 문제였다. 가끔 공사마을에서 채소를 사오고 일부 인심 좋은 동네분들이 종종 터밭 채소를 가져다주지만 역부족이였다.
하여 우리는 누가 간혹 집에 다녀오면 밑반찬을 가져오기로 했다. 아마 집에서 막내인 류성렬이가 제일 많이 가져온 것 같다. 근데 그는 갖고 온 먹거리를 단번에 내놓지 않고 때마다 조금씩 내놓는다. 하지만 이틀도 안돼 누가 훔쳤는지 고추장이며 썩두부들이 통채로 밥상에 버젓이 올라 삽시간에 거덜난다. 억이 막힌 성렬이는 또 누가 자기의 궤를 토벌했다고 투덜댄다. 썩 후에 알았지만 그 때 성렬이는 엿도 가져왔단다. 근데 그건 녀자애들 몫이고 남자애들은 구경도 못했다. 그래도 너무너무 감사하다. 그 때 맛들인 썩두부는 난 지금도 즐겨먹는다.
가을이 가고 초겨울이 잡아들자 우리의 채소는 더욱 문제였다. 반찬이란 다만 소금물에 삶은 멀건 무우국, 배추국이다. 이 때 동네에서 맏며느리감이라 소문이 자자한 최계순, 최량순, 김옥산 세 녀자애가 나를 보고 된장도 담그고 버려지는 쌀뜨물이 아까운데 돼지도 키우잔다. 너희들이 장을 담글 줄 아냐는 나의 물음에 그들은 장이 아니라 서슬만 있으면 두부도 앗을 자신이 있단다. 덕분에 우리는 그들이 손수 만든 천하일미 두부를 배터지게 먹은 적도 있다.
장을 담그는 날 온 집체호가 총동원되여 콩을 삶고 호미로 짓뭉개서는 메주를 빚어 새끼줄로 묶어 대들보에 달아맸다. 여기에 우스운 이야기도 있다. 설을 쇠자 5명의 상해지식청년들이 우리 집체호에 내려왔다. 첫날 대들보에 매달린 메주를 보고 호기심이 동한 그 애들이 이것이 뭔가 묻는다. 난 문득 메주를 한어로 뭐라 하는지 생각나지 않아 “콩지뢰”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폭발하냐고 또 묻는다. 난 머리에 떨어져 폭발하면 너희들은 끝장이라 했더니 그들은 슬금슬금 자리를 피해 앉는다.
우리가 키운 돼지는 무럭무럭 잘도 자라 어느새 중돼지가 됐다. 이듬해 어느 봄날 두마리의 돼지가 우리를 뛰쳐나와 집체호 터밭을 마구 뚜져댄다. 남자애들이 총동원되여 한놈은 쉽게 붙잡아 가두었지만 다른 한놈은 어찌도 역빠른지 붙잡을 수가 없었다. 이 때 뽈차개 태종수가 쏜살같이 뒤다리를 덥석 잡았지만 돼지가 죽기로 용 쓰는 탓에 돼지의 뒤다리가 뚝 부러졌다. 종수는 놀란 나머지 눈이 휘둥그래져서 어쩔 바를 모른다. 이 때 김대장이 언제 왔는지 “잘됐어. 온 동네가 군을 떼게 됐다.”며 즉시로 공사에 사람을 띄워 도살비준을 받아왔다. 덕분에 우리는 돼지고기 한사발씩 게눈 감추듯 맛나게 먹었다. 별미였다! 지금 생각해도 군침이 돈다.
화수골에는 메돼지도 많았다. 어느 하루 나와 허영일이가 나무하러 산에 올랐다. 중간쉼을 하는데 약 30메터 앞에서 메돼지 한마리가 슬렁슬렁 오더니 가둑나무 아래에 벌렁 누워 잠자면서 떠날 념을 하지 않았다. 이 때 영일이가 귀속말로 자기 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소는 범과 싸워도 이긴다면서 소를 내몰아 메돼지를 잡잔다.
