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아름다운 추억 123]찬 기후 속에서도 뜨거운 정은 있었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19년1월16일 00시00분    조회:1302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51)

▩김규칠(화룡)

1974년 7월, 화룡현 동성공사 해란소학교 제5회 졸업 기념사진. 앞줄 왼쪽 세번째가 필자.

해마다 청명, 추석이면 나는 어김없이 진정부 소재지 동네에서 10리 가량 떨어진 해란촌에 있는 어머님 산소로 찾아간다. 해란촌은 전에 내가 15년 남짓 때묻은 정든 고장이다. 이곳에서 교편을 잡고 나어린 학생들과 호흡을 같이했고 아들딸을 낳고 어머니를 모셨다.

1966년 7월,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는 해에 화룡현 동성공사 중심소학교에서는 원래 중심소학교 분교였던 해란촌 소학교를 정식 독립학교로 명명하고 교원을 물색했다. 그런데 이 학교로 가려는 교원이 없어 학교 지도부에서는 골머리를 앓았다. 설비가 부족한 건 말할 것도 없고 혼자서 여러개 과목을 맡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도 두세개 학년 복식 교수를 해야 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이미 전에 민반 녀선생 한분이 어린 학생들을 데리고 해란강에 목욕시키러 나갔다가 한 학생이 선생이 지정한 범위를 벗어나면서 익사하는 바람에 아이의 부모에게 모진 구타와 된욕을 당하고 정신타격을 받아 정신병으로 사망한 일이 있었다.

또 남자선생 한분이 대리로 갔는데 룡정으로 영화 구경 갔다가 학생 한명이 잃어져 온 동네사람들이 룡정시내를 훑다 싶이 했건만 찾지 못하니 그 선생은 속을 태우다 못해 마침 기차가 오는 것을 보고 철길에 뛰여드는 것을 사람들이 제때에 발견하고 구한 일이 있었다.

잃어졌던 학생은 이튿날 연길현 동성공사 해란촌에서 찾았다. 우리 고장은 화룡현 동성공사 해란촌이여서 두 촌은 현명이 다를 뿐 공사와 촌 이름까지 똑같아 구별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 선생은 혼쌀 먹고 다시는 분교로 안 가겠다고 나눕는 바람에 학교가 비게 될 형편이였다.

이런 상황에서 분교를 독립학교로 설치하니 선생이 적어도 3명은 있어야 했는데 3명은커녕 한사람도 구하기 어려웠다.

이 시기에 나에게는 속타는 일이 있었는데 이 문제만 해결되면 내가 가겠다고 자원했다. 사연인즉 나는 화룡현 동성 시골에서 교편을 잡고 있고 우리 부모는 왕청현 시골에 있었는데 10여년 병환에 계신 어머니를 호리하시던 아버지가 세상 뜨니 아들인 내가 모셔오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나 안해가 소속된 생산대 대장에게 제기했으나 당장에서 거절당하였다. 나는 생각다 못해 량식을 주관하는 간부를 찾아가 도시호구로 넘겨달라고 사정했다. 그 간부는 단마디에 “안된다”고 잘라말했다. 그 시기 농민을 도시호구로 넘긴다는 것은 참으로 락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였다. 나의 아이들도 태여나면서 국가 배급을 타먹는 나의 호구로 올린 것이 아니라 농민인 안해 쪽으로 넘기는 때였으니까.

내가 해란소학교로 가려는 전제조건으로 그 곳에서 우리 부모를 받겠다면 가겠다고 자보하니 교장선생은 너무도 반가와서 “내가 힘써보겠으니 우선 갈 준비를 하라.”는 것이였다. 그 때 마침 각 촌 지부서기들 회의가 있어 교장선생은 해란촌의 지부서기를 만나 나의 상황을 이야기했더니 로지부서기는 “부모를 안다는 게 선생이지 부모를 모르는 게 선생이요? 우리 받겠으니 보내시오.” 하더란다.

나는 막무가내로 얼마 안되는 이사짐을 꿍져가지고 해란촌에 갔다. 우리는 들 집이 없어 처음에는 8평방 되나마나한 남의 웃방에 있다가 낡은 흙벽 집 우사 사양실로 이사를 했다. 사양실을 뜯고 가마를 걸 부엌과 온돌을 놓고 나니 비좁기 말이 아니였다. 할수없이 나는 이깔나무로 사다리식 틀을 짜고 이불과 일부 세간을 올려놓으니 식구 여섯이 다리를 펴고 겨우 누울 수 있었다. 게다가 어머니는 하루에 10여차씩 간풍을 일으키는데 풍이 일 적마다 온몸의 신경이 졸아붙으면서 소변이 나와 까래밑이 마를 사이가 없었다.

