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백성이야기86] 할머니의 꿈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12월19일 00시00분    조회:1348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나어린 손녀, 반평생 남호촌에서 살아온 할머니를 글로 쓰다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룡정시에서 동남쪽으로 50키로메터 쯤 가면 ‘송이버섯 고향'으로 불리우는 삼합진이 있다. 삼합진정부 소재지에서 7리 가량 더 가면 조선의 함경북도 회령시와 두만강을 사이두고 있는 남호촌이 보인다.

할머니네 집에 모인 친척과 이웃들이 맛있는 식사를 함께 하며 행복한 하루를 보낸다.

나의 할머니는 이 자그마한 시골마을에서 반평생을 보냈다. 남호촌은 할머니에게 인생의 풍상고초와 희로애락이라는 잊지 못할 기억을 남겨주었고, 남호촌 또한 할머니가 계심으로 하여 한줄기의 아름다운 색채를 더하게 되였다. 마을은 할머니에게 아름답고 소박한 꿈을 부여하였고 할머니는 이 마을에서 인생의 행복을 빚었다. 남호촌은 할머니의 초심을 굳건히 지켜주었고 할머니는 평생 사랑해온 이 땅을 여전히 지키고 있다.

린근에 유명한 “통역”- 할머니의 첫번째 꿈

1948년, 할머니는 편벽하고 빈곤한 룡정시 세린하향 문화촌에서 5남매 중의 막내로 태여났다. 어릴 때부터 활달하고 총명했던 할머니는 소학교 때부터 우수한 성적을 따내였고 학급과 학교의 학생간부로 활약했다. 하지만 중학교에 진학할 무렵 가정형편이 어려워지면서 부득불 학교를 중퇴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면서도 할머니는 공부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않았다. 당시 정부에서 문맹 퇴치 목적으로 촌마다 야간학교를 운영했는데 할머니는 낮에는 오빠네 집 애를 돌보고 농사일도 도우면서 저녁이면 야간학교에서 한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근심없이 학교를 다니는 것이 당시 할머니의 꿈이였을 것이다.

그 때 한어를 배워두었기에 지금까지도 할머니는 한어로 문장까지 쓸 수 있고 촌에서 한어로 교류할 수 있는 몇몇 안되는 사람 중의 한사람으로 되였다. 당시 연변의 농촌에는 한족들이 얼마 안되였고 대부분이 조선족이다 보니 많은 촌민들은 한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다. 어쩌다가 현성에서 간부들이 오거나 손님들이 오면 무조건 할머니네 집에 찾아와 통역을 부탁했다. 따라서 할머니는 “유명통역”으로 린근에 이름을 날렸고 지금도 마을에서 통역 겸 “대변인”으로 알려지고 있다.

할머니가 동네분들과 함께 삼합진 망강각에서 유쾌한 하루를 보냈다.

남호촌과의 인연- 할머니의 두번째 꿈

할머니가 22세 되던 해에 오빠 친구의 소개로 남호촌에 살고 있는 할아버지와 약혼을 하게 되였고 편지로 사랑을 나누었다. 10여일 뒤에야 받아볼 수 있는 편지였지만 한통 또 한통의 편지는 그들의 사랑을 불태웠다. 당시 할머니의 높은 필력에 감탄한 할아버지는 늘 자랑삼아 할머니의 편지를 동네분들에게 읽어주었다고 한다. 비록 할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지만, 할머니는 지금까지도 그 때의 련애편지를 간직하고 계신다. 나로서는 상상이 가지 않지만 련애편지는 아마 그 시대 사람들의 정과 사랑의 견증물일 것이다.

1970년 정월,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남호촌에 40평방메터도 안되는 집을 외상으로 사서 들었다. 집값을 하루빨리 갚기 위해 두분은 아글타글 일하였지만 평균분배를 했던 계획경제 시기라 일을 많이 하나 적게 하나 수입은 별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언제나 일에 앞장섰다. 부지런히 일하는 데다가 인간관계까지 좋다 보니 할머니는 생산대 부녀주임, 기공원(记工员),촌의 유치원, 소학교 교원으로까지 여러가지 일을 했었고 수차 인민공사와 생산대의 표창을 받았다.

