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아름다운 추억 126]81세에 겪은 풍찬로숙의 고행
조글로미디어(ZOGLO) 2019년1월25일 00시00분    조회:2065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54)

▩김수철(룡정)/오기활(도문) 대필

김수철 교수. 김교수는 이 토배기 현미경에 의거해 자신이 채집한 2600여종의 식물표본을 사생하였다. /오기활 찍음

나의 식물채집은 만년에 또 한번 잊을 수 없는 고행을 겪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13년 전인 2006년 9월 10일에 나는 81세 나이에 식물조사의 지점을 룡정시 지신으로 택했다.

룡정에서 지신 성남까지는 택시로 멋스레 갔다. 다음부터는 도보이다. 식물조사는 부득불 ‘11호차’만 리용해야 할 뿐 다른 여지가 없다. 하기에 이 일은 남들에게는 아주 괴로운 일처럼 보인다. 나도 떠날 때는 다소 걱정이 되지만 일단 현지에 도착하면 내가 보고픈 초목들로 흥에 겨워 종일 다녀도 고단하기는 하지만 성취감에 피로감이 압도된다.

지신의 이 계절은 송이 사냥군들이 산을 메주 밟듯 헤매니 수림 속의 풀밭에 남긴 그들의 발자국으로 나는 비록 혼자몸이지만 외롭다는 감을 느끼지 못하였다.

내가 만나려는 식물마다 저들이 갖고 있는 모든 정보를 나에게 끊임없이 전달해주는 데서 나는 눈고픔과 귀고픔을 말리는 매력에 도취되여 다른 여념을 가질 겨를이 거의 없었다.

한식경 남짓 송림 속에서 헤매느라니 뜻밖에 동북해방무명렬사비석을 만났다. 비록 주위는 잔디풀로 깔렸으나 우거진 나무숲 속에 숨겨진 데서 쉽게 찾아볼 사람이 거의 없다는 생각으로 무척이나 마음이 언짢았다.

나는 혁명렬사들의 혁명정신 위압에 눌려 불시에 내 몸이 작아지는 감을 느꼈다. 그리고 혁명사업에 보귀한 생명을 바치고 고이 잠든 그들에 비하면 지금의 나의 고생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부끄러움이 떠올랐다.

나는 머리 숙여 렬사 비석에 경의와 추모의 묵도를 하고 나니 혁명렬사들이 나를 고무하고 격려하는 감이 느껴졌다.

‘혁명의 로근거지인 연변은 가는 곳마다 원쑤들과 용맹하게 싸우다가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쓰러진 무명 혁명렬사들이 그 얼마일가!?’

한동안 이런 생각으로 모대기던 나는 당년에 부르던 추도가를 맘속으로 불렀다.

가슴 우에 손을 얹고 쓰러진다 혁명군

가슴에서 흐르는 피 푸른 풀에 질벅해

산에 나는 까마귀야 시체 보고 울지 말아

몸은 비록 죽었으나 혁명정신 살아있다

……

후- 긴 한숨 따라 눈굽이 젖어나며 머리 속에는 “오성붉은기에는 조선혁명렬사의 붉은 피가 슴배여있다”고 한 모택동 주석의 말씀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만약 세상에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고 대신으로 죽는 법이 있다면 비록 늦었다고는 해도 이 나이에 내가 렬사를 대신해 죽어지고 이름 모를 렬사가 회생하여 장가전이면 장가를 가고 분단된 조국일지망정 한번 다녀왔으면 얼마나 좋을가…’

나는 이런 생각으로 혁명렬사들의 바람이 바로 오늘의 행복한 생활이라고 생각되여 마치 잠에서 깬 사람마냥 불시에 새 힘을 얻고 계속하여 숲속을 헤치며 찾고저 하는 식물에만 눈정신을 팔았다.

