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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림문화상 대상수상작품] 일본에서 살기
조글로미디어(ZOGLO) 2019년11월12일 08시10분    조회:1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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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생활> 계림문화상 대상 수상작품

"일본에서 살기"
리홍매(일본)

머리말
1983년, 당시의 일본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내각이 ‘류학생 10만명 계획’을 세우고 세계를 향하여 일본 고등교육의 대문을 열었다. 80년대말에 이르러 활성화된 중국정부의 류학생정책으로 인하여 일본어가 널리 보급된 동북3성지역의 조선족들 속에서 일본류학의 붐이 일었다.

1994년 4월, 남들보다 빨리 그 붐에 올라탄 남편이 자비류학을 택하게 되였다. 2년 후인 1996년에 나도 세살 반이 넘은 아들애의 고사리손을 잡은 채 겁없이 일본땅을 밟게 되였다. 그렇게 오늘까지 20여년을 우리는 일본에서 살고 있다.

20대 후반이였던 우리 부부가 이미 50 고개를 넘어서고 유치원 중반인 ‘병아리반’에서 축구공 덕분에 친구를 사귀기 시작했던 아들애가 직장인이 된 지도 벌써 4년째다. 뭔가를 배우기 위해 바다를 넘어온 우리는 세식구가 모여살기 위해 정착을 시작했고 인생설계도에 없었던 제2의 고향을 만들어버렸다. 처음엔 공기마저 신선했던 밝디밝은 땅이였는데 점차 고달픔을 이겨내느라 심신이 단단해지는 시련의 시간이 흐르면서 이젠 차분한 마음으로 지난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추억도 생긴 이방인이 되였다. 

되돌아보면 그리움에 젖었던 일본생활의 시작이였다. 지인 하나 없는 곳에서 인맥을 쌓으며 한발자국한발자국 열심히 걸어나가는 고달픈 삶의 길이기도 했다. 언어장애의 벽을 넘고 나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격이 기다렸고 사람의 마음을 얻고 나면 이문화(异文化)의 미묘한 차이가 보였다.

그래도 꽤 살 만한 일본땅이였다. 3년을 살고 나니 이곳의 음식을 맛 있게 먹을 수 있게 되였고 5년을 살아보니 이 곳 사람들에게 불만의 소리도 내뱉을 수 있게 되였으며 10년을 살다보니 ‘이 곳에 정착해도 괜찮지 않을가?’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 동안 서러움도 있었다. 그리움에 지칠 때도 있었고 따뜻함에 목이 멜 때도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많은 것을 배우며 살게 되였다.

오늘날 문화의 차이는 더 이상 감추고 극복하는 차원의 과제가 아니며 그것에 대한 리해는 상호간의 소통중에서 홀시할 수 없는 밑거름으로 되고 있다. 알고보면 납득이 가고 흥미로운 일본인들의 전통과 문화이다.

중국에서 태여난 조선족인 우리는 오래동안 중국, 일본, 한국의 다문화적 환경에 몸 담고 살다보니 문화의 차이에 대한 고민이 멈추지 않았고 문화의 공생 속에서 생활하게 되였다는 느낌이 든다. 문화의 정착은 이주생활에 큰 도움을 주었다. 하여 오늘은 일본인들의 독특한 문화를 몸에 익히고 우리의 문화를 그들에게 전하며 살아온 자신의 지난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나의 글이 독자들의 다문화적인 인생에 도움이 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1.      바다를 건느다
 
아들애가 세돌이 되던 해인 1994년 4월, 결혼 4년 반 만에 우리 부부는 서로 떨어져 살게 되였다. 남편이 일본류학의 길에 올랐던 것이다. 자격이 통과되는 사람에게만 차례지는 행운이였던지라 깊은 고민 따위는 하지도 않은 채 어리벙벙하게 남편을 떠나보내게 되였다. 일본어학교 1년에 대학원 3년이라는 순조로우면서도 일반적인 기한이 지나면 인차 돌아와야 한다고만 여겼었다.

80년대말부터 시작된 자비류학붐은 큰 부담과 리스크가 동반되여있었다. 출국이라는 개념조차 거의 없었던 그 때는 우선 년봉의 열배 정도가 넘는 자금이 없으면 류학수속을 마칠 수 없었다. ‘만원호’라는 칭호가 존재할 정도로 만원이면 부자행렬에 들어설 수 있었던 그 당시에 5만원 정도의 빚을 지고 떠나야 하는 류학이였지만 일본에 가면 그 정도는 인차 갚을 수 있다는 근거 없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누구나 다 그러하듯이 첫 한달은 황홀한 꿈에 잠겨 집생각을 할 새가 없었다는 남편이였다. 한달 정도 지나고 나니 학교생활과 아르바이트생활에 몸과 마음이 지쳐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을 매일 같이 국제전화로 달래야 했다. 당장이라도 다 팽개치고 집에 돌아가고 싶었지만 다행히(후에 생각해보니 다행이였다고 한다.) 지고 온 빚 때문에 돌아갈 수 없었고 그 빚을 갚느라 아득바득하면서 1년 쯤 더 버티다보니 어느덧 일본생활에 적응이 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단다. 그래서 남편은 류학길에 오른 후배들에게 늘 “1년만 버텨봐!”라고 조언을 하군 하였다.

1년 후 경영학과 대학원 공부를 시작하게 된 남편이 세식구가 같이 일본에서 살자는 제의를 해왔다. 생각 같아서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면서 남편이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싶었다. 하지만 아빠를 찾기 시작하는 어린 아들애를 보면서 3년이라는 시간이 아들애의 성장에 있어서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닐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남편과 달리 일본에 대한 동경이 그닥 강렬하지 않았던 나였지만 발전한 일본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은 충동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 때까지 한번도 연길을 벗어나 생활해본 적 없었던 나는 중학교부터 근 10년간 일본어를 배웠다는 자신심 하나로 일본에 가려는 결정을 내리게 되였다.

첫번째 수속은 순조롭지 못했다. 마음이 상해할가 봐 남편에게는 말 못했지만 어쩌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텔레비죤방송국 편집기자일을 하기 시작하여 6년째에 들어섰을 때였던지라 하고 싶은 일들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헌데 당시에는 일본에 갈 수 있는 조건이 되면 안 가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만일 내가 가지 않으면 남편은 류학공부를 마치고 인차 돌아와야 했고 그렇게 되면 겨우 빚을 벗을 정도로 경제상의 변화는 크게 없을 것이였다. 그렇다고 학업을 뿌리치고 불법체류로 돈을 번다는 것은 인생계획에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여서 세식구가 같이 살기 위한 비교적 합당한 선택이 내가 아이를 데리고 일본에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영부영 망설이는 나를 두고 남편이 일본에 와서 반년을 살아보고 결정하자는 방안을 생각해냈다. 선배님들을 따라다니며 일을 배우느라 여념이 없었던 나는 두번째로 출국수속을 밟으면서도 ‘설마 그렇게 쉽게 비자가 나올가? 그리고 설마 일본에 가서 그렇게 오래 살 수 있을가?’ 하는 생각으로 반년 만에 돌아오겠다고 단위의 어마어마한 분들과 약속했다.

결국 마지막 일로 되여버린 1995년 양력설문예야회 실내촬영을 마친 날, 저녁기차로 주심양 일본령사관으로 향했다. 일이 순조로우려고 그랬는지 일주일 후에 비자가 나왔다. 나는 그 자리에서 열흘 후의 비행기티켓을 끊었다. 생각 밖으로 너무 순조롭게 비자가 나왔던 것이다.

한번도 딸을 외지에 보내본 적 없는 친정아버지는 준비 없는 전투를 한다고 잔소리를 하면서도 은근히 기뻐하는 눈치였다. 한 5, 6년 정도는 얼굴을 못 볼 것이라며 북경행 기차 우에 잠간 올라오셔서 눈물을 흘리시면서도 2년 만에 세식구가 모여살게 된다는 기쁨외에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말라며 아버지답지 않게 말씀하셨다.

1996년 1월 11일, 북경은 령하 20도 좌우의 추운 날씨였다. 친구가 한뜸한뜸 떠준 아래우 털실내의 덕분에 추운 줄도 모르고 일본행 비행기에 오른 나는 나리타공항에 내리는 순간부터 숨이 막히기 시작했다. 에어컨이라는 존재조차도 몰랐던 내가 공항 실내온도가 25도를 넘고 있음을 알 리가 없었다. 게다가 말도 통하지 않아 긴장해진 얼굴은 고뿔을 앓는 사람처럼 달아올랐다. 심지어 아들애는 땀벌창이 되여 하품만 하고 있었다. 두시간 정도 지나서야 겨우 입국수속을 마친 나는 귀가에 들리는 오가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물소리, 바람소리 같았다. 나와 상관 없이 흘러가는 거침없는 물들이 돌에 부딪치며 내는 소리처럼, 내 몸을 휙하고 스쳐지나간 겨울바람이 어딘가에 멈췄다가 다시 출발하면서 내는 소리처럼 “줄줄”, “윙윙”… 솔직히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여태 경험하지 못한 소리환경에 서있는 것 같았다.

아무런 대책도, 타산도 없이 총망히 바다를 건넌 나는 말 그대로 일본에 오면 하늘에서 돈이 떨어지는 줄로 알았다. 남편이 내가 가지고 온 짐 속에 들어있는 고급실크잠옷을 보면서 말없이 웃었던 리유를 나는 한달이 지난 후에야 알았다. 나를 기다리고 있은 것은 별빛보다 황홀한 샨데리야의 불빛처럼 랑만과 즐거움만 있는 일본생활이 아니였다. 20대 후반에 들어선 내가 처음으로 겪으면서 이겨나가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2.  아들애의 유치원생활
 
중학교시절부터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한 나였지만 한동안은 귀가 멍멍해지고 성대가 소리내기를 주저하는 시기가 있었다. 교과서에서 익힌 일본어가 일본사람들 속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례를 들면 우리가 배운 책 속의 말 “식사하셨나요?”가 생활 속에서는 “밥은?”라는 말로 소통되는 그런 생활언어환경이 나를 괴롭혔었다. 게다가 뉴앙스와 분위기로 리해해야 하는 일본사람들과의 대화였기에 일본에 온 첫 몇달 동안은 종이장에 글을 쓰면서 하는 대화가 많았다.

아들애는 달랐다. 도착한 이튿날부터 밖에서 뛰여노는 아이들 속에 끼우고 싶은 눈치였다. 전혀 들어본 적도 없는 말들이 오가는 속에서 같이 웃고 떠드는 아들애가 신기하기도 했다. 열흘이 지나자 아들애가 유치원에 보내달라고 떼질을 썼다. 좀더 말이 통하게 되면 보내려는 우리 생각으로는 아들애를 설득시킬 수가 없었다.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였는지라 소지하고 있었던 10만엔을 몽땅 털어 사립유치원 등록을 마쳤다. 유치원에 가는 첫날, 유치원뻐스가 집문 앞까지 데리러 왔었다. 1월말인지라 아직 쌀쌀한 날씨인데 유치원 통일복이 짧은 바지여서 전날밤부터 걱정에 잠을 설친 나는 내복 우에 짧은 바지를 입혔다. 겨울 한철에 맨다리차림으로 밖에 내보낸다는 것은 그 때까지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던 일이였다. 헌데 유치원에서 다른 아이들이 이상한 눈길을 보냈는지 이튿날부터 아들애는 기어이 내복을 벗어버리는 것이였다.

사계절이 뚜렷한 일본이지만 거의 모든 유치원에서 통일복이 일년사시절 짧은 바지(남)에 짧은 치마(녀)이다. 령하 20도를 넘는 연변에서 추위로부터 아이를 보호하느라  호랑탄자(요즘에는 볼 수도 없는)에 아이를 싸서 업고 키운 나로서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썩 후에야 안 일이지만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체온이 높고 활동량이 많기 때문에 너무 두터운 옷은 되려 아이들의 건강에 리롭지 못하다고 한다.) 겨울철에 피부가 추운 기온과 직접 부딪치면 자극을 얻게 되여 자률신경(自律神经)이 강해질 수 있으며 기온의 변화에도 쉽게 적응할 수 있다는 도리도 그 때서야 알게 되였다. 

그렇게 겨울철에 맨다리로 시작한 유치원 생활 덕분이였는지는 몰라도 감기를 달고 살던 애가 자주 앓는 일도 없이 무사히 잘 커갔다.

아들애가 다니는 유치원은 시내복판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내부는 넓고 단촐한 공원 같았다. 입구에는 나이 든 벗나무 한그루가 자라고 있었는데 원장선생님이 매일 문 밖에서 아이들을 맞아주었다. 자기절로 옷을 입고 가방을 챙겨서 메고 와야 한다는 유치원의 규칙을 준수하는 아들애를 보면 대견스럽기도 했고 신을 벗은 후 두짝을 가지런히 자기 이름이 씌여져있는 곳에 올려놓는 애들 모습이 신기하기도 했다. 여태 애기인 줄 알았던 아들애가 훨씬 어른스러워보이기도 했다.

처음으로 외국인을 받아들인 유치원에서는 중국어를 약간 아는 젊은 나오코선생이 맡고 있는 병아리반에 아들애를 배치했다. 중국사람이라고 신경을 써준 유치원측에는 감사했지만 중국어보다 조선어가 모어라는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질문사항이 따로 없이 “그렇습니까? 알았습니다!”라고 대답한 나오코선생은 유치원에서 잘 쓰는 일본어용어들을 적어주면서 한국어로 번역하여 발음을 일본어로 적어달라고 했다. 선생님과 아들애의 소통은 그렇게 조선어의 일본어발음으로부터 시작되였다.

