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 나의 장래희망은 박사가 되거나 작가가 되는 것이었다. 현재 나는 박사재학중에 있고 간혹가다 비루한 솜씨로 쓴 글들을 투고하여 가뭄에 콩 나듯 지면에 내 이름을 올리면서 살고 있다. 우선 오해가 없도록 하자. 나의 현재 삶을 브리핑한 목적은 어렵사리 어릴적 꿈을 지키고 이루어낸 ‘성공신화의 주인공’으로 자신을 과대포장하기 위함은 절대 아니다.
소크라테스가 말했었지 않은가. 네 자신을 알라고. 그 명언을 받잡고 자아성찰을 해본다면, 나는 학위론문을 아직 미완하였으니 박사가 아니고 성인이 되고서는 입선작이 없으니 작가도 아니다. 그러니 나는 대가와는 거리가 먼, 10여년차 문학을 전공하고 있는 일개 풋내기 문학도에 불과하다.
아, 나는 어쩌다가 강산도 변했을법한 시간동안 문학아카데미를 배회하게 되였고 또 그 나날들에 대해서는 어떠했다고 정의할 수 있을가? 물불 가리지 않고 시종일관 문학만을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의 마음때문에 순애보를 펼쳐왔던거라고 한다면 이는 너무나도 작위적이고 뻔한 거짓말일 것이다.
생뚱맞게 느껴질 고백을 한다면 철이 들면서 나는 문학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했다. 그러니 문학과 연을 맺는 모든 순간들을 전부 다 행운이라고 여겼을리가 만무하다. 10대 이전에 나는 작가를 꿈꿨고 10대 초중반의 나이인 중학생이 되여서는 작가의 꿈에서 서서히 깨여나려고 몸부림쳤다. 지금부터 그 ‘썰’들을 풀어보고자 한다.
글을 익히고 나서부터 나는 책읽기를 즐겨했다. 독서량이 ‘풍부’했던터라 주어진 단어를 사용해 짧은 글을 짓는 숙제조차 허투루하지 않고 창의력을 발휘한 문장들을 써갔다. 3학년에 진학하니 작문과가 설치되였다. 해당과목을 담당하셨던 선생님이 작문써클을 조직하게 되자 나는 물만난 고기처럼 신나서 참가신청을 하였다.
사교육열이 별로 높지 않던 소학교시절 달마다 지출되는 나의 작문써클비는 대학생인 언니를 뒤바라지해야 하는 평범한 월급쟁이 가정에는 약간의 부담이였다. 쩍하면 체불되는 로임때문에 가계가 어려워 가족들은 나에게 작문반을 그만뒀으면 하는 눈치를 주었다. 하지만 나는 작문선생님과 써클비를 반으로 깎는 당돌한 딜까지 해가면서 작문반 다니기를 견지하였다. 각종 작문경연에서 상을 탈 때마다 나의 작가꿈과 한발작 더 가까워지는 것 같아 가슴뿌듯해 하였다.
주변에서 ‘꼬마작가’라고 불러주니 자신이 아주 영광스럽게 생각되였고 ‘자고로 영웅은 소년때 된다’는 말을 떠올리며 나도 내가 쓴 글들을 차곡차곡 모으다보면 《야심》이라는 작품집을 써낸 김영옥처럼 일약 작가가 되고 대학까지 추천받아 갈 수있지 않을가 하는 설익은 꿈에 빠지기도 했다. 극상해야 천자좌우의 글을 작품이라고 쓰며 계란장수 치부의 꿈을 나는 엉감생신 꿈도 못꾸었던 장편소설을 혼자의 힘으로 써내서 단행본으로 출판한 석현이라는 동년배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세기가 바뀌면서 나는 중학생이 되였고 삶의 모든 패턴은 전적으로 내생에 있게될 중요한 두차례의 입시만을 위해 돌아갔다. 반항적 기질로 충만된 나는 적자생존의 법칙을 강조하는 환경속에서 질식해 죽을 것 같았다. 나의 일탈은 마주 앉은 책상앞을 떠나지 않은 채 교과서 사이에 교과목과 무관한 책들을 끼워넣고 읽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누군가가 지정해주는 추천도서 목록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어문교과서에 등장하는 작가들의 교과서에 실리지 않은 작품들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읽을 거리들을 찾아 읽었다. 그중에는 《맹아》잡지에서 주최한 신개념 작문경연에서 입상하면서 ‘80후’ 작가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한 비슷한 나이또래의 작품들도 있었고 새로운 글쓰기 붐을 일으킨 국내외의 인터넷소설도 있었다. 작품과 함께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책 출판 및 흥행에 힘입어 작가반열에 오름과 동시에 대학입시에 있어서도 수동적인 위치에서 벗어나 막대한 부의 수혜자가 된 창작자들의 성공이야기였다. 바다 건너 먼 나라에서 《해리포터》라는 마법의 이야기를 쓴 조앤 K 롤링에게서 일어났던 마법같은 일이 나와 같은 ‘80후’ 세대한테서도 일어날 수 있다니.
