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백성이야기86] 할머니의 꿈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12월19일 00시00분    조회:1276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나어린 손녀, 반평생 남호촌에서 살아온 할머니를 글로 쓰다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룡정시에서 동남쪽으로 50키로메터 쯤 가면 ‘송이버섯 고향'으로 불리우는 삼합진이 있다. 삼합진정부 소재지에서 7리 가량 더 가면 조선의 함경북도 회령시와 두만강을 사이두고 있는 남호촌이 보인다.

할머니네 집에 모인 친척과 이웃들이 맛있는 식사를 함께 하며 행복한 하루를 보낸다.

나의 할머니는 이 자그마한 시골마을에서 반평생을 보냈다. 남호촌은 할머니에게 인생의 풍상고초와 희로애락이라는 잊지 못할 기억을 남겨주었고, 남호촌 또한 할머니가 계심으로 하여 한줄기의 아름다운 색채를 더하게 되였다. 마을은 할머니에게 아름답고 소박한 꿈을 부여하였고 할머니는 이 마을에서 인생의 행복을 빚었다. 남호촌은 할머니의 초심을 굳건히 지켜주었고 할머니는 평생 사랑해온 이 땅을 여전히 지키고 있다.

린근에 유명한 “통역”- 할머니의 첫번째 꿈

1948년, 할머니는 편벽하고 빈곤한 룡정시 세린하향 문화촌에서 5남매 중의 막내로 태여났다. 어릴 때부터 활달하고 총명했던 할머니는 소학교 때부터 우수한 성적을 따내였고 학급과 학교의 학생간부로 활약했다. 하지만 중학교에 진학할 무렵 가정형편이 어려워지면서 부득불 학교를 중퇴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집에서 농사일을 거들면서도 할머니는 공부에 대한 집념을 버리지 않았다. 당시 정부에서 문맹 퇴치 목적으로 촌마다 야간학교를 운영했는데 할머니는 낮에는 오빠네 집 애를 돌보고 농사일도 도우면서 저녁이면 야간학교에서 한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근심없이 학교를 다니는 것이 당시 할머니의 꿈이였을 것이다.

그 때 한어를 배워두었기에 지금까지도 할머니는 한어로 문장까지 쓸 수 있고 촌에서 한어로 교류할 수 있는 몇몇 안되는 사람 중의 한사람으로 되였다. 당시 연변의 농촌에는 한족들이 얼마 안되였고 대부분이 조선족이다 보니 많은 촌민들은 한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했다. 어쩌다가 현성에서 간부들이 오거나 손님들이 오면 무조건 할머니네 집에 찾아와 통역을 부탁했다. 따라서 할머니는 “유명통역”으로 린근에 이름을 날렸고 지금도 마을에서 통역 겸 “대변인”으로 알려지고 있다.

할머니가 동네분들과 함께 삼합진 망강각에서 유쾌한 하루를 보냈다.

남호촌과의 인연- 할머니의 두번째 꿈

할머니가 22세 되던 해에 오빠 친구의 소개로 남호촌에 살고 있는 할아버지와 약혼을 하게 되였고 편지로 사랑을 나누었다. 10여일 뒤에야 받아볼 수 있는 편지였지만 한통 또 한통의 편지는 그들의 사랑을 불태웠다. 당시 할머니의 높은 필력에 감탄한 할아버지는 늘 자랑삼아 할머니의 편지를 동네분들에게 읽어주었다고 한다. 비록 할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지만, 할머니는 지금까지도 그 때의 련애편지를 간직하고 계신다. 나로서는 상상이 가지 않지만 련애편지는 아마 그 시대 사람들의 정과 사랑의 견증물일 것이다.

1970년 정월,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남호촌에 40평방메터도 안되는 집을 외상으로 사서 들었다. 집값을 하루빨리 갚기 위해 두분은 아글타글 일하였지만 평균분배를 했던 계획경제 시기라 일을 많이 하나 적게 하나 수입은 별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언제나 일에 앞장섰다. 부지런히 일하는 데다가 인간관계까지 좋다 보니 할머니는 생산대 부녀주임, 기공원(记工员),촌의 유치원, 소학교 교원으로까지 여러가지 일을 했었고 수차 인민공사와 생산대의 표창을 받았다.

