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유체기증2] “무엇으로 이 은혜에 보답하겠습니까”
조글로미디어(ZOGLO) 2019년11월8일 15시25분    조회:1737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멀고도 가까운 문화-유체 기증](2)

“무엇으로 이 은혜에 보답하겠습니까”

--70년 당령(党龄)의 한춘옥 ‘마지막 공헌'으로 유체 기증을 선언  

‘한춘옥 ’이름자와 전국 통일 번호(2785)를 밝혀 발급된 건국 70돐 기념장 소장함.

기자한테 자신이 받은 건국 70돐 기념장을 보여주는 한춘옥로인.

한춘옥로인(88세)은 1948년 3월 도문시 우정국 전화 교환수 직에 모집되여 선후로 도문시 우정국 ,룡정시 우정국에서 전화 교환수, 영업청 영업원, 부서 책임자로 일하다 퇴직한 분이며 1949년 12월에 당조직에 가입한 오랜 당원이다.

건국 70돐을 맞으며 로인은 건국 전에 혁명사업에 참가한 오랜 혁명로동자로 중공중앙, 국무원, 중앙군사위원회로부터 발급하는‘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주년 기념장'을 퇴직단위인 룡정시우정국을 통해 전달받았다.

룡정시우정국 한룡호 국장이 한춘옥로인에게 기념장을 달아드리고 찍은 기념사진./사진 류립민 

룡정시우정국 지도부에서는 국경절 전 한춘옥로인을 방문하여‘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주년 기념장'과 함께 단위 위문금을 전달했다. /사진 류립민 

“얘들아, 너희들은 당과 나라의 은혜를 갚아라.”

한춘옥은 매일 그 기념장을 보면서 격동을 가라앉힐 수 없어한다. 일전에 기자는 한춘옥을 찾았다. 허리 지병으로 행동하는데 불편해져 로인은 3년째 복리원에 옮겨와 만년을 보내고 있지만 정신력만은 좋아 신문 보기, 책 보기를 즐긴다.

“이 기념장을 받은 날 나는 밤새 잠 들 수 없었네. 이 늙은이를 당과 나라에서는‘성 쌓고 남은 돌’취급을 아니했다네. 무엇으로 이 깊은 은혜에 보답하겠습니까?”

한춘옥은 평생토록 당에 대한 신념, 나라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저버린 적 없었고 세월과 더불어 더 절절해졌다고 말한다.

화룡의 한 시골에서 태여난 한춘옥은 유년에 부모 따라 살길 찾아 흑룡강성 목단강지역에까지 갔다가 광복을 맞이하고 15살 나는 해에 도문시에 와 정착했다. 그러는 사이 그의 아버지와 오빠는 원한 속에서 병으로 생을 마감했고 어머니는 남은 자식(한춘옥과 그의 두 남동생)을 먹여 살리고 공부 시켜보려고 갖은 고생을 다 했다. 한춘옥은 한번은 학비를 낼 수 없어서, 한번은 토비들의 기습에 못이겨 이리저리 피난다니다나니 퇴학을 반복하며 결국 고급소학교 밖에 나오지 못했다.

새 중국이 창립된 후 도문시우정국의 로동자 모집에 응해 취직한 한춘옥은 “첫날부터 맡은 바 일을 잘하고 당을 따라 생명이 다하는 때까지 분투하리라 다짐했다.”는 자기의 낙언을 실천에 옮겼다.

“배운 지식도 없고 철 없는 나를 당조직에서 교육, 양성시켜 도문시우정국 화무반의 교환수로 일할 수 있게 하였고 당조직에 가입해 나중에는 반장직에 부임할 수 있었네.”

한춘옥은 이렇게 회상한다.

우정국 화무반은 꽤 오랜 시기 전시 대응 태세로 통신 통도 접속 임무를 감당했다. 특히 항미원조전쟁시기 변강도시인 도문시에서는 방공 통금령이 무시로 하달 되군 했다. 전화 교환 접속 소통을 보장해야 하는 우리 화무반에서 반장인 나한테 유일하게‘특별통행증'이 발급되였는데 그건 내가 수시로 화무반으로 달려갈 수 있는 통행증이였다. 그 시기 사이렌소리 속에서 일터를 지키던 당년 우리 화무반의 정경을 잊을 수 없다...

한춘옥은 “당년 새 중국을 맞지 못했다면 남은 우리 가족들의 살길은 없었을 것이다. 내가 취직해서부터 병약한 어머니의 짐을 덜어 줄 수 있었고 두 동생도 공부를 계속할 수 있어 사범학교까지 나와 나중에 훌륭한 직장인으로 될 수 있었다.”며 당년에 어머니가 남기신 훈시를 되새긴다.