엄동설한에도 할머니는 쉴 줄을 몰랐다. 땔나무를 하는 건 기본이고 신체가 허약한 할아버지를 대신해 뼈를 에이는듯한 추운 겨울에도 전기도 없는 벌목장에 올라가 벌목공들에게 때시걱을 끓여주는 일을 맡아했다. 매일 매일 고된 일의 반복이였지만 할머니는 종래로 가난에 불평을 늘여놓지 않았다. 할머니는 “항상 좋게 생각해라”고 늘 말씀하시군 하였다.

나의 아버지는 1971년에 태여났는데 당시 집생활이 구차하다 보니 돌사진 한장도 남기지 못했다. 조선족의 풍속으로는 애기가 첫돌이 되면 돌사진을 찍고 친척 친구들을 청하여 돌잔치를 벌린다. 당시만 해도 남호촌에서 돌사진을 찍으려면 현성인 룡정에 가야만 했다. 할머니는 그때 아버지의 돌사진을 찍어주지 못한 일을 두고 지금도 후회하군 한다.

그렇듯 가난이 싫었던 할머니는 아버지에게 항상 “너희들이 가난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공부하는 길이다.”며 백방으로 아버지의 공부를 섬기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빈곤한 생활에서 벗어나 자식을 근심걱정없이 공부시키는 것이 그 때 할머니의 꿈이였을 것이다.

나라의 기둥감으로 자라거라-할머니의 세번째 꿈

70년대 말 80년대 초 우리 나라에서 개혁개방 정책을 실시하자 농촌에서도 점차 도급제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도급제를 실시하면서 촌민들은 상대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찾을 수가 있었다. 아마 그 때가 남호촌이 제일 흥성할 때가 아니였던가 싶다고 할머니는 회억한다. 도급제를 실시하자 할머니는 소, 돼지, 닭을 사육하기 시작했고 쯤만 나면 산에 약재와 버섯 캐러 다니였다. 도급제를 실시하던 해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처음으로 벽시계를 장만했다. 벽시계를 사온 그 날 밤 할머니는 몇번이나 일어나 벽시계를 쳐다보았다고 한다. 벽시계는 당시 할머니의 보물단지였다.

아들의 공부 뒤바라지를 위해 할머니는 궂은일 마른일 가리지 않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아글타글 뒤바라지한 보람으로 1990년에 아버지는 끝내 북경대학에 입학했다. 당시 할머니는 린근에 “북경대학생 어머니”로 소문이 났다. 그 칭호는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불려지고 있다. 그 뒤로 아버지는 석사공부를 계속했고 일본 류학까지 다녀왔는데 할머니는 항상 아버지의 학업을 지지했다. 아마 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나라의 기둥감으로 자라나는 것이 그 당시 할머니의 꿈이였을 것이다.

할머니네 집 부엌에서 동생과 할머니와 함께 찰칵.

정든 고향 마을을 지켜- 할머니의 네번째 꿈

2000년에 나이 아버지와 어머니는 결혼했다. 그때의 남호촌은 집집마다 채색텔레비죤을 갖추었고 대부분 사람들이 집에 남아 농사를 지었기에 비교적 유족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그 후 연변의 농촌에는 “한국바람”이 세차게 불기 시작했다. 더 잘 살아보기 위해 언어적 우세가 있는 조선족 농민들이 한국로무라는 출국 길에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나의 할머니도 그 대오에 가담했다. 몇년 뒤 할머니는 다시 남호촌으로 돌아왔다. 지금 농촌의 농사일은 인력으로 모내기를 하고 풀을 뽑고 수확하던 지난날과는 다른 천지개벽의 변화가 일어났다. 기계화가 보급이 되였고 경작기술이 발달하여 생산효률이 매우 높아 할머니는 그냥 터전을 다루는 간단한 농사일만 하면 되였다.

