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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이야기86] 할머니의 꿈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12월19일 00시00분    조회: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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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어린 손녀, 반평생 남호촌에서 살아온 할머니를 글로 쓰다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룡정시에서 동남쪽으로 50키로메터 쯤 가면 ‘송이버섯 고향'으로 불리우는 삼합진이 있다. 삼합진정부 소재지에서 7리 가량 더 가면 조선의 함경북도 회령시와 두만강을 사이두고 있는 남호촌이 보인다.

할머니네 집에 모인 친척과 이웃들이 맛있는 식사를 함께 하며 행복한 하루를 보낸다.

나의 할머니는 이 자그마한 시골마을에서 반평생을 보냈다. 남호촌은 할머니에게 인생의 풍상고초와 희로애락이라는 잊지 못할 기억을 남겨주었고, 남호촌 또한 할머니가 계심으로 하여 한줄기의 아름다운 색채를 더하게 되였다. 마을은 할머니에게 아름답고 소박한 꿈을 부여하였고 할머니는 이 마을에서 인생의 행복을 빚었다. 남호촌은 할머니의 초심을 굳건히 지켜주었고 할머니는 평생 사랑해온 이 땅을 여전히 지키고 있다.

린근에 유명한 “통역”- 할머니의 첫번째 꿈

1948년, 할머니는 편벽하고 빈곤한 룡정시 세린하향 문화촌에서 5남매 중의 막내로 태여났다. 어릴 때부터 활달하고 총명했던 할머니는 소학교 때부터 우수한 성적을 따내였고 학급과 학교의 학생간부로 활약했다. 하지만 중학교에 진학할 무렵 가정형편이 어려워지면서 부득불 학교를 중퇴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면서도 할머니는 공부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않았다. 당시 정부에서 문맹 퇴치 목적으로 촌마다 야간학교를 운영했는데 할머니는 낮에는 오빠네 집 애를 돌보고 농사일도 도우면서 저녁이면 야간학교에서 한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근심없이 학교를 다니는 것이 당시 할머니의 꿈이였을 것이다.

그 때 한어를 배워두었기에 지금까지도 할머니는 한어로 문장까지 쓸 수 있고 촌에서 한어로 교류할 수 있는 몇몇 안되는 사람 중의 한사람으로 되였다. 당시 연변의 농촌에는 한족들이 얼마 안되였고 대부분이 조선족이다 보니 많은 촌민들은 한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다. 어쩌다가 현성에서 간부들이 오거나 손님들이 오면 무조건 할머니네 집에 찾아와 통역을 부탁했다. 따라서 할머니는 “유명통역”으로 린근에 이름을 날렸고 지금도 마을에서 통역 겸 “대변인”으로 알려지고 있다.

할머니가 동네분들과 함께 삼합진 망강각에서 유쾌한 하루를 보냈다.

남호촌과의 인연- 할머니의 두번째 꿈

할머니가 22세 되던 해에 오빠 친구의 소개로 남호촌에 살고 있는 할아버지와 약혼을 하게 되였고 편지로 사랑을 나누었다. 10여일 뒤에야 받아볼 수 있는 편지였지만 한통 또 한통의 편지는 그들의 사랑을 불태웠다. 당시 할머니의 높은 필력에 감탄한 할아버지는 늘 자랑삼아 할머니의 편지를 동네분들에게 읽어주었다고 한다. 비록 할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지만, 할머니는 지금까지도 그 때의 련애편지를 간직하고 계신다. 나로서는 상상이 가지 않지만 련애편지는 아마 그 시대 사람들의 정과 사랑의 견증물일 것이다.

1970년 정월,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남호촌에 40평방메터도 안되는 집을 외상으로 사서 들었다. 집값을 하루빨리 갚기 위해 두분은 아글타글 일하였지만 평균분배를 했던 계획경제 시기라 일을 많이 하나 적게 하나 수입은 별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언제나 일에 앞장섰다. 부지런히 일하는 데다가 인간관계까지 좋다 보니 할머니는 생산대 부녀주임, 기공원(记工员),촌의 유치원, 소학교 교원으로까지 여러가지 일을 했었고 수차 인민공사와 생산대의 표창을 받았다.

엄동설한에도 할머니는 쉴 줄을 몰랐다. 땔나무를 하는 건 기본이고 신체가 허약한 할아버지를 대신해 뼈를 에이는듯한 추운 겨울에도 전기도 없는 벌목장에 올라가 벌목공들에게 때시걱을 끓여주는 일을 맡아했다. 매일 매일 고된 일의 반복이였지만 할머니는 종래로 가난에 불평을 늘여놓지 않았다. 할머니는 “항상 좋게 생각해라”고 늘 말씀하시군 하였다.

나의 아버지는 1971년에 태여났는데 당시 집생활이 구차하다 보니 돌사진 한장도 남기지 못했다. 조선족의 풍속으로는 애기가 첫돌이 되면 돌사진을 찍고 친척 친구들을 청하여 돌잔치를 벌린다. 당시만 해도 남호촌에서 돌사진을 찍으려면 현성인 룡정에 가야만 했다. 할머니는 그때 아버지의 돌사진을 찍어주지 못한 일을 두고 지금도 후회하군 한다.