“얘들아 , 너희들 모두 듣거라. 참 좋은 세상(주: 새 중국)이 왔구나. 지금 같은 좋은 세상이 빨리 왔다면 니네 아버지도, 형도 그렇게 죽지 않았을 것을...니들은 꼭 일 잘해서 당과 나라의 은혜를 갚아라!”

룡정시우정국 주관 책임자의 말에 의하면 당년에 한춘옥이 조직에 바친 자서전에도 이 말이 적혀있었다.

공안계통에서 사업하던 남편이 룡정으로 조동하게 되자 한춘옥도 1963년에 룡정시우정국으로 조동했다. 직접적으로 고객을 상대하는 영업실에서 한춘옥은 한 우정(邮政)종업원으로서, 한 공산당원으로서 봉사, 공헌하는 직업정신을 더한층 확고하게 실천했다.

한춘옥은 한생을 당과 나라에 대한 감은의 마음으로 , 일심전력으로 인민을 위해 봉사하고 공산주의 실현을 위해 분투해왔지만 아직도 그 기여가 부족하다고 느껴진다면서 안타까움을 표했다.

기자가 지난날의 성적과 영예에 대해 물으니 한춘옥은 “뭇지도 쓰지도 말라”며 영예증서도, 사진도 내놓지 않았다.

룡정시우정국의 소개에 의하면 그는 다년간 단위의 선진생산자 및 기준병이였고 연변 우정계통 영업원대오의‘전면능수'였으며 1964년, 1965년에 련속 길림성우정계통선진생산자(사업일군)기준병으로 표창받았다. 하여 한춘옥은 당년 전국향촌우편배달원 기준병이며 영화 기러기의 원형인물인 리호천과 함께 본보기 벽보란에 이름을 나란히 올린 기억을 남기기도 했다.

의학원에 편지를 쓰고...유체 기증 념원과 신청 사실 공개 리유

 
한춘옥로인이 의학원 원장에게 보낸 편지의 한 단락.

연길시의 모 복리원으로 자리를 옮긴 후 한춘옥은 불가항력적인 실락감에 빠지기도 했지만 새 시대정신을 학습하고 터득해오면서, 복리원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잔잔한 행복을 찾게 되였다. 로인은 퇴직 후에도 당학습, 조직생활을 견지해왔고 복리원에 와서는 줄곧 당간행물을 손에서 놓은 적 없었다. 그래서 그는 복리원 임직원들로부터 신문, 잡지, 책자들을 꼭꼭 챙겨받는‘특별대우'를 받고 있었다.

“무엇으로 당과 나라에 보답해야 하겠는가? ”

심사숙고끝에 로인은 ‘유체 기증’념원을 가지게 되였다. “죽은 후 유체가 죽은 사람이나 가족한테는 의미는 없다고 보네. 그러나 난 나의 유체는 의학원 해부학 교수에는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네.”

2017년 9월 15일, 한춘옥은 복리원의 침상에서 연변대학 의학원 원장 앞으로 편지를 썼다. 편지에는 “...의료사업에 쓸모 있다면 나중에 유체를 선듯이 공헌하겠습니다.”라고 씌여있었다. 그 편지는 곧 연변대학의학원유체기증접수쎈터 김범학 주임한테로 전달되였다. 하여 한춘옥로인은 자녀의 동의를 받는 등 절차를 밟아 2017년 9월 20일에 연변대학의학원유체기증접수쎈터에 유체 기증 신청인으로 등록되였다. 로인의 남편은 이미 돌아갔고 지금 로인슬하에는 아들 둘에 딸 하나 있다.

‘건국 70돐 기념장'과 함께 한춘옥은 깊이 간수해 두었던 유체 기증 신청 등록서를 기자한테 꺼내 보이면서 처음으로 공개한다고 말했다.

“나의 유체 기증 등록 사실을 뒤늦게라도 공개하는 것은 그것도 마지막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로 인식되였기 때문이네. 의학 교수 연구에 유체 기증이 많이 부족하다고 하니 이 몸을 바쳐 기증자 한사람이라도 늘어난다면 그 역시 공헌이 아니겠나?”

