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아름다운 추억 112] 인민대회당 건설에 땀 흘리던 나날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11월23일 00시00분    조회:1381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40)

▩최금란(대련)

 

 
텔레비죤 화면을 통하여 당대표와 인민대표, 정치협상회 위원들이 북경에 모여와 인민대회당에서 국사를 의논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솟구치는 감회를 금할 수 없다. 인민대회당을 건설하던 의무로동의 잊지 못할 나날들이 어제런듯 나의 눈앞에 펼쳐진다.

 

그것은 1958년도의 늦가을이였다. 그 때 북경에서는 국경 10주년을 앞두고 만인대강당(후에 ‘인민대회당’이라고 하였음), 중국인민혁명군사박물관, 민족문화궁, 전국농업전람관, 중국력사박물관, 중국혁명박물관, 북경로동자체육장, 조어대국빈호텔, 북경역전, 화교호텔 등10대 건물들을 짓느라고 열의충천할 때였다.

중앙국가기관들에서는 모두 이 건설장에 의무로동대군을 파견하였다. 우리 중앙인민방송국 대외부(지금의 국제방송국) 편집부문에서도 번마다 반달씩 약 30명 좌우의 편집, 방송일군들을 인민대회당 건설공사장에 파견하였다. 나도 그들중의 한사람으로 인민대회당 건설현장에 두번 나가 의무로동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

우리는 아침마다 방송국에서 파견하는 전용차에 앉아 천안문광장의 서남쪽에 있는 넓은 공사장으로 갔다. 시공 현장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곳곳마다에 각종 건축용기재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첫날에 관리부문에서는 우리 매개인에게 안전모와 어깨바대를 하나씩 나누어주었다. 우리는 저마다 버들로 엮은 큼직한 안전모를 눌러쓰고 웃옷 우에 어깨바대를 올려놓고 끈을 매였다. 의용을 바꾸니 대번에 우리는 막로동자로 변해버렸다. 사무실에 앉아 붓대를 끄적거릴 때는 저마다 한다는 재간둥이였지만 공사장에 나오니 그저 잡공이나 심부름군 노릇 밖에 할 수 없었다.

처음에 우리는 푸른색 오지기와를 날랐다. 처음 몇번은 그래도 괜찮았는데 해종일 기와장을 나르려니 어깨와 팔다리가 쑤셔났고 허리도 펴기 힘들어졌다. 나 같은 사람은 그래도 농촌에서 거칠게 자랐으나 우리 대외부의 방송, 편집 일군들 속에는 화교나 도시에서 자란 ‘아씨’ ‘도련님’ 출신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도 가냘픈 몸을 아끼거나 잔꾀를 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였다. 그러다가 휴식시간만 되면 너나없이 땅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아픈 팔다리를 쉬웠다. 휴식이 끝나면 또다시 기여일어나 땀을 철철 흘려가며 안깐힘을 다해서 일을 많이 잘하려고 애썼다.

이 건설장에서 하루에 일하는 사람이 무려 만명이나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그저 노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이 어느 사람에게나 할 일들이 빠듯하게 배치되여있다는 점이였다. 그 빈틈없는 로동력 조직과 배치에 실로 감탄이 갔다.

후에 우리는 또 회가루 포대를 날랐다. 뽀얗게 회가루를 뒤집어쓴 데다 땀까지 흘려서 얼굴들은 너나없이 알락고양이로 되였지만 누구도 어지럽다거나 바쁘다고 두덜거리지 않았다. 점심때가 되면 똑같이 차례지는 찐빵이나 옥수수떡 서너개에 짠지쪼각을 타서 들고는 달게 먹어대였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국경 10주년을 맞으며 북경에서 10대 건물을 짓는데 그중에서도 으뜸으로 치는 것이 인민대회당이라고 했다. 건물 수명은 적어도 350년 이상을 담보해야 한다는 주총리의 지시가 있었단다. 그러니 설계로부터 재료와 시공에 이르기까지 최선을 다해야 하였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갈 때면 기진맥진하여도 이튿날이면 또 어김없이 일터로 나갔다. 비록 보잘 것 없는 막로동을 하였지만 주총리께서 직접 지휘하시는 위대한 공정에 힘을 보태고 있다는 긍지로 하여 우리의 젊은 가슴들은 부풀어올랐다.

1959년 초여름에 두번째로 의무로동을 갔을 때는 주체공정이 일어나서 모양새가 좀 알리였다. 벽채 옆에는 숱한 선반들이 거미줄처럼 세워졌고 건물 안팎도 사람들로 법석이였다. 한 넓은 칸에선 목수들이 줄줄이 늘어서서 대패질을 하였는데 잠간 사이에 그들의 발밑에는 대패밥이 수북이 쌓였다. 나는 그 대패밥을 부지런히 쓸어내는 일을 맡아하였다.