친구, 밥, 화장실, 선생님 등 단어의 조선어발음을 일본어로 적어준 기억이 생생하다. 매일 유치원에서 돌아오면 아들애의 하루 상황을 상세하게 적어놓은 나오코선생의 련락수첩을 보면서 감동될 때도 있었다. 화장실에 갔을 때의 일이며 우유를 못 마셨다는 일이며 처음으로 자기 이름을 일본어로 류창하게 말했다는 일이며를 롱담까지 섞어가면서 적어주는 선생님의 일지를 읽으면서 유치원교육의 친절성을 새삼 느끼게 되였다. 우리에게만 주는 친절인 줄 알았지만 사실은 아이들 한명한명에게 모두 그렇게 련락수첩이 있었다. 엄마들도 련락수첩에 집에서의 애들 상황을 까근히 적어보내군 하였기에 그야말로 부모와 유치원선생이 같이 아이를 키운다는 느낌이 들었었다. 그렇게 한달이 지나니 아들애의 입에서 일본어가 술술 나오기 시작했다. 깜짝 놀랐었다. 모어가 조선어로부터 일본어로 교체되여가는 순간들이였다.

몇달이 지난 어느 날, 아들애가 자기 이름의 유래와 엄마 배속에 있었을 때의 에피소드 같은 것을 캐물었다. 만 다섯살을 먹는 생일이 다가왔던 것이다. 유치원에서는 한달에 한번씩 그 달에 생일을 맞는 아이들을 위해 이벤트를 조직하군 하였는데 아들애가 태여난 5월에는 생명의 탄생과 중요성을 익혀주는 조기교육을 할 차례였던 것이다. 이름의 유래와 거기에 담긴 뜻에는 별로 흥미를 갖지 않는 것 같던 아들애가 배속에서 험하게 엄마 배를 찼다는 말과 위치가 바뀌여서 낳을 때 엄마가 조금 힘들었었다는 말을 듣고 나서는 “미안해, 아팠겠다.” 하면서 내 품에 안기던 일이 인상 깊게 남아있다. 평소에 보지 못했던 심각한 얼굴이였던지라 잊을 수 없었다.

교통규칙과 쓰레기분리에 관한 교육은 유치원의 필수과목이였다. 또 국어교실, 영어교실, 미술교실 등 여러가지 공부방이 있었지만 지정된 교과서는 하나도 없었다. 선생님들마다 아이들의 흥미를 끌려고 수공으로 여러가지 도구들을 만들어 직접 수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잘 움직이는 아이들의 특성에 맞추어서 몸을 움직이면서 기억하는 수업방법이 많은 덕에 교실이 늘 시끌벅적하고 선생님과 아이들이 하나가 되는 공간이였다.

“애들은 바람의 아이, 어른은 불의 아이(こどもは風のこ、おとなは火のこ)”라는 일본 속담이 있다. 아이들은 바람 부는 추운 날씨에도 밖에서 뛰놀고 어른들은 추위가 무서워 따뜻한 불을 떠나지 못한다는 뜻이다. 애들이 부모들보다 더 빨리, 더 쉽게 일본생활에 적응하게 된 리유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이 아닌가 싶다.(다음 호에 이음)
 

3.신기하기만 했었던 일본생활의 첫시작
 
첫 몇달은 신기하기만 한 일본생활이였고 일본사람들이였다. 거리를 청소하는 사람들을 한번도 본 적이 없는데 거리가 항상 너무 깨끗했다. 습도가 높은 지역인 까닭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봄철인데도 공기가 그닥 건조하지 않고 맑았다. 당연히 먼지도 거의 없었다. 생각 밖으로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기본적으로 인도에서 달렸다. 걷고 있는 사람들 곁을 지날 때에는 “스미마센(すみません, 죄송합니다)”라는 말로 딸랑방울을 대신했다. 인도인 만큼 사람이 우선인 것 같았다.

어느 한번 무심결에 횡단보도의 빨간 신호등을 무시하고 자전거를 탄 채 길을 건넜더니 면목도 모르는 나이 지긋한 분이 자전거에서 내리라면서 뒤쫓아왔다. 자전거 뒤에 애까지 태우고 무슨 정신으로 그렇게 신호등을 무시하느냐고 꾸짖는 눈치였다. 후에 안 일이지만 일본의 차들은 확실히 속도가 빨랐고 신호등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지라 횡단보도 신호등을 기준으로 차들이 달렸다. 그만큼 신호등을 무시하면 교통사고확률이 높아지는 것이였다.

제일 신기한 것이 전철 안의 사람들이였다. 빼곡한 전철 안에서 큰소리로 이야기를 주고 받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요즘처럼 스마트폰이 보급되지 않아서였는지는 모르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신문과 책을 손에 쥐고 읽었다. 같은 책이라고 해도 단행본(单行本)보다 몇년 후에야 나오게 되는 문고본(文库本)이 더 잘 팔리는 원인은 가격대가 저렴한 동시에 싸이즈가 한손에 쥘 수 있는 정도여서 언제 어디서나 쉽게 읽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회사에 출근하기 전에 조간신문을 읽는 것은 일본사람들의 오래된 습관이였고 이동중에 전철역이거나 편의점에서 석간신문을 사서 읽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리고 대부분 일본사람들의 가방 속에 문고본책이 한권씩은 다 들어있다는 것도 썩후에야 알게 되였다. 요즘에는 핸드폰을 보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지만…

일본인지인의 초대를 받고 처음으로 일본료리집에 갔을 때의 일이다. 첫눈에 보이는 것이 우리와 완전히 다른 저가락 방향이였다. 저가락문화는 중국에서 생겼고 일본은 중국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저가락을 쓰게 되였다 한다. 헌데 송나라 때까지만 가로놓던 중국의 저가락 문화는 수요에 따라 점차 세로 놓는 것으로 변하였지만 아이로니하게도 일본에서는 고유의 중국문화를 그대로 전해내려가고 있는 것이였다. 

또 료리의 량과 종류 그리고 그릇에 담는 방법도 달랐다. 하나하나 작은 그릇에 종류별로 나오기에 마치 나오는 시간에 따라 주역이 바뀌는 것처럼 어느 하나도 지나쳐버릴 수 없었다. 량은 그릇의 크기에 비해 적은 축이였으며 모둠료리는 색갈이 서로 다른 식재료들이 이쁘고 정결한 그릇 우에 잘 어울려 담겨나왔다. 식욕을 자극하는 풍성하고 향기로운 우리 료리들과는 달리 먹고 싶다는 생각보다 보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눈을 즐겁게 해주는 일본식 료리는 갓 일본에 온 나한테 경이로운 존재였다. 뎀뿌라와 함께 밥을 넘길 수 없었으며 식재료의 원 맛을 강조하여 만들어진 료리에서도 맛을 느낄 수 없었다. 시각과 미각으로 즐기는 일본식 료리가 2013년에 유네스코무형문화유산에 등록될 정도로 세계각국에 널리 알려졌다고는 하지만 처음 접촉했을 때 나는 그 진미를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우리가 사는 아빠트 근처에는 슈퍼마켓이 두개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마츠모토키요시(マツモトキヨシ)였다. 요즘 일본에 오는 젊은 려행자들이 제일 많이 찾는다는 일본의 대표적인 드러그스토어(药妆店)중의 하나인 마츠모토키요시, 지금은 드러그스토어 일원화(一元化) 방향으로 경영하고 있지만 90년대말까지는 우월전략으로 슈퍼마켓 등 다각경영을 했었다. 마츠모토키요시의 연혁과정의 일부분이였던 슈퍼마켓 력사를 우리가 직접 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처음으로 마츠모토키요시에 들어갔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카운터를 사이 둔 점원과 손님 사이에서야 이루어질 수 있다고 여겨왔던 판매와 구매 행동이 셀프써비스형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사지 않으면 절대 손을 댈 수 없다고 생각했던 상품을 손으로 만져보고 눈으로 직접 확인하면서 고르는 자유로운 구매형식에 나는 신선감을 느꼈다. 주택가에 자리 잡은 슈퍼마켓 안에는 신선한 어류, 육류, 야채로부터 일상 생활용품과 약품에 이르기까지 상품종류가 구전했다. 한주일에 한두번 정도 그 곳에 가기만 하면 아무리 급한 사정이 생겨도 일주일 정도의 생활은 충분히 보장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직 슈퍼마켓에 적응이 안되였던 어느 날, 아들애가 사고를 친 적이 있었다. 글쎄 마음대로 자동차놀이감 포장을 뜯어서는 슈퍼마켓 한복판에서 “윙윙” 하면서 놀고 있었다. 입안에는 벌써 진렬대에서 가져온 과자가 들어있었다.   

나는 부랴부랴 아들애를 이끌고 이미 먹은 과자와 포장을 뜯은 놀이감 값을 계산했다. 아직도 욕심나는 물건이 많은 모양인 아들애가 뒤에서 엉엉 울며 떼를 쓰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눈길이 싫었던 나는 애를 그대로 놔두고 밖에 나와버렸다. 한동안은 슈퍼마켓에 데리고 오지 말아야 되겠다고 속으로 궁리를 하는데 아들애가 눈물투성이로 따라나오면서 나한테 뭔가를 넘겨주었다. 내가 허둥지둥 나오면서 떨어뜨린 돈가방을 주어서 가지고 나왔던 것이다. 가슴이 덜컥해났다. 남편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벌어온 한달 월급이 그대로 들어있는 돈가방이였다.

아들애가 너무 장해보였던 나는 ‘에라, 모르겠다.’ 하는 생각으로 아들애를 이끌고 다시 슈퍼마켓에 들어갔다. 그리고는 사달라는 것을 몇개 더 사주면서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었다. 돈을 내기 전에 마음대로 포장을 뜯으면 안되며 물건은 꼭 엄마와 상의하고 바구니에 넣어야 하고 오늘처럼 떼를 쓰면 다시는 슈퍼마켓에 데리고 오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하고 또 했다.

무인슈퍼마켓까지 나온 요즘에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지만 처음 슈퍼마켓을 접했을 때는 어린 아들애와 마찬가지로 놀랍고 신기한 나머지 매일 한번씩 가보고 싶었다. 량이 제한되여있는 특별세일상품을 손에 넣었을 때의 쾌락이 일본생활의 첫걸음을 뗀 나에게 소소한 즐거움을 주었다.
 
4. 이방인들 간의 상호 배척 
 
우리가 제일 처음 살았던 곳은 아빠트 2층이였다. 방 두칸에 작은 주방, 욕실과 화장실이 겸비되여있는 아담진 세집이였다. 텔레비죤드라마거나 영화에서만 보아왔던 미닫이문과 다다미방이 내가 일본에 왔다는 실감을 주었다.

집집마다 집 앞 출입구 쪽에 세탁기를 고정시켜놓은 것을 보고 놀랐었다. 세탁기가 엄청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가구중의 하나인데 밖에 내놓으면 잃어버리지나 않을가 걱정했던 기억도 난다. 옆집에 사는 부부는 밤중에 들어와서 잠만 자는듯 한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일본에 온 지 한달이 채 안되는 어느 날, 초인종소리에 문을 열어보니 아래집에서 사는 녀자였다. 일본에 도착한 날 선물을 주면서 수인사를 나눈 사이여서 마음 놓고 문을 열었던 것이다. 나와 나이가 비슷한 것 같았는데 세 아이의 엄마였고 일본사람과 결혼한 대만녀자였다.

말이 통한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나는 그녀의 방문에 마음이 흥분되였다. 이웃들 중에 하나뿐인 중국어권 사람인지라 마음을 터놓을 수도 있고 여러모로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나였다. “니호우(你好!)” 오랜만에 시름 놓고 번지는 나의 기분 좋은 인사말을 들었는지 말았는지 그녀는 문을 열자마자 퉁명스럽게 뭐라고 일본말을 했다. 그녀가 틀림없이 중국말을 할 것이라는 빗나간 예측 때문에 잠시 긴장을 풀었던 나는 어리벙벙해졌다. 순간 무언가대(无言可对)라는 말의 뜻을 페부로 느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의 일본어가 ‘카다고도(片言, 더듬거리는 불완정한 말)’수준이였을 수도 있었고 그래서 아직 일본어에 적응이 안된 내가 더 리해하기 어려웠는지도 몰랐다. “응?” 하는 나의 반응에 그녀가 다시 한번 반복하여 말했다. 대체적으로 좀 조용히 살라는 뜻인 것 같았다. 나는 “쓰마(是吗?)”하면서 그녀가 중국말을 할 것을 유도해봤다. 헌데 나의 의문 같은 건 듣고 싶지 않다는듯 또 일본어로 길게 말을 늘어놨다. ‘중국말을 하면 너도 나도 다 편할 텐데.’ 한마디도 대꾸하지 못한 채 속으로 웨쳤던 말이 기억난다.

그 때는 다섯살에 가까운 아들애가 유치원 축구팀에 들어가면서부터 자나깨나 뽈을 찾던 시기였다. 해질녘까지 밖에서 뽈을 차다가 집에 들어와서도 뽈을 굴리며 놀았고 잘 때에도 뽈을 안고 잘 정도였다. 그러니 아들애 때문에 아래집에서 올라오게 되였던 것이다. 처음 목조주택에 살게 된 우리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점이였던지라 송구함을 느꼈다. 그 날부터 집안에서의 뽈장난을 무작정 금지시켰다. 아무리 늦은 밤이라도 뽈장난은 꼭 동네공원에 나가서 하게 했다. 그런 노력과는 상관없이 애가 바닥에서 조금만 빨리 걸어도 아래집에서 뭔가로 쿵쿵 올려치기 시작했다. 조용하라는 신호였던 것이다.