/길림신문 김영자기자

-[멀고도 가까운 문화-유체 기증](3)이 다음 날 이어집니다.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209
  • 세 언니들은 나보다 12살, 10살, 5살 많아서 나는 누구보다도 언니들의 사랑을 흠뻑 받으며 자랐다. 아쉬운 것은 나이 차이가 커서 한집에서 생활했던 시간들이 짧은 편이였고 큰 언니가 학교문을 나서면서부터는 네 자매가 한자리에 모여 앉기도 쉽지 않았다. 큰 언니는 으로 농촌에 내려가 6년동안이나 힘든 집체호 생활...
  • 2019-07-24
  • 캐나다 조선족 협회에서는 얼마전 자연의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G로즈 로더팍에서 여름 야유회를 개최하고 조선족 동포사회의 단합과 정보교류및 친목을 도모했다. 이번 행사는 김춘식 회장, 최남 수석 부회장, 최동춘 비서장을 비롯한 협회 운영진들의 아낌없는 노력과 여러 회원들의 적극적인 동참하에 비록 짧은 만...
  • 2019-07-19
  • 첫째날의 기록 ...흥분과 감격속에서 맞이한 고향 프랑카드를 들고 공항에 마중나온 친척 친우들 나는 미국 동남부에 위치한 선샤인(햇빛) 스테이트(주)라 불리우는 플로리다주 수부 탈라하시에서 20년째 살고 있다. 탈라하시는 시정부와 대학교중심의 중소형 행정도시에 속하며 바다 가까이에 자리잡고 있다. 4...
  • 2019-07-19
  • 손익규,윤송죽 부부가 막내딸과 함께 포즈를 취한 장면     (흑룡강신문=칭다오)박영철 기자=손익규, 윤송죽 부부는 지난 1961년부터 옌타이시에 거주하면서 옌타이조선족사회의 산 증인으로 불리며 선구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옌타이시 중조어업협정 옌타이판공실 통역, 옌타이시외사판공실 섭외과 과장, 옌타이...
  • 2019-07-18
  •     - 글 / 고향련 -   2000년 4월 25일, 나는 난생처음으로 중국땅을 떠나서 일본 류학길에 올랐다.   당시 한창 류행됐던 일본류학의 붐에 떠밀려서이기도 하고 4년간 공부했던 회계전업이 나하고 맞지 않은듯 하여 다른 공부가 하고싶어서이기도 했다. 그보다 중요한건 일본에서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
  • 2019-07-17
  • 90년대 초만 해도 연변에는 가정용전화기가 없는 집이 태반이였다. 그때 나에게는 간절한 바램이 하나 있었다. 집에 전화기기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정든 모교이자 사업터인 연길시 제2고급중학교에서 조선어문 교원으로 꿈에 부풀어 있을 때 결혼한지 2년반밖에 안 되는 남편은 한국 류학길에 올랐다. 중한수교 이듬...
  • 2019-07-16
  • 산 좋고 물 맑고 인심 좋은 시골마을을 다시 찾은 박춘금,그녀의 고향건설 다시 시작된다 연길에서 찾아온 배구애호가들이 배구를 즐기고 있다. 지난세기 80년대부터 고향마을을 떠나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고향 떠나 룡정으로, 연길로 가기 시작하더니 점차 더 멀리 청도로, 북경으로, 상해로, 광주로 떠났고...
  • 2019-07-11
  • [일본글짓기응모]    나의 행복 - 글 / 정미화 -       "엄마,우리 온천 가요."   "온천?어느 온천?"   "군마쪽으로 가려는데...어디로 가겠어요?"   "글쎄, 구사쯔는 가보았는데, 참 좋았어..."   "이가호와 구사쯔, 어느쪽으로 갈가?"   일년전 대학원을 졸업하고 회사생활을 하는 딸이 ...
  • 2019-06-24
  • 얼마전 한 로인과 그의 가족들이 통화현조선족학교를 찾아 목숨을 구해준 두 학생에게 감사기를 전했다. 5월 29일 점심, 통화현조선족학교 9학년 학생 권예령, 안미현 두 학생은 통화현 산수화성 아빠트 서쪽 교통강부근에서 60세좌우되는 녀인이 갑자기 쓰러진 것을 발견하였다. 불시에 주변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어떤 사...
  • 2019-06-24
  • 57년전에 꼬마친구들과 기념사진을 남긴 해방군 아저씨(뒤줄 좌가 김일룡, 앞줄 우가 박정숙, 중간이 최송림) 57년 후 만난 해방군 아저씨와 꼬마친구(좌로부터 배영애, 김일룡, 최송림, 박정숙) 지금으로부터 57년전인 1962년, 길림성 무송현에서 장춘에 와 병 치료를 받고 있던 해방군 전사가 있었다. 그는 조...
  • 2019-06-12
