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아름다운 추억 112] 인민대회당 건설에 땀 흘리던 나날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11월23일 00시00분    조회:1379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40)

▩최금란(대련)

 

 
텔레비죤 화면을 통하여 당대표와 인민대표, 정치협상회 위원들이 북경에 모여와 인민대회당에서 국사를 의논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솟구치는 감회를 금할 수 없다. 인민대회당을 건설하던 의무로동의 잊지 못할 나날들이 어제런듯 나의 눈앞에 펼쳐진다.

 

그것은 1958년도의 늦가을이였다. 그 때 북경에서는 국경 10주년을 앞두고 만인대강당(후에 ‘인민대회당’이라고 하였음), 중국인민혁명군사박물관, 민족문화궁, 전국농업전람관, 중국력사박물관, 중국혁명박물관, 북경로동자체육장, 조어대국빈호텔, 북경역전, 화교호텔 등10대 건물들을 짓느라고 열의충천할 때였다.

중앙국가기관들에서는 모두 이 건설장에 의무로동대군을 파견하였다. 우리 중앙인민방송국 대외부(지금의 국제방송국) 편집부문에서도 번마다 반달씩 약 30명 좌우의 편집, 방송일군들을 인민대회당 건설공사장에 파견하였다. 나도 그들중의 한사람으로 인민대회당 건설현장에 두번 나가 의무로동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아침마다 방송국에서 파견하는 전용차에 앉아 천안문광장의 서남쪽에 있는 넓은 공사장으로 갔다. 시공 현장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곳곳마다에 각종 건축용기재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첫날에 관리부문에서는 우리 매개인에게 안전모와 어깨바대를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우리는 저마다 버들로 엮은 큼직한 안전모를 눌러쓰고 웃옷 우에 어깨바대를 올려놓고 끈을 매였다. 의용을 바꾸니 대번에 우리는 막로동자로 변해버렸다. 사무실에 앉아 붓대를 끄적거릴 때는 저마다 한다는 재간둥이였지만 공사장에 나오니 그저 잡공이나 심부름군 노릇 밖에 할 수 없었다.

처음에 우리는 푸른색 오지기와를 날랐다. 처음 몇번은 그래도 괜찮았는데 해종일 기와장을 나르려니 어깨와 팔다리가 쑤셔났고 허리도 펴기 힘들어졌다. 나 같은 사람은 그래도 농촌에서 거칠게 자랐으나 우리 대외부의 방송, 편집 일군들 속에는 화교나 도시에서 자란 ‘아씨’ ‘도련님’ 출신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도 가냘픈 몸을 아끼거나 잔꾀를 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였다. 그러다가 휴식시간만 되면 너나없이 땅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아픈 팔다리를 쉬웠다. 휴식이 끝나면 또다시 기여일어나 땀을 철철 흘려가며 안깐힘을 다해서 일을 많이 잘하려고 애썼다.

이 건설장에서 하루에 일하는 사람이 무려 만명이나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그저 노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이 어느 사람에게나 할 일들이 빠듯하게 배치되여있다는 점이였다. 그 빈틈없는 로동력 조직과 배치에 실로 감탄이 갔다.

후에 우리는 또 회가루 포대를 날랐다. 뽀얗게 회가루를 뒤집어쓴 데다 땀까지 흘려서 얼굴들은 너나없이 알락고양이로 되였지만 누구도 어지럽다거나 바쁘다고 두덜거리지 않았다. 점심때가 되면 똑같이 차례지는 찐빵이나 옥수수떡 서너개에 짠지쪼각을 타서 들고는 달게 먹어대였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국경 10주년을 맞으며 북경에서 10대 건물을 짓는데 그중에서도 으뜸으로 치는 것이 인민대회당이라고 했다. 건물 수명은 적어도 350년 이상을 담보해야 한다는 주총리의 지시가 있었단다. 그러니 설계로부터 재료와 시공에 이르기까지 최선을 다해야 하였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갈 때면 기진맥진하여도 이튿날이면 또 어김없이 일터로 나갔다. 비록 보잘 것 없는 막로동을 하였지만 주총리께서 직접 지휘하시는 위대한 공정에 힘을 보태고 있다는 긍지로 하여 우리의 젊은 가슴들은 부풀어올랐다.

1959년 초여름에 두번째로 의무로동을 갔을 때는 주체공정이 일어나서 모양새가 좀 알리였다. 벽채 옆에는 숱한 선반들이 거미줄처럼 세워졌고 건물 안팎도 사람들로 법석이였다. 한 넓은 칸에선 목수들이 줄줄이 늘어서서 대패질을 하였는데 잠간 사이에 그들의 발밑에는 대패밥이 수북이 쌓였다. 나는 그 대패밥을 부지런히 쓸어내는 일을 맡아하였다.

