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부의 ‘코기러기’ 훈춘시 경신진 방천촌 촌민위원회 주임 김만혁의 이야기
연변에서 최근년간에 변화가 제일 큰 마을을 꼽으라면 아마도 훈춘시 경신진 방천촌을 대야 할 것이다. 10여년전까지만 해도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외국의 전기를 써야 했으며 그것도 정전되는 날이 비일비재라 초불에 등잔불을 다 동원해야만 했던 촌이 개발개방의 훈풍을 타면서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고 있으니 이 변화의 앞장에 서서 촌민들을 치부의 길로 이끄는 코기러기가 바로 방천촌 당지부 서기이며 촌민위원회 주임인 금년에 49살에 나는 김만혁이다. 김만혁은 방천촌의 ‘토배기’로서 경신진 공소합작사에서 ‘큰가마밥’을 먹다가 고향에 다시 뿌리박은 직업농민이다.
■ 농민대표로 훈춘역에서 고속철을 타던 날
1.4억원을 투자해 건설한 방천촌, 촌민들은 누가 백만원을 줘도 집을 안 판다고 말한다.
중국과 조선, 로씨야의 접경지대에 위치해있는 방천촌은 훈춘시와 60키로메터 남짓이 떨어져있는 두만강 하류의 자그마한 조선족마을로서 ‘동방제일촌’으로 불리우며 중국 명촌지 총서에 오를 만큼 이름나있다.
김만혁은 훈춘에 고속철이 정식으로 통한 2015년 9월 20일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고속철이 방천촌의 력사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농민대표로 뽑혀 훈춘역에서 처음으로 발차하는 고속렬차에 올랐습니다. 실로 력사적인 한 순간이였지요. 그 누가 훈춘에 고속철이 통하리라고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여러가지 생각으로 감개가 무량했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이제 멀지 않아 우리 방천촌도 고속철의 혜택을 톡톡이 입을 날이 오겠구나.’하고 생각했지요. 우리 마을은 관광지이니깐요. 길 따라 가는 게 사람이 아니겠어요.”
아니나다를가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아 그의 생각은 적중했다. 그 해 국경절 련휴 기간에만 방천풍경구를 찾은 관광객이 무려 12만 6,000여명에 달해 력사기록을 돌파했으며 훈춘시내에서 병원과 개인집을 다 동원해서 손님을 재워야 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 봉황을 모셔와 촌민들을 위해 황금알을 낳게 하다
방천은 길림성에서 농촌 치고는 유일하게 길림8경에 들어간 관광전망이 밝은 곳이다. 그렇다고 자연우세만 믿고 안방에서 올방자를 틀고 가만히 앉아서 누가 돈다발을 안겨주겠지 하면 그건 틀린 생각이다. 김만혁은 자연우세가 마을의 실질적인 변화에 진정한 추동력을 가져오도록 하려고 기회만 되면 정부의 관련 부문을 찾아다니면서 자금과 대상을 적극 신청했고 기업가들을 만났다. 이렇게 노력한 보람으로 국가와 성, 주, 시로부터 선후로 천만원에 달하는 변경 지원 정책보조자금을 락착받아 방천촌의 기초시설 건설에 투입해 관광업 발전의 토대를 마련했다.
지난 10월 25일 새집을 분여하던 날 촌민들은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올해 3월부터는 훈춘시의 한 부동산개발회사와 계약을 체결하고 총투자액이 1.4억원에 달하는 마을 대개조에 들어갔다. 거기에는 마을의 41호 촌민들에게 한채당 50만원에 달하는 조선족 전통가옥을 무상으로 지어주는 대상도 포함, 이미 공사가 완공되여 10월 25일에 촌민들은 집 열쇠를 받아가졌다. 이번 마을 대개조에도 기초시설공사 투입으로 정부의 자금 4,000만원을 쟁취했다.
