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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글짓기응모] 꿈꾸는 별
조글로미디어(ZOGLO) 2019년2월13일 11시10분    조회:2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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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 현성해 -

 

 

예술학교시절 강신자교수님과 함께

  1. 꿈많은 어린시절

  아버지께서는 넓은 바다의 별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사람이 되라는 뜻에서 나에게 성해(星海)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다. 그 간절한 기대만큼이나 나는 어릴적부터 다재다능한 소녀로 성장해왔다. 타고난 고운 목소리로 동네에서는 <꼬마가수>로 불리웠고 소학교3학년 때 연길시 소년궁전 음악선생님으로부터 꼭 한번 배양해보고 싶다는 제안을 받아 나는 바로 전문적인 음악공부를 할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였다. 수많은 련습으로 허다한 무대에 오르게 되였고 어릴적부터 텔레비죤프로에도 출연하며 소중한 경험과 실력들을 쌓아갔다.

  그 뒤 5학년이 되면서 나는 소원대로 연변대학 예술학원 민악반에 입학하였다.

  강신자교수님의 문하에서 남도민요와 판소리를 전공하게 되였는데 그 때 동기들로는 최려나, 박연, 김선희,김해연 등이 있었다.그중 최려나,박연과 함께 세명이 같이 하는 무대가 많았다. <음력설야회>, <매주일가>, <주말극장> 등 프로에 참여하면서 점차 나를 알아봐주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였다.당시 방송외에도 많은 잡지와 광고,라지오 프로 등에 참여를 하면서 나는 그야말로 자신의 꿈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씩 알차게 걸어갔다.그렇게 학업과 방송을 병행하는 바쁜 학창시절을 보내며 대학입시를 준비하던 어느 날,불현듯 더욱 큰 세상을 경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갔다.맞춰진 인생퍼즐이 아닌 부풀어오른 청춘의 열정으로 용기 있는 도전을 해보고 싶었던 나는 곧 일본류학으로 자신의 진로를 선택하게 되였다.

 

 

그때 그 시절 박연, 최려나와

  2. 류학시절의 이모저모

  수많은 환상과 기대를 한몸에 지닌채 일본에 도착하고 보니 현실은 생각했던 것보다 만만치 않았다.

  우선 생활비와 학비를 벌기 위해서 곧바로 일자리를 찾아야만 했으나 일본어가 많이 서툴렀던 나에게 있어서 이는 너무 어려운 일이였다.그러다보니 궂은 일 마른 일을 가릴 상황이 못되였다. 일할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 닥치는대로 일했었다.택배회사에서 무거운 짐을 나르면서 한달에 체중이 3킬로그람씩 빠지기도 했고,야키니쿠가게에서는 매일 주방 안에서 땀으로 샤와를 할 정도로 무거운 솥가마를 닦기도 했었다.너무나 고달프고 힘들어서 남몰래 눈물도 참 많이 흘렸었다.

  화려하고 편안했던 고향에서의 생활과는 달리 일본에서의 나는 그야말로 누구 하나 알아주지 않는 일개 가난한 류학생에 불과했다. 가끔은 자신의 한계를 느낄 때마다 포기라는 단어가 자꾸 떠올랐지만 여직껏 나의 뒤바라지를 위해 묵묵히 헌신해준 부모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려 차마 이대로 주저앉을수는 없다고 자신을 다독였다.

  노력과 인내의 시간은 쓰거웠지만 그 결실은 매우 달콤했다.어느덧 나의 일본어실력은 놀라울 정도로 제고되였고 하고 싶은 일도 척척 해나갈수 있게 되였다.

  한번은 일본 수제버거체인점인 <모스버거>라는 곳에 들어가 일을 시작했는데 당시 가게에는 많은 젊은이들이 있었다. 하는 일도 적성에 맞았고 또 그 곳에서 좋은 친구들도 사귀며 즐거운 나날을 보낼수가 있었다.햇내기 아르바이트생으로부터 시작하여 나중에는 나의 근면과 성실함이 인정을 받아 아르바이트매니저로까지 승진하여 신참들을 가르치고 점장의 오른 팔 역할을 하면서 3년 이상 지내게 되였다.