최근 몇년 사이에는 당지 정부의 빈곤부축 사업 혜택을 입어 많은 공용시설이 건설되고 농민들의 대우도 큰 개선을 가져왔다. 포장도로가 집 문앞까지 수리됐고 오락활동 장소와 신체단련 기구들이 마련되였으며 마을 길에는 태양에네르기 가로등까지 설치되였다. 올해 설부터 할머니는 위챗을 쓰기 시작했다. 매일 저녁이면 아버지, 어머니와 위챗으로 통화하고 나에게 위챗으로 사진을 보내기도 하고 고무격려의 말을 남기기도 한다. 할머니는 위챗으로 젊은이들과 자주 대화하니 새로운 사물을 많이 접촉하고 시대의 발전에 뒤떨어지지 않아 참 좋다고 말한다.

할머니가 살고 있는 남호촌 제3촌민소조(3대)는 원래의 30여 세대로부터 현재 7세대 밖에 남지 않았다. 남아있는 촌민은 전부 로인들이다. 제일 ‘젊은’ 분도 이제 곧 예순이 된다고 하다. 촌의 인구가 급감하면서 농사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수확하는 계절이면 외지 사람을 고용하는 수 밖에 없게 되였다. 매년 명절이면 촌에는 사람들이 더욱 적어져서 어떤 때에는 할머니 혼자서 마을을 지키고 있다. 올해 음력설에도 우리는 어김없이 할머니네 집에서 보냈는데 온 마을에 우리 다섯 식솔 뿐이였다.

이젠 할머니도 일흔을 넘긴 년세이다. 몇년 전에 할아버지를 먼저 떠나보내신 할머니를 보고 아버지가 북경에 모시겠다고 했으나 할머니는 남호촌이 편하다면서 절대 떠나지 않으시겠다고 한다. 익숙하고 또 정든 남호촌에서 오래오래 사는 것이 최대의 행복이라고 한다. 할머니는 건강하게 로년을 보내여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것이 제일 큰 희망이라고 한다. 아마 자식을 둔 천하의 부모님들도 다 같은 마음일 것이다.

할머니와 남호촌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나는 매년마다 아버지가 고향을 찾는 것이 의무적인 것 만이 아닌 할머니,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생활하고 분투하는 땅에서 생명의 의의와 그들이 나눈 정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는 것을 깨달았다.

할머니는 자신의 꿈을 키우고 실현해 온 정든 땅을 지키고저 오늘도 남호촌에서 꿋꿋이 살아가고 있다.

필자(왼쪽)가 할머니와 동생과 함께 아버지와 어머니가 마련한 효도관광을 만끽.

/글 리윤혜(수도사범대학부속고중 2학년 2반)