목수든 미장공이든 전공이든 용접공이든 철공이든, 이 건축공사장의 모든 기공들은 죄다 솜씨가 출중한 공장들이였는데 전국 각지에서 뽑아왔다고 하였다. 각종 건축용 기재들도 전국각지로부터 가장 좋은 것들을 추려서 가져왔단다. 우리 장백산의 홍송도 인민대회당 건설에 한몫을 담당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만인강당의 중심에 달, 오각별 전등을 책임지고 제작 생산한 상해의 한 전구공장에서는 다 만들어놓은 그 큰 오각별 전등을 손상없이 북경에 운송하기 위해 로동자들이 자기들의 이불 32채나 가져다 싸서 보내왔다는 감동적인 사연도 전해졌다.

우리는 유리를 나르든 벽돌을 나르든 참대를 묶어 세워놓든 현장을 청소하든 자기들이 하는 모든 일을 성스럽게 여겼다. 벽돌 한장이라도 깨여질세라 조심했고 못 한대라도 땅에서 굴러다니면 주어 못통에 넣었다.

의무로동이 끝나는 날 오후였다. 우리들이 짓는 집이 도대체 얼마나 큰가 한번 돌아보고싶었다. 우리 몇몇이 울퉁불퉁하고 거치장스러운 건축현장을 다 돌기엔 기운이 역부족인데다 보았대야 아직은 무엇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저 특이한 것은 1, 2층도 채 되지 않았는데 그 웃층들, 지어 지붕까지도 동시에 일어서면서 층층마다에서 사람들이 분망히 일하고 있는 것이였다. 이것을 ‘복합식 시공방식’이라고나 할는지? 곳곳에서 목공청년돌격대, 벽돌공, 콩크리트공, 미장공 등 여러가지 공종의 청년돌격대 기발들이 펄펄 나붓기고 있었다. 아마도 이런 청년돌격대 대원들이 중책을 떠메고 앞장에 서서 온갖 난관을 물리치며 열의충천하게 일한 데서 시공진도를 크게 단축시키지 않았는가 생각되였다.

그 후의 보도에 따르면 인민대회당은 1959년 9월 10일에 완공되였다. 이렇게 방대한 인민대회당 건설공정을 10개월에 완수하였다니 실로 건축사상의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2만여명 로동대군이 밤낮없이 분전한 결과이며 전국 각지의 대폭적인 지원과도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모주석을 배석한 만리동지의 말씀이였다. 모주석께서는 “명예도 리득도 따지지 않고 일심전력으로 일한 그들에게 워낙 기념비를 세워주어야겠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 이름조차 비석에 다 써넣을 수 없으니 만인강당을 ‘인민대회당’이라고 합시다.”라고 하시였단다.

국경절이 지난 10월 8일에 인민대회당에서는 수도 10대 공정의 승리적인 준공을 경축하는 대회가 있었다. 주총리께서는 전체 건설자들에게 뜨거운 감사와 위문을 표시하였고 북경시 팽진 시장께서는 나라의 주인으로 된 건설자들의 위대한 창조력과 적극성을 높이 찬양하셨다.

인민대회당의 남북 길이는 336메터, 너비 206메터, 제일 높은 곳은 46.5메터여서 뫼산(山)자를 이루었다. 인민대회당은 크게 3개 부분으로 구성되였는데 북쪽에는 5000개 좌석이 놓여있는 연회청이고 중간은 만인대강당, 남쪽에는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의 사무청사가 있다.

만인강당은 이름 그대로 만개의 좌석이 있어 만인을 용납할 수 있는 큰 강당이다. 그 곳에는 16가지 언어를 동시에 통역, 전달할 수 있는 이어폰 설비와 도착 신고(접수), 즉석발언, 표결 등 세가지 기능을 일체화한 설비가 갖추어져 있다. 강당의 천정은 큰 오각별 등을 중심으로 주위에 500개의 등으로 만천성을 이루었는바 해바라기가 태양을 따르는 주제와 ‘수천일색, 혼연일체’의 미감을 체현하였다.

천안문의 서남쪽에 자리잡고 있는 인민대회당은 전국 여러 민족 인민들의 지성에 받들려 가장 출중한 장인들이 가장 좋은 건축재료와 가장 빠른 속도로 국사연구의 중심청사를 일떠세웠던 것이다. 우리들의 깨끗한 정성과 청춘의 땀방울도 그 곳에 스며있다고 생각하니 더욱 감개무량하다.