‘큰쓰레산’ 바위 속에 드문드문 차지한 가둑나무 숲에 이르니 해가 서산에 기울었다. 나는 큰 바위를 의지하여 준비하였던 비닐박막으로 비바람을 막을 수 있는 정도의 비닐하우스를 꾸미였다. 지금은 맹수들이 거의 없고 또 이 나이를 먹으니 귀신도 두렵지 않았다. 단 겁이 있다면 비바람의 공습 뿐이였다. 10월이 당금인 데도 다행으로 밤 날씨가 좋았기에 혼자몸으로 심산 속에서 순리롭게 야영을 하였다.

새날이 희붐히 밝으니 또 길도 없는 수림 산속으로 향하였다. 남쪽 벼랑에 이르니 2~3메터 높이의 기둥 모양으로 된 석림 천불지산(天佛脂山)이 한눈에 안겨들었다. 1985년 룡정현 지명지는 “하늘의 법사가 옥황상제의 성지를 받고 이곳으로 내려왔다고 하여 ‘천불지산’이라고 불렀다”고 기록하였다.

천불지산 정상에 오르면 오봉산, 큰쓰레 노름바위 등 두만강의 이북 산봉들이 한눈에 안겨온다. 《길림신문 》에서 본 룡정시 오정묵씨의 천불지산 얘기이다.

나와 천불지산의 인연은 이상하게 맺어졌다. 1990년대 초반의 어느 날, 등산길에서 약재 캐는 로인을 만나 이 말 저 말을 나누던 끝에 산 이름을 물었더니 천불지산이라고 알려주었다. 나는 그 로인의 전설 같은 이야기를 허망한 전설로 마이동풍으로 흘려보냈는데 후날에 자료들을 찾아보니 그 전설 속의 인물이 실존인물로(룡성스님) 그가 유명한 반일지사라는 것을 알았다.

천불지산을 바라보며 “절승경개는 여기로다…”란 시구가 떠올랐다. 그리고 천불지산의 경관을 연길 모아산에 옮겨다 심는다면 얼마나 많은 국내외 관광객을 끌 것인가는 속셈도 해보았다.

‘아쉽도다! 지금은 관광객이 나 혼자 뿐이니 천불지산이 독수공방 신세로구나!’

이런 아쉬운 심정으로 천불지산을 등지고 한참을 걸으니 발목까지 풀썩 빠지는 습지에서 키다리로 자란 키다리바비꽃의 아름다움이 놀라울 정도였다…

날이 어두워졌다.

지신에서 삼합으로 넘어가는 접경지에 이르니 지신림장 일군들이 내 볼 바엔 멋스러운 집을 짓느라고 한창이였다.

“아바이는 어디서 오십니까?

“오기는 지신에서 오는데…”

“무얼 하러 오셨습니까?”

“식물채집이지요”

“아바이, 이곳은 식물채집이 금지된 구역이니 다시는 오지 맙소. 한번만 용서하꾸마.”

“그렇게 하오리다. 그런데 여기서 대명동(지금의 부유촌)까지 가려면 몇리나 걸어야 하오?”

“70리꾸마.”

뜻밖에도 한 젊은이가 70리라는 말에 내가 주저하는 눈치가 보였던지 나를 조용한 곳으로 데리고 가더니 “대명동이 70리가 안됩니다. 17리나 되는데 날이 저물기 전에 아바이는 이곳을 빨리 떠나가십시오.”라고 알려줬다.

나는 사람냄새가 나는 젊은이의 말에 “이렇게 친절하게 안내해주니 정말 고맙구려…”라는 인사말을 대충 남기고 동남쪽으로 열린 골짜기를 향해 걸었다.

기실 내가 생각이 나는 대로 그들에게 “지신림장에서 한동안 일을 본 적이 있는 김상래를 아시오? 내가 상래의 아버지요…”라고 한마디만 했더라도 그들이 이 주책없는 늙은이에게 잠자리도 마련하고 때시걱도 반반히 차릴 것이지만 내가 그들에게 페를 끼치기보다 차라리 숲속에서 나 홀로 마음을 푹 놓고 야영을 하는 편이 퍼그나 편안하겠다고 생각하고 갈길을 재촉했다.

