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좋고 물 맑고 인심 좋은 시골마을을 다시 찾은 박춘금,그녀의 고향건설 다시 시작된다
연길에서 찾아온 배구애호가들이 배구를 즐기고 있다.
지난세기 80년대부터 고향마을을 떠나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고향 떠나 룡정으로, 연길로 가기 시작하더니 점차 더 멀리 청도로, 북경으로, 상해로, 광주로 떠났고 그러다가 인젠 한국으로, 일본으로, 로씨야로 가고 있다. 고향을 떠난 행렬은 세계로 퍼지기 시작했다. 우리 선조들이 남부녀대하고 온갖 고생을 다 하면서 개척한 이 땅을 버리고 사람들은 그렇듯 자연스럽게 고향을 떠났다.
룡정고중을 졸업한 후 가정형편때문에 아예 대학공부를 포기하고 화룡현 석국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박춘금녀성도 1998년 그 행렬에 가담했다. 로씨야장사에 나선 것이다. 로씨야어 한마디도 몰랐지만 악착같은 그녀는 하바롭스크와 우쑤리스크와 모스크바의 개미시장을 메주밟듯 하면서 로씨야땅에서 10년 세월을 보냈다.
“끝이 없을 것 같았던 로씨야장사도 막물이 되더라구요. 중국에서 생산한 복장과 소상품이 로씨야땅에 넘쳐날 정도였으니…” 그렇게 그녀는 고향을 떠난지 꼭 10년만인 2008년 가을에 고향인 룡정시 동성용진 룡하촌(구룡촌)에 돌아왔다.
“고향마을이 변해 있었어요. 불과 십년인데 300여호 되던 큰 마을이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황페한 마을로 변했으니 말입니다.” 친척과 친구들을 따라 연길에 올라와 집을 장만해야 했던 그녀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산에서 자라는 닭들이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우르르 모여든다.
연길에서 살면서 그녀는 도시사람이 되려고 여러모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승벽심이 강하고 ‘남자벌개'라는 별명까지 있었던 그녀는 한가한 도시사람이 되기는 싫었다. 지인을 통해 연변제1중학교 학생숙사 사감으로 취직하고 여가시간엔 배구를 치면서 많은 사람들을 사귀였다. “소학교 때부터 배구를 좋아했지요. 고중시절 함께 배구를 치던 친구들과 함께 배구동호회에서 활동하기 시작했어요.”그녀는 배구는 스트레스도 풀고 좋은 친구들도 많이 사귈 수 있는 좋은 건강운동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도시사람이 되여가던 그녀가 귀향을 결정하게 된데는 별로 큰 사연이 따로 없었다. 시골마을에 비워둔 초가집이 허물어져가고 있었고 온몸이 흙냄새에 전 자신에게 도시인이란 너무나 큰 사치이고 고생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거기에 한국에 갔던 동생이 귀국하여 누님이라도 고향마을을 지켰으면 하는 생각을 내비쳤기 때문이였다.
“2016년 봄부터 집짓기를 시작하였어요. 동생과 둘이서.” 힘든 일을 하면서 친구 하나 없는 고향마을에서 살아갈 수 있을가 하는 물음을 자신에게 던지고는 어머님이 돌아가실 때 “베풀면서 살거라”하던 유언을 떠올렸다. 그녀는 그렇게 동생과 둘이서 2000여평방메터 부지에 배구장과 정자와 꽃밭을 품은 아담한 집을 장만했다.
“가끔 배구를 치다보면 실내운동장이 지겨울 때가 많아요. 공기가 혼탁하고 사람이 많은데다 시간제로 비용을 받다보니 여러모로 불편해요.” 강미배구동호회 최미선녀성은 이렇게 말하면서 지난해에도 이곳에 와서 배구를 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좋은 추억을 남겼다고 엄지를 내든다. 공기도 좋고 배구장도 좋고 농가 음식도 좋다는게 그녀의 리유다.
산닭을 삶아 음식상을 준비하고 있는 박춘금.
