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청춘노트-미주] 오리,거위꿈에서 깨여나다
조글로미디어(ZOGLO) 2019년11월1일 11시48분    조회:1855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어린시절 나의 장래희망은 박사가 되거나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현재 나는 박사재학중에 있고 간혹가다 비루한 솜씨로 쓴 글들을 투고하여 가뭄에 콩 나듯 지면에 내 이름을 올리면서 살고 있다. 우선 오해가 없도록 하자. 나의 현재 삶을 브리핑한 목적은 어렵사리 어릴적 꿈을 지키고 이루어낸 ‘성공신화의 주인공’으로 자신을 과대포장하기 위함은 절대 아니다.

소크라테스가 말했었지 않은가. 네 자신을 알라고. 그 명언을 받잡고 자아성찰을 해본다면, 나는 학위론문을 아직 미완하였으니 박사가 아니고 성인이 되고서는 입선작이 없으니 작가도 아니다. 그러니 나는 대가와는 거리가 먼, 10여년차 문학을 전공하고 있는 일개 풋내기 문학도에 불과하다.

아, 나는 어쩌다가 강산도 변했을법한 시간동안 문학아카데미를 배회하게 되였고 또 그 나날들에 대해서는 어떠했다고 정의할 수 있을가? 물불 가리지 않고 시종일관 문학만을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의 마음때문에 순애보를 펼쳐왔던거라고 한다면 이는 너무나도 작위적이고 뻔한 거짓말일 것이다.

생뚱맞게 느껴질 고백을 한다면 철이 들면서 나는 문학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했다. 그러니 문학과 연을 맺는 모든 순간들을 전부 다 행운이라고 여겼을리가 만무하다. 10대 이전에 나는 작가를 꿈꿨고 10대 초중반의 나이인 중학생이 되여서는 작가의 꿈에서 서서히 깨여나려고 몸부림쳤다. 지금부터 그 ‘썰’들을 풀어보고자 한다.

글을 익히고 나서부터 나는 책읽기를 즐겨했다. 독서량이 ‘풍부’했던터라 주어진 단어를 사용해 짧은 글을 짓는 숙제조차 허투루하지 않고 창의력을 발휘한 문장들을 써갔다. 3학년에 진학하니 작문과가 설치되였다. 해당과목을 담당하셨던 선생님이 작문써클을 조직하게 되자 나는 물만난 고기처럼 신나서 참가신청을 하였다.

사교육열이 별로 높지 않던 소학교시절 달마다 지출되는 나의 작문써클비는 대학생인 언니를 뒤바라지해야 하는 평범한 월급쟁이 가정에는 약간의 부담이였다. 쩍하면 체불되는 로임때문에 가계가 어려워 가족들은 나에게 작문반을 그만뒀으면 하는 눈치를 주었다. 하지만 나는 작문선생님과 써클비를 반으로 깎는 당돌한 딜까지 해가면서 작문반 다니기를 견지하였다. 각종 작문경연에서 상을 탈 때마다 나의 작가꿈과 한발작 더 가까워지는 것 같아 가슴뿌듯해 하였다.

주변에서 ‘꼬마작가’라고 불러주니 자신이 아주 영광스럽게 생각되였고 ‘자고로 영웅은 소년때 된다’는 말을 떠올리며 나도 내가 쓴 글들을 차곡차곡 모으다보면 《야심》이라는 작품집을 써낸 김영옥처럼 일약 작가가 되고 대학까지 추천받아 갈 수있지 않을가 하는 설익은 꿈에 빠지기도 했다. 극상해야 천자좌우의 글을 작품이라고 쓰며 계란장수 치부의 꿈을 나는 엉감생신 꿈도 못꾸었던 장편소설을 혼자의 힘으로 써내서 단행본으로 출판한 석현이라는 동년배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세기가 바뀌면서 나는 중학생이 되였고 삶의 모든 패턴은 전적으로 내생에 있게될 중요한 두차례의 입시만을 위해 돌아갔다. 반항적 기질로 충만된 나는 적자생존의 법칙을 강조하는 환경속에서 질식해 죽을 것 같았다. 나의 일탈은 마주 앉은 책상앞을 떠나지 않은 채 교과서 사이에 교과목과 무관한 책들을 끼워넣고 읽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누군가가 지정해주는 추천도서 목록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어문교과서에 등장하는 작가들의 교과서에 실리지 않은 작품들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읽을 거리들을 찾아 읽었다. 그중에는 《맹아》잡지에서 주최한 신개념 작문경연에서 입상하면서 ‘80후’ 작가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한 비슷한 나이또래의 작품들도 있었고 새로운 글쓰기 붐을 일으킨 국내외의 인터넷소설도 있었다. 작품과 함께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책 출판 및 흥행에 힘입어 작가반열에 오름과 동시에 대학입시에 있어서도 수동적인 위치에서 벗어나 막대한 부의 수혜자가 된 창작자들의 성공이야기였다. 바다 건너 먼 나라에서 《해리포터》라는 마법의 이야기를 쓴 조앤 K 롤링에게서 일어났던 마법같은 일이 나와 같은 ‘80후’ 세대한테서도 일어날 수 있다니.