그 말을 곧이들은 나는 소고삐를 잡고 영일이는 큼직한 돌멩이 하나를 들고 메돼지를 향해 살금살금 다가갔다. 근데 메돼지와 10여메터 가까이에 이르자 소는 떡 버티고 서서 엉덩이를 아무리 밀어도 씩씩거리며 꼼짝도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내가 소를 돌리는 순간 영일이가 돌멩이를 던졌다. 놀란 메돼지는 벌떡 일어서더니 우리 코앞으로 쏜살같이 도망갔다.
그 때 나는 난생처음으로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느낌을 체험했다. 그래도 영일이는 씁쓸해서 우리 아버지도 거짓말할 줄 아는구나 한다며 너스레를 떤다. 그러고 보니 세상에서 믿을 놈이 과연 없는 것 같았다.
당시 지식청년들에게는 ‘족제비’라는 딱지가 붙어있었다. 즉 닭 훔치는 족제비 맞잡이라는 데서다. 그러나 모범집체호인 우리는 실수로 닭을 잡아먹은 적은 있어도 훔친 일은 한번도 없다.
어느 날 저녁 뜨락에서 몇이 한담하는데 리철원이가 낮에 소방목하다가 닭무리가 귀찮게 굴어 무심히 돌멩이를 뿌렸는데 닭 한마리가 맞아죽어 겁 먹고 숲속에 감춰놨단다. 이게 웬 떡이냐? 난 당장 찾아오라고 했다. 이윽고 철원이가 마대에 닭을 둘둘 감고 왔다. 다른 애들이 잠들기를 기다려 몇이서 닭을 끓이고 ‘백계연’을 벌렸다.
공교롭게도 이 때 생산대 청년 리정수가 집체호 앞을 지나다 구수한 냄새를 맡고 문을 뚝 떼고 불쑥 들어왔다. 방법없이 함께 먹어야 했다. 그리고 남과 말하면 안된다고 재삼 당부했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정수가 하는 말이 어제 먹은 닭이 자기 집 거란다. 아침에 엄마가 수탉 한마리가 잃어졌다고 부산 떠는데 우리가 먹었다는 말을 차마 못하고 족제비가 먹었겠다고 말했단다. 다행이다. 모범집체호의 체면도 세웠고 닭도 공짜로 먹었으니 이거야말로 꿩 먹고 알 먹기이다.
세분의 선생님을 모시고 남긴 하향 50주년 기념 집체사진
1969년 6월 20일 화수골에는 꿩알 만큼한 우박을 동반한 특대 폭우가 반시간 가량 쏟아졌다. 삽시에 집채 같은 산홍수는 아름드리 나무를 송두리채 뽑았고 모내기를 갓 마친 논밭은 평지로 변했으며 한전의 곡식들은 앙상한 줄거리만 남았다. 농사가 거덜난 판이다.
이 홍수로 1대에서는 공소사 영업원 양금월 등 4명의 처녀애들이 목숨을 잃었다.
우리 7대의 일년농사는 겨우 3, 4개월 민식을 해결할 정도였다. 하향 1주년이 넘은 우리도 나라식량 공급이 끊기자 사원들과 마찬가지로 반소량(返销粮)을 먹어야 했다. 구제량은 곰팡이가 낀 통옥수수였다. 이런 옥수수로 밥을 지어서는 뜬 냄새가 지독하여 당초 먹을 수가 없었다. 하여 녀자애들은 옥수수를 물에 하루씩 담그어 곰팡이 냄새를 얼마간 제거한 후 촌의 발방아로 가루를 내여 옥수수떡을 만들었다. 당시 소다까지 긴장한 때라 떡은 돌멩이 마냥 굳었다.
녀자애들은 갖은 방법을 다해 우리의 식욕을 돋구려 애썼다. 떡은 손가락 두께 만큼 저미여 마치 맛나는 빵처럼 그릇에 곱게 쌓았다. 시각상의 미감으로 식욕을 자극하려는 것이다. 너무도 감격한 일이라 남자애들은 먹기 바쁜 대로 한두점씩 억지로 더 먹군 했다. 그 애들의 정성을 생각할 때마다 그들이 지은 밥을 한번 더 먹고 싶은 생각도 가끔 난다.