나이를 좀 먹고 세상물정을 알게 되였던 탓일가. 내가 느꼈던 것은 비단 맹목적인 흠모의 감정 뿐만이아니였다. 현실에 대한 자각을 하면서 나는 얍삽하게 변해버렸다. 뜻이 있는데 길이 있다? 웃기는 얘기. 조선어 구독자수를 떠올려 볼 때 내게 편한 퍼스트언어로 창작해서는 한한도, 귀여니도 될 수 없었다. 그래, 현실을 직시하고 작가의 꿈은 포기하자는 결심을 하게 되였다. 구상이 떠오를 때마다 적어오던 창작노트까지 북북 찢으면서 문학과 다소 유난스러운 결별식을 혼자서 치뤘다.
근데 뭔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성적 맞춰서 가고 보니 조문학부였다. 주체할 수 없이 뜨거운 피가 끓어올라도 창작과담을 쌓고 살았고 지면에 발표할 수 있는 기회들에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대학시절 나의 상태는 창작의 욕과 함께 창작능력도 상실하게 되였다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이되겠다. 그렇게 된 계기는 수업시간에 명작들을 접하는 과정에서 작품을 보는 ‘안목은 자연스레 높아’졌고 자신의 창작실력도 마치 그 작품들을 창작한 유명작가들 수준에 이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있었기때문이다. 상당한 필력차이가 존재하는 상상과 현실 사이에서 괴리감을 겪다보니 자연히 글 쓰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게 되였던 것 같다. 펜대를 제대로 들어보지도 않고 절필을 택했었다고 할 수 있겠다.
대학졸업 뒤 진로를 두고 고민하다가 나는 대학원에 진학하였고 여전히 문학을 전공하게 되였다. 현실적인 타산에 밝은 머리는 문학과의 결별을 종용했지만 선택하고 보면 항상 문학을 철저히 외면하지 못했다. 련속 며칠씩 밤을 새면서 문학 관련 론문을 써야 할 때면 페인모드로 살아야 하는 현재와 별로 전도유망할 것 같지 않을 미래때문에 너무 나괴로워서 애초의 내 선택을 두고 가슴을 치며 후회해보기도 한다.
왜 하필이면 문학일가? 문학을 두고서 긴 세월동안 ‘저장장애’를 앓고 있는 자신에게 자꾸만 던지게 되는 질문이다. 이 문항에 나는 다소 ‘문학의 감성’이 묻어나는 답을 얻은 것 같다. 그 동안 안데르센 동화 《못난 새끼오리》에 심취된 나라는 한 오리가 거위가 되고픈 나머지 못난 새끼 오리 코스플레이를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가 싶다. 못난 새끼오리라는 선제적 조건으로 인해 거위가 되는 것은 아닌데도 불구하고 거위에 목 매는 단일한 꿈에 빠져서는 끊임없는 자기부정을 해왔던 것 같다. 어느덧 깃털이 자라나기 시작한다. 훨훨 높게 날면 어떻고 푸드득 거리며 낮게 날면 어떠하랴. 문학이라는 늪을 령혼의 안식처로 여기고 그 주변을 항시 배회 할 수 있다는 자체가 팍팍한 삶에 큰 위안으로 느껴진다. 반복적인 통찰끝에 진심으로 이를 느끼기까지는 많은 시간들을 필요로 했다.
박후기가 쓴 《복서연대기》라는 시속에 “아웃파이터로 살고 싶었지만 /치고 빠지는 것이야말로 비겁한 짓이라고 / 아버지가 말했다”는 시구가 있다. 자꾸만 곱씹으며 생각을 하게 만든다. 문학이라는 링우에서 ‘비겁한 짓’이라는 통념에 사로 잡혀 아웃파이터가 아닌 인파이터가 되여야만 하는걸가? 어쩌면 애초부터 난 전략따위는 치밀하게 짜봤자 종국에는 다 부질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고 링우에 서고 싶어하는건지도 모르겠다.
미주(美筑)
본명 최미령(崔美玲), 1987년 연길 출생
연변대학 조문학부 졸업,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과 박사과정 재학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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