매일 주의를 주었지만 다섯살도 안된 남자애가 시시로 도적고양이처럼 걸어다닐 수도 없고 움직이지 않고 앉아서만 놀 수도 없었다. 아이 셋을 키우는 집이라 리해해줄 만도 하였지만 만날 때마다 애를 잘 관리하라는 뜻의 불만을 들어야 했다. 그 때마다 ‘스미마센(すみません, 죄송합니다)’이라는 일본어로 미안함을 표달했던 나는 밖에 나갈 때면 그녀의 행적을 먼저 살피군 했다. 하여 아직 일본생활에 적응도 못했던 그 때 내가 제일 먼저, 또 제일 많이 쓴 일본어가 바로 ‘스미마센’이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외감과는 무인연으로 살았던 나는 처음으로 여태 살았던 것에 비해 격 떨어지는 위치에 놓여져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일본사람이 아니라는 리유 때문에 아래집 대만녀자가 만만하게 보는 것 같아서 오기가 생기기도 했다. 일본남자와 결혼했다는 것외에는 나와 다름없는 외국인(사실은 내가 더 우수한 외국인이라고 자부했었다)이였고 그만치 일본에 오래 살았으면 그녀보다 일본말을 훨씬 더 잘했을 것 같은 자신감도 들었다. 점차 무작정 철 모르는 아들애를 닥달하는 것에 의문을 갖게 되였고 아래집 녀주인의 눈치를 살피는 것에 괴로움을 느끼기 시작한 우리는 반년 만에 단독집에 이사를 가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일본에서의 첫 인간관계 장벽을 느낀 상대는 의외로 일본인이 아니였다…
 
요즘과는 달리 그 때는 “중국사람인데 왜 국방색옷을 입지 않았어요?”, “중국에도 사과랑 귤이랑 있어요?”, “전기는 있어요?”라고 물을 정도로 중국에 대해 잘 모르는 일본사람들이 꽤 많았다. 그리고 가짜결혼과 불법체류가 많았던 시기였다. 요즘 생각해보면 우습지만 당시 오기 부리기를 꺼려하지 않는 20대 막바지에 들어섰던 나는 ‘맹류(盲流)’로 오해받을가 봐 “우리는 류학생입니다!”를 항상 입에 달고 다니면서 돈 벌러 온 게 아니라 배우러 왔다는 인상을 박아주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2중언어환경 속에서 자란 정체성 때문에 다중언어환경에 대한 적응이 빠를 거라고 자기 나름 대로 신심을 가졌던 나였지만 난생처음으로 100퍼센트 이국언어환경 속에 몸을 담그게 되면서 생활 속에서 차지하는 언어환경 비중의 크기를 나날이 감지하게 되였다. 

첫 반년간은 일본사람과 대화할 때면 머리속에서 일련의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우선 대화 속에 라렬되는 단어의 뜻을 머리속에서 번역하여 리해하는 절차가 필요했다. 다음은 말하는 사람의 뉴앙스와 얼굴표정으로 분위기를 파악해야 했다. 같은 단어라 하더라도 용처에 따라 완전히 다른 뜻으로 리해해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례하면 “고노 혼 도우데스까?(この本どうですか 이 책 어때요?)”라는 물음에 “이이데스(いいです)”라는 대답이 뉴앙스에 따라 “좋네요”와 “필요 없어요”라는 두가지 대답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있다. 또 긍정 혹은 부정과 같은 ‘결론’이거나 기쁨 혹은 슬픔의 ‘태도’가 먼저 제시되는 한어적 어순과는 달리 일본어는 마지막까지 들어야 대화의 결말을 알 수 있다. 조선어의 어순과 같아서 다행이긴 했지만 그 내용을 머리속에서 리해한 후 대답을 다시 일본어로 번역하여 입에까지 옮기려면 엄청 시간이 걸렸다.

외국인들에게 친절한 일본사람들은 말이 잘 통하지 않으면 손짓, 눈짓, 심지어 발짓까지 하면서 상대방이 알아들을 때까지 천천히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상대방 나라의 언어로 인사를 하는 것으로 친절함을 전하기도 한다. 첫 1년간 내 주변의 일본사람들은 내가 끼운 자리에서는 항상 알아듣기 쉬운 일본말로 천천히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런 습관이 몸에 배여서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때도 또박또박, 천천히 말하게 되더라고 우스개를 할 정도로 그들은 나한테 생활용어를 자상하게 배워주었다.

일본에서 살면서 놀랍게 느낀 점이지만 일본사람들보다 더욱 린색한 것이 같은 립장의 외국인들일 때도 있었다. 나만의 오해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이방인들 사이의 상호 배척이 분명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5. 세집
 
아래집 대만녀자 덕분에 우리는 또 다른 경험을 하게 되였다.

2층 아빠트에서 조심조심 살다가 반년 만에 아예 이사를 결심한 우리는 부동산에 가서 1층 세집을 알아보기로 했다.

일본에서는 단독주택이 아닌 2, 3층 정도의 집합주택임대건물을 아빠트라고 했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고층건물주택은 맨션이라고 불렀다. 아빠트 두곳을 돌아본 우리에게 부동산 사무원이 애 때문이라면 아빠트가 아닌 단독주택은 어떠냐고 물었다. 단독주택은 아빠트에 비하면 마당도 있고 주차장도 딸려있어서 애들을 자유롭게 키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따로 주차장을 빌리지 않아도 된다고 하면서 마침 적당한 가격대의 단독주택이 나와있다고 했다. 아빠트에 비해 임대료가 엄청 비싼 단독주택이라니 엄두도 나지 않았지만 호기심이 동한 나는 한번 보고 싶다고 사무원을 따라나섰다.

중국에서 처음으로 방영된 일본텔레비죤드라마 《혈의(血疑)》에서 나오는 사치코네 집처럼 집안에 층계가 있는 2층건물이였는데 주로 다다미방이여서 일본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지은 지 오래된 듯한 목조건물이였다. 2층에 침실 두개가 있었고 아래층에는 방 하나에 넓은 주방이 있었다. 세식구에게는 호강에 겨운 집이였다. 한번 쯤은 이런 집에서 살고 싶다고 중얼거리기만 하다가 아예 단념하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몇날 며칠을 고민한 끝에 남편이 그 집을 계약하러 가자고 했다. 썩후에야 안 일이지만 남편은 일본에 와서 안정하지 못하는 나의 마음을 붙잡으려고 그런 결정을 내렸던 것이였다.

세집을 구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우선 일본인 련대보증인이 있어야 했다. 보증인의 주민등록증과 납세증명서 등 개인정보서류를 시청에 가서 떼와야 하는 데다가 집세가 체납되였을 경우에 대신 물어야 한다는 련대책임을 져야 하는 일인지라 입이 잘 떨어지지 않는 부탁이였다. 그리고 석달치 집세의 보증금과 한달치의 사례금, 부동산 수수료 한달치에 집세 한달치까지 한꺼번에 적어도 여섯달치의 집세값이 있어야 집을 빌릴 수 있었다. 보증금은 후에 되돌아온다고는 하지만 집을 원상복구하는 데 걸리는 료금을 물고 나면 거의 절반 이상은 돌아오지 않는다고 지인들이 알려주었다. 그리고 우선은 우리가 집주인의 심사에 통과되여야 했다.

기름진 중화료리 때문에 주방이 더러워진다고 중국인들을 사절하는 경우와 카레 냄새가 배이는 것 때문에 인도와 파키스탄 사람들을 거부하는 경우 그리고 쓰레기 분류 문제 때문에 아예 외국인들을 거절하는 집주인들도 종종 있었던지라 한주일 동안 긴장하면서 기다렸던 기억이 난다.
 
당시 지방에는 중국류학생이 그닥 많지 않았다. 게다가 어린 애까지 딸린 가족이 같이 와서 공부를 한다는 자체가 일본인들에게는 존경을 받을 만한 일이였다. 자기네들은 일단 결혼을 한 다음에는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할 엄두를 못 낸다면서 대단하다고 엄지손가락을 척 내드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연유로 주위의 일본인들이 너도나도 친절을 베풀어주었다. 덕분에 우리는 복잡한 절차들을 무사히 밟고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하게 되였다. 우선 이사한 구역내의 주민자치회에 가입해야 했다. 같은 지역에 사는 주민들이 자주적으로 결성하는 단체인 자치회는 같은 곳에 살게 된 인연들이 모여 서로 돕고 서로 어울린다는 의미에서 ‘지연단체’라고도 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가두의 소조와 같은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가입여부는 자유라고 하였지만 우선 쓰레기를 공동쓰레기장소에 버릴 수 있고 무슨 일이 생겼을 경우에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말에 아무 고려도 없이 일년간의 회비를 물고 가입하기로 했다.

요즘에는 거의 없어지기도 하는 일본사람들의 이사문화를 우리는 그 때 체험했다. 에도(江戸)시대부터 전해내려오면서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는 전통문화였는데 적어도 새로 이사 온 집의 앞 3채와 량쪽 옆집에는 일본 소바(메밀국수)를 선물로 주는 습관이였다. 소바의 형태가 가늘고 길다는 점에서 “가늘고 길게 오래오래 잘 지냅시다(細く長いお付き合いをお願いします)”라는 의미를 담았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값이 싸고 맛이 좋기에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량쪽이 모두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리유인 것 같기도 했다. 20여년이 지난 요즘에는 점점 희미해지는 습관으로 되기도 하지만 동네사람들과 친해지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이사 온 날 자치회의 책임자가 방문을 왔었다. 곧 래일부터 쓰레기를 버리게 될 것이니 쓰레기 분류방법과 각종 쓰레기를 버리는 요일이 적혀있는 포스트와 쓰레기주머니를 가져다주면서 잘 부탁한다고 했다. “괜찮죠?”라는 물음에 “하이!”라고 인차 대답을 했던 나는 그 걱정어린 시선의 진짜 의미를 두고 후날 깊이 반성하게 되였다.

이사한 지 두주일 정도 되는 날, 그 날은 화요일이여서 플라스틱 쓰레기를 버리는 날이였다. 쓰레기 청소당번인 듯한 아주머니 한분이 서서 내가 가져온 플라스틱 쓰레기를 유심히 보고 있었다. 조금은 신경이 쓰이기도 하였지만 음료수 병사리들과 일상용 플라스틱 용기들을 분류하여 각자의 주머니에 넣었다. 여태 그렇게 해왔던지라 문제가 될 줄은 생각지도 않은 채 돌아서는 나를 그 아주머니가 불러세웠다.

“죄송합니다- 잠간 괜찮죠?”

“하이!”

아주머니는 내가 가져간 플라스틱 용기 주머니를 헤치기 시작했다. 사용방법 등 설명이 인쇄되여있는 라벨은 떼여내야 하고 빈 용기는 반드시 뜨거운 물에 헹구어야 하며 음료수 병사리의 마개는 따로 버려야 한다는 등등을 구구절절 설명해주었다. 그러면서 쓰레기를 회수하는 사람들이 요 며칠 분류되지 않은 쓰레기를 회수하지 않아서 자기가 다시 정리했다고 투덜거리듯 말했다.

“스미마센(죄송합니다)-” 나는 몇번이고 같은 말을 곱씹으면서 다음부터는 주의하겠다고 허리를 굽혔다. 여태 없었던 일 때문에 며칠간 고민하다가 겨우 해결을 본 그 아주머니는 시름을 놓은 듯한 얼굴로 잘 부탁한다고 했다.

요즘도 그렇지만 지역에 따라서 쓰레기 분류방식이 미묘하게 다르다. 그 날 이후로부터 나는 플라스틱 쓰레기를 뜨거운 물로 잘 씻군 했다. 다른 일도 아니고 쓰레기문제로 눈총을 받기 싫어서였다.

헌데 몇년이 지난 후에 텔레비죤프로에서 우연히 이런 뉴스를 보았다. 플라스틱 용기를 뜨거운 물로 세척할 경우 재활용으로 환원될 에네르기자원보다 씻을 때의 에네르기자원 소모량이 더 높아질 수 있다는 데터가 나왔다고 했다. 따지고 보면 쓰레기재활용을 위해 뜨거운 물로 씻어서 버릴 경우 에네르기자원의 마이나스 순환이 생긴다는 뉴스였다.

“허 참…” 그래서 그 때부터는 찬물로 플라스틱 용기를 씻어서 버리거나 심하게 더러워진 플라스틱 용기는 아예 태우는 쓰레기에 버리기 시작했다. 나에게 열심히 분류방식을 가르쳐줬던 그 아주머니도 그 뉴스를 봤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6. 일본사람과 까마귀
 
갓 일본에 왔을 때 해질녘이 되면 들리는 동요 <유야케고야케(저녁노을)>의 멜로디에 고향생각을 많이 했던 기억이 있다. 어린시절에 아버지가 배워주신 일본동요였는데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 학교에서도 늘 불렀던 노래였던 것이다. 산 설고 물 선 이국타향에서 노을 비낀 저녁하늘을 바라보며 착잡한 마음을 달래기도 했던 동요이기도 했다.

요즘 23년전과 변함이 없는 일들 중의 한가지가 바로 저녁녘이면 무선 스피커를 통해 <유야케고야케>의 멜로디가 들리는 것이다. 일본의 대부분 지역에서 저녁 네시 혹은 다섯시에 이 동요가 울려퍼지는데 밖에서 뛰놀던 아이들이 서둘러 집에 돌아가야 하는 신호로도 되고 있다.

가사를 보면 대체로 이렇다.
 
저녁노을 비끼고 해는 지는데 / 산속 절에서 종소리가 울리네
손에 손 잡고 모두 돌아가자 / 까마귀와 함께 돌아갑시다
 
중국에서 일본어를 배운 사람들 거의 모두가 이 동요를 기억하고 있겠지만 일본에 와서도 거의 날마다 들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까마귀는 날이 어두워지면 산에 돌아가는 속성을 갖고 있다 한다. 그래서 “까마귀와 함께 돌아갑시다”라는 가사가 나온 듯하지만 까마귀가 동요가사에 올랐다는 자체는 조금 리해가 가지 않았었다.
 
까마귀로 시작되는 또 다른 동요 <일곱 아이(七つの子)>도 있다.
 