목수든 미장공이든 전공이든 용접공이든 철공이든, 이 건축공사장의 모든 기공들은 죄다 솜씨가 출중한 공장들이였는데 전국 각지에서 뽑아왔다고 하였다. 각종 건축용 기재들도 전국각지로부터 가장 좋은 것들을 추려서 가져왔단다. 우리 장백산의 홍송도 인민대회당 건설에 한몫을 담당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만인강당의 중심에 달, 오각별 전등을 책임지고 제작 생산한 상해의 한 전구공장에서는 다 만들어놓은 그 큰 오각별 전등을 손상없이 북경에 운송하기 위해 로동자들이 자기들의 이불 32채나 가져다 싸서 보내왔다는 감동적인 사연도 전해졌다.

우리는 유리를 나르든 벽돌을 나르든 참대를 묶어 세워놓든 현장을 청소하든 자기들이 하는 모든 일을 성스럽게 여겼다. 벽돌 한장이라도 깨여질세라 조심했고 못 한대라도 땅에서 굴러다니면 주어 못통에 넣었다.

의무로동이 끝나는 날 오후였다. 우리들이 짓는 집이 도대체 얼마나 큰가 한번 돌아보고싶었다. 우리 몇몇이 울퉁불퉁하고 거치장스러운 건축현장을 다 돌기엔 기운이 역부족인데다 보았대야 아직은 무엇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저 특이한 것은 1, 2층도 채 되지 않았는데 그 웃층들, 지어 지붕까지도 동시에 일어서면서 층층마다에서 사람들이 분망히 일하고 있는 것이였다. 이것을 ‘복합식 시공방식’이라고나 할는지? 곳곳에서 목공청년돌격대, 벽돌공, 콩크리트공, 미장공 등 여러가지 공종의 청년돌격대 기발들이 펄펄 나붓기고 있었다. 아마도 이런 청년돌격대 대원들이 중책을 떠메고 앞장에 서서 온갖 난관을 물리치며 열의충천하게 일한 데서 시공진도를 크게 단축시키지 않았는가 생각되였다.

그 후의 보도에 따르면 인민대회당은 1959년 9월 10일에 완공되였다. 이렇게 방대한 인민대회당 건설공정을 10개월에 완수하였다니 실로 건축사상의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2만여명 로동대군이 밤낮없이 분전한 결과이며 전국 각지의 대폭적인 지원과도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모주석을 배석한 만리동지의 말씀이였다. 모주석께서는 “명예도 리득도 따지지 않고 일심전력으로 일한 그들에게 워낙 기념비를 세워주어야겠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 이름조차 비석에 다 써넣을 수 없으니 만인강당을 ‘인민대회당’이라고 합시다.”라고 하시였단다.

국경절이 지난 10월 8일에 인민대회당에서는 수도 10대 공정의 승리적인 준공을 경축하는 대회가 있었다. 주총리께서는 전체 건설자들에게 뜨거운 감사와 위문을 표시하였고 북경시 팽진 시장께서는 나라의 주인으로 된 건설자들의 위대한 창조력과 적극성을 높이 찬양하셨다.

인민대회당의 남북 길이는 336메터, 너비 206메터, 제일 높은 곳은 46.5메터여서 뫼산(山)자를 이루었다. 인민대회당은 크게 3개 부분으로 구성되였는데 북쪽에는 5000개 좌석이 놓여있는 연회청이고 중간은 만인대강당, 남쪽에는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의 사무청사가 있다.

만인강당은 이름 그대로 만개의 좌석이 있어 만인을 용납할 수 있는 큰 강당이다. 그 곳에는 16가지 언어를 동시에 통역, 전달할 수 있는 이어폰 설비와 도착 신고(접수), 즉석발언, 표결 등 세가지 기능을 일체화한 설비가 갖추어져 있다. 강당의 천정은 큰 오각별 등을 중심으로 주위에 500개의 등으로 만천성을 이루었는바 해바라기가 태양을 따르는 주제와 ‘수천일색, 혼연일체’의 미감을 체현하였다.

천안문의 서남쪽에 자리잡고 있는 인민대회당은 전국 여러 민족 인민들의 지성에 받들려 가장 출중한 장인들이 가장 좋은 건축재료와 가장 빠른 속도로 국사연구의 중심청사를 일떠세웠던 것이다. 우리들의 깨끗한 정성과 청춘의 땀방울도 그 곳에 스며있다고 생각하니 더욱 감개무량하다.