그 시기 안해가 소속된 생산대는 1958년 대약진 시기에 팔포강 골안의 산재호들을 모두 이사시켜 해란촌에 내려와 집체로 가정별로 새집을 짓고 한개 생산대를 이룬 동네였는데 인심이 아주 후하였다. 먹을 식량마저 변변치 못한 형편이였건만 나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다. 어쩌다 반반한 음식이 생기면 들고 오던 일들이 50년 세월이 지났건만 지금도 눈앞에 보는듯 잊을 수 없다.

하루는 대장이 나를 찾아와서 “우리 생산대의 대무회의에서 토론이 있었는데 회의실 삼아 선생께서 드실 집을 지으려 하는데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여 나는 어리둥절했다. “아이구! 이런 감사할 변이라구야. 대장께서도 아시다 싶이 우리 어머니는 환자이다 보니 집이 어지럽고 지린내가 떠날 사이 없으니 여러 사원들께 페를 끼쳐서야 되겠습니까. 말만 들어도 감사합니다. 그러니 그저 회의실로만 하십시오. 우리는 들 수 없습니다.”고 사양하였다.

그 후 사원대회에서 토론을 붙이니 사원들은 “선생이 들 집을 모여들어 짓되 로력은 우리가 대고 재목을 선생이 부담하는 것이 어떻겠는가?”고 하여 그 해 집을 짓게 되였다. 생산대에서는 전문 목수재간이 있는 로인 네분과 사원 몇을 떼내여 재목과 구들돌 및 흙을 날라오고 (집터는 모래땅이여서 전문 외토를 실어와야 했다) 서까래를 얹거나 외를 엮고 흙을 바르는 일들을 사원들이 모여들어 하여 아주 훌륭한 6간 초가집을 지었다.

나는 비좁게 살다가 너른 초가에 드니 숨이 활 나와 살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 감사한 마음이 뼈속까지 스며드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1969년 문화대혁명이 고조되여 파벌싸움이 심한 세월 속에서도 이런 훌륭한 초가를 지어준 시골 인심에 저도 모르게 감사의 눈물이 날 때도 있었다. 감사한 일은 이 뿐만이 아니다.

1972년 아들애가 태여나면서 심한 병으로 매일과 같이 병원놀음을 하다 나니 안해는 생산대의 일에 나가지 못해 우리는 무거운 빚에 깔려 허덕였다. 이 때 대장을 비롯한 대무위원들은 또 한차례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당시 나는 월급 39원을 받는 국가공무원이였는데 (안해와 아이들은 모두 농촌호구) 생산대에서는 공적금 150원으로 우리 집 빚을 일부 감면해주었다. 농민들은 옹근 1년 하루도 빠짐없이 일해도 가을에 이것저것 제하고 나면 손에 거퍼 10원 돈도 쥐여보지 못하는 때였으니 그 150원이라는 돈은 참으로 천문수자나 다름없었다.

이 못난 선생도 자기들 자녀의 선생이라고 받드는 그들의 성의는 참으로 각골난망이였다. 더구나 ‘공자를 비판’하고 교원은 ‘고린내 나는 아홉째’로 몰리는 세월의 찬 기후와는 무관하게 이처럼 뜨거운 정으로 품어주는 그들의 후더운 인심은 내 일생의 영원한 빚으로 남았다. 문화대혁명! 그 거세찬 풍랑 속에 계급투쟁을 일상 과업으로 삼고 인심이 박할 대로 박한 가운데서도 이런 따뜻한 구석이 있었다.

환자인 나의 어머니를 받아준 아량 깊은 로지부서기의 드넓은 흉금은 그렇게도 따스했고 분망하 가운데서도 내가 들 집을 지어준 시골 농민들의 정은 나에게 사악한 마음을 버리고 남을 사랑할 줄 알게 가르쳤고 손톱이 닳을 정도로 일해도 헐벗고 굶주림을 면하지 못하면서도 나에게 동정의 손길을 내밀어 빚을 덜어준 그 은덕은 영원히 나의 마음속에 아로새겨져 있을 빚일 것이다. 순박하고 후더운 시골 인심은 나로 하여금 티없이 깨끗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도록 말없는 교육을 주었다.

아, 해란촌! 누구나 가기 싫어하던 해란촌에 정작 가보니 세상에 이런 좋은 고장이 얼마나 되랴 싶었다. 세외도원이 따로 없었다.

해란촌은 화룡시와 룡정시를 경계로 한 풍경이 수려한 비암산 아래 푸른 물 흐르는 해란강을 뒤배경으로 앉은 오붓한 동네이다. 또한 해란강 젖줄기로 살진 70리 평강벌이 룡정시를 사이두고 끝나가는 동네이기도 하다. 마을 앞남산은 웅장하고 위엄스런 ‘범코숭산’이 하늘을 향해 입을 짝 벌린 호랑이가 푸른 숲을 입에 물고 소리 지들듯한 금강산 같은 절승경개로 하여 내 마음속에 영원히 지울 수 없는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으로 새겨져있을 것이다.