길림신문 편역 유창진기자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 글 / 조련화 -   (흑룡강신문=도쿄) 2018년 5월 20일 일본조선족문화교류협회에서 주최한 우리 노래 대잔치가 도쿄 닛뽀리에서 성황리에 열렸고 나는 짝궁 훈이와 듀엣으로 무대에 오르게 되였다. 꿈만 같았던 하루, 잊을수 없는 그날은 나의 인생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의 계기가 되였다.   노래자랑에 참가하게 된것...
  • 2019-09-20
  • 독서에 심취한 전동빈,조예화부부의 이야기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창업에 뛰여드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는 종종 뉴스로 전해지기도 한다. 허나 월급을 주요 수입원으로 하는 그런 직장을 그만두고 금전적인 수익이 없는 공익사업에 뛰여드는 사례는 그리 흔치 않다. 7년간의 노력으로 쌓아올린 공무원직을 내려놓고 &...
  • 2019-09-16
  • 초등학생이 그린 테네시 대학교 로고(왼·로라 스나이더 페이스북)와 실제로 제작된 테네시대 티셔츠(오·테네시대 공식 트위터 계정). 미국의 한 대학교가 초등학교에서 놀림당하던 학생의 그림을 대학교 티셔츠로 제작했습니다. 친구들의 조롱으로 주눅 들어있던 이 아이와 부모는 어른들의 배려에 감동받았다...
  • 2019-09-14
  • 까치소리는 언제나 반갑고 그립다. 까치소리는 내 동년의 아름다운 추억중의 하나로 나의 마음 속에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 마을 앞 키 높은 백양나무 우에 둥지를 틀고 알을 까고 새끼를 키우며 가끔 마을의 낮은 지붕우로 “깍깍”거리며 날아지 날 때면 어쩐지 기분이 좋았던 나의 동년시절이다. 필자 홍순...
  • 2019-09-09
  • - 글 / 리연춘 -       (흑룡강신문=도쿄) 지난 가을쯤이였던것 같다.   이른 아침 한주일 먹거리를 장만하려고 우리집 부근의 아침시장으로 나갔다. 부지런한 한족들은 쌀쌀한 늦가을에도 사이사이에 발 들이댈 틈도 없이 일자로 길 한쪽에 난전을 펼치고 싱싱한 풋채소에 상긋한 과일에 고기까지 없는것이...
  • 2019-08-22
  • 련이은 장마로 올해 유난했던 무더위가 주춤하는 말복, 알라디조선족학교 72년 13기 졸업생동창생들이 고향마을-알라디를 찾아 큰소리로 “고향아, 우리가 돌아왔노라.”를 웨쳤다.   드디여 고향마을에 도착한 동창...
  • 2019-08-19
  • ‘인생 70 고래희’ 라고 하던데 내 나이가 벌써 73살 된다. “아이들은 날(日)이 빠르고 해(年)가 늦고 로인들은 날이 늦고 해가 빠르다”는 말과 같이 실로 감짝 사이에 한해가 지나니 말이다. 젊어서는 희망으로 살고 늙어서는 추억으로 산다더니 이 나이를 먹고 보니 지나간 그 시절이 그립기만 하...
  • 2019-08-19
  • - 글 / 한경애 -           개미 채바퀴 돌듯 석자 교단에서 달리고 달리다가 멈춰서 되돌아보니 어언간 30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다. 사슴의 눈망울을 가진 꼬마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인간성을 키워주는 시간속에서 수많은 부동한 색갈의 이야기로 아름다운 멜로디를 엮어왔다. 내 기억의 푸르른...
  • 2019-08-16
  • 인생은 미완성 숙제   김 경 희   인생살이 굽이굽이 아리랑 열두 고개, 집집마다 말 못할 사정이 있듯이 나도 살면서 끝없이 꼬리에 꼬리를 문 문제들에 마주하며 살아왔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인생 매단계마다에 의미를 부여하며 참으로 벅차고 억척스레 살아온 것 같다. 그렇게 내 인생의 끝...
  • 2019-08-15
  • - 글 / 김미란 -       (흑룡강신문=도쿄) 오늘도 예전처럼 일 끝내고 집에 와서 부랴부랴 저녁상을 차려놓고 작은 아들과 식탁에 마주앉았다.   무의식에 반찬 하나를 가리키며 아들한테 물었다.   "이 반찬 누가 제일로 좋아하지?"   "할아버지..."   "어떻게 알아???"   "엄마가 이 반찬 할 때마...