이사람의 손에서 저 사람의 손으로 튕겨가면서 아름다운 포물선과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배구공처럼 그녀가 연길에서 20분 거리의 경치가 수려한 농촌마을에 배구장을 만들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연길시안의 여러 배구동아리들에 퍼져갔다. 이곳을 찾은 연길시배구협회 책임자는 연길시배구협회 야외배구훈련기지라는 편액까지 만들어왔고 연길시를 찾은 향항, 오문, 상해와 한국의 배구애호가들과 함께 이곳을 찾아 배구시합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집을 잘 꾸미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했어요. 동생이 목수재간이 있어서 다행이였지요.” 배구장 주변과 뒤울안에 꽃도 심고 곰취도 옮겼으며 부추와 상추, 오이, 가지, 도마도도 가득 심었다. 그리고 집 바로 뒤에 있는 산자락의 널직한 공간에도 그물을 둘러치고 수백마리의 병아리를 넣었다.
이 마을에 사는 박상희(70세)할머니는 손두부를 잘 앗아 동네방네에 소문이 났다. 3년전 우연하게 인연을 맺은 할머니는 그녀의 일이라면 팔을 걷고 나선다. “춘금이가 마음씨 곱고 같은 박씨라 자식같은 느낌이 듭니다.” 마을에서 거리가 꽤 먼 위생소에 갔다가 차시간을 놓져 걸어오던 허리굽은 할머니를 그녀가 집까지 모셔다 준 것이다.
박춘금은 고향을 떠나 20년만에 다시 돌아와 마을에 정착하기에 이르렀고 잊어버릴번했던 이름과 얼굴들과 한집사람처럼 어울리기 시작하였다. 부근의 몇개 촌이 합병하여 룡하촌으로 이름을 고치다보니 면목 모를 분들도 있었다.
뒤산에 기댄 뒤울안.
“박상희로인 뿐만 아니라 저희 촌 빈곤호와 대문이 변변치 못한 집들에 전부 새로 대문을 갈아주었습니다. 거기에 해마다 3.8절이나 로인절이면 술이나 맛있는 먹걸리를 지원하는 건 물론 현금도 천원씩 내놓습니다.” 이 마을 부녀주임 김미옥(56세)씨는 그녀가 고향에 돌아와서 너무나도 좋은 일들을 하고 있다고 치하한다.
“제가 귀향한 건 창업이 아니라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또 사람소리가 별로 들리지 않는 고향마을을 도시사람들이 자주 찾는 동네로 만들고 싶어서였습니다.”
지난 6월 22일, 연길에서 온 민강, 강미배구동호회의 친선경기가 끝나자 박춘금녀성은 밖에 설치한 주방에서 음식상을 장만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날 박상희로인이 그녀의 옆에서 손두부를 마치고 상차림준비에 서둘고 있었고 마을의 일부 녀성들도 손을 맞추어 맛나는 음식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저희 집에 손님이 오면 마음씨 착한 동네분들이 마치 자기집에 귀한 손님이 온 것처럼 달려와 도와줍니다. 제 혼자서 20여명의 음식상을 장만하려면 어림도 없지요. 고향분들의 독특한 손맛도 고향을 홍보하는 좋은 방식이 아닐가요?”
마을 녀성들과 함께 음식준비에 드바쁘다.
동네 녀성들은 박춘금을 “박선생”이라고 친절하게 부른다. 서로 일손이 딸리면 자기집 일처럼 달려와 도와주는 시골인심이 되살아나고 있다.
“룡하촌에서 보낸 지난 삼년이 하루하루가 새롭도록 너무 행복했습니다. 앞으로도 산 좋고 물 맑고 인심 좋은 고향마을에서 손맛 좋은 고향분들과 함께 이 곳을 찾는 여러분들을 모시고 싶습니다.”
산언덕에 판 널직한 김치움에서 자연랭동된 시원한 맥주를 부으면서 그녀는 고향의 미래를 도시사람들에게 슬며시 묻는다.
/길림신문 김태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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