찬 기후 속에서도 뜨거운 정이 깃들었던 땅! 해란촌이 더욱 번영하고 아름답고 행복한 무릉도원으로 될 것을 충심으로 기원한다.

길림신문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세 언니들은 나보다 12살, 10살, 5살 많아서 나는 누구보다도 언니들의 사랑을 흠뻑 받으며 자랐다. 아쉬운 것은 나이 차이가 커서 한집에서 생활했던 시간들이 짧은 편이였고 큰 언니가 학교문을 나서면서부터는 네 자매가 한자리에 모여 앉기도 쉽지 않았다. 큰 언니는 으로 농촌에 내려가 6년동안이나 힘든 집체호 생활...
  • 2019-07-24
  • 캐나다 조선족 협회에서는 얼마전 자연의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G로즈 로더팍에서 여름 야유회를 개최하고 조선족 동포사회의 단합과 정보교류및 친목을 도모했다. 이번 행사는 김춘식 회장, 최남 수석 부회장, 최동춘 비서장을 비롯한 협회 운영진들의 아낌없는 노력과 여러 회원들의 적극적인 동참하에 비록 짧은 만...
  • 2019-07-19
  • 첫째날의 기록 ...흥분과 감격속에서 맞이한 고향 프랑카드를 들고 공항에 마중나온 친척 친우들 나는 미국 동남부에 위치한 선샤인(햇빛) 스테이트(주)라 불리우는 플로리다주 수부 탈라하시에서 20년째 살고 있다. 탈라하시는 시정부와 대학교중심의 중소형 행정도시에 속하며 바다 가까이에 자리잡고 있다. 4...
  • 2019-07-19
  • 손익규,윤송죽 부부가 막내딸과 함께 포즈를 취한 장면     (흑룡강신문=칭다오)박영철 기자=손익규, 윤송죽 부부는 지난 1961년부터 옌타이시에 거주하면서 옌타이조선족사회의 산 증인으로 불리며 선구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옌타이시 중조어업협정 옌타이판공실 통역, 옌타이시외사판공실 섭외과 과장, 옌타이...
  • 2019-07-18
  •     - 글 / 고향련 -   2000년 4월 25일, 나는 난생처음으로 중국땅을 떠나서 일본 류학길에 올랐다.   당시 한창 류행됐던 일본류학의 붐에 떠밀려서이기도 하고 4년간 공부했던 회계전업이 나하고 맞지 않은듯 하여 다른 공부가 하고싶어서이기도 했다. 그보다 중요한건 일본에서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
  • 2019-07-17
  • 90년대 초만 해도 연변에는 가정용전화기가 없는 집이 태반이였다. 그때 나에게는 간절한 바램이 하나 있었다. 집에 전화기기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정든 모교이자 사업터인 연길시 제2고급중학교에서 조선어문 교원으로 꿈에 부풀어 있을 때 결혼한지 2년반밖에 안 되는 남편은 한국 류학길에 올랐다. 중한수교 이듬...
  • 2019-07-16
  • 산 좋고 물 맑고 인심 좋은 시골마을을 다시 찾은 박춘금,그녀의 고향건설 다시 시작된다 연길에서 찾아온 배구애호가들이 배구를 즐기고 있다. 지난세기 80년대부터 고향마을을 떠나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고향 떠나 룡정으로, 연길로 가기 시작하더니 점차 더 멀리 청도로, 북경으로, 상해로, 광주로 떠났고...
  • 2019-07-11
  • [일본글짓기응모]    나의 행복 - 글 / 정미화 -       "엄마,우리 온천 가요."   "온천?어느 온천?"   "군마쪽으로 가려는데...어디로 가겠어요?"   "글쎄, 구사쯔는 가보았는데, 참 좋았어..."   "이가호와 구사쯔, 어느쪽으로 갈가?"   일년전 대학원을 졸업하고 회사생활을 하는 딸이 ...
  • 2019-06-24
  • 얼마전 한 로인과 그의 가족들이 통화현조선족학교를 찾아 목숨을 구해준 두 학생에게 감사기를 전했다. 5월 29일 점심, 통화현조선족학교 9학년 학생 권예령, 안미현 두 학생은 통화현 산수화성 아빠트 서쪽 교통강부근에서 60세좌우되는 녀인이 갑자기 쓰러진 것을 발견하였다. 불시에 주변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어떤 사...
  • 2019-06-24
  • 57년전에 꼬마친구들과 기념사진을 남긴 해방군 아저씨(뒤줄 좌가 김일룡, 앞줄 우가 박정숙, 중간이 최송림) 57년 후 만난 해방군 아저씨와 꼬마친구(좌로부터 배영애, 김일룡, 최송림, 박정숙) 지금으로부터 57년전인 1962년, 길림성 무송현에서 장춘에 와 병 치료를 받고 있던 해방군 전사가 있었다. 그는 조...