“집만 지어주는 것으로 끝난 게 아니지요. 촌민들의 수입을 증대시키기 위해 우리는 회사와 농민들의 집을 민박으로 사용하되 모든 비품과 음식마저도 촌민들의 손이 갈 필요 없이 회사에서 책임지기로 계약을 맺었지요. 민박에서 나오는 수입은 4:6 비례로 농민이 40%를 가져가니 그저 앉아서도 돈을 버는 셈이지요. 농민들은 지어 불도 땔 필요가 없게 되였습니다. 마을 전체에 집중열공급이 들어왔으니깐요.”
■ 촌민들을 위한 일이라면 바다 건너 한국까지 나가서 촌사무를 보다
한국에 나간 촌민들을 배려해 직접 한국까지 가서 촌사무를 보는 김만혁
한국에 나간 촌민들과 함께(뒤줄 오른쪽 다섯번째 김만혁)
방천촌에는 한국에 나가서 돈을 버는 농민들이 절반을 차지한다. 지난해 마을 대개조를 앞두고 41호 촌민들의 집을 허물고 그 자리에 새집을 지으려고 할 때의 일이다. 다른 어지간한 일 같으면 전화나 위챗상으로 해결이 얼마던지 가능하겠으나 집을 허무는 일은 큰 일이라서 직접 만나서 촌민들과 상의하고 계약도 맺어야 했다.
“그렇다고 한국에서 일하는 촌민들더러 들어왔다가 다시 나가라면 그로 인해 돈도 적게 벌고 하던 직장도 그만둬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손실이 크지요. 그래서 아예 제가 나가서 그들을 만나기로 했지요.”
이렇게 지난해 8월초 김만혁은 가방에 촌사무를 볼 서류들을 가득 챙겨가지고 한국에 나갔다. 자신들을 위하여 먼길도 마다하지 않고 한국까지 나온 김만혁을 만난 촌민들은 “우리의 김서기가 최고”라면서 집을 허무는 일에 대해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김만혁의 ‘출국사무’는 여기서 끝난 게 아니다. 요즘 그는 또 한국에 나가서 촌사무를 보기로 했다. 이번에는 일신된 마을의 변모를 자상히 알려주고 민박을 포함한 촌민들의 리익과 관계되는 마을의 운영 그리고 앞으로 촌민들이 지켜야 할 계약서의 내용들 등 여러가지 일들을 처리하기로 했다.
■ 촌민들을 부유하게 하려면 자신부터 앞장서야 설득력이 있지요
중앙텔레비죤방송국 취재팀을 태우고 두만강에서 노를 젓는 김만혁(가운데)
‘촌민들을 치부에로 이끌자면 자신부터 앞장서서 잘살아야 한다.’
이는 김만혁이 촌장, 서기로 부임돼서부터 줄곧 가진 생각이다. 코기러기의 시범역할이 그만큼 중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두만강이 바다로 흘러드는 바로 출구에 위치하여있는 방천촌은 예로부터 어업자원이 풍부하기로 소문났다. 지금 방천촌에서 전문 어업에 종사하는 가구가 15호인데 김만혁도 그중의 한 성원이다.
“이곳에서는 일년사시절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데 봄에는 황어, 여름에는 숭어와 송어, 그리고 가을에는 련어, 겨울엔 장어와 황어...모두다 순수한 야생물고기들입니다. 판로도 좋아 전문 사러 오는 사람들이 있어요. 물고기가 잘 올라올 때면 하루에 2,000~3,000원씩 벌 때도 있지요. 정말 짭짤한 수입입니다.”
김만혁은 또 당지에 풀자원이 풍부한 우세를 리용해 소도 기르고 있는데 이렇게 하면 해마다 10여만원은 쉽게 벌 수 있다고 말한다...
“지금의 방천촌은 옛날의 그 버들방천이 아닙니다. 촌민들이 날따라 부유해지고 집체경제가 장대해지며 전국 방방곡곡에서 손님들이 찾아오는 중국 명촌입니다.”
김만혁은 얼굴에 환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마을 자랑에 침 마를 줄 모른다.
/길림신문 리철수 김성걸 리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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