나는 남들에게 페를 끼치는 것이 송구스러워 질색한다. 지금도 남에게 부담되는 일이 마음에 걸려 심지어 90을 넘긴 로친까지 딸집에 보내고 고군작전을 하면서 《길림성식물지》를 편찬하기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계속 이어지는 길가에서 엄청나게 큰 독활(獨活)을 만나니 ‘여기는 확실히 심산이 옳구나’는 생각이 떠올랐다.

어두운 산곡간의 길을 걸으면서 곡간으로 흐르는 내물을 건너갔다가는 또 그 내물을 다시 건너오는 것을 몇번이나 반복했다.

나의 경험과 이미 걸은 짐작으로 25리는 잘되게 걸었는 데도 17리 가량 된다는 대명동은 보이지도 않는다. 그럴 즈음에 변덕스럽게도 “꽈르릉…” 하고 귀청을 울리는 우뢰소리가 이 늙은이를 경악케 한다. 게다가 급하게 내물을 건너다가 어림증으로 돌에 걸려 넘어져 온몸이 물참봉이 되였다.

더는 갈 수 없게 되였다. 앞뒤가 어두워서 좀처럼 방향과 행길을 분간할 수 없었다.

촌보난행의 시각에 엎친 데 덮치는 격으로 소낙비까지 억수로 퍼붓기 시작했다. 나는 물가에서 꽤나 굵직한 버드나무를 꺾어 두 버드나무 사이에 가름대를 걸고 거기에 비닐박막으로 주머니 모양의 하우스를 겨우 만들고 그 속에 몸을 숨겼다.

실로 앉지도 못하고 서지도 못하는 몸가짐으로 비닐박막 주머니를 쓰고 서있는 꼴이였다. 물판에 앉을 수도 없으니 말이다.

어제 숲속에서 만난 혁명렬사를 다시 생각하며 총탄이 비발치는 최전선에 비하면 이까짓 비방울은 아무 것도 아니였다.

비를 맞아 물참봉이 된 내가 홀로 지낸 이번 길이 결국은 2박3일의 힘겨운 야영길이였다.

날이 밝자 바람으로 자리를 떠나 산곬을 따라 내려가니 하마 양식장의 사나운 집지키기 개가 길을 막아나섰다. 집주인이 나와서 돌아가는 길 문을 열어줬다.

넓은 시야에 삼합청천저수지가 안겨왔다. 다행히도 대명동(부유촌)에서 삼합진으로 달리는 빈 택시를 만나 잡아타고 거침없이 룡정 집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만년에 호기심으로 떠난 2박3일간의 식물조사는 나에게 찬비를 맞게 하고 이틀이나 나홀로를 寒渡를 시켰어도 하느님이 돌본 덕분으로 감기도 안 걸리고 성공적으로 이어졌으니 나에게는 대단한 축복이였다

(김수철, 95세, 연변농학원 교수)