나이를 좀 먹고 세상물정을 알게 되였던 탓일가. 내가 느꼈던 것은 비단 맹목적인 흠모의 감정 뿐만이아니였다. 현실에 대한 자각을 하면서 나는 얍삽하게 변해버렸다. 뜻이 있는데 길이 있다? 웃기는 얘기. 조선어 구독자수를 떠올려 볼 때 내게 편한 퍼스트언어로 창작해서는 한한도, 귀여니도 될 수 없었다. 그래, 현실을 직시하고 작가의 꿈은 포기하자는 결심을 하게 되였다. 구상이 떠오를 때마다 적어오던 창작노트까지 북북 찢으면서 문학과 다소 유난스러운 결별식을 혼자서 치뤘다.

근데 뭔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성적 맞춰서 가고 보니 조문학부였다. 주체할 수 없이 뜨거운 피가 끓어올라도 창작과담을 쌓고 살았고 지면에 발표할 수 있는 기회들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대학시절 나의 상태는 창작의 욕과 함께 창작능력도 상실하게 되였다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이되겠다. 그렇게 된 계기는 수업시간에 명작들을 접하는 과정에서 작품을 보는 ‘안목은 자연스레 높아’졌고 자신의 창작실력도 마치 그 작품들을 창작한 유명작가들 수준에 이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있었기때문이다. 상당한 필력차이가 존재하는 상상과 현실 사이에서 괴리감을 겪다보니 자연히 글 쓰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게 되였던 것 같다. 펜대를 제대로 들어보지도 않고 절필을 택했었다고 할 수 있겠다.

대학졸업 뒤 진로를 두고 고민하다가 나는 대학원에 진학하였고 여전히 문학을 전공하게 되였다. 현실적인 타산에 밝은 머리는 문학과의 결별을 종용했지만 선택하고 보면 항상 문학을 철저히 외면하지 못했다. 련속 며칠씩 밤을 새면서 문학 관련 론문을 써야 할 때면 페인모드로 살아야 하는 현재와 별로 전도유망할 것 같지 않을 미래때문에 너무 나괴로워서 애초의 내 선택을 두고 가슴을 치며 후회해보기도 한다.

왜 하필이면 문학일가? 문학을 두고서 긴 세월동안 ‘저장장애’를 앓고 있는 자신에게 자꾸만 던지게 되는 질문이다. 이 문항에 나는 다소 ‘문학의 감성’이 묻어나는 답을 얻은 것 같다. 그 동안 안데르센 동화 《못난 새끼오리》에 심취된 나라는 한 오리가 거위가 되고픈 나머지 못난 새끼 오리 코스플레이를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가 싶다. 못난 새끼오리라는 선제적 조건으로 인해 거위가 되는 것은 아닌데도 불구하고 거위에 목 매는 단일한 꿈에 빠져서는 끊임없는 자기부정을 해왔던 것 같다. 어느덧 깃털이 자라나기 시작한다. 훨훨 높게 날면 어떻고 푸드득 거리며 낮게 날면 어떠하랴. 문학이라는 늪을 령혼의 안식처로 여기고 그 주변을 항시 배회 할 수 있다는 자체가 팍팍한 삶에 큰 위안으로 느껴진다. 반복적인 통찰끝에 진심으로 이를 느끼기까지는 많은 시간들을 필요로 했다.

박후기가 쓴 《복서연대기》라는 시속에 “아웃파이터로 살고 싶었지만 /치고 빠지는 것이야말로 비겁한 짓이라고 / 아버지가 말했다”는 시구가 있다. 자꾸만 곱씹으며 생각을 하게 만든다. 문학이라는 링우에서 ‘비겁한 짓’이라는 통념에 사로 잡혀 아웃파이터가 아닌 인파이터가 되여야만 하는걸가? 어쩌면 애초부터 난 전략따위는 치밀하게 짜봤자 종국에는 다 부질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링우에 서고 싶어하는건지도 모르겠다.