  • 2019-08-09
  • 코리아패션의 손향(좌1) 사장 연변지체장애인협회 리춘자(가운데) 회장에게 운동복을 전하고 있다. 연길 코리아패션의 손향 사장은 지난  8월 5일, 총동문회 회장단 일행과 함께 연변지체장애인협회를 방문, 운동복 20벌을 후원했다. 지체장애인협회 활동실에는 다가오는 연변주장애인좌식배구경기에 참가하기 위해 선...
  • 2019-08-08
  • 화룡시 룡성진 부흥촌 제대군인 렴경창의 고향건설 이야기 생활이 제일 구차한 촌민 기와집에 먼저 지난세기 70년대에 건설된 부흥촌 주택구 “이제 당의 지시에 따라 우리가 악전고투한다면 고향사람들이 저런 오두막에서 번신할 날도 멀지 않겠지” 제대하던 날 렴경창은 기와집 한채 보이지 않던 부흥마을을 ...
  • 2019-08-07
  • 정든 고향을 떠나면서 기억속에 담아놓은 연길공항 오늘날 세상은 5G 시대에 들어섰고 세계는 하나의 지구촌을 이루고 있다. 나한테 가정용전화기가 절실했던 시대는 불과 25년전의 일에 지나지 않지만 먼 옛날 얘기처럼 고리타분하게 들린다. 를 맞이한 고향의 변화는 실로 놀라웠다. 중국 연변에서 모바일의 혁신적인 변...
  • 2019-08-06
  • 화룡시 룡성진 부흥촌 제대군인 렴경창의 고향건설 이야기 연길 아들 집에서 기자와  인터뷰 중인 렴경창옹. (사진설명: 렴경창부부(안로인 지난해 85세로 병고)는 슬하에 네 오누이를 두었는데 딸을 일찍 잃었고 세 아들 중 두 아들은 제대군인, 지금 세 아들은 다 외국에서 로무에 종사하고 있다. 렴...
  • 2019-08-05
  • 친구들과 함께(왼쪽 두번째가 리화옥씨). 꿈같은 고향나들이 마지막 일정으로 오늘은 두만강하류일대를 따라 중국대지의 제일 동쪽에 있는 ‘동방제일촌’훈춘시 경신진 방천 관광길에 나섰다. 5월 1일 아침 여섯시 정각, 큰 언니가 새벽부터 정성껏 말아준 김밥을 넉넉히 싸가지고 약속된 지점에서 기다리고 있...
  • 2019-08-02
  •   - 글/ 박영옥 -    오늘은 토요일이라 애들이 작문배우러 오는 날이여서 여느때보다 일찍이 일어나서 아침 먹고 이쁘게 화장을 하고는 반시간 앞두고 림시로 빌려쓰고 있는 로인대학2층교실로 향했다.   그런데 몇몇 애들이 벌써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날 본 애들은 쫑그르 달려와서 저마다 나한테 인사를 했...
  • 2019-07-31
  •              하늘아래 빈자리에 평범할래야 더 평범할 수 없는 내가 서있다.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을가? 그리고 또 어디로 갈것인가? 이 물음에 답안을 작성해 본다면 조금은 식상하지만 절때로 흠을 잡을 수 없는 답이 나온다. 나는 주련화이고 엄마의 배속으로 부터 왔으며그...
  • 2019-07-30
  • "생명의 강, 만남의 강, 희망의 강"으로 마음속 깊이 여울치는 강   두만강가의 중조국경에서 친구들과 함께한 리화옥(가운데 사람)특파원 기다리던 4월 30일, 아파트문앞에서부터 도문까지 택시타고 가는데 40분 밖에 안 걸린다고 했지만 나는 부득부득 30분동안 공공뻐스를 타고 연길서역으로 향하였다. 고향에...
  • 2019-07-29
  • 진달래축제 현장에서 친구들과 함께(오른쪽 두번째가 리화옥특파원) 십여년만의 고향방문길에 마침 화룡에서 열리는 장백산진달래국제 문화관광축제에 참여할수 있는 행운을 누리게 되였다. 27일 아침 6시 30분, 축제에 가기로 약속한 시간이 되여 부랴부랴 아파트밑에 내려갔더니 중학교시절의 친구가 새까만 윤기가 흐르...
  • 2019-07-26
  • - 글 / 김영숙 -   (흑룡강신문=하얼빈) 오늘은 사촌녀동생이 백년가약을 맺는 날이다. 하얀 드레스를 입고 행복한 미소를 머금은 사촌녀동생을 바라보노라니 나도 덩달아 행복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문득 내 눈앞에는 꽃너울을 곱게 쓰고 다소곳이 머리를 숙이고 우리 김씨 가문에 들어선 올케의 예쁜 얼굴이 선히 떠올...
  • 2019-07-25
‹처음  이전 4 5 6 7 8 9 10 11 12 13 14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