2017년 김수철 교수가 훈춘에서 박영호 제자의 식물육종 시험기지를 돌아보고 있다. /오기활 찍음

길림신문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ㅡ룡정온천사우나의 ‘때밀이박사’ 김철수도 아빠트 두채에 자가용 갖춘 부자 지금은 목용탕에서 때밀이를 하는 사람들중 조선족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때밀이를‘천’한 일로 여기기때문이다. 하지만 목욕탕에서 때밀이를 17년 째 해오고 있는...
  • 2018-05-16
  • - 아들의 프로 데뷔를 보고 싶은 한 아버지의 가슴 아픈 사연 지난 10일 만난 정명호(46세)씨는 수심이 가득했다. 부모가 돼서 자식에게 자꾸만 부담을 주고 짐이 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 뿐이라고 했다. 목에 튜브를 낀 정명호씨는 이틀에 한번씩 투석 치료를 받아야 하는 뇨독증 환자이다. 당뇨합병증을 10여년 앓던 그...
  • 2018-05-14
  • 5월 10일 오전, 연길시 신흥가 민창사회구역에서 점심준비가 한창이다. 어머니의 사랑을 확인하고 기념하는 날인 어머니날은 미국에서 유래된 기념일(5월 두번째 일요일)로 연변에서는 ‘3.8’부녀절이나 ‘8.15’로인절 등에 비해 작은 규모의 비교적 생소한 명절에 불과하나 독거로인을 비롯한 로인...
  • 2018-05-12
  • 4월 22일, 일본국제문화원 정걸씨의 초청으로 메지로대학“스즈키선생과 장연선생을 모시는 모임”에 참가하였다. 이날 모임의 현장 ㅡ 동경 닛포리 HOTEL LUNGWOOD으로 가는 길은 연변의“진달래꽃 축제”를 마중해 언녕 핀듯한 울긋불긋한 철쭉꽃들로 필자의 기분이 더 없이 상쾌하였다. 이날 모임은...
  • 2018-05-10
  •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11) ▩양상태(길림) 필자부부가 당시 두손으로 지은 기와집 내가 결혼할 당시(1967년 겨울)에 우로는 아버지, 어머니, 형님, 누이가 계셨는데 누이는 출가했고 형님은 항미원조에 나갔다가 제대하여 흑룡강성 대경시에 배치받았다. 아래로는 남동생이 둘 있었는데 ...
  • 2018-05-09
  • 왕청진후대관심사업위원회 전금선 주임의 사적   (흑룡강신문=하얼빈)리강춘 특약기자= 10년을 하루와 같이 왕청현 왕청진 동진소학교의 학교, 유치원어린이들에게 새 이불, 솜신, 솜옷, 교복, 운동복을 보내주고 생활형편이 어려운 가정의 학생들에게 온갖 사랑의 선물을 보내주는 공산당원이 있다. 그가 바로 왕청진 후...
  • 2018-05-08
  •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응모작품 (10) ▩김삼철(룡정) 1968년 11월 7일, 맏딸 홍화의 돌생일날에 남긴 기념사진 지금도 우리 부부가 처음 엄마 아빠로 되던 날을 생각하면 나는 기쁨보다 온몸에 소름이 끼친다. 처음 맞게 되는 큰애의 출생이 안해의 난산으로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 줄을 누가 알았으랴. &lsqu...
  • 2018-05-04
  •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9) ▩김성숙(장춘) 앞줄 왼쪽부터 필자의 올케, 어머니, 오빠. 뒤줄 왼쪽부터 필자의 동생부부, 언니, 필자 김성숙. 어머니는 아버지를 일찍 여읜 우리 네 형제자매를 근면하고 정직한 사람으로 키우기에 힘썼다. 후에 아들을 장가 보내 며느리를 삼은 후에는 화목한 가...
  • 2018-04-25
  • 료녕성 무순시에서 해방전쟁시기 전투영웅 리형선 로인을 만나 취재중인 김광현. 출판기념모임에서《백년실록》교육편의 주필인 허청선 교수와 담소하고 있는 김창석. (지난 기에 이어) 김광현과 김창석은 아예 우리 지도의 최남단에 위치한 해남도로부터 취재를 시작하기로 기획을 하고 일시불로 동영상카메라 4대를 샀다...