엄동설한에도 할머니는 쉴 줄을 몰랐다. 땔나무를 하는 건 기본이고 신체가 허약한 할아버지를 대신해 뼈를 에이는듯한 추운 겨울에도 전기도 없는 벌목장에 올라가 벌목공들에게 때시걱을 끓여주는 일을 맡아했다. 매일 매일 고된 일의 반복이였지만 할머니는 종래로 가난에 불평을 늘여놓지 않았다. 할머니는 “항상 좋게 생각해라”고 늘 말씀하시군 하였다.

나의 아버지는 1971년에 태여났는데 당시 집생활이 구차하다 보니 돌사진 한장도 남기지 못했다. 조선족의 풍속으로는 애기가 첫돌이 되면 돌사진을 찍고 친척 친구들을 청하여 돌잔치를 벌린다. 당시만 해도 남호촌에서 돌사진을 찍으려면 현성인 룡정에 가야만 했다. 할머니는 그때 아버지의 돌사진을 찍어주지 못한 일을 두고 지금도 후회하군 한다.

그렇듯 가난이 싫었던 할머니는 아버지에게 항상 “너희들이 가난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공부하는 길이다.”며 백방으로 아버지의 공부를 섬기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빈곤한 생활에서 벗어나 자식을 근심걱정없이 공부시키는 것이 그 때 할머니의 꿈이였을 것이다.

나라의 기둥감으로 자라거라-할머니의 세번째 꿈

70년대 말 80년대 초 우리 나라에서 개혁개방 정책을 실시하자 농촌에서도 점차 도급제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도급제를 실시하면서 촌민들은 상대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찾을 수가 있었다. 아마 그 때가 남호촌이 제일 흥성할 때가 아니였던가 싶다고 할머니는 회억한다. 도급제를 실시하자 할머니는 소, 돼지, 닭을 사육하기 시작했고 쯤만 나면 산에 약재와 버섯 캐러 다니였다. 도급제를 실시하던 해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처음으로 벽시계를 장만했다. 벽시계를 사온 그 날 밤 할머니는 몇번이나 일어나 벽시계를 쳐다보았다고 한다. 벽시계는 당시 할머니의 보물단지였다.

아들의 공부 뒤바라지를 위해 할머니는 궂은일 마른일 가리지 않았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아글타글 뒤바라지한 보람으로 1990년에 아버지는 끝내 북경대학에 입학했다. 당시 할머니는 린근에 “북경대학생 어머니”로 소문이 났다. 그 칭호는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불려지고 있다. 그 뒤로 아버지는 석사공부를 계속했고 일본 류학까지 다녀왔는데 할머니는 항상 아버지의 학업을 지지했다. 아마 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나라의 기둥감으로 자라나는 것이 그 당시 할머니의 꿈이였을 것이다.

할머니네 집 부엌에서 동생과 할머니와 함께 찰칵.

정든 고향 마을을 지켜- 할머니의 네번째 꿈

2000년에 나이 아버지와 어머니는 결혼했다. 그때의 남호촌은 집집마다 채색텔레비죤을 갖추었고 대부분 사람들이 집에 남아 농사를 지었기에 비교적 유족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그 후 연변의 농촌에는 “한국바람”이 세차게 불기 시작했다. 더 잘 살아보기 위해 언어적 우세가 있는 조선족 농민들이 한국로무라는 출국 길에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나의 할머니도 그 대오에 가담했다. 몇년 뒤 할머니는 다시 남호촌으로 돌아왔다. 지금 농촌의 농사일은 인력으로 모내기를 하고 풀을 뽑고 수확하던 지난날과는 다른 천지개벽의 변화가 일어났다. 기계화가 보급이 되였고 경작기술이 발달하여 생산효률이 매우 높아 할머니는 그냥 터전을 다루는 간단한 농사일만 하면 되였다.