까마귀는 왜 우는 걸가 / 까마귀는 산속에
귀여운 일곱 아이가 / 기다리고 있어서
이쁘다 이쁘다고 / 까마귀는 우는 거야
 
일본어로 ‘이쁘다’, ‘귀엽다’를 가와이이(可愛い)라고 하는데 ‘가와이이’의 발음과 까마귀의 “까욱까욱”하는 울음소리가 비슷하게 들린다는 해석도 까마귀에 대한 호의를 바탕으로 하는 선의적인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우리한테 까마귀는 불길한 징조였다. 까마귀를 보면 집에 불상사가 생긴다고 간혹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들려도 감히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던 기억들이 있다.
일본에 와서 처음 얼마 동안은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리기만 하면 고향에 안부전화를 하군 했던 일들도 많았다. 헌데 상상외로 일본땅에는 까마귀가 많았고 인간과 공생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일본사람들에게 있어서 까마귀는 어떤 존재였을가
 
일본인 지인에게 까마귀를 좋아하냐고 물어봤더니 “까마귀가 울면 사람이 죽는다는 설이 있어요. 게다가 까마귀는 벌을 받아서 새까맣게 됐대요…”라고 하면서 옛말을 들려주었다.

옛날옛적에 올빼미는 염색가였다. 제비, 비둘기 등 온갖 새들이 찾아와서 이쁘게 염색을 해달라고 했는데 제일 마지막에 나타난 새하얀 까마귀가 자기를 제일 이쁘게 염색해달라고 졸라댔다. 욕심 많은 까마귀에게 벌을 주기 위해 올빼미가 새까만 색으로 염색하여주었다는 설과 까마귀의 욕구에 따라 여러가지 무늬로 색갈을 겹쳐서 염색하는 바람에 결국은 새까만 색으로 변했다는 등 여러가지 설이 있다. 그 때로부터 올빼미와 까마귀는 천적으로 되였고 올빼미는 까마귀를 피해 밤에만 활동한다는 결말을 가진 옛말들이였다.

헌데 까마귀는 불길함의 상징외에 연기(缘起)가 좋은 새로 전해내려온 또 다른 전설도 갖고 있었다. 그 전설에 의하면 일본의 초대 천황이 신이 내려준 새에게서 무술을 전수받은 후 길을 안내받으면서 자기 땅을 동으로 넓혔고 강대한 조정을 세웠다고 하는데 그 때 그 새가 발이 세개 달린 야타가라스(八尺鸟)라는 까마귀였다고 한다. 즉 일본전설 속의 삼족오인 것이다. 그 때로부터 까마귀는 일본인들 속에서 신의 사자 혹은 태양의 신으로 상징되여 대대로 전해내려왔다. 현재 일본축구협회의 상징마크가 ‘야타가라스’이고 월드컵에 진출하는 일본국가팀의 유니폼에 야타가라스가 새겨져있는 원인도 바로 그런 전설에서 유래된 것이다.
 
검은색을 불길한 색상으로 간주해왔던 일본인들이 까마귀를 견제하지 않는 또 하나의 리유는 울음소리마저도 음침한 까마귀이지만 먹이를 물어다가 부모 입에 넣어주는 ‘효조(孝鸟)’라는 점에서였다. 실제로 새끼가 자립할 때까지 키워서 둥지 밖으로 내보내면 새끼는 그 때부터 먹이를 물어다가 어미를 봉양한다는 까마귀의 효도를 찬양하는 사자성어 “자오반포(慈乌反哺)”를 모르는 일본사람은 아주 적다.

그런 까마귀이지만 실제 생활 속에서 사람들에게 여러모로 고민을 가져다주는 새여서 요즘엔 사회적인 문제거리이기도 하다.

과일이 무르익어 먹을 만할 때를 기다려서 밭에 침입한다는 까마귀는 음식쓰레기를 헤집고 먹이를 찾는 머리 아픈 새이기도 하다. 어릴 때 자주 들었던 “까마귀처럼 까먹지 말라”는 말의 근거를 의심할 정도로 비상한 뇌를 가진 까마귀는 학습능력이 대단하다. 한번 먹어보고 맛 없는 먹이는 두번다시 안 먹는다는 까마귀이다. 음식쓰레기를 버리는 날이면 무리를 지어 그 주위를 빙빙 에돌다가 사람그림자가 보이지 않으면 작업을 시작하는데 그때그때 먹이를 먹을 뿐만 아니라 저장을 하기 위해 먹이를 옮겨갈 정도로 령리한 새이기도 하다.
 
고향에서는 어쩌다가 한번씩 그 울음소리를 듣거나 간혹 떼를 지어 전선줄에 앉은 모습들을 보군 했던 까마귀들을 여기 일본에서는 너무 자주 그리고 너무 가까운 곳에서 보군 한다. 더우기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그 당당함에 기가 꺾일 때도 있다. 사람과 눈이 마주칠 경우, 까마귀가 사람의 얼굴을 기억한다는 말에 감히 눈도 못 마주칠 정도이다. 또 우로 올려다보는 시선보다 내려다보는 시선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까마귀의 속성 때문에 베란다에서 까마귀 울음소리만 들려도 황급하게 피하게 되는 것이 이젠 습관으로 되였다.

언제부터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까마귀를 지방에서보다 도심에서 그리고 옛날보다 현대에 이르러 더욱 빈번히 보게 된 것 같다. 길 가는 사람들의 손에 음식이 쥐여져있으면 어느새 날치기를 해가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까마귀는 우리와 가까운 곳에 정착하고 있는 것 같다. 산속에서처럼 고생스럽게 먹이를 찾지 않아도 도심에는 풍부한 먹이들이 많고 많다. 별로 가리는 음식이 없이 닥치는 대로 다 먹는다는 그들에게 있어서 매일매일 음식쓰레기를 배출하는 사회가 로동을 하지 않고도 먹고살 수 있는 지상락원일지도 모른다.

사람도 까마귀도 서로 적응을 하고 있는 것인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쓰레기를 버리러 오는 사람들을 피하던 까마귀들이 요즘에는 피하지도 않는다는 느낌이 든다. 점차 인간들과 어우러져 사는 것이 자연 속에서 사는 것보다 마음 편한 일이 되여가고 있는 것이 아닐가? 게다가 영양가 높은 먹이를 먹으면서 번식이 잘되여가고 있고 또 수명조차도 길어지는 게 아닐가 싶기도 하다. 전문가들의 관찰에 의하면 최근 까마귀들이 주택지와 가까운 곳의 나무 우에 번식처를 정하고 있기 때문에 날이 갈수록 줄어들 대신 오히려 점점 많아진다고 한다.

기후가 따뜻하고 나무들이 무성하며 거기에 음식쓰레기까지 많다보니 까마귀가 인간들을 위해 자주적으로 떠나는 일은 아마 없을 것 같다. 사회적인 화제로도 되고 있어 그 퇴치방법을 모색하고 여러모로 조치도 취하고 있는 형편이지만 아직도 까마귀에 대한 사람들의 고민은 사라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아무리 봐도 일본이라는 작은 땅덩어리 우에서 ‘소비기한’에 대해 과도하게 신경을 쓰는 일본사람들이 음식쓰레기를 줄이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게 점차 맛 있는 먹이가 줄어들게 되면 까마귀들이 일본의 도심을 떠나는 날이 오지 않을가!

7. 첫 아르바이트
 
일본에 온 지 석달 만에 지인의 소개로 우리가 사는 지역 《아사히신문》판매회사의 오리꼬미(折り込み: 신문에 부록이나 전단지를 접어서 끼워넣는 일)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였다.

신문이 우편국을 통하여 독자들에게 배달되는 중국과는 달리 일본은 신문판매회사라는 독립적인 업체를 통하여 매일 독자들 손에 전달된다. 90년대 후반이였던 그 때에는 인터넷신문이 주류인 요즘과는 달리 신문을 주문하지 않는 가정이 거의 없었다.

우리가 사는 지역에는 일본의 대표적 신문인 《아사히신문(朝日新闻)》과 《요미우리신문》이 각기 자체의 전문판매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자체의 메인신문외에 《마이니찌신문》, 《스포츠신문》, 《일본경제신문》 등 10여가지 타신문도 취급하고 있었다. 대부분 독자들은 석달에 한번씩, 혹은 반년에 한번씩 신문주문을 갱신하였는데 그 때마다 영업사원들이 사은품을 들고 직접 독자의 자택을 방문하여 계약을 맺군 하였다. 독자들은 ‘아사히파’와 ‘요미우리파’로 나뉘여지고 있었는데 신문의 론술기사 관점이나 주부들이 즐겨 읽는 문화면 내용, 읽기 쉬운 지면디자인에 대한 취향이 주요 원인이였다. 가끔은 야구 팬들의 취향도 들어있었다. 놀랍게도 판매회사의 신문 배달방식이거나 배달시간에 대한 고객의 만족도 뿐만 아니라 주부들이 신문기사보다 더 먼저 본다는 전단지의 종류와 내용들도 홀시할 수 없는 기준에 속해있었다.

한개 지역에 두가지 종류의 주류 신문이 있다는 것은 적어도 절반 독자를 끌어올 수 있는 가능성이 확보되였다는 뜻이다. 하여 경쟁상대인 두 판매회사는 써비스 수준과 종류, 사은품의 가격대, 극소수 특수가정의 신문열독 시간에까지 신경을 쓰고 있었다. 몇만부 이상의 신문을 취급하고 있었지만 날마다 한부한부에 승부를 거는 것 같았다.
그 당시는 아직 인터넷광고가 널리 보급되지 않았던 때인지라 전단지가 지역정보와 상업광고의 최고수단이였다. 매일 조간신문과 세트로 배달되는 전단지는 지정된 배달일 전날에 기계로 세팅되여야 했다. 전단지에 대한 료해가 전혀 없었던 나는 신문판매업종의 한개 부문인 오리꼬미작업장이라는 작은 울타리 안에서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되였다. 그 때 처음 안 일이지만 신문과 함께 배달되는 광고전단지의 수수료가 신문판매회사에는 순리윤으로 남는 부분이였다.

오리꼬미작업은 전부 기계로 하는 작업이였다. 몇십부에 달하는 전단지를 세팅하여놓으면 이튿날 조간신문을 배달하는 배달일군들이 신문에 끼워서 배달하였다. 세팅은 기계가 하였지만 어느 지역에 몇부씩 배달하는가에 대해서는 전단지를 의뢰하는 회사가 결정하였다. 전단지 한장에 얼마라는 기준이 있었기 때문에 전반 지역에 배달하는 것이 회사에도 유리했고 작업하기에도 편했지만 모든 전단지가 다 그렇지만은 않았다.

전단지를 살펴보면 같은 업종 사이의 경쟁을 엿볼 수 있었다. 례하면 슈퍼들은 매주마다 특매일(特売日) 날 아침에 전단지를 배포하군 하였는데 각기 특가품이 들어있었다. 그 날 특가품의 인기가 주부층들을 붙잡느냐 못 붙잡느냐를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조간신문을 주문하는 조건이 모모 슈퍼의 전단지가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는 독자들도 가끔 있었다. 그럴 경우 엄연히 전단지를 의뢰하는 회사가 요구하는 지역과는 다른 지역의 독자라고 할지라도 특별히 신경을 써서 그 전단지를 배달해야만 했다. 당시 사은품도 사양하고 신문값도 자동시스템으로 지불하지만 지정한 전단지만은 꼭 배달해야 한다는 그런 계약조건의 독자가 20여명 있었다. 오리꼬미작업은 간단한 것 같지만 특별히 신경을 써야 하는, 책임성이 동반되는 작업이였다.

전반 지역에 전단지를 뿌리는 경우에는 단순한 작업으로 세팅할 수 있지만 제한된 전단지를 일부분의 특정된 지역에만 배포할 경우에는 복잡한 세팅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전단지를 배포하는 목적과 맞물리게 이벤트장소거나 상업단체들의 지리적인 위치를 알아야 독자들과 의뢰회사들의 요구에 만족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 그런 도리를 정확히 리해할 수 없었던 나는 선배들의 지시 대로 기계가 표시하는 수자가 몇번이면 어느 스위치를 끄고 몇번이면 어느 스위치를 넣는 식으로 맹목적으로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일일이 지시를 받으며 단순한 작업을 매일 하다보니 자연히 전단지와 지역 사이의 위치관계에 대해 희미하게나마 리해하게 되였다. 나는 오리꼬미작업에서의 전문용어와 작업순서를 하나하나 수첩에 메모하면서 기계조작에 차질이 없도록 도정신하는 하루하루를 보냈다.

석달이 지나니 수첩 하나가 거의 채워졌고 대부분 전단지의 데터가 만들어졌다.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베테랑 세 사람과 나와 나이가 비슷한 한 사람, 그리고 나까지 다섯 사람이 매일 오리꼬미작업을 했었다. 전혀 들어본 적도, 접촉해본 적도 없었던 부문인지라 처음에는 하나하나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감히 움직일 수도 없었던 나였지만 차츰 일이 재미 있어지기 시작했다. 화보처럼 만들어지는 전단지를 보는 것도 즐거웠고 짧고 인상 있게 박혀있는 광고문의 매력에도 끌렸다.

일도 일이였지만 선배들이 너무 따뜻하게 대해주어서 더없이 감사했다. 서툰 일본말도 개의치 않고 들어주었고 일본인들의 습관에 대해서도 알기 쉽게 알려주군 하였다. 무엇보다 교과서에서 볼 수 없는 생활용어들을 많이 배울 수 있어서 다행이였다. 그중에서도 스무살이나 이상인 다다상이 특별히 나를 잘 챙겨주었다. 매일 일본사람들 속에서 지내다보니 말문도 트이고 편하게 대화도 할 수 있게 되여서 한동안은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그러던 어느 하루, 선배 세분이 같은 날에 휴식을 하게 되였다. 그것도 전단지가 제일 많은 금요일이였다. 비록 사전에 점장이 지원인원들을 배치해주었지만 베테랑 셋이 동시에 휴식을 한다니 눈앞이 캄캄했다. 석달째에 들어선 신인인 나와 1년차인 이와모토씨가 지원을 나온 사원 네 사람과 함께 토요일 아침에 배달될 전단지 세팅 작업을 끝마쳐야 했다. 늘 선배들의 지시에 따르기만 했던 이와모토씨가 여태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이라며 주저하는 바람에 현장은 긴장 속에 파묻혔다. 불행중 다행으로 나의 메모수첩이 큰 은을 냈다. 평시보다 시간이 좀 길어지기는 했지만 무사히 오리꼬미작업을 마치게 되였고 나는 간만에 일 같은 일을 한 듯한 성취감을 느끼게 되였다.