인민대회당은 새 중국이 걸어온 빛나는 려정을 력력히 기록해가면서 수도의 하늘을 떠이고 억만 인민들의 마음속에 거연히 솟아있으리라!

길림신문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28) ▩서현(연길)   살면서 처음으로 거한 밥상을 받았던 기억은 중학교 시절, 시내에서 좀 떨어진 어느 시골에 살고 있는 한반 친구네 집으로 놀러 갔던 날이다.   겨울방학이라 두눈이 멀뚱멀뚱해서 거의 집에만 박혀 쏠락거리다가 점점 식상한 나머지 새로...
  • 2018-09-06
  •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27) ▩김숙자(길림) “그 때 한숙사에서 뒹굴던 채화, 정복, 미화, 춘희, 보옥… 항상 보고 싶다.”는 필자 김숙자(앞줄 왼쪽 두번째). 중년의 문턱을 넘어서 그런지 느닷없이 지나간 옛일들이 나를 찾아오군 한다. 새록새록 떠오르는 옛 추억의 물길은...
  • 2018-09-06
  •     빈곤 장애인 대학입학생에 온정의 손길 이어져     9월 1일, 두 손에 보행보조기를 짚고 하해대학 2018년급 신입생 등록처에 나타난 돈화시 빈곤가정 대학입학생 왕붕박(19살, 2급 지체장애인)의 얼굴에는 행복의 미소가 떠날줄 모른다. “학교에서 저에게 2000원의 조학금과 가치가 300원에...
  • 2018-09-06
  •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26) ▩김명희(왕청) 알뜰살뜰 살림군 김명희 필자 해마다 거리에 우후죽순처럼 일어서는 새 아빠트들을 보면 저도 모르게 힘들게 살아왔던 지나간 세월이 영화필림처럼 떠오르며 코마루가 찡해난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던 1995년 겨울, 친척 친우들의 축복 속에서 간단...
  • 2018-08-27
  • 21일, 심양시조선족제1중학교에서 주최하고 정사교육그룹(精思教育集团)에서 후원한 ‘계향장학금’ 설립식 및 제1회 장학금시상식이 심양시조선족제1중학교에서 진행되였다. 행사에는 백성남 심양시조선족제1중학교 교장을 비롯한 학교 지도부 성원들과 윤용철 정사교육그룹 회장을 비롯한 회사 관계자 그리고 ...
  • 2018-08-23
  •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25) ▩최영숙(연길) 필자 최영숙, 어린 시절 동생들과 함께(뒤). 1966년 6월 중순의 어느 일요일이였다. 휴식날이지만 나는 토끼 당번이였기에 아침에 흰 대복(그 당시 나에게는 제일 좋은 옷)으로 갈아입지 않고 전날 입고 자던 웃옷 그대로, 전날 오후 들에 나가 캐놓...
  • 2018-08-20
  • 일본인 아키코씨의 연변추억5 자전거부대를 바라보고있는 아키코씨(왼쪽) 오오무라 아키코녀사의 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오늘도 령하 24도이다. 아침 9시, 사흘만에 서시장에 가려고 집을 나섰다. 긴 털실목도리를 얼굴로부터 목에 두른채 큰길에 나서니 벌써 자전거로 출근하는 남녀들이 줄을 짓고 있었다. &lsq...
  • 2018-08-13
  • 나는 1960년에 연변대학 수학계를 졸업하고 연길시 3중에서 33년을 교원으로 있었다. 딸 둘과 아들 하나를 키우면서 보람찬 교원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로후의 인생에 대해서 고민해본적이 없었다. 제각기 잘 자라 준 자식들은 각기 자기들의 능력대로 일본과 상해에서 분투하며 살기 시작하였고 정년퇴직을 한 남편과 나는...
  • 2018-08-13
  • 제34번째 로인절을 맞으며 10일, 주로령사업발전기금회와 연변애심어머니협회는 10명 빈곤녀성에게 인당 2000원씩 지급해 사회의 온정을 전했다.   구제금 지급식에서 주로령사업발전기금회 회장이며 주인대 상무위원회 전 부주임인 민광도는 “이번 활동의 주요 구제대상은 중병을 앓거나 장애로 불편을 겪는 년...
  • 2018-08-12
  •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24) ▩강성범(룡정)   필자 강성범   우리의 생활에 또 하나의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의 한페지를 남긴 2017년 10월 16일, 그 날은 연길현2중(지금의 룡정고중) 1967년급 초중 3학년 3반 졸업 50주년 동창모임이 있던 날이다. 그 날의 눈물겹던 아름다운 기...
  • 2018-08-11