최근 몇년 사이에는 당지 정부의 빈곤부축 사업 혜택을 입어 많은 공용시설이 건설되고 농민들의 대우도 큰 개선을 가져왔다. 포장도로가 집 문앞까지 수리됐고 오락활동 장소와 신체단련 기구들이 마련되였으며 마을 길에는 태양에네르기 가로등까지 설치되였다. 올해 설부터 할머니는 위챗을 쓰기 시작했다. 매일 저녁이면 아버지, 어머니와 위챗으로 통화하고 나에게 위챗으로 사진을 보내기도 하고 고무격려의 말을 남기기도 한다. 할머니는 위챗으로 젊은이들과 자주 대화하니 새로운 사물을 많이 접촉하고 시대의 발전에 뒤떨어지지 않아 참 좋다고 말한다.

할머니가 살고 있는 남호촌 제3촌민소조(3대)는 원래의 30여 세대로부터 현재 7세대 밖에 남지 않았다. 남아있는 촌민은 전부 로인들이다. 제일 ‘젊은’ 분도 이제 곧 예순이 된다고 하다. 촌의 인구가 급감하면서 농사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수확하는 계절이면 외지 사람을 고용하는 수 밖에 없게 되였다. 매년 명절이면 촌에는 사람들이 더욱 적어져서 어떤 때에는 할머니 혼자서 마을을 지키고 있다. 올해 음력설에도 우리는 어김없이 할머니네 집에서 보냈는데 온 마을에 우리 다섯 식솔 뿐이였다.

이젠 할머니도 일흔을 넘긴 년세이다. 몇년 전에 할아버지를 먼저 떠나보내신 할머니를 보고 아버지가 북경에 모시겠다고 했으나 할머니는 남호촌이 편하다면서 절대 떠나지 않으시겠다고 한다. 익숙하고 또 정든 남호촌에서 오래오래 사는 것이 최대의 행복이라고 한다. 할머니는 건강하게 로년을 보내여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것이 제일 큰 희망이라고 한다. 아마 자식을 둔 천하의 부모님들도 다 같은 마음일 것이다.

할머니와 남호촌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나는 매년마다 아버지가 고향을 찾는 것이 의무적인 것 만이 아닌 할머니,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생활하고 분투하는 땅에서 생명의 의의와 그들이 나눈 정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는 것을 깨달았다.

할머니는 자신의 꿈을 키우고 실현해 온 정든 땅을 지키고저 오늘도 남호촌에서 꿋꿋이 살아가고 있다.

필자(왼쪽)가 할머니와 동생과 함께 아버지와 어머니가 마련한 효도관광을 만끽.

/글 리윤혜(수도사범대학부속고중 2학년 2반)