인민대회당은 새 중국이 걸어온 빛나는 려정을 력력히 기록해가면서 수도의 하늘을 떠이고 억만 인민들의 마음속에 거연히 솟아있으리라!

길림신문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한때 내게는 글을 쓰고 책을 읽는 일을 내놓고 별다른 취미가 따로 없었다. 같잖은 글이라도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들을 차곡차곡 글로 표현해내고 나면 모종의 희열 같은 것을 느끼군 했다. 그랬던 적이 있었다. 그런 나에게 요즘은 글을 쓰는 일이 일상이 되여버렸다. 졸업을 하고 출판사의 편집이 되고 나서, 또 지금은...
  • 2019-11-25
  • 건국 70돐 기념 특별기획: 〈일대일로의 조선족 개척자들〉(1) 글 사진/서정옥 올해 휴가는 어디로 떠날가 고민하는 나에게 남편은 지중해 남쪽 해안 나라 튀니지로 가자고 한다. 튀니지가 도대체 지구촌 어딘데? 인터넷에서 검색했다. 우리와 거의 지구 반대쪽에 있는 아프리카 최북단에 위치한 튀니지, 사하라사막이 있는...
  • 2019-11-16
  • [수기] 엄마가  준  두번째 생명 림율아 나는 우리나라 3년 자연재해시기였던 1961년 봄에 태여났다.   1959~1961년을  중국의 3년 자연재해시기 또는 3년 고난의 시기라고 한다. 이 3년 동안에 우리나라는 식량과 부식품이 극도로 결핍하여 인민들의 건강과 생명에 엄중한 해를 끼쳤다.백성들은 먹을...
  • 2019-11-14
  • 연길 세집 2017년 8월 24일 어렸을 적부터 나는 겁이 꽤 많았다. 특히 밤이 되면 변소에 가기를 그렇게 무서워했다. 그래서 항상 엄마가 아니면 아버지가 ‘보초’를 서주어야 했다. 캄캄한 시골의 재래식변소에 앉아있으면 자꾸 누군가가 뒤에 서있는 것 같고 당장이라도 밑으로부터 뭔가가 올라올 것 같은 공포...
  • 2019-11-12
  • 계림문화상 대상 수상작품 "일본에서 살기" 리홍매(일본) 머리말 1983년, 당시의 일본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내각이 ‘류학생 10만명 계획’을 세우고 세계를 향하여 일본 고등교육의 대문을 열었다. 80년대말에 이르러 활성화된 중국정부의 류학생정책으로 인하여 일본어가 널리 보급된 동북3성지역의...
  • 2019-11-12
  • 병원치료 포기 2017년 7월 21일 내 고향친구들한테는 엄마는 ‘어죽’으로 통한다. 고기잡이를 좋아하는 나, 어죽을 잘 끓이는 엄마 그래서 친구들은 우리 집에 놀러오기를 좋아했다. 놀러오면 엄마는 거의 혼자서 준비를 다해서 우리가 서쪽 강변에 나가 마음껏 천렵을 즐길 수 있도록 해주군 했다. 처음 몇번은...
  • 2019-11-11
  • “온 힘을 다해 이 아들을 한번 더 바라보던 그 눈빛”, “어느 구석을 봐도 엄마가 보이는데 어디에도 엄마가 없다는 사실이 너무 생소해 미칠 것 같았다”, “엄마 번호로 전화를 걸어본다, 엄마 위챗으로 문자를 보내본다, 잠을 자다가, 밥을 먹다가, 길을 걷다가… 엄마만 떠올리면 억...
  • 2019-11-11
  • [멀고도 가까운 문화-유체 기증](2) “무엇으로 이 은혜에 보답하겠습니까” --70년 당령(党龄)의 한춘옥 ‘마지막 공헌'으로 유체 기증을 선언   ‘한춘옥 ’이름자와 전국 통일 번호(2785)를 밝혀 발급된 건국 70돐 기념장 소장함. 기자한테 자신이 받은 건국 70돐 기념장을 ...
  • 2019-11-08
  • 편집자의 말 우리 나라에는 아직 유체 기증 사업 관련 법은 없다. 하지만 유체 기증이라는 아름다운 소행이 싹트고 있다. ‘유체 기증'은 기증인이 생전에 유체 기증 념원을 표명하고 사망 후 위탁인 혹은 집행인이 유체를 전부 혹은 부분적(장기 기증 경우)으로 의학 교수 및 연구사업에 기증하는 문명행위...
  • 2019-11-08
  • 영화 삼촌은 지난세기 50년대에 룡정 덕신중학교 학생회 회장으로 활약하면서 어린나이에 자기보다 몇살 위인 선배들앞에서 연설을 하군했는데 똑똑하다고 정평이 났으며 이름난 웅변가였다고 한다.   사진뒤면에  ...