며칠후 사장이 오리꼬미소조회의를 열었다. 늘 “전단지 때문에 어느 독자가 의견전화를 걸어왔다”든가, “전단지 한장에 1년치 신문의 계약이 걸려있다”든가 하는 문제가 생겼을 때만 급히 열리는 회의였는데 그 날은 뜻밖이였다. 나의 메모수첩에 대해 보고를 받았다고 하면서 “앞으로 신인들이 들어와도 인차 적응할 수 있도록 계속 그런 식으로 정리하라!”는 새로운 과제를 주었다. 비록 평범하고 단순하여 누구나 다할 수 있는 작업이였지만 뭔가 인정을 받는 것 같아서 나는 기분이 좋았다.

헌데 그 이튿날 기분 좋게 출근한 나는 여느때와 다른 쌀쌀한 분위기를 느꼈다. “오하요 고자이마스!”라는 아침인사를 미적지근하게 받아주는 선배들과 그들의 눈치를 살피는 이와모토씨를 발견하였던 것이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다시한번 인사를 건넸으나 역시 반응은 같았다. 며칠이 지나도 똑같았다. 나는 웬 일이냐고 물어볼 용기도 못 낸 채 한달을 묵묵히 그런 분위기 속에서 보냈다.

“튀여나온 말뚝은 얻어맞는다(出る杭は打たれる)”는 일본속담이 있다. 남보다 튀지 않고 비슷하게 사는 것이 무난하다는 뜻인데 그것이 일본사람들 사이 관계의 숨은 원칙임을 나는 뒤늦게야 알게 되였다.

십여년을 근무해온 선배들이 매뉴얼을 만들려고 생각지도 않았던 일을 마음대로 해버렸고 사장님한테 인정까지 받았던 나는 난생처음으로 ‘이지메(따돌림)’를 당하게 되였다. 이모처럼 여겼던 다다상이 제일 노여워하는 것에 나는 엄청 상처를 받게 되였다.
 
8. 동그라미 관계
 
와카(和歌: 일본 고전시), 와후쿠(和服: 일본민족복장), 와쇼크(和食: 일본음식), 와후(和風: 일본식) 등에서 알 수 있듯이 ‘화(和)’는 일본을 상징하는 한자로 전해내려오고 있다. 오래전부터 ‘조화롭고 온화하며 부드러운 것’을 세상 사는 리치로 여겨왔다는 일본사람들의 화(和)문화는 개성보다 질서와 안녕을 중시하며 례의를 선호하는 오래된 전통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같은 행사에 참가한다거나 조그마한 공통점만 있으면 안목 없는 사람들끼리 서로 인사를 나누면서 인차 친숙해지는 것이 이 곳 사람들이다. 처음에는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이 사람들 사이에 트러블은 존재할가?’라는 어처구니없는 생각도 해본 적이 있었다.

일본사람들의 대화방식은 더욱 흥미로웠다. 비슷한 생각이라는 전제하에서 나누는 대화여서인지는 몰라도 마지막에 늘 “そうでしょう?!(그렇지?!)”를 붙이군 하였다. 듣는 사람 역시 “소우데쓰네~(그러네요)”로 대화를 이어가면서 될수록이면 정반대의 의견을 말하지 않는 것이 이들의 무난한 대화방식 같았다. 때로는 엄연히 다른 의견을 말하면서도 습관적으로 “소우데쓰네~”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우선 상대방의 생각에 대해 긍정한 다음 자기 의견을 말하군 한다. 하여 공공장소거나 모임에서 자기 주장을 내세우면서 서로 다른 견해로 크게 다투는 경우가 거의 없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것이 바로 일본사람들 사이의 ‘혼네(本音: 속내)’와 ‘다테마에(建前: 겉치레)’라는 것을 알게 되였다. 속마음은 누구나 다 갖고 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에 맞지 않거나 상대방을 언짢게 하는 일, 혹은 자기에게 불리익을 주는 것이라면 될수록 감추는 것이 일본사람들의 일반적인 심리이다. 민족적인 성격이거나 문화를 떠나서 그것은 이미 인간관계에서의 매너로 자리 잡고 있었다. 어찌 보면 자기를 낮추고 상대방을 존중하며 사람들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미덕인 것 같지만 거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마음에 상처를 받은 적 있는 외국인들이 적지 않다. 백퍼센트라 할 정도로 겉이자 속인 우리는 중립인 듯하고 망설이는 듯하는 일본사람들의 태도에 답답할 때가 많았다. 오래동안 모방하기조차 어려웠던 부분이였다.

메모수첩사건 이후 나는 선배들이 건네는 “아다마 이이네(총명하네요)”라는 칭찬이 비양조로 들렸다. 솔직히 내가 무얼 그렇게 잘못했는지 알 수가 없었던 그 때의 한달 동안 한물 건너간 친절처럼 따뜻하지 않은 그들의 시선에 나는 큰 상처를 받게 되였다.

언어의 장벽을 갓 허물기 시작한 나는 일본에 온 지 여덟달 만에 그렇게 사람과의 커다란 장벽에 부딪치게 되였다. 한동안 나는 사람을 믿지 못하는 하루하루를 보내게 되였다. 만나면 “니호우”라고 인사를 하면서 친절하게 대해주는 사람들이 조금은 부담스럽기도 하여 슬그머니 피한 적도 많았다. 잘 모르는 사람과 별로 관심이 없는 말들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부질없는 일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하여 때론 초인종소리를 무시하고 숨 죽이고 집안에서 나오지 않았던 일도 있었고 쓰레기를 버리려고 나서다가 사람들이 모여있으면 주춤하면서 되돌아서기도 했다. 매일 잠을 설치면서 ‘이 곳에서 계속 살아야 하나?’ 하고 고민을 거듭하던 나는 남편과 상의한 후 끝내 아들애를 이끌고 무작정 고향행 비행기에 올랐다.
 
고향의 푸근한 향기와 두터운 정이 나를 반가이 맞아주었다. 살 것만 같았다.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큰소리로 떠들 수도 있었고 머리속의 복잡한 시스템을 떠난 편안한 대화를 마음껏 할 수 있어서 좋았다. 며칠후 친정아버지께 다시 일본에 가지 않겠다는 말씀을 드렸다. 우선 며칠 편히 쉬고 다시 얘기하자는 한마디를 하고 돌아앉던 아버지의 그 때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고작 몇달밖에 배기지 못하고 돌아온 딸이 한심하셨던 것이 분명했다.

그러던 며칠후 아버지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자식은 부모의 뒤모습을 보면서 크는 법이니라. 부부가 같이 사는 모습을 자식한테 보여줘라!” 엄격한 아버지의 그 한마디에 나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였다. 아무리 고생스러워도 식구는 같이 살아야 한다는 깊은 뜻이 담긴 아버지의 그 말씀이 이후의 나의 생활에 지침이 되였다.

일본에 돌아온 후 나는 생각을 바꿨다. 나는 일본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륜(바퀴)적인 관계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한두가지 공통점만 생기면 인차 그룹을 만들고 싶어하는 그들은 그 동그라미관계 속에 들어가지 못하고 혼자가 될가 봐 무척 두려워한다. 될수록 ‘평범하게’, ‘다같이’, ‘무난하게’ 지내려면 솔직한 기분과 직설적인 대화를 피해야만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져있었다. 만나서 한시간후이면 가족관계까지 다 털어놓는 우리와는 달리 일본사람들은 오래동안 지내면서 차츰차츰 신용관계를 쌓아가는 편이다. 때문에 일단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있고 털어놓을 수 있는 관계가 성립된 후이면 쉽게 무너지지 않는 것이 그들의 인맥이였다. 헌데 보이지 않는 사람 사이의 선을 두고 방황했던 나의 마음속에는 알게 모르게 응어리가 생겼던 것 같았다. 그대로라면 20대의 막바지에 들어선 내가 당당함을 잃지나 않을가 걱정스러웠다. 늘 감동을 주는 일본사람들이였지만 진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떻게 살것인가’를 두고 오래동안 고민한 나는 ‘산에 가면 산노래, 들에 가면 들노래’를 부르기로 작심했다. 자꾸 우리와 다르다는 생각으로 이문화적인 요소를 밀어내지만 말고 조금씩 리해하고 받아들이다 보면 편히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한동안 집안에서 나오지도 않았던 나는 주위사람들과 같은 시선과 같은 화제를 만들기로 작심했다. 우선 제일 하고 싶었던 운전을 배우기 시작했고 단시일내에 면허증을 탔다. 한동안 너무 즐거웠다. 주동적으로 사람을 사귀기 시작했고 일본어가 능숙하지 않더라도 될수록 말을 많이 주고 받았다. 언어가 자유로워지고 나니 숨통이 트이는 것만 같았다. 더는 전화벨소리가 두렵지 않았고 눈과 눈을 마주하지 않고서도 대화가 통했다.

지인의 소개로 내가 사는 지역의 국제교류협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게 된 나는 만두교실, 한국어교실, 중국어교실, 김치교실도 열었다. 일본사람들이 요청하는 일에는 될수록이면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고 나니 일본사람들의 동그라미관계 속에 당당한 내 자리가 생기게 되였다.

9. 재난대국
 
9월 1일은 일본의 〈재해방지의 날(防災の日)〉이다. 해마다 이 날이면 각 자치단체거나 학교들에서 재해방지 훈련을 하게 된다.

유치원, 소학교들에서는 지진 발생시를 대비하여 규정된 매뉴얼에 의해 훈련을 하게 되는데 그 훈련은 부모들한테 아이들을 인도하는 데까지여서 대부분 부모가 함께 훈련에 참가하게 된다. 아주 실감이 나는 훈련이다.

강요받는 일은 아니지만 그맘때가 되면 가정용 재해대책용품을 점검하는 사람들도 많다. 음료수, 건빵, 통졸임, 컵라면 등 간이식료품과 비상약품, 손전지, 라지오, 충전기, 휴지, 휴대용 변기 등 적어도 하루이틀 버틸 수 있는 몇가지가 들어있는 비상가방을 가장 찾기 쉬운 곳에 준비해두는데 소비기한을 점검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지진이 발생하여 가족이 각기 흩어졌을 경우, 피난장소를 서로 재확인하는 일은 필수이며 지진 발생시의 상식 같은 것을 알아가는 날이기도 하다.
 
일본에 온 지 얼마 안되여 새벽녘의 지진을 처음으로 체감했을 때 나는 잠든 아들애를 안고 총망히 밖에 뛰여나갔었다. 집 전체가 좌우로 흔들리는 짧은 흔들림이였는데 어쩌면 집이 무너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었다. 헌데 한참을 지나도 밖에 피난하러 나오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고 더우기 남편은 나와 아들애 걱정은 하지도 않은 채 그대로 잠자고 있었다. 

그후 긴 세월을 일본에서 살다보니 그 정도의 흔들림은 일상생활에는 별로 영향이 없이 비일비재로 나타나는 현상이였다. 오랜 력사를 바탕으로 수정과 개정을 거듭한 일본의 건축물 내진(耐震)기준은 고층건물이 ‘무너지지 않는다’에 그치지 않고 ‘사람의 안전을 확보한다’에까지 이르고 있으며 그 새로운 기준에 따라 건축물을 시시로 진단하고 수축하기 때문에 집이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도 후에 알게 되였다.

일본사람들은 호텔이거나 영화관 같은 공공장소에 가면 꼭 먼저 비상구를 체크한다. 마치 비행기에 탑승할 때처럼 말이다. 개인집 현관에는 늘 손전지가 장비되여있다. 처음엔 괜히 민감하다고 그들의 소심성에 의문을 가졌었지만 몇년이 지나고 나니 나도 점점 닮아가고 있었으며 8년전 큰 지진을 겪고 보니 사소하지만 결코 실없는 일이 아님을 실감하게 되였다.
 
만 5,898명이 목숨을 잃었고 8년이 지난 오늘도 2,533명이 여전히 행방불명이 된 그번 지진은 사는 동안 다시는 겪을 수 없을 것 같은, 아니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충격적인 경험이였다.

2011년 3월 11일, 나는 지인들과 함께 레스토랑에서 늦은 점심식사를 하고 있었다. 14시 46분경, 갑자기 레스토랑건물이 상하로 심하게 흔들렸다. 대개 3, 4초후 본격적으로 심하게 좌우로 흔들리기 시작한 건물은 그 흔들림이 례사롭지 않았다. 천천히, 그러면서도 강한 흔들림을 느꼈다. 각종 전자시스템이 “삐- 삐-” 경종을 울리기 시작했고 주방의 식기들이 무너지는 소리가 무서울 정도로 요란스러웠다. 공포 그 자체였다. 후에 나온 통계에 의하면 그번 지진은 일본내의 근대적 관측사상 최대 규모의 지진이였다. 실성할 정도로 혼란상태에 빠진 나는 눈물코물범벅이 되여 외마디소리마저 질렀던 것 같다. 헌데 그런 나와는 반대로 같이 식사중이던 지인들은 마음을 불안케 하는 흔들림 속에서 서로 분담하여 로인들과 아이들을 테블 밑에 먼저 피난시키고 있었다. 누군가가 “괜찮습니다! 괜찮습니다!”를 웨치고 있었는데 그 와중에 큰 위안이 되였다.

세계말일이 온 듯했던 무시무시한 흔들림이 잠시 멈추었다. 레스토랑의 종업원들이 손님들을 비상구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언제 여진이 닥칠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7층 건물에서 층계를 내려오는 과정은 또 하나의 감동스러운 광경이였다. 누구 하나 명령조로 지시를 하는 사람이 없었는데도 다리가 불편한 로인들과 아이들을 먼저 앞세우고 천천히 층계를 내려오는 질서정연하고 태연한 모습들에 나는 입이 딱 벌어질 정도였다. ‘이 사람들 참으로 대단한 사람들이구나!’ 솔직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몇년이 지나도 그 때의 그 감격은 잊혀지지 않는다.
 