길림신문 편역 유창진기자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세 언니들은 나보다 12살, 10살, 5살 많아서 나는 누구보다도 언니들의 사랑을 흠뻑 받으며 자랐다. 아쉬운 것은 나이 차이가 커서 한집에서 생활했던 시간들이 짧은 편이였고 큰 언니가 학교문을 나서면서부터는 네 자매가 한자리에 모여 앉기도 쉽지 않았다. 큰 언니는 으로 농촌에 내려가 6년동안이나 힘든 집체호 생활...
  • 2019-07-24
  • 캐나다 조선족 협회에서는 얼마전 자연의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G로즈 로더팍에서 여름 야유회를 개최하고 조선족 동포사회의 단합과 정보교류및 친목을 도모했다. 이번 행사는 김춘식 회장, 최남 수석 부회장, 최동춘 비서장을 비롯한 협회 운영진들의 아낌없는 노력과 여러 회원들의 적극적인 동참하에 비록 짧은 만...
  • 2019-07-19
  • 첫째날의 기록 ...흥분과 감격속에서 맞이한 고향 프랑카드를 들고 공항에 마중나온 친척 친우들 나는 미국 동남부에 위치한 선샤인(햇빛) 스테이트(주)라 불리우는 플로리다주 수부 탈라하시에서 20년째 살고 있다. 탈라하시는 시정부와 대학교중심의 중소형 행정도시에 속하며 바다 가까이에 자리잡고 있다. 4...
  • 2019-07-19
  • 손익규,윤송죽 부부가 막내딸과 함께 포즈를 취한 장면     (흑룡강신문=칭다오)박영철 기자=손익규, 윤송죽 부부는 지난 1961년부터 옌타이시에 거주하면서 옌타이조선족사회의 산 증인으로 불리며 선구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옌타이시 중조어업협정 옌타이판공실 통역, 옌타이시외사판공실 섭외과 과장, 옌타이...
  • 2019-07-18
  •     - 글 / 고향련 -   2000년 4월 25일, 나는 난생처음으로 중국땅을 떠나서 일본 류학길에 올랐다.   당시 한창 류행됐던 일본류학의 붐에 떠밀려서이기도 하고 4년간 공부했던 회계전업이 나하고 맞지 않은듯 하여 다른 공부가 하고싶어서이기도 했다. 그보다 중요한건 일본에서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
  • 2019-07-17
  • 90년대 초만 해도 연변에는 가정용전화기가 없는 집이 태반이였다. 그때 나에게는 간절한 바램이 하나 있었다. 집에 전화기기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정든 모교이자 사업터인 연길시 제2고급중학교에서 조선어문 교원으로 꿈에 부풀어 있을 때 결혼한지 2년반밖에 안 되는 남편은 한국 류학길에 올랐다. 중한수교 이듬...
  • 2019-07-16
  • 산 좋고 물 맑고 인심 좋은 시골마을을 다시 찾은 박춘금,그녀의 고향건설 다시 시작된다 연길에서 찾아온 배구애호가들이 배구를 즐기고 있다. 지난세기 80년대부터 고향마을을 떠나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고향 떠나 룡정으로, 연길로 가기 시작하더니 점차 더 멀리 청도로, 북경으로, 상해로, 광주로 떠났고...
  • 2019-07-11
  • [일본글짓기응모]    나의 행복 - 글 / 정미화 -       "엄마,우리 온천 가요."   "온천?어느 온천?"   "군마쪽으로 가려는데...어디로 가겠어요?"   "글쎄, 구사쯔는 가보았는데, 참 좋았어..."   "이가호와 구사쯔, 어느쪽으로 갈가?"   일년전 대학원을 졸업하고 회사생활을 하는 딸이 ...
  • 2019-06-24
  • 얼마전 한 로인과 그의 가족들이 통화현조선족학교를 찾아 목숨을 구해준 두 학생에게 감사기를 전했다. 5월 29일 점심, 통화현조선족학교 9학년 학생 권예령, 안미현 두 학생은 통화현 산수화성 아빠트 서쪽 교통강부근에서 60세좌우되는 녀인이 갑자기 쓰러진 것을 발견하였다. 불시에 주변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어떤 사...
  • 2019-06-24
  • 57년전에 꼬마친구들과 기념사진을 남긴 해방군 아저씨(뒤줄 좌가 김일룡, 앞줄 우가 박정숙, 중간이 최송림) 57년 후 만난 해방군 아저씨와 꼬마친구(좌로부터 배영애, 김일룡, 최송림, 박정숙) 지금으로부터 57년전인 1962년, 길림성 무송현에서 장춘에 와 병 치료를 받고 있던 해방군 전사가 있었다. 그는 조...
  • 2019-06-12