  • ‘나는 된다’는 오기로 살아온 지체장애자 김란화의 헌신이야기 올 음력설을 맞이해 김란화의 가정을 위문한 파음조로 서기 일여덟살 철이 들기 시작해서부터 란화는 집 근처에 있던 공공변소를 하루도 빠짐없이 청소했다. 지체장애자라 다른 애들보다 두살 늦게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그는 소학교, 초중, 고중...
  • 2018-08-10
  • (흑룡강신문=하얼빈) 지난 8월4일 화룡고급중학교일본학우회 설립대회가 동경에서 열렸다.   저녁 6시, 일본 동경의 한여름 무더위가 울고 갈 정도로 뜨거운 분위기 속에, 동경 닛뽀리 랑그웃도 호텔에서 화룡고급중학교일본학우회 설립대회가 성황리에 열렸다.       현재 일본각지에서 뿌리박고 삶의 터전...
  • 2018-08-07
  •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23) ▩리동주(연길) 퇴직 후 함께 등산하면서 즐기는 세 친구(오른쪽이 필자 리동주, 중간사람이 명준친구, 왼쪽이 종식친구.) 지금은 있을 수도 또 있어서는 절대 안될 일이지만 달리는 화물렬차를 단지 친구라는 의리 하나 때문에 무작정 멈춰세운 ‘도깨비&rsqu...
  • 2018-08-06
  • 8월 3일, “덕이 있는 사람들이 꿈꾸는 숲” 덕림장학문화재단 (준) 제2기 리사회는 중국조선족생태문화원 룡가미원에서 덕림장학문화재단 (준) 을 가지고 나눔으로 행복한 장학문화인들의 여름잔치를 치렀다. 덕림장학문화재단(준) 제2기 리사회와 연변가정연구소에서 주최한 이번 에서는 동북3성 11개 조선족고...
  • 2018-08-05
  •     (흑룡강신문=하얼빈)길림성 왕청진 쟈피구촌에 살고있는 리희태의 안해 유형숙은 꽃보다 아름다운 나이에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만나서 즐기는 신혼생활은 깨알이 쏟아지고 행복이 넘쳤을 것이다.   두 분도 역시 더 이상 바랄 것 없이 살아갈 수 있었던 것만 같았다고 한다. 세상의 풍운조화는 예측하기 어렵...
  • 2018-08-01
  •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22) ▩김진석(연길) 필자 김진석 나는 한생을 라지오TV방송 기자 사업으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류수와 같이 흘러간 세월을 돌이켜보니 가슴은 세차게 방망이질하면서 기자생활에서 있었던 가지가지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리 속에 떠오른다. 그 하나하나가 마치...
  • 2018-07-30
  • 일본인 아키코씨의 연변추억4 “연변,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음식이 무엇이죠?” “랭면, 랭면이 제일 그리운 연변음식이예요. 그리고 조선명태가 너무 맛있었어요” 아키코씨와의 이번 이야기는 이렇게 먹는 음식으로부터 시작되였다. 갓 연변에 갔을때 어느 개인집에 초대받은 적이 있었는데 차려...
  • 2018-07-30
  • 일본인 아키코씨의 연변추억3 일본에서는 일부러 목장으로 가지 않으면 만날 수 없는 소나 말. 처음에 연길에 가서 제일 놀라웠던 일이 거리에 마차와 소수레가 자동차들 속에 끼여 있는 것을 보았을 때였다고 아키코씨는 말한다. 현대건물이 들어서있는 거리 풍경과 양복차림의 신사들 모습을 배경으로 한 소와 말, 당나귀...
  • 2018-07-24
  •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20) ▩렴순옥(연길) 필자 렴순옥의 외할머니 고하순 그리고 어머니 리정숙과 아버지 렴응철 1 고향이 조선 함경남도 단천군 백자동인 나의 아버지 렴응철은 4촌형 렴흥철을 따라 룡정에 와서 대성중학교를 다녔다. 이들 4촌형제는 지하당원인 나의 작은외할아...
  • 2018-07-16
  • 미국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김춘희사장 지난해 10월 24일 밤  11시 30분경, 재미 조선족교포 김춘희씨가 운영하는 조지아주 도라빌에 있는 식당에 3인조 흑인 무장강도가 침입하였다. 퇴근하면서 에 들린 7명의 맛사지 녀성들의 돈을 노리고 추적해 온 무장강도들이 란발한 총에 김춘희사장이 불의의 사고를 당하게 되...
  • 2018-07-11
‹처음  이전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