그렇듯 가난이 싫었던 할머니는 아버지에게 항상 “너희들이 가난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공부하는 길이다.”며 백방으로 아버지의 공부를 섬기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빈곤한 생활에서 벗어나 자식을 근심걱정없이 공부시키는 것이 그 때 할머니의 꿈이였을 것이다.

나라의 기둥감으로 자라거라-할머니의 세번째 꿈

70년대 말 80년대 초 우리 나라에서 개혁개방 정책을 실시하자 농촌에서도 점차 도급제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도급제를 실시하면서 촌민들은 상대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찾을 수가 있었다. 아마 그 때가 남호촌이 제일 흥성할 때가 아니였던가 싶다고 할머니는 회억한다. 도급제를 실시하자 할머니는 소, 돼지, 닭을 사육하기 시작했고 쯤만 나면 산에 약재와 버섯 캐러 다니였다. 도급제를 실시하던 해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처음으로 벽시계를 장만했다. 벽시계를 사온 그 날 밤 할머니는 몇번이나 일어나 벽시계를 쳐다보았다고 한다. 벽시계는 당시 할머니의 보물단지였다.

아들의 공부 뒤바라지를 위해 할머니는 궂은일 마른일 가리지 않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아글타글 뒤바라지한 보람으로 1990년에 아버지는 끝내 북경대학에 입학했다. 당시 할머니는 린근에 “북경대학생 어머니”로 소문이 났다. 그 칭호는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불려지고 있다. 그 뒤로 아버지는 석사공부를 계속했고 일본 류학까지 다녀왔는데 할머니는 항상 아버지의 학업을 지지했다. 아마 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나라의 기둥감으로 자라나는 것이 그 당시 할머니의 꿈이였을 것이다.

할머니네 집 부엌에서 동생과 할머니와 함께 찰칵.

정든 고향 마을을 지켜- 할머니의 네번째 꿈

2000년에 나이 아버지와 어머니는 결혼했다. 그때의 남호촌은 집집마다 채색텔레비죤을 갖추었고 대부분 사람들이 집에 남아 농사를 지었기에 비교적 유족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그 후 연변의 농촌에는 “한국바람”이 세차게 불기 시작했다. 더 잘 살아보기 위해 언어적 우세가 있는 조선족 농민들이 한국로무라는 출국 길에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나의 할머니도 그 대오에 가담했다. 몇년 뒤 할머니는 다시 남호촌으로 돌아왔다. 지금 농촌의 농사일은 인력으로 모내기를 하고 풀을 뽑고 수확하던 지난날과는 다른 천지개벽의 변화가 일어났다. 기계화가 보급이 되였고 경작기술이 발달하여 생산효률이 매우 높아 할머니는 그냥 터전을 다루는 간단한 농사일만 하면 되였다.

최근 몇년 사이에는 당지 정부의 빈곤부축 사업 혜택을 입어 많은 공용시설이 건설되고 농민들의 대우도 큰 개선을 가져왔다. 포장도로가 집 문앞까지 수리됐고 오락활동 장소와 신체단련 기구들이 마련되였으며 마을 길에는 태양에네르기 가로등까지 설치되였다. 올해 설부터 할머니는 위챗을 쓰기 시작했다. 매일 저녁이면 아버지, 어머니와 위챗으로 통화하고 나에게 위챗으로 사진을 보내기도 하고 고무격려의 말을 남기기도 한다. 할머니는 위챗으로 젊은이들과 자주 대화하니 새로운 사물을 많이 접촉하고 시대의 발전에 뒤떨어지지 않아 참 좋다고 말한다.

할머니가 살고 있는 남호촌 제3촌민소조(3대)는 원래의 30여 세대로부터 현재 7세대 밖에 남지 않았다. 남아있는 촌민은 전부 로인들이다. 제일 ‘젊은’ 분도 이제 곧 예순이 된다고 하다. 촌의 인구가 급감하면서 농사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수확하는 계절이면 외지 사람을 고용하는 수 밖에 없게 되였다. 매년 명절이면 촌에는 사람들이 더욱 적어져서 어떤 때에는 할머니 혼자서 마을을 지키고 있다. 올해 음력설에도 우리는 어김없이 할머니네 집에서 보냈는데 온 마을에 우리 다섯 식솔 뿐이였다.

이젠 할머니도 일흔을 넘긴 년세이다. 몇년 전에 할아버지를 먼저 떠나보내신 할머니를 보고 아버지가 북경에 모시겠다고 했으나 할머니는 남호촌이 편하다면서 절대 떠나지 않으시겠다고 한다. 익숙하고 또 정든 남호촌에서 오래오래 사는 것이 최대의 행복이라고 한다. 할머니는 건강하게 로년을 보내여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것이 제일 큰 희망이라고 한다. 아마 자식을 둔 천하의 부모님들도 다 같은 마음일 것이다.

할머니와 남호촌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나는 매년마다 아버지가 고향을 찾는 것이 의무적인 것 만이 아닌 할머니,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생활하고 분투하는 땅에서 생명의 의의와 그들이 나눈 정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는 것을 깨달았다.

할머니는 자신의 꿈을 키우고 실현해 온 정든 땅을 지키고저 오늘도 남호촌에서 꿋꿋이 살아가고 있다.

필자(왼쪽)가 할머니와 동생과 함께 아버지와 어머니가 마련한 효도관광을 만끽.

/글 리윤혜(수도사범대학부속고중 2학년 2반)

길림신문 편역 유창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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