  • 2019-06-12
  •     요즘 들어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인가?” 라는 질문을 곧잘 듣게 된다. 그 때마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려행 다닐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소리높이 대답한다.        몇달전에도 나는 친구들과 함께 5박6일의 일정으로 두바이려행을 다녀왔다. 너무도 아름다운 추억을...
  • 2019-06-03
  • 저자는 10년의 수련 끝에 정상을 앞둔 36살 신경외과 의사다. 사회에서 인정 받고, 일류대학교수 자리를 제안 받았다. 저자가 인생의 정점에 있을 때, 그는 페암말기 선고를 받는다. 그는 대학 시절 인간의 의미를 찾으려고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더 정확한 답을 얻기 위해 의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의사가 되어서 문학...
  • 2019-05-31
  • '어린이들이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울거에요' 6.1절을 맞으며 연길 청아성형외과(원장 안향화)에서는 21일, 20여명의 직원들의 마음이 담긴 사랑의 성금 1만원을 연변TV "사랑으로가는 길(219회)"프로를 통해 빈곤가정의 어린이에게 전했다.   안향화 원장은 "우리 청아성형외과는 외모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
  • 2019-05-24
  • 오늘은 나도 자랑많은 추억렬차의 기관사가 되련다.추억의 렬차를 몰고 서서히 현재를 떠나 고동을 울리며 칙칙폭폭 과거로 추억려행을 떠나련다.추억의 벌판을 지나고 추억의 고개를 넘고 추억의 굽이를 돌아 녀인들의 애환이 서린 아득히 먼 70년대 생산대의 벼모 꽂는 현장으로 가련다. 안도현 석문공사 무학대대에서 태...
  • 2019-05-23
  • 장춘시조선족차세대관심사업위원회 남관분회 배영애의 차세대 교육사랑 2015년 북경에서 열린《중국홰불》잡지사 창간 20주년 대회에서 발언한 배영애, 회의 기간 그는 중국차세대관심사업위원회 주임 고수련의 접견을 받았다. “아무리 죄를 졌다 해도 우리들의 차세대가 아닙니까?” 이는 길림성미성년범관리교...
  • 2019-05-22
  • 김선생가사도우미쎈터 대표 김경자의 퇴직 후의 보람찬 인생이야기 김경자 프로필: 1959년 반석현 출생 반석사범학교 영어전업 전공 반석3중 영어교원, 담임교원 력임 길림조선족중학교 영어교원 2014년 길림조선족중학교에서 퇴직 ...
  • 2019-05-08
  • 최근 인터넷에서 한 동영상이 인기를 끌고 있다. 동영상의 주인공은 바로 두 다리가 없는 예쁜 소녀이다. 그녀는 물구나무서기, 팔굽혀펴기부터 스케이트보드, 농구, 배드민턴, 수영까지 할 수 없는 것이 없다. 이 소녀의 이름은 웨이메이뉘(渭梅女)이다. 그녀의 인생 스토리는 너무나 감동적이다. 그녀의 미소에는 자신감...
  • 2019-05-03
  • 지금으로부터 60여년 전, 내가 18살 되던 해에 음력설을 닷새 앞두고 아버지의 꾸지람을 받은 적이 있다. 나의 한가지 감성적인 처사로 하여 받은 아버님의 첫 꾸지람이다. 하지만 그 꾸지람은 해마다 설날이 돌아올 때면 나의 머리 속에 기분좋게 떠오른다. 한것은 그 꾸지람 뒤에 아버지의 너그러운 처사가 이어져 나를 ...
  • 2019-04-22
  • 고요하던 집안에 따르릉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벨은 받는 사람이 없자 잠시 끊어졌다가 다시 울렸다. 복녀는 화장실에서 일을 보느라고 처음 울린 전화를 받지 못했다. 그래서 전화벨이 다시 울리기 무섭게 허둥거리며 전화기가 놓여있는 탁상쪽으로 뛰여갔다. 말이 뛰여갔지 걷는 것과 진배없었다. 복녀는 한달째 아침에 ...
  • 2019-04-19
  • 청명에 고향에 있는 부모님산소에 다녀왔다. 이번 청명은 바람이 많이 불어서 잠깐 절만 올리고 급하게 산소를 떠났다. 제사는 불과 10분만에 마치고 나머지는 산 사람들의 술자리다. 저승의 사람들을 위한 제사인지 이승의 사람들이 모이는 회포의 자리인지 올해따라 돌아보게 된다. 마침 호텔에서 학교 선배님 부부를 만...
  • 2019-04-09
‹처음  이전 5 6 7 8 9 10 11 12 13 14 15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