  하는 일도 재미있고 낯선 일본땅에서의 류학생활도 적응을 잘해 나갔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늘 이름모를 공허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공허함’은 바로 내가 잠시 내려놓아야 했던 < 음악> 이라는 것을 알게 되였다.

  그러던 어느날,우연한 기회에 친구 따라 세계류학생모임에 참가하게 되였는데 그 곳에서 흘러나오는 우리말로 된 노래들은 내 맘을 살폿이 어루만져주었다.그 동안의 간절함이 폭발한듯 나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러내렸다.노래를 부르면서 행복했던 모든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오랜 시간동안 그 행복을 느끼지 못했으니 내 마음의 갈급함은 그야말로 목마른 사슴 같았다.그 뒤로 나는 매주마다 각 나라의 류학생들과 교민 3천명씩 모이는 그 모임에 참석해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특별한 행사나 라이브콘서트가 있을 때면 한국의 유명가수들과 나란히 무대에 올라 우리 민요를 부르기도 하면서 점차 일본생활에도 적응해가기 시작하였다.

 

 

일본유학시절

  3. 일인다역을 충실하게

  학교를 졸업한 뒤 나는 일본의 명문대학 와세다대학의 한 연구실 비서로써 취직을 했다. 허나 사무직보다는 내게는 한사람 한사람 눈을 맞춰가며 미소를 주고 받는 써비스업이 더 매력있게 느껴졌다.하여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가차없이 사직서를 제출하고 도꾜 긴자의 유명한 백화점에 다시 서류를 넣었다.그렇게 외국인이란 나 하나뿐인 큰 기업에 무난하게 입사할수 있었고 그 곳에서 써비스업에 관한 기본자세와 태도부터 시작하여 철저한 훈련을 받게 되였다.워낙 일본인외에도 각국 려행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 나는 매장업무외에도 일본어,한국어,중국어,영어로 통역을 하기도 하면서 정말 “꼭 필요한 인재”로 활약하게 되였다.

  그 후 나는 행운스럽게도 인성과 재능을 두루 겸비한 한 남자를 만나 결혼에 골인하게 되였다.첫 아이를 임신하면서 그 동안 쉬지 않고 열심히 달려왔던 내 자신에게도 쉼을 주고저 일을 그만두고 육아에 전념하기로 했다. 인차 둘째까지 태여나면서 나는 자신의 모든 시간을 오로지 가족을 위해 바쳤다.남편은 사업상 국내뿐만아니라 해외출장도 많아 길게는 석달 정도씩 집을 비워야 했었기에 육아는 오로지 나의 몫이였다.더 이상 노래를 부르는 현성해가 아닌 안해로, 엄마로,그리고 주부로밖에 살수 없었던 나는 그야말로 일인 다역으로 충실하면서도 드바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귀여운 자녀들과

  4. 창업의 첫걸음을 내디디며

  2016년 5월5일,나는 남편과 함께 사이타마현에 자체브랜드 ‘KOTOBUKI’(코토부키)를 설립하였고 푸딩과 빵전문점을 경영하게 되였다.개업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섬세한 장인의 기술과 최고급원재료만 고집하여 만드는 상품들은 까다로운 손님들의 입맛을 만족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어인지 입소문을 타고 인츰 린근지역에서 유명한 가게가 되였으며,주말에는 주차장이 부족할 정도로 많은 손님들도 북적거렸다.

  그러나 손님이 많으면 많아질수록 4,5명의 직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체력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정말 바쁜 주말이나 공휴일에는 하루 로동시간이 저그만치20시간에 달할 때도 많았다.가게에 있어야 하는 시간이 길다 보니 가정의 일상적인 생활은 엉망이 되여가고 있었고,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과로사로 쓰러지기 일보직전이였다.많고 많은 고민과 상의의 시간들을 거쳐, 2년반동안 해왔던 빵전문점을 과감히 접고 2018년 12월 1일 푸딩과 시퐁케익과 롤케익전문점으로 리뉴얼 오픈을 하게 되였다.