  • 2019-11-07
  • 지난 10월 31일, 간단한 기부식이 무순1중 회의실에서 진행됐다. 료녕무공공구주식유한회사 리사장 장명상이10만원의 기부금을 빈곤대학생 손영택에게 전달했다. 장명상이 손영택에게 하는 두번째 기부다.   19세의 손영택과 그의 가정은 갖은 고난을 겪었다. 그의 누나는 13세 때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그는 선천성 ...
  • 2019-11-07
  • 어린시절 나의 장래희망은 박사가 되거나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현재 나는 박사재학중에 있고 간혹가다 비루한 솜씨로 쓴 글들을 투고하여 가뭄에 콩 나듯 지면에 내 이름을 올리면서 살고 있다. 우선 오해가 없도록 하자. 나의 현재 삶을 브리핑한 목적은 어렵사리 어릴적 꿈을 지키고 이루어낸 ‘성공신화의 주인공...
  • 2019-11-01
  • [청춘노트]  리은실(李银实) 필명 몽실(梦实). 1984년출생 2009년 연변대학에서 문학석사학위 취득. 현재 북경민족출판사 근무 최근에 글을 왜 쓰냐는 질문을 몇번 받았다. 글쎄다. 나는 글을 왜 쓸가? 언제나 먹기보단 잠자기를 우선시하는, 잠이 모든 문제해결의 열쇠라 생각하는 ‘잠보’가 잠을 포기하...
  • 2019-10-26
  • 지난 8월 29일, 나는 흑룡강성 계서시 계동현 계림조선족향에서 펼쳐진 약선(药膳)강습행사를 마치고 50년 만에 다시 그리운 북대황 기러기섬(雁窝岛)으로 향했다. 기러기섬은 바로 50년전인 1969년 3월에 가서 1973년 3월까지 내가 청춘열정을 쏟아부어 벼농사를 개척한 정든 고장이다.   1962년 6월 22일, 국무원...
  • 2019-10-22
  • 지난 10월 19일, 연길시도시건설투자그룹유한회사(대서양공관대상)에서 주최하고 공청단연변주위, 연변사회조직관리국, 연변9.3애심공익협회에서 주관한 “대서양공관대상 애심입쌀 3만근 전달”식이 연변체육관에서 펼쳐졌다.   10월 17일은 여섯번째로 되는“전국 빈곤층 부축의 날”이다.&nbs...
  • 2019-10-21
  • 백세 시대인 요즘엔 칠십나이는 삶의 지혜를 빛내는 황금 시절이고 삶을 새롭게 시작하는 두번째 봄이다. 공화국 창립과 동갑인 나의 칠십년 인생을 되돌아보노라면 어린시절과 그림같은 고향의 풍경이 내 머리 속에서 파노라마처럼 떠오른다. 나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된 해에 두만강 상류인 화룡현 로과향 흥남촌에서 ...
  • 2019-10-18
  • #예로부터 결혼은 인륜지대사로 꼽혔다. 그러나 점점 결혼을 늦게 하는 만혼인구 증가률이 상승하고 지어 독신주의를 선언하는 비혼족이 생겨나는 등 시대가 변하면서 요즘 세대들의 결혼관 또한 빠른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했다. 그 변화와 더불어 관점의 충돌로 인한 갈등 또한 항상 존재해 왔다. 다름 아닌 “...
  • 2019-10-12
  • "더 기다려주다가는 혼자 사는 게 더 편하다고 할가봐 걱정돼서 달려왔죠."  "급해하는 엄마 마음 리해가 돼서 함께 왔어요."... 결혼에 대한 인식이 다양해지다 보니 만혼 인구도 점차 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결혼 적령기 자녀와 부모의 ‘결혼에 관한 론쟁’도 항상 이슈로 떠오른다. “자식의 결...
  • 2019-10-08
  • - 글 / 국하 -       (흑룡강신문=도쿄) 알람 소리에 따르릉, 이불을 개는 소리 착착, 창문을 여는 소리 찰칵, 바람이 속삭이는 소리 살살, 웃집에서 걸음을 걷는 소리 쿵쾅쿵쾅, 수도물이 내려오는 소리 쏴쏴... 내 마음이 오늘도 힘내라고 하는 소리 뿅뿅.   찌르륵 찌르륵 계란후라이 지지는 소리와 같이...
  • 2019-09-24
‹처음  이전 3 4 5 6 7 8 9 10 11 12 13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