자연의 횡포 앞에서는 절대적으로 무력한 인간이지만 그 속에서 보여지는 일본인들의 차분함과 쉽게 무너지지 않는 정신력, 질서 있는 행위에 머리가 숙어졌다. 례의, 양보, 배려는 절제를 동반하는 도덕적인 범주를 벗어나 이미 미덕으로 그들의 피와 살 속에 슴배여있는듯이 자연스러웠다. 재난 앞에서 침착하면서도 의연하고 제도화된 듯한 그들의 행동들은 그번 지진을 통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그게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그냥 평정심(平常心)일 뿐인데…” 세계적인 찬사를 받는다는 말에 돌아오는 일본사람들의 보편적인 반응이다. 그럴 법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일본은 재난과 ‘공생’하는 국가이다. 지리적으로 태풍의 진로 우에 위치한 연유로 일년간 지구상에서 발생하는 태풍중 거의 절반이 일본땅에 접근하게 된다. 일본에는 또 세계 활화산수의 7%를 차지하는 활화산이 존재하기 때문에 언제 분화활동이 일어날지 예측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더우기 일본은 인도네시아에 이어 세계적으로 두번째로 가는 지진대국이기도 하다. 이런 데터를 접하다 보면 좀체로 안심하고 살 수 없을 만큼 불안한 나라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홍수피해를 막기 위하여 거액의 투자를 한 것으로 국제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일본은 엄격한 건축기준 등 재난국으로서의 국가적인 재난방지대책으로 생활기반의 파괴를 미리 방지하고 신속히 회복할 수 있는 조건이 구비되여있다.   

도꾜지하철회사만 보더라도 자연재해시의 침수대책과 내진보충공지, 지진경보시스템에 의한 전차긴급정차체제를 실시하고 있는데 2011년 동일본대지진시에 시속이 170km에 달하는 전차가 적시적으로 긴급정차를 했으며 무려 6시간후에 안전전검후 다시 운행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번 지진에서 515만명에 달하는 귀향 곤난자가 생겼던 것을 큰 경험으로 삼아 약 10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에게 공급할 수 있는 음료수, 알루미니움담요, 휴대용 변기, 간이매트 등을 각 역전에 장비하고 있다고 한다.

자연재해를 마주하는 일본사람들의 생사관과 사회관 역시 독특하다. 가족의 죽음 앞에서도 조용히, 침착하게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그들이다. 그리고 한 사람의 힘으로는 도무지 살 수 없었던 농경민족의 력사에서 필수였던 집단의식이 지역사회에 대한 책임감이거나 주위 사람들에 대한 배려, 또 타인과의 련대성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더우기 그러한 것들이 독재와 강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상식처럼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에 조금 놀랍기도 했다.

지진이 발생된 후 물자운송의 중단으로 각지에서 상품결여 현상이 나타났었다. 놀라웠던 것은 적어도 지진 직후에는 대량으로 사들이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으며 평균적으로 다 살 수 있도록 서로 배려하는 모습이였다. 심지어 대형슈퍼에 이리저리 널려진 상품들을 고객들이 제자리에 정리해주는 모습과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광경은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통신과 교통수단 등 생활기반의 파괴로 당일 저녁 집에 돌아가지 못한 이른바 귀향 곤난자들이 아무런 혼란상태도 일으키지 않은 채 택시를 기다리고 있는 장면이 이튿날 텔레비죤을 통해 세계에 전파되였다…
 
이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이처럼 대단한 심리소질을 갖고 있을가? 아무리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지만 자연재해 앞에서도 어떻게 이처럼 태연하게 지낼 수 있을가? 자연이 벌여놓은 모든 악렬한 상황에 일말의 원망도 가지지 않는 태도의 근원은 과연 무엇일가? 나는 항상 미묘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차가운’ 일본인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였다.

일본사람들은 늘 “창피를 알라(恥を知れ)”라는 말을 하는데 우리가 흔히 말하는 체면을 지키라는 뜻이다. 그것은 남들보다 더 많은 돈이거나 더 좋은 차, 더 높은 지위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렴치’임을 그번 지진을 통해서 알게 되였다.
 
10. 자존심
 
2011년에 발생한 동일본대지진에서 받은 피해와 그로 인한 후꾸시마제1원자력발전소 사고로 인해 받은 피해를 통털어 제2차 세계대전이래 일본 최악의 자연재해로 불리우는 ‘동일본대진재(東日本大震災)’라고 력사에 기재되였다.
 
지진이 발생한 이튿날부터 한동안 모든 텔레비죤채널은 후꾸시마제1원자력발전소의 사고를 생중계했다. 지진발생과 더불어 밀려오는 해일로 인한 자동정전이 원인이였으며 대량의 방사성물질이 방출되는 사상 최대 규모의 원자력발전소사고였다.

사고로 인해 대기, 토양, 해수, 지하수 등에 방사성물질이 방출되였고 그로 인해 민심은 심한 혼란상태에 빠졌다. 지진과 해일로 인해 집과 가족을 잃은 재난민들 그리고 방사성물질 피해를 피하기 위해 부득불 삶의 터전을 떠나야 하는 피난민들이 매일같이 늘어났다. 후꾸시마제1원자력발전소 부근에 살고 있던 3만 2천여명의 귀환곤난구역(归还困难区域) 주민들은 8년이 지난 지금도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타향에 흩어져 살고 있다.

그 번 3.11지진과 더불어 일본은 비상사태에 들어가게 되였다. 수도권에 전기를 공급하는 전력회사인 도꾜전력은 후꾸시마 제1, 제2 원자력발전소와 화력발전소, 수력발전소 등에 의해 커다란 피해를 입게 되였다. 전력 부족을 예측한 도꾜전력은 3월 14일부터 계획적인 륜번정전을 실시하게 되였다.

계획적인 정전인 만큼 미리 주민들에게 통지가 내려졌다. 그 때에 또 한번 깨달았지만 일본사람들은 너무 정직하고 자각적인 면을 갖고 있었다. 가정에서도 회사에서도 될수록이면 에어컨을 켜지 않는 것이 일반화되였으며 전기를 절약하는 것이 당연한 일과로 되여있다. 전 국민이 일제히 전기절약에 나선 덕으로 정전을 하지 않아도 되는 날들이 늘어갔다. 정전을 대비하여 만단의 준비를 한 주민들은 지정된 날에 정전이 되지 않으면 되려 화를 내군 했다. 구청이거나 시청에 “왜 정전을 실시하지 않느냐?”라는 의견전화가 쇄도하기도 했다고 한다.

전력뿐이 아니였다. 지진으로 일부 제유소가 폭발사고를 일으키고 석유탕크트럭이 해일로 인해 밀려가는 바람에 전국적으로 휘발유 부족을 심하게 겪게 되였다. 무인주유소에는 “한 사람당 2천엔씩”이라는 표어가 붙어있었다. 대부분 사람들이 그것을 지키고 있어서 또 한번 놀랐다. 설령 매일 나와서 줄을 서면서 몇시간씩 기다리더라도 매번 2천엔씩이라는 제한을 초과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예 차를 타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늘어났다.

소리 없는 협력이고 약속이였다. 이 사람들은 눈앞만, 자기만 보는 것이 아니였다. 자원을 절약해야겠다는 의식과 같이 살아가야 한다는 리념이 모두의 머리 속에 오래전부터 자리 잡고 있는 듯하였다. 그번 지진 이후로 일본전력의 30%를 담당했던 원자력발전소가 점검에 들어가면서 전부 가동을 멈추게 되였다. 원자력발전소 재가동을 반대하는 여론을 무릅쓰고 2015년 8월부터 다시 가동을 시작한 이래 오늘까지 이미 9개소의 발전소가 가동되여있다고 최근에 일본원자력발전주식회사가 공포했다. 재가동을 하기 전의 4년 동안을 원자력발전소의 힘을 빌지 않고도 일본의 전반 전력이 정상적으로 공급되였다는 점이 놀랍기만 하다. 그것은 일본주민들의 협력이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였다고 본다.
 
지진은 여러 사람들의 모습을 알아가는 하나의 계기였으며 가치관의 차이가 뚜렷해지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지진이 발생하여 한달 이내에 관서지방으로 터전을 옮기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방사성물질 피해를 조금이라도 멀리하기 위해서였다. 또 죽음에 대한 공포와 가족에 대한 걱정으로 년수입 등 일부 조건 때문에 주저했던 커플들이 다투어 결혼을 하였는데 이른바 ‘진재혼(震災婚)’이라는 새로운 단어가 생길 정도였다. 재해지구 복귀사업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류학계획을 접고 출세와 수입보다도 사회공헌도에 초점을 맞추는 사람, 죽음을 앞두고 머리에 떠올랐던,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일을 하기 시작한 사람, 대기업을 포기하고 재해지구에서 벤처기업을 일으킨 고학력의 대학졸업생, 특히 원자력발전소 사고현장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작업을 계속한 50명에 달하는 도꾜전력 사원들(일본외의 해외 미디어에서 일제히 ‘Fukushima 50’이라고 찬양)… 그 번 지진은 단지 지반만을 크게 진동시킨 것이 아니였다. 자신의 존재가치를 다시 점검하는 이른바 인생관과 사업관을 크게 흔들어놓아 변화를 가져오게 한 큰 사건이기도 했다.

큰일을 겪게 된 중국 사장도 있었다. 그가 하고 있는 사업이 크게 손실을 입었던 것이다.

시청빌딩 안과 쇼핑몰 안에서 영업중이였던 두개의 중화료리가게와 커피숍 하나가 70% 이상의 파손피해를 입었고 여진과 점검 때문에 영업중지 통보를 받았었다. 그는 그 때의 심경을 눈앞이 캄캄해났다고 밝혔다. 일주일 동안 건물 안에 들어가지도 못했던 그들은 속수무책으로 집에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일본에 온 이래 처음으로 그렇게 오랜 시간을 집에서 보내게 된 사장, 게다가 휴가도 아닌 지진 때문인지라 안절부절 못했다. 직원들 가족의 생활이 달려있었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류학생들의 생계도 걸려있었다. 게다가 영업중지와는 상관없이 물어야 할 임대료 또한 어마어마하였다. 그 때 만큼은 사장이 아닌 일반 직원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랐다고 한다.

그후 파손된 물건들을 정리정돈하는 데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자연재해에서 받은 손해는 하루빨리 영업을 시작하는 것으로 메꾸는 수밖에 없었지만 좀체로 영업허가가 나오지 않아 속이 바질바질 타들어갔다. 매일 전화련락을 애타게 기다리면서 텔레비죤만 마주하고 있던 사장은 재해지구 봉사활동에 참가하겠다고 시청에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복잡한 수속절차 때문에 인차 떠날 수 없다는 답복을 받은 사장은 며칠 동안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는데 할 것이 없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일주일이 지나니 쌀을 비롯한 생필품 부족 현상 때문에 모두 아우성쳤다. 불행중 다행인 것은 식재료들이 많이 저장된 랭동랭장창고가 크게 손상받지 않은 것이였다. 그는 우선 직원들의 집을 찾아다니면서 식재료들을 나눠주었다. 그리고 일본인 지인들한테도 문안을 다녔다. 한달이란 시간은 일년 맞잡이였다. 매일 한번씩 가게에 나가보았지만 좀체로 영업허가가 내려오지 않았다. 정작 허가가 내려온다 하더라도 물자류통이 거의 정지되다싶이 한 상황이라 영업이 불가능했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하루, 그는 직원들을 집합시켰다. 모두들 시청에 모였다. 우선 시장한테 시청 안의 공무원들에게 곽밥을 제공할 것을 제의했다. 후날 지인들이 그 때 만큼 점심 한때를 해결하는 데 정력을 들였던 적은 없었다고 말했을 정도로 정상적인 영업을 하는 료리점이 드물었던 것이다. 30년이 된 건물 안 8층에 자리 잡은 가게인지라 여진이 걱정되기는 했지만 뭐라도 해야 마음을 진정할 수 있다는 것이 가게 직원들의 한결같은 마음이였다. 동북지구가 아닌 지방에서도 충분히 자원봉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그 때 알게 되였다. 그렇게 그들은 일주일 정도 시청건물 안의 공무원들에게 점심밥을 제공하였다.

길고 막막했던 한달이 지난 후 정상적인 영업이 시작되였다. 헌데 생각 밖으로 한동안 불경기가 지속되였다 한다. 큰일을 겪은 사람들이 외식행위를 꺼렸던 것이다. 물건보다 현금이라는 생각이 한동안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뿐만 아니라 일본의 외식사업은 로동력의 부족으로 한동안 진통을 겪게 되였다.
지진과 방사성물질의 위협을 이기지 못한 외국인들 대부분이 결국 귀국을 선택했다. 벌려놓은 사업을 접고 일본을 떠난 사람들도 수두룩했다. 외국인 회사 사원들, 아르바이트를 하던 류학생들이 뿔뿔이 떠났다. 민심은 갈수록 심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충분히 리해한다고,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있어서 부럽다고 하면서도 일본사람들은 그 이후로 외국인들을 불신하게 되였다. 자연재해가 그동안의 은공과 배려를 저버릴 만큼 무서운 것이라고 락담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주로 외국인을 고용하던 가게들이 대부분 문을 닫게 되였다.
중국사장님의 가게도 큰 타격을 받았었다. 료리사가 갑자기 중국에 돌아가기도 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던 류학생은 거의 전부가 련락이 두절되였다.(1년후에 되돌아온 아르바이트생한테서 지진직전의 월급을 청구받았던 일도 있었다 한다.) 중국 사장은 친척, 친우들을 동원하고 일본인 지인들에게 도움을 청하면서 간신히 영업을 했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일본이 이렇게 망해가고 있는데 우리를 버리지 않아서 감사하다”, “이렇게 맛 있는 중화료리가게가 우리 곁에서 없어지지 않게 잘 부탁한다”면서 매일이다싶이 찾아주는 손님들도 많았는데 덕분에 반년이 지난 후 영업이 제 궤도에 들어서게 되였다…

사장님은 생각 같아서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가게 하나는 접고 싶은 마음이 불같았단다. 하지만 류학생활시절에 받은 신뢰와 관심을 저버릴 수 없었고 아들애를 훌륭하게 배양해준 분들에게 차마 등을 돌릴 수 없더라면서 그 때의 정신없이 보냈던 세월을 떠올리기도 했다. 더우기 일본기업들과 동등하게 경쟁하여 따내게 된 시청 및 쇼핑몰과의 사업제휴관계 신용을 저버릴 수 없었다는 중국 사장님이였다. 적자를 내더라도 지키고 싶었던 자존심이였다고 한다.(다음 호에 이음)
 
11. 도둑이 들다
 
한 15년쯤전 일이다.
 