  •     요즘 들어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인가?” 라는 질문을 곧잘 듣게 된다. 그 때마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려행 다닐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소리높이 대답한다.        몇달전에도 나는 친구들과 함께 5박6일의 일정으로 두바이려행을 다녀왔다. 너무도 아름다운 추억을...
  • 2019-06-03
  • 저자는 10년의 수련 끝에 정상을 앞둔 36살 신경외과 의사다. 사회에서 인정 받고, 일류대학교수 자리를 제안 받았다. 저자가 인생의 정점에 있을 때, 그는 페암말기 선고를 받는다. 그는 대학 시절 인간의 의미를 찾으려고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더 정확한 답을 얻기 위해 의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의사가 되어서 문학...
  • 2019-05-31
  • '어린이들이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울거에요' 6.1절을 맞으며 연길 청아성형외과(원장 안향화)에서는 21일, 20여명의 직원들의 마음이 담긴 사랑의 성금 1만원을 연변TV "사랑으로가는 길(219회)"프로를 통해 빈곤가정의 어린이에게 전했다.   안향화 원장은 "우리 청아성형외과는 외모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
  • 2019-05-24
  • 오늘은 나도 자랑많은 추억렬차의 기관사가 되련다.추억의 렬차를 몰고 서서히 현재를 떠나 고동을 울리며 칙칙폭폭 과거로 추억려행을 떠나련다.추억의 벌판을 지나고 추억의 고개를 넘고 추억의 굽이를 돌아 녀인들의 애환이 서린 아득히 먼 70년대 생산대의 벼모 꽂는 현장으로 가련다. 안도현 석문공사 무학대대에서 태...
  • 2019-05-23
  • 장춘시조선족차세대관심사업위원회 남관분회 배영애의 차세대 교육사랑 2015년 북경에서 열린《중국홰불》잡지사 창간 20주년 대회에서 발언한 배영애, 회의 기간 그는 중국차세대관심사업위원회 주임 고수련의 접견을 받았다. “아무리 죄를 졌다 해도 우리들의 차세대가 아닙니까?” 이는 길림성미성년범관리교...
  • 2019-05-22
  • 김선생가사도우미쎈터 대표 김경자의 퇴직 후의 보람찬 인생이야기 김경자 프로필: 1959년 반석현 출생 반석사범학교 영어전업 전공 반석3중 영어교원, 담임교원 력임 길림조선족중학교 영어교원 2014년 길림조선족중학교에서 퇴직 ...
  • 2019-05-08
  • 최근 인터넷에서 한 동영상이 인기를 끌고 있다. 동영상의 주인공은 바로 두 다리가 없는 예쁜 소녀이다. 그녀는 물구나무서기, 팔굽혀펴기부터 스케이트보드, 농구, 배드민턴, 수영까지 할 수 없는 것이 없다. 이 소녀의 이름은 웨이메이뉘(渭梅女)이다. 그녀의 인생 스토리는 너무나 감동적이다. 그녀의 미소에는 자신감...
  • 2019-05-03
  • 지금으로부터 60여년 전, 내가 18살 되던 해에 음력설을 닷새 앞두고 아버지의 꾸지람을 받은 적이 있다. 나의 한가지 감성적인 처사로 하여 받은 아버님의 첫 꾸지람이다. 하지만 그 꾸지람은 해마다 설날이 돌아올 때면 나의 머리 속에 기분좋게 떠오른다. 한것은 그 꾸지람 뒤에 아버지의 너그러운 처사가 이어져 나를 ...
  • 2019-04-22
  • 고요하던 집안에 따르릉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벨은 받는 사람이 없자 잠시 끊어졌다가 다시 울렸다. 복녀는 화장실에서 일을 보느라고 처음 울린 전화를 받지 못했다. 그래서 전화벨이 다시 울리기 무섭게 허둥거리며 전화기가 놓여있는 탁상쪽으로 뛰여갔다. 말이 뛰여갔지 걷는 것과 진배없었다. 복녀는 한달째 아침에 ...
  • 2019-04-19
  • 청명에 고향에 있는 부모님산소에 다녀왔다. 이번 청명은 바람이 많이 불어서 잠깐 절만 올리고 급하게 산소를 떠났다. 제사는 불과 10분만에 마치고 나머지는 산 사람들의 술자리다. 저승의 사람들을 위한 제사인지 이승의 사람들이 모이는 회포의 자리인지 올해따라 돌아보게 된다. 마침 호텔에서 학교 선배님 부부를 만...
  • 2019-04-09
‹처음  이전 5 6 7 8 9 10 11 12 13 14 15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