  •     요즘 들어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인가?” 라는 질문을 곧잘 듣게 된다. 그 때마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려행 다닐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소리높이 대답한다.        몇달전에도 나는 친구들과 함께 5박6일의 일정으로 두바이려행을 다녀왔다. 너무도 아름다운 추억을...
  • 2019-06-03
  • 저자는 10년의 수련 끝에 정상을 앞둔 36살 신경외과 의사다. 사회에서 인정 받고, 일류대학교수 자리를 제안 받았다. 저자가 인생의 정점에 있을 때, 그는 페암말기 선고를 받는다. 그는 대학 시절 인간의 의미를 찾으려고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더 정확한 답을 얻기 위해 의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의사가 되어서 문학...
  • 2019-05-31
  • '어린이들이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울거에요' 6.1절을 맞으며 연길 청아성형외과(원장 안향화)에서는 21일, 20여명의 직원들의 마음이 담긴 사랑의 성금 1만원을 연변TV "사랑으로가는 길(219회)"프로를 통해 빈곤가정의 어린이에게 전했다.   안향화 원장은 "우리 청아성형외과는 외모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
  • 2019-05-24
  • 오늘은 나도 자랑많은 추억렬차의 기관사가 되련다.추억의 렬차를 몰고 서서히 현재를 떠나 고동을 울리며 칙칙폭폭 과거로 추억려행을 떠나련다.추억의 벌판을 지나고 추억의 고개를 넘고 추억의 굽이를 돌아 녀인들의 애환이 서린 아득히 먼 70년대 생산대의 벼모 꽂는 현장으로 가련다. 안도현 석문공사 무학대대에서 태...
  • 2019-05-23
  • 장춘시조선족차세대관심사업위원회 남관분회 배영애의 차세대 교육사랑 2015년 북경에서 열린《중국홰불》잡지사 창간 20주년 대회에서 발언한 배영애, 회의 기간 그는 중국차세대관심사업위원회 주임 고수련의 접견을 받았다. “아무리 죄를 졌다 해도 우리들의 차세대가 아닙니까?” 이는 길림성미성년범관리교...
  • 2019-05-22
  • 김선생가사도우미쎈터 대표 김경자의 퇴직 후의 보람찬 인생이야기 김경자 프로필: 1959년 반석현 출생 반석사범학교 영어전업 전공 반석3중 영어교원, 담임교원 력임 길림조선족중학교 영어교원 2014년 길림조선족중학교에서 퇴직 ...
  • 2019-05-08
  • 최근 인터넷에서 한 동영상이 인기를 끌고 있다. 동영상의 주인공은 바로 두 다리가 없는 예쁜 소녀이다. 그녀는 물구나무서기, 팔굽혀펴기부터 스케이트보드, 농구, 배드민턴, 수영까지 할 수 없는 것이 없다. 이 소녀의 이름은 웨이메이뉘(渭梅女)이다. 그녀의 인생 스토리는 너무나 감동적이다. 그녀의 미소에는 자신감...
  • 2019-05-03
  • 지금으로부터 60여년 전, 내가 18살 되던 해에 음력설을 닷새 앞두고 아버지의 꾸지람을 받은 적이 있다. 나의 한가지 감성적인 처사로 하여 받은 아버님의 첫 꾸지람이다. 하지만 그 꾸지람은 해마다 설날이 돌아올 때면 나의 머리 속에 기분좋게 떠오른다. 한것은 그 꾸지람 뒤에 아버지의 너그러운 처사가 이어져 나를 ...
  • 2019-04-22
  • 고요하던 집안에 따르릉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벨은 받는 사람이 없자 잠시 끊어졌다가 다시 울렸다. 복녀는 화장실에서 일을 보느라고 처음 울린 전화를 받지 못했다. 그래서 전화벨이 다시 울리기 무섭게 허둥거리며 전화기가 놓여있는 탁상쪽으로 뛰여갔다. 말이 뛰여갔지 걷는 것과 진배없었다. 복녀는 한달째 아침에 ...
  • 2019-04-19
  • 청명에 고향에 있는 부모님산소에 다녀왔다. 이번 청명은 바람이 많이 불어서 잠깐 절만 올리고 급하게 산소를 떠났다. 제사는 불과 10분만에 마치고 나머지는 산 사람들의 술자리다. 저승의 사람들을 위한 제사인지 이승의 사람들이 모이는 회포의 자리인지 올해따라 돌아보게 된다. 마침 호텔에서 학교 선배님 부부를 만...
  • 2019-04-09
‹처음  이전 5 6 7 8 9 10 11 12 13 14 15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