미주(美筑)

본명 최미령(崔美玲), 1987년 연길 출생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과 박사과정 재학중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세 언니들은 나보다 12살, 10살, 5살 많아서 나는 누구보다도 언니들의 사랑을 흠뻑 받으며 자랐다. 아쉬운 것은 나이 차이가 커서 한집에서 생활했던 시간들이 짧은 편이였고 큰 언니가 학교문을 나서면서부터는 네 자매가 한자리에 모여 앉기도 쉽지 않았다. 큰 언니는 으로 농촌에 내려가 6년동안이나 힘든 집체호 생활...
  • 2019-07-24
  • 캐나다 조선족 협회에서는 얼마전 자연의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G로즈 로더팍에서 여름 야유회를 개최하고 조선족 동포사회의 단합과 정보교류및 친목을 도모했다. 이번 행사는 김춘식 회장, 최남 수석 부회장, 최동춘 비서장을 비롯한 협회 운영진들의 아낌없는 노력과 여러 회원들의 적극적인 동참하에 비록 짧은 만...
  • 2019-07-19
  • 첫째날의 기록 ...흥분과 감격속에서 맞이한 고향 프랑카드를 들고 공항에 마중나온 친척 친우들 나는 미국 동남부에 위치한 선샤인(햇빛) 스테이트(주)라 불리우는 플로리다주 수부 탈라하시에서 20년째 살고 있다. 탈라하시는 시정부와 대학교중심의 중소형 행정도시에 속하며 바다 가까이에 자리잡고 있다. 4...
  • 2019-07-19
  • 손익규,윤송죽 부부가 막내딸과 함께 포즈를 취한 장면     (흑룡강신문=칭다오)박영철 기자=손익규, 윤송죽 부부는 지난 1961년부터 옌타이시에 거주하면서 옌타이조선족사회의 산 증인으로 불리며 선구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옌타이시 중조어업협정 옌타이판공실 통역, 옌타이시외사판공실 섭외과 과장, 옌타이...
  • 2019-07-18
  •     - 글 / 고향련 -   2000년 4월 25일, 나는 난생처음으로 중국땅을 떠나서 일본 류학길에 올랐다.   당시 한창 류행됐던 일본류학의 붐에 떠밀려서이기도 하고 4년간 공부했던 회계전업이 나하고 맞지 않은듯 하여 다른 공부가 하고싶어서이기도 했다. 그보다 중요한건 일본에서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
  • 2019-07-17
  • 90년대 초만 해도 연변에는 가정용전화기가 없는 집이 태반이였다. 그때 나에게는 간절한 바램이 하나 있었다. 집에 전화기기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정든 모교이자 사업터인 연길시 제2고급중학교에서 조선어문 교원으로 꿈에 부풀어 있을 때 결혼한지 2년반밖에 안 되는 남편은 한국 류학길에 올랐다. 중한수교 이듬...
  • 2019-07-16
  • 산 좋고 물 맑고 인심 좋은 시골마을을 다시 찾은 박춘금,그녀의 고향건설 다시 시작된다 연길에서 찾아온 배구애호가들이 배구를 즐기고 있다. 지난세기 80년대부터 고향마을을 떠나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고향 떠나 룡정으로, 연길로 가기 시작하더니 점차 더 멀리 청도로, 북경으로, 상해로, 광주로 떠났고...
  • 2019-07-11
  • [일본글짓기응모]    나의 행복 - 글 / 정미화 -       "엄마,우리 온천 가요."   "온천?어느 온천?"   "군마쪽으로 가려는데...어디로 가겠어요?"   "글쎄, 구사쯔는 가보았는데, 참 좋았어..."   "이가호와 구사쯔, 어느쪽으로 갈가?"   일년전 대학원을 졸업하고 회사생활을 하는 딸이 ...
  • 2019-06-24
  • 얼마전 한 로인과 그의 가족들이 통화현조선족학교를 찾아 목숨을 구해준 두 학생에게 감사기를 전했다. 5월 29일 점심, 통화현조선족학교 9학년 학생 권예령, 안미현 두 학생은 통화현 산수화성 아빠트 서쪽 교통강부근에서 60세좌우되는 녀인이 갑자기 쓰러진 것을 발견하였다. 불시에 주변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어떤 사...
  • 2019-06-24
  • 57년전에 꼬마친구들과 기념사진을 남긴 해방군 아저씨(뒤줄 좌가 김일룡, 앞줄 우가 박정숙, 중간이 최송림) 57년 후 만난 해방군 아저씨와 꼬마친구(좌로부터 배영애, 김일룡, 최송림, 박정숙) 지금으로부터 57년전인 1962년, 길림성 무송현에서 장춘에 와 병 치료를 받고 있던 해방군 전사가 있었다. 그는 조...