  • 2018-04-20
  • -10여년간 불우이웃에 따뜻한 애심손길 보내준 김선희씨 이야기 휴빈스의 애심천사 “영채꽃”은 누구? “불우이웃을 돕는데 전혀 사심이 없고 항상 앞장선다” 는 짤막한 기사제보를 보내준 사람은 화룡시 팔가자진에서 옹기된장기업을 운영하고있는 장청옥, 김경남씨 부부였다. 함께 애심활동을...
  • 2018-04-16
  • 연변주봉체육양성쎈터 양매 외지에 오래 있다 보면 누구나 고향을 그리워하기 마련이다. 창업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 줄곧 외지에서 사업했던 연길시주봉체육양성쎈터 교장 양매(43세)도 그중 한 사람이다.   “창업을 시작하기 전에 저는 줄곧 장춘, 심양 등지에서 기업관리에 종사했습니다. 외지에 나간 시간이...
  • 2018-04-13
  •     광둥 후이저우에 조선족 노인협회가 탄생되기까지   (흑룡강신문=하얼빈) 자녀따라 광둥에 진출한 노인들은 악착같이 버텼다. 적응기는 빡셌고 슬펐다.   친구도, 말 동무도 없었던 노인들은 정착 과정에서 문화적응, 언어장벽, 여가생활의 부족, 병원 등 사회 공공 기관  사용의 불편은...
  • 2018-04-11
  •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7) ◈김철우(위해) 40여년전 유치원 문예공연을 마치고 남긴 기념사진(중간 필자) 오늘 나는 책상서랍을 뒤지다 우연히 흑백사진 한장을 땅에 떨구었다. 허리를 굽혀 손에 쥐여들고 보다가 나는 세월 속에 깊숙이 묻힌 추억의 바다 속에 저도 몰래 빨려들어가고 말았다....
  • 2018-04-11
  • 일본에 온 지가 어느덧 18년이 돼간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두번이나 변할 정도의 기나긴 세월이 눈깜짝 할 사이에 흘러갔다. 일본은 나에게 희망도, 행복도, 저주도, 슬픔도 배워준 희로애락의 인생교과서이다 . 나는 처음부터 그 어떤 웅대한 포부나 꿈을 가지고 일본류학을 선택한 것은 아니였다. ...
  • 2018-04-10
  • 5일 새벽, 깊은 산속에서 54년간 묵묵히 렬사기념비를 지켜온 리은기 로인이 지팡이를 짚고 오솔길을 따라 마을에서 그닥 멀지 않은 산속을 향해 걷는다. 길의 저 끝에는 혁명렬사기념비 하나가 조용히 서있었다. 기념비에 도착한 로인은 손으로 기념비 우에 앉은 먼지를 살살 닦아내고는 기념비 앞에 두 발 모아 바로 선 ...
  • 2018-04-09
  • 일본전통씨름대회인 오오즈모 현장 지난 4월 4일 일본 교토 마이즈루 (舞鶴) 시에서 있은 봄철 오오즈모(大相撲:일본전통씨름대회)에서 인사말을 하던 시장이 갑자기 지주막하출혈로 쓰러졌다. 긴급한 상황에서 관객석에 있었던 두 녀성(간호사)이 도효(土俵:경기장)에 올라 구급조치를 취하게 되였고 잇따라 다른 두명...
  • 2018-04-09
  • [편집자의 말] 을 펴내면서 북경 등 전국 각지 네티즌들 뿐만 아닌 한국 네티즌까지 아낌없는 고무격려와 응원의 박수에 감사를 드린다. 에서는 서로 떨어져있는 부모와 자식간의 그리움, 원망으로부터 서로 리해해주고 서로 응원해주는 가족사랑을 담은 내용이였다면 (3)에서는 부모와 자식간 소통의 기회를 마련해가면서...
  • 2018-04-08
  •    든든한 "무송서기"로 불리우는 룡정시 석문촌 김무승 제1서기   (흑룡강신문=하얼빈)류설화 렴청화 연변특파원= "우리 무송서기한테 토닭알하고 된장을 좀 줘야겠는데, 우리 아바이는 매일 저녁만 되면 날이 추워져서 무송서기가 잠을 못잘가봐 '우리 집으로 데려올까'하고 물어보오. 어디 그뿐이오...
  • 2018-03-29
  • 제2회 ‘아름다운 추억’ 수기 응모작품 (5) ◈김삼철(룡정) 당년의 ‘땅소나기’ 김병인로인(84세). 당시 조선에 사는 한 친척 화가가 놀러 왔다가 그렸다고 함.
  • 2018-03-29
‹처음  이전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