그날은 월요일이였다. 밖에서 외식을 하고 집에 돌아 온 때가 저녁 여덟시 반쯤이였다. 출입문이 열리지 않았다. 안으로 문이 잠겨져 있었던것이다. 아들애가 축구클럽의 합숙에 갔던때인지라 집안에 사람이 있을수 없었는데 안으로 문이 잠기다니 어리둥절해 났다. 한참 싱갱이질했지만 문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설마 집에 도둑이 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남편이 고우반(交番:일본의 각 시가지에 설치된 파출소)에 전화를 걸었다. 도둑일수도 있다는 말에 겁부터 먹은 나는 오돌오돌 떨면서 경찰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고향에서도 겪지 못했던 일을 당하게 되였던것이다. 고우반에 전화를 하는 사이에 집옆의 공동주차장에서 차 한대가 빠져 나가는것이 보였다. 그 차가 도둑차일수도 있다면서 쫓아 가려하는 남편을 뒤집에서 사는 기즈씨가 필사적으로 말렸다. 뒤일을 생각하여 도둑의 얼굴은 봐도 못본듯이 지나쳐야 한다고 재삼 말했다.
 
10분도 안되는 사이에 경찰 두사람이 도착했다. 집주위를 샅샅이 수사한 결과 아래층 다다미방의 창문유리가 깨여져 있었고 출입구문이 안으로 잠겨진 대신 거실안 창문이 열려져 있었다. 다다미방쪽에 심은 동백꽃 나무에 가리워져 도둑이 편하게 그쪽으로 들어 올수 있었던것이다. 우리가 집에 돌아 왔을 때 도둑이 집안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인기척이 들리자 거실쪽 창문으로 빠져 나갔을 거라고 경찰이 분석했다.
 
집안 아래우층을 여지없이 밟고 다닌 도둑의 발자국을 목격한 나는 그 와중에 발이 큰 사람들을 두고 ‘도둑놈 발처럼 크다’고 하시던 고향의 로인님들 말씀이 떠올랐다. 전날에 비가 내렸던 탓으로 선명하게 찍힌 도둑발자국은 뚜벅뚜벅 발걸음 소리까지 상상될 정도로 무섭게 느껴졌다.
 
집안의 서랍이라는 서랍은 다 뒤집혀 있었고 잠겨졌던 열쇠란 열쇠는 죄다 망가져 있었다. 수라장이 된 집안은 경찰들의 조사가 끝날때까지 그대로 둬야만 했다. 제1발견자인 집식구가 우선 용의자선안에 들어 있었다. 남편과 나는 따로따로 조사를 받았고 난생 처음으로 검은 색 손도장을 찍었다.
 
경찰조사중에는 잃어버린 물건에 대한 조사도 들어 있었다. 솔직히 새벽 두시가 되도록  계속되는 경찰들의 작업에 불안하고 무서운 생각까지 들었다. 나의 물건과 식구들의 물건들중 잃어버린것을 생각해 내라고 하는데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바보처럼 멍하니 앉아만 있는 나를 보고 경찰 한분이 귀중한 소지품을 한번 확인해 보라고 했다. 그제야 정신이 버쩍 든 나는 우선 저축통장과 도장, 그리고 려권을 확인하려 했다. 헌데 몇달에 한번씩 장소를 바꿔가며 보관했던 나는 당황한 나머지 새롭게 정한 자리가 갑자기 생각나지 않았다. 얼이 빠진듯이 멍하니 앉아 있는 나를 보고 “금은 장식품은 없었습니까?”라고 귀띔하는 경찰의 한마디에 다시 한번 정신이 들었다. 그제야 그날 끼고 나갔던 반지외의 나의 귀중품들이 하나도 남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친정아버지가 선물해  주신 묵직한 순금세트가 제일 아쉬웠다. 깊은 사연이 들어 있었던것이다. 그리고 해마다 하나씩 장만했던 사연이 담긴 액세서리들이 죄다 없어졌다. 아들애의 께임기와 황금돼지저축통안의 꽤나 되는 푼돈들도 다 없어졌다. 소학생 아들애의 전 재산과 지난 세월에 대한 나의 추억들이 다 도둑맞았던 것이다. 좀도둑인것 같다고 하면서 도둑을 붙잡았을 경우 물건이 남아 있을 확률이 아주 낮다는 경찰들의 말에 실망되기도 했다.
 
잃어버린 물건들의 개수와 명칭, 가격대를 밝히라고 했지만 그걸 생각해낼 정신력이 나한테는 이미 결핍되여 있었다. 다시 돌아 올 가망성도 없을것 같은데 대충대충 하고 빨리 집안을 정리하고 도둑의 흔적을 없애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였다. 확인에 재확인을 겸하는 일본경찰들의 까근한 조사는 새벽녘까지 계속되였다. 경찰들이 돌아간후 온몸에서 힘이 빠져 나가는것만 같았던 나는 침대우에까지 올라 다닌 도둑의 흔적을 없애느라 한잠도 자지 못했다. 일년사시절 자전거에 열쇄를 잠그지 않아도 되는 일본에서 하필 우리집에 도둑이 들다니 허무하기 짝이 없었다.
 
불행중 다행인것은 우리가 참가한 화재보험(火災)에 도난보상도 포함되여 있었다. 보험회사의 담당인 사토씨가 보험금신청조항에 해당된다면서 잃어버린 물건의 명칭과 가격대, 구매한 년도수를 신고하라고 했다. 령수증같은것은 필요없었고 사실상 개인신고를 근거로 했었다. 대부분 고향에 있을때의 물건들이고 구매한 날자도 꽤 오래된 것들인지라 일본엔으로 환산하면 엄청 싼 가격이였다. 
 
몇달후 보험회사로부터 보험금이 입금되였다. 신고한 구매날짜에 근거하여 계산되여 있었는데 제일 최근에 산 물건들은 신고한 구매가격의 백분의 80%정도로 나왔고 대부분은 구매시 가격의 백분의 50%이하로 보험금이 내려왔다. 게다가 중국현지의 가격을 기준으로 신고했기에 생각보다 얼마되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그나마 깨여진 유리값과 수리비를 보상받아서 다행이였다.  하지만 아무리 보험금이 나왔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도둑맞힌 소중한 추억들은 다시 돌아 오지 않았고 무서웠던 기억이 거의 반년동안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았었다. 
 
소잃고 외양간을 제대로 고쳤다. 집주위에 감시카메라를 설치하였고 자동감지전기를 안장했다. 주위의 나무들을 다 베여 버렸고 사면으로 집주위가 훤히 보이게 정리정돈을 하였다. 또 주위의 일본사람들한테서 경험담도 듣게 되였다. 년세 있는 분들은 항상 집안에 만엔정도의 돈을 두고 다닌다고 했다. 그들의 말을 빈다면 도둑질도 꽤나 힘든 일인데 아무것도 얻을것이 없으면 집을 마구 뒤집어 놓고 도망친다고 했다. 훔치지 못할바엔 아예 수라장을 만들어 놓고 도망가는 도둑들이 많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세금도 비싼 나라에서 도둑한테 바칠 돈까지 준비해둘 넉넉한 여유가 어디 있으랴 싶어 웃음으로 넘겨 버리고 말았다. 
 
그후 3년정도 지난후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었다. 도둑 한명이 자백을 했는데 우리집이 그 리스트에 들어 있다고 했다. 하지만 물건은 하나도 되돌아 오지 않았다.
 
12.일본사람들과 공동묘지
 
일본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저녁에 산책하러 나갔다가 기겁하고 돌아 온적이 있었다. 그때 살았던 아파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공동묘지가 있었던것이다. 그곳에는 밝게 전기까지 켜져 있어서 생화가 꽃혀 있는 개개의 묘비가 길쪽을 향하고 있는것이 확연하게 보였다. 무심결에 그옆을 지나게 된 나는 온몸이 오싹해 남을 느꼈다. 헌데 낮길도 아니고 밤길에 그 옆을 지나 다니는 일본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은듯 싶었다. 알고 보니 그곳은 오래된 사원(寺院)이였다. 좀 지나서야 일본의 사원은 주로 납골하는 곳이며 주택가와 가까운 곳에 자리잡고 있는 경우가 아주 많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일본은 에도시대(江戸時代 1603년~1868년)에 들어서면서 가족의 제사와 조상에 대한 공양을 사원에 일임하는 단가제도(檀家制度)가 나오게 되였다 한다. 그후
호주(戸主)를 중심으로 가까운 친족관계가 있는 사람들을 한 집(一家, 일가)에 속하게 하는 이에제도(家制度 1898년~1947년)가 나오면서부터 그 단가제도는 더욱 단단해진 모양이다. 하나의 이에, 즉 ‘집’을 단위로 하카(墓)를 만들게 되는데 대대로 장남과 장남가족의 유골이 함께 묻히게 된다. 그렇게 대대로 그 ‘집’의 하카가 이어지게 되는데 장남이외의 가족은 또 새롭게 자기의 하카를 만들어서 대대로 이어가게 되는것이다. 우리에게 하카는 죽은 사람과 산사람간의 경계선이고 무서워서 떠올리기도 싫은 존재이지만 일본인들에게 하카는 고인의 명복을 빌고 남은 가족의 평안을 바라는 마음을 전하는 자리인 동시에 종국적으로 너도나도 가야할 ‘집’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같은 하카에 들어가고 싶다”는 말이 프로포즈로 쓰일 정도로 하카는 가족을 느끼게 하는 것으로 된다. 장례식으로부터 납골까지 맡아서 해주고 묘지관리까지 철저하게 해주는 사절은 가족의 마지막 거처지이기도 하다.
 
공동묘지가 보여서 밤길이 무서울때가 많다고 하는 나에게 일본인 지인 히사타케(久武)씨가 “죽은 사람이 왜 무서운가요? 아무것도 할수 없는데..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산사람입니다” 라고 익살조로 말한적이 있었다. 십여년전 그를 저세상에 보내면서 나는 처음으로 일본인들의 장례문화를 접하게 되였다.
 
우리 가족이 믿고 의지했던 히사타케씨는 독특한 생각을 가진 일본인이였다. 90년대중반에 벌써 연변을 몇번이고 다녀 갔고 도꾜와 연길의 차이를 ‘간격’ 혹은 ‘틈새’라고 표현하면서 연변의 가치를 알아 낸 사람중의 한사람이다. 남편더러 중학생이였던 아들 마사노군에게 중국말을 가르쳐 달라 하였고 나의 친정아버지의 담보로 어린 마사노를 연변대학에 3년간 류학보내기도 하였다.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면 당당하게 시청에 가서 책상을 두르려도 된다고 알려 준 사람이였고 나리타(成田)공항입구에서 신분증을 내놓으라는 경찰들에게(요즘에는 없어졌지만 한동안 공항입구에서 검문이 있었다) 항상 먼저 당신의 신분증을 보여달라고 했던 사람이다. 뭇 일본사람들과는 많이 달랐다.
 
2006년 봄, 히사타케씨가 취장암진단을 받았다면서 우리집에 들렸다. 여명이 1년이라는 선고도 받았다고 했다. 술과 담배와는 인연이 없는 50대중반의 그가 암선고를 받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지라 듣는 순간에 받은 쇼크는 너무나 컸었다. 일본땅을 밟은 시각부터 의지하고 보호를 받았던 우리에게 히사타케씨는 가족같은 존재였다. 슬픈 표정으로 앉아 있는 우리 부부를 보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죽기 싫어서 병원에 다니고 치료도 받겠지만 그래도 죽음을 피할수 없으면 운명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담담하게 말하는 그 모습은 죽음에 대한 준비가 시작된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결국 항암치료에서 자신을 해방시킨 그는 물리치료를 선택했다. 전문의의 조언을 받으면서 사망하기 두달전까지 자유인이였던 그는 그동안의 시간을 가족의 부담을 덜어주는데 소비했다. 한창 진행중이였던 사업을 원만하게 정리하였고 채무관계, 재산상속관계 등 자기가 떠난 이후 가족이 해야 할 일들을 미리 정리해 놓았다. 그가 입원을 선택했을 때에는 이미 자신의 장례식장소를 정해 놓고 비용까지 지불한 후였다. 살아 있는 동안에 자유로운 삶을 살았으니 죽을 때에도 마음대로 죽게 됐다고 마지막으로 병문안을 갔을때 롱조로 말했던 히사타케씨였다.
 