  • 2019-06-12
  •     요즘 들어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인가?” 라는 질문을 곧잘 듣게 된다. 그 때마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려행 다닐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소리높이 대답한다.        몇달전에도 나는 친구들과 함께 5박6일의 일정으로 두바이려행을 다녀왔다. 너무도 아름다운 추억을...
  • 2019-06-03
  • 저자는 10년의 수련 끝에 정상을 앞둔 36살 신경외과 의사다. 사회에서 인정 받고, 일류대학교수 자리를 제안 받았다. 저자가 인생의 정점에 있을 때, 그는 페암말기 선고를 받는다. 그는 대학 시절 인간의 의미를 찾으려고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더 정확한 답을 얻기 위해 의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의사가 되어서 문학...
  • 2019-05-31
  • '어린이들이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울거에요' 6.1절을 맞으며 연길 청아성형외과(원장 안향화)에서는 21일, 20여명의 직원들의 마음이 담긴 사랑의 성금 1만원을 연변TV "사랑으로가는 길(219회)"프로를 통해 빈곤가정의 어린이에게 전했다.   안향화 원장은 "우리 청아성형외과는 외모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
  • 2019-05-24
  • 오늘은 나도 자랑많은 추억렬차의 기관사가 되련다.추억의 렬차를 몰고 서서히 현재를 떠나 고동을 울리며 칙칙폭폭 과거로 추억려행을 떠나련다.추억의 벌판을 지나고 추억의 고개를 넘고 추억의 굽이를 돌아 녀인들의 애환이 서린 아득히 먼 70년대 생산대의 벼모 꽂는 현장으로 가련다. 안도현 석문공사 무학대대에서 태...
  • 2019-05-23
  • 장춘시조선족차세대관심사업위원회 남관분회 배영애의 차세대 교육사랑 2015년 북경에서 열린《중국홰불》잡지사 창간 20주년 대회에서 발언한 배영애, 회의 기간 그는 중국차세대관심사업위원회 주임 고수련의 접견을 받았다. “아무리 죄를 졌다 해도 우리들의 차세대가 아닙니까?” 이는 길림성미성년범관리교...
  • 2019-05-22
  • 김선생가사도우미쎈터 대표 김경자의 퇴직 후의 보람찬 인생이야기 김경자 프로필: 1959년 반석현 출생 반석사범학교 영어전업 전공 반석3중 영어교원, 담임교원 력임 길림조선족중학교 영어교원 2014년 길림조선족중학교에서 퇴직 ...
  • 2019-05-08
  • 최근 인터넷에서 한 동영상이 인기를 끌고 있다. 동영상의 주인공은 바로 두 다리가 없는 예쁜 소녀이다. 그녀는 물구나무서기, 팔굽혀펴기부터 스케이트보드, 농구, 배드민턴, 수영까지 할 수 없는 것이 없다. 이 소녀의 이름은 웨이메이뉘(渭梅女)이다. 그녀의 인생 스토리는 너무나 감동적이다. 그녀의 미소에는 자신감...
  • 2019-05-03
  • 지금으로부터 60여년 전, 내가 18살 되던 해에 음력설을 닷새 앞두고 아버지의 꾸지람을 받은 적이 있다. 나의 한가지 감성적인 처사로 하여 받은 아버님의 첫 꾸지람이다. 하지만 그 꾸지람은 해마다 설날이 돌아올 때면 나의 머리 속에 기분좋게 떠오른다. 한것은 그 꾸지람 뒤에 아버지의 너그러운 처사가 이어져 나를 ...
  • 2019-04-22
  • 고요하던 집안에 따르릉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벨은 받는 사람이 없자 잠시 끊어졌다가 다시 울렸다. 복녀는 화장실에서 일을 보느라고 처음 울린 전화를 받지 못했다. 그래서 전화벨이 다시 울리기 무섭게 허둥거리며 전화기가 놓여있는 탁상쪽으로 뛰여갔다. 말이 뛰여갔지 걷는 것과 진배없었다. 복녀는 한달째 아침에 ...
  • 2019-04-19
  • 청명에 고향에 있는 부모님산소에 다녀왔다. 이번 청명은 바람이 많이 불어서 잠깐 절만 올리고 급하게 산소를 떠났다. 제사는 불과 10분만에 마치고 나머지는 산 사람들의 술자리다. 저승의 사람들을 위한 제사인지 이승의 사람들이 모이는 회포의 자리인지 올해따라 돌아보게 된다. 마침 호텔에서 학교 선배님 부부를 만...
  • 2019-04-09
‹처음  이전 5 6 7 8 9 10 11 12 13 14 15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