이런 와중에 우리는 틈틈이 오락판도 벌렸다. 오락이 시작되면 활보인 명철이가 대야에 물을 반 쯤 붓고 바가지를 엎어놓으면 세상에 둘도 없는 장단이고 예술에는 문외한인데 곡만은 어물쩍하게 넘기는 성렬이의 하모니카는 피아노도 무색하며 덕일, 영일, 철원이가 제멋대로 뽑아내는 노래는 가무단 가수의 화성 3인창도 울고 간다. 과연 철부지 때가 좋았다. 우리에게는 고생타령은 잠간이고 쾌락만은 영원한 것이였다.
1970년대 중반 우리 연변탄광에서는 로동자 모집이 시작되여 몇번에 걸쳐 9명의 남자애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나와 리성종이만 남았다. 너무도 조용하고 고독했다.
그 해 10월 또 한차례의 로동자 모집이 있었다. 고독에 시달리던 나는 대대 손서기의 극구 만류도 마다하고 떠나기로 작심했다. 그런데 먼저번 모집에서 체중 부족으로 불합격인 성종이가 걱정이였다. 신체검사 하는 날 나는 미리 체중 측정 상황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체중검사는 옷을 입은 채로 앉은뱅이 큰 저울로 측정하였다.
수가 생겼다고 나는 다짜고짜로 성종이를 이끌고 룡수역으로 달려가 철길 밑 받침용 철판 두개를 주어 혁띠와 신끈으로 성종이의 배와 허리에 꽁꽁 동여매고 웃옷을 입히니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검사는 무사히 통과됐다. 그의 체중은 백근을 금방 넘겼다.
여전히 시름놓을 수 없는 그는 만약 이번에도 합격을 못하면 자기 혼자 어떻게 집체호에 남는가며 고민이였다. 난 이런 성종이가 안스러워 만약 네가 합격 못하면 나도 안 가겠다고 했더니 그도 시름을 좀 놓았다. 한달 후 합격통지서가 왔다. 그 날 둘은 거나하게 술도 많이 마셨다.
우리가 떠나는 날 남아있는 녀자애들과 상해애들이 동구밖까지 따라나왔다. 나의 손을 꼭 잡고 잘 가라고 인사하는 상해애들 눈에는 눈물이 고였고 나의 눈시울도 뜨거웠다. 그 애들의 눈물에는 리별의 설음도 있지만 자신들의 막막한 앞날에 대한 걱정과 슬픔이 더 많았을 것이다. 순간 나는 전쟁터에서 도망가는 ‘도주병’인 느낌에 기쁨이 가뭇없이 사라졌다. 나의 3년간 집체호 생활은 이렇게 끝났다.
고생은 헛되지 않았다. 우리는 그 곳에서 많은 무형재산을 물려받았다. 구수한 흙냄새에서 거짓 모르는 땅의 진실을 배웠고 역경 속에서 삶의 지혜를 터득했으며 농민들의 소박한 품성에서 참된 인간의 진맛을 깨달았다. 자랑스러운 것은 찌는듯한 뙤약볕에 벗겨진 한벌 또 한벌의 껍질을 영원한 밑거름으로 제2의 고향땅에 남겼고 하나 또 하나의 저수지에 뿌린 땀방울은 오늘도 생명수에 희석되여 고향의 땅을 적셔준다.
어느덧 50년이란 긴 세월이 흘러갔다. 그 기간 슬프고 유감스런 일이라면 함께 붉은꽃 달고 푸른 꿈을 키우려고 농촌으로 달려갔던 16명 형제자매중 7명이나 저세상 사람으로 되였고 살아있는 우리도 별로 해놓은 일 없이 인생의 가을을 맞게 된 것이다. 그러나 꿈은 여전하다. 해마다 이맘때 가을이 오면 고향산천에는 꿈의 상징인 들국화가 만발한다. 파아란 들국화로 단장된 저 언덕은 내 마음의 안식처이다. 우리의 꿈을 담은 저 들국화는 올해도 래년에도 곱게곱게 피여날 것이라고 나는 굳게 믿는다./길림신문
하향 50주년 기념모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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