2007년 여름 병문안을 갔다 온 후 한달만에 쯔야(通夜)통지를 받았다. 고인이 다시 눈을 뜰것을 간절히 바라여 사망한 날 밤 고인의 유체옆에서 선향을 피우고 승려의 독경을 들으며 고인에 대한 추억을 더듬는 일본인들의 장례식중 중요한 한개 절차인 쯔야였다. 장남인 마사노군이 아버지의 유언대로 조용한 가족장을 하게 되였다고 하면서 히사타케씨가 남겨 놓은 장례식참가자 희망명단에 가족이 아닌 사람으로서는 우리 부부뿐이라고 했다. 그한테 우리가 가족같은 존재였을것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뜨거워 나면서 더더욱 서글퍼졌다.  고인이 된 사람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봐야 한다니 솔직히 무섭고 주저가 앞서는 짧은 시각이였다. 나는 스쳐 지날뿐 직시할수 없었다. 한참씩 고인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생전의 추억을 말하거나 사는동안 수고했다는 말들을 고인에게 건네는 일본인들이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이튿날 있은 장례식장에서는 고인이 생전에 즐겼던 음악이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국화꽃으로 장식된 제단에는 미소짓는 히사타케씨의 영정사진이 모셔져 있었다. 본인이 생전에 정해 놓았다는 음악과 사진이라 하였다.  3면 조각으로 된 목제관속에 누워 있는 히사타케씨의 얼굴을 똑똑히 보면서 하얀 국화꽃을 머리맡에 올렸다. 돌아간 사람을 그처럼 가까이에서 본적은 그때가 처음이였다. 고인의 유체에 한사람 한사람씩 인사를 하는 것이 일본사람들의 장례식중 또 하나의 중요한 절차였다. 나는 생각밖으로 경건해지는 마음을 느끼면서 고인을 향해 “편히 쉬세요”라고 말했다.
 
유체화장이 끝난후에는 장례식의 마지막 순서인 (拾骨)습골절차, 즉 오코츠아게(お骨上げ)가 진행되였다. 하나의 골회를 두사람이 동시에 저가락으로 집어서 납골함에 넣는 의식이였다. 가까운 가족만이 참가할 수 있는 절차에도 우리를 참가시키라는 히사타께씨의 당부가 있었던 연유로 그날 처음으로 오코츠아게를 체험한 나와 남편이였다. 다리부분으로부터 머리에로의 순서로 습골절차가 시작되였는데 남편과 나는 제일 마지막 차례로 오코츠아게를 마쳤다.
 
친족만 참가한 장례식이였지만 시종 조용한 속에서 진행되였다. 통곡소리와 슬픔을 견디지 못하는 아우성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일전에 듣기만 했던 비교적 현실적인 일본사람들의 사생관을 그곳에서 느끼게 되였다. 당연히 가족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테지만 그것을 받아 들이는 과정은 그닥 거창하지 않았고 죽음에 대한 차분하고 담담한 그들의 수용력을 보여 주었다. 특히 고인을 보내는 일본인의 장례식문화는 고결하고 정중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습골된 골회함은 49일동안 자택의 부츠단(仏壇)에 보관하였다가 사원이거나 릉원에 납골하게 된다. 한동안 집안에 골회함을 모시고 고인에게 매일 인사를 건넨다거나 사원에 납골한후에도 매일 부츠단을 마주하고 고인의 위패(位牌: 죽은 사람의 이름을 적어 그의 혼을 대신한다는 상징성을 갖는 나무 조각)를 향해 집안일을 회보한다거나 하는 일본인들의 습관은 통곡소리와 몸부림을 낯설어하는 그들만의 애수의 표현이기도 하다. 집안에 있는 작은 사당이라해도 무방한 부츠단(仏壇)은 종교신앙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먼저 간 가족을 공양하기 위해 일본인들이 만들어낸, 일본특유의 문화라고 한다.
 
최근에 전신암으로 세상을 뜬 일본의 유명한 배우 기키기린(樹木希林)씨가 남긴 ‘사는것도 일상이고 죽어가는것도 일상’이라는 말은 일본인들의 사생관을 보여주는 한마디이기도 하다. 죽음도 살아 가는 동안의 일부분이고 거부할수 없는 정해진 과정이기때문에 더 살려고 힘을 빼지도 말고 그만 살려고 단념을 하지도 말며 오늘과 지금을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현세주의적인 일본인들의 사생관과  ‘죽은 사람은 변명을 할수 없기에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비난을 하지 말아야 된다’는 죽은 사람에 대한 그들의 비교적 합리주의적인 관용력도 대단하다는 느낌이 든다.
 
동일본대지진때 다른 물건을 다 제쳐놓고 남편의 유골함을 가슴에 안은채 피난을 했다는 일본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은적 있다. 공동묘지 바로 옆에 집을 짓고 사는 일본사람들을 수없이 보아 왔다. 아침마다 릉원안을 산책하고 봄이면 릉원에 일부러 벚꽃구경을 가는 일본사람들, 밤길에도 묘비들이 총총한 절앞을 편안하게 지날수 있는 일본사람들이다.
 
세계적으로도 명확한 종교가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는 일본사람들은 어쩌면 죽은 사람들과 늘 함께 생활할수 있는 자기의 독특한 신앙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끝>
 
 《청년생활》 ‘계림문화상’ 응모통지
 
 
2020년은 《청년생활》 창간 4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격동의 세월을 헤쳐온 《청년생활》은 새해에도 북경에서­ 사업하고 있는 한 유지인사(고향 흑룡강성 계동현 계림조선족향)의 후원으로 ‘계림문화상’ 응모활동을 계속 펼칩니다.
해내외 중국 조선족 기성 및 신인 작가 모두가 응모에 참가할 수 있으며 주제 및 소재는 제한이 없으나 생활수기를 위주로 하되 미발표된 순수창작물이여야 합니다.
들꽃처럼 수수한 이야기이지만 잔잔한 감동을 주고 독자들의 심금을 울리는 작품이면 모두 참가할 수 있습니다. 삶에 대한 패기와 열­정, 세상을 보는 날카로운 시선, 인간에 대한 뜨거운 애정을 가진 글쓰기열성자들의 거침없는 도전을 기대합니다.

 
상금표준:
대상: 1명 상금: 5,000원
금상: 2명 상금: 3,000원
은상: 3명 상금: 2,000원
동상: 4명 상금: 1,000원
우수상: 5명 상금: 500원
● 접수작품 보낼 곳:
메일주소: ybqnsh@163.com
련계인: 장수철
우편주소: 延吉市长白山东路98号 延边人民出版社 《青年生活》编辑部
원고에 ‘응모작’이라고 명기하고 이름(필명이면 본명 명기)과 주소와 전화번호를 꼭 밝혀주십시오.
● 원고 마감일: 2020년 9월 30일
● 문의전화: 0433-290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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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선 다해 삶을 살아가는 녀강자 고향이 흑룡강성 가목사인 정계화(1967년생)는 부모형제들에 대한 각별한 사랑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찬사를 받고 있다. 정계화는 아버지가 장기환자인, 생활형편이 어려운 가정의 3남매 중 맏이로 태여났다. 호도거리를 시작하면서 정부에서는 대부금을 내주며 ‘전문호’로 될...
  • 2022-05-17
  • 올해 봄은 코로나19의 여파로 본지방을 마음대로 리탈하지 못하는 방역지침을 따라야 하기에 진달래꽃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타지방으로 가지 못하고 가까운 일광산, 후안산 진달래꽃 구경으로 만족해야 했다. 요즘은 그 진달래꽃도 어지러이 락화하는지라 어디로 구경갈 데도 마뜩잖던 차에 등산애호가인 윤선생이 4월 30일...
  • 2022-05-10
  • 봄바람이 산들산들 부는 어느 휴일, 나는 강변을 거닐다가 우연히 연 띄우기를 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였다. 연이 자유로이 날아오르기도 전에 연줄을 너무 세게 잡아당겨 조금 날다가 휙 돌아치며 땅에 곤두박질하는 ‘물고기 연’이 있는가 하면 하늘 높이 날아올라 보일락 말락 까만 점으로 되자 급히 연줄을 ...
  • 2022-05-10
  •   [료녕신문 최수향 기자] 5월 8일, 대련아리랑예술단 전체 단원 31명은 80세 이상 장수로인 5명을 모시고 뜻깊은 어머니날 경축모임을 가졌다.   이날 대련아리랑예술단 성원들은 예술단의 장수로인 리복록, ...
  • 2022-05-10
  • 빈곤퇴치 난관공략 촌주재사업팀 일군에서 전염병퇴치 ‘따바이(大白)’가 되기까지 연변주청소년사업발전쎈터 부주임 김명길은 그야말로 ‘전문역행자’이다. 이 동북 조선족 ‘90후’는 “어디에서 나를 필요로 하면 나는 어디에 간다.”고 말했다.   3월초, 연변 훈춘에서...
  • 2022-05-07
  • 김향자 촬영작품 《고향•넋》 전시 포스터 4월 16일, 연변녀성촬영가 10인 초청작품전의 첫 행사로 김향자(61세)의 《고향•넋》작품전시가 연길백화청사(8층) 하건나(哈根娜)커피청에서 정식 개막되였다. 녀성의 달 3월을 겨냥하여 준비한 작품전이건만 코로나사태로 미뤄진 행사라 모처럼 이루어진 모임에서 주...
  • 2022-04-22
  • [수기 103]인생을 함께 걸어가는 동반자 편집/기자: [ 홍옥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2-04-15 20:40:27 ] 클릭: [ ] 인생은 홀로서기라는 말이 있다. 말하자면 자신의 강인한 힘으로 인생을 창조해야 한다는 말이겠다. 손에 손 잡고 가자는 말도 있다. 이는 함께 살아가는 동조의 뜻이다. ...
  • 2022-04-17
  • [수기] 마음의 가책 김영숙 (룡정시북안소학교) “앗…” 종합 실천활동 시간에 애들과 함께 채색 종이를 오리고 자르고 붙이는 과정에서 나는 그만 부주의로 가위에 왼손 식지가 찔리웠다. 깊게 난 상처는 아니지만 새빨간 피가 방울방울 솟아나왔다. 애들은 울상이 되여서 “선생님, 괜찮습니까? 빨...
  • 2022-03-29
  • 3월 8일 오전, 료양현 흥륭진 홍광조선족촌은 촌사무실 앞마당에서 ‘3.8’부녀절 경축행사를 가졌다.     “오늘 우리 ‘시골’ 동네에서도 ‘3.8’절 경축행사를 가졌수다” 문정숙 촌서기 겸 촌주임의 가득 들뜬 말이다.      현재 홍광조선족촌...
  • 2022-03-10
  • [수기] 집 찾아 돌아온 오리 김순옥 몇년전 나는 그림 같고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새 아빠트에 입주했다.  아빠트단지에 들어서면 유난히 내 마음을 사로잡는 오리 조각상이 있다.  매번 오리 조각상을 볼 때마다 지나간 추억이 새록새록...
  • 2022-02-25
  • [수기] 부러움 없이 보냈던 동년시절의 설 김춘선 나의 동년시절은 남진골, 차창에서 보냈다. 남진골은 화룡현 덕화향의 한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지금은 페허로 되였다. 남진골에서 출생한 내가 세상 물정을 알게 되였을 때는 아마도 대여섯살부터인 것 같다.   1958년 7월 화룡 차창에서 형제들과 함께 기념...
  • 2022-02-24
  • [생활수기] 코바늘에 깃든 이야기 - 최범수 갓 결혼하고 첫 딸애를 본 나는 마냥  즐거워 늘 행복 속에 잠겨 흥얼흥얼 코노래를 부르며 학교로 출근했다. 금방 걸음마를 탈가말가하는 딸애는 그렇게도 귀엽기만 했다...
  • 2022-02-24
  • [생활수기] 손자에게서 배우는 재미 - 리삼민 ‘강산이 일곱번 바뀌’는 사이, 뜻밖의 사연으로 얼굴이 뜨거워질 때가 많았지만 외손자가 나에게 준 교훈은 두고 두고 잊혀지지 않는다.     외손자의 이름은 김...
  • 2022-02-17
  •  [수기] 행복을 찾아가는 길 김영실(연길시건공소학교) 전 지구촌을 휩쓰는 코로나19 때문에 정상적인 교수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학교 수업과 온라인 수업을 하며 복새판을 부리다 보니 어느새 한해가 다 지나갔다. 지나온 한해를 돌이켜 보노라니 분명히 어려운 일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행복했던 순간들...
  • 2022-02-17
  • 장백산 아래 어느 로부부가 들려준 ‘길’에 담긴 이야기     장백산 아래에 사는 김은호, 남영자 로부부가 고향에 들어선 고속철역 앞에서.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길부터 먼저 닦으라”는 말이 있다. 지난해 12월 24일 장백산고속철이 개통식을 가진던 날, 안도현 현성과 200여리 떨어진 ...
  • 2022-02-10
  • 수기ㅣ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 정영수 나에게는 늘 함께 하는 친구가 있다. 며칠전 친구모임을 가졌는데 설전에 단동 친구네 별장에 가기로 약속했다. 지정한 날자에 심양에서 승용차 두대에 몸을 싣고 출...
  • 2022-02-07
  • 과거에는 많은 친척들이 모여 함께 설을 맞이하고 음식을 나눠 먹던 풍경과 달리 코로나19 사태로 직계가족만 모여 조용하게 명절을 보내는 추세가 반영되면서 장을 봐서 일일이 조리해야 하는 음식보다는 간편하고 간단하게 료리할 수 있는 반성품,간편식이 인기이다. 1월 31일, 3년째 반성품  ‘땅추(当厨)&rs...
  • 2022-02-07
  • 연변가정연구소 문화봉사자팀은 지난 1월 16일 그들의 전문 교육장인 연길태원호텔에서 제2기평생교육강좌 수료식을 ‘마지막 수업’으로 15년간 이어온 평생교육강좌를 마쳤다. ‘문화봉사자'라는 이름으로 함께 해온 15년의 성장을 기억하고 기록하며 문화봉사자팀 일동은 우선 “20여년간 하루...
  • 2022-02-03
  • 바로 지금이다. 그대 곧 시작하라!   김훈       며칠전 한국에 있는 지인이 전화로 문안을 전하면서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보람찬"일거리"를 찾았다고 했다. 이름만 대면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예술무대에서 유명세를 탔던 별호가 “수러우”인 리옥희 배우다.. 지인이 찾은 보...
  • 2022-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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