  업종변경의 리뉴얼 오픈이라는 어찌보면 0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사업에 불안감도 많았으나 <진짜는 진짜를 알아본다>는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원재료중 무려 1킬로그램에 12.3만엔씩 하는 ,전 세계적으로도 희소가치가 높은 “천연바닐라빈즈”에 특허한 상품만을 고집하여 만드는 우리의 상품들은 차원이 다른 향과 맛과 전문성과 고급스러운 패키지로 말미암아 그야말로 거기에 걸맛는 고층급고객들의 발길을 불러오고 있다.매일마다 입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신규고객들과 한두명씩 늘어나고 있는 리필 고객들을 보면서, 아직 시작은 미약할지라도 나중은 창대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오늘도 긍정적인 마인드로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5. 다시 찾게 된 꿈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나는 고향이 그리워지고 옛 친구들이 많이 그리워졌다.더우기 언젠가 한번은 꼭 고향무대에서 다시 노래를 부를수 있었으면 하는 소망을 늘 지녔었다.그러던 2018년 5월에 연변TV<노래자랑>프로에서 일본편을 찍는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였고 나는 용기를 내서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그 어느때보다 열심히 준비를 했고 또 최선을 다해 노래를 불렀다.무대에서 내려올 때는 그동안 간절히 바랐던 고향무대에 설수 있음에 감개무량하고 가슴이 벅차올랐다.

 

 

  공연이 끝난뒤,일부러 대기실까지 찾아와주신 분들이 계셧다.

  사진촬영을 요청하시는 분,소녀처럼 퐁퐁 뛰면서 좋아해주시는 분,심지어 눈물까지 글썽이면서 그리웠다고 두손을 꼭 잡아주시는 분, 17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그 때를 기억해주시는 고향분들을 보며 내 마음도 여느때없이 훈훈해졌다.

  그리고 우리 노래의 끈을 놓지 않은 자신이 처음으로 대견하게 느껴졌다.

  그때의 무대를 계기로 나는 처음으로 우리 조선족사회에 발을 내디디게 되였고 점차 일본조선족 여러 단체들의 각종 행사에서 러브콜을 받게 되였다.그로 인하여 새로운 꿈이 생겼다.앞으로 일본땅에서도 우리 노래,우리 민요들을 마음껏 불러 향수(乡愁)에 젖어있는 수많은 우리 민족에게 힐링을 전해주고 싶고 더 나아가 우리 민족의 아이들과 어른들에게도 우리 노래와 민요를 보급하여 전통을 잊지 않게끔 하고 싶다.

  “KOTOBUKI”(코토부키)또한 큰 꿈을 꾸려 한다.

  지금 있는 이 자리에만 안주하여 만족하지 않고 항상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며 날로 성장해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나눠주며 받은 사랑을 사회에 공헌하는 의미있는 존재로 키워나가고 싶다.

  그런 생각으로 최근 만들어진 것이 조선족어린이와 그 부모를 상대로 한 서양과자(親子お菓子作り体験教室)만들기 체험교실이다.

 

 

서양과자 만들기 체험교실

  일본인상대로 몇차례 실행을 해본 결과, 기대이상의 뜨거운 반응들에 놀라웠고 행복해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조선족아이들에게도 이런 행복한 웃음을 안겨주고 싶다는 생각에 본격적으로 준비하게 되였다.일본에 있는 우리 조선족 아이들이 학교수업이나 학원외에도 이런 제과체험같은 다양한 경험을 통해 지금부터 꾸게 될 그들의 싱그러운 꿈들이 더 다양한 방면으로 무지개같이 펼쳐지길 원하며 그런 멋진 꿈에 우리“KOTOBUKI”(코토부키)가 귀하게 씌여지길 바랄뿐이다.

  내 나이도 이제 불혹에 접어들고 있지만 아직 해야 할 일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다. 마지막 남은 인생도 푸른 바다의 별처럼 다른 사람들을 비춰 반짝이는 별이 되고 싶다.꿈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고 감사한 일인 것 같다. 그 꿈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두근 설레고 너무나 행복하다. 그 꿈들을 이루기 위하여 오늘도 나는 내가 있는 이 곳,일본땅에서 열심히 충실히 이 자리를 지키며 살아간다.

흑룡강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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