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남편 (박영옥편 7)
2012년도 가을의 어느날, 나는 이외의 사고로 다리에 상처를 입었다. 부랴부랴 병원으로 가서 사진 찍었더니 골절되였다면서 석달이 지나야 회복된단다. 정말 약한 다리에 침질한 격으로 부실한 다리가 골절되였던 것이다.
나는 아픔을 견디며 석달 후란 그 날자에 초점을 맞추고는 매일과 같이 아픔과 희망을 반죽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내 생애에서 석달이란 시간이 이처럼 지루한 줄을 처음으로 경험한 것 같다.
남편과 함께.
이 석달 동안 친구들이 우르르 찾아와서 힘을 주었다. 친정어머니는 매일과 같이 찾아오셔서는 잠시 나마 아픔을 잊으라고 일부러 우스운 이야기를 끄집어내셨다. 풋풋한 인정의 향기가 감돌아치는 속에서, 마를줄 모르는 샘물마냥 푹푹 솟구치는 어머니의 그 사랑 속에서, 특히는 매일마다 내 시중을 드는 남편의 살뜰한 보살핌 속에서 날마다 회복되는 기미가 보였다.
남편의 수고를 생각하면 코마루가 찡해날 정도다.
아침마다 더운물 끓이고 뼈에 좋다는 음식을 만들고 거기에다 나의 시중을 도맡아 해야 했다. 그러면서도 출근은 하루도 빠짐없이 했다.
어느 진눈까비가 흩날리던 날 퇴근시간이 썩 지나서야 남편이 돌아왔다. 왜서인가 했더니 뼈잇기에 도움이 된다는 오이씨와 홍화씨를 구입해가지고 돌아온 것이였다. 그리고는 그날 저녁으로 또 집에서 절구로 찧었다. 그런데 절구로는 잘 찧어지지 않아서 남편은 땀투성이였다. 내가 약방에 가루 내는 기계가 있으니 래일 기계로 가공하라고 했더니 남편은 저려나는 팔을 문지르며 하루라도 빨리 먹어야 한다고 했다.
속담에 긴병에 효자가 없다고 했지만 남편은 나에 대한 사랑이 정말 지극하다. 석달동안 남편은 매일마다 어떤 날에는 하루에 몇번이나 나를 안고 화장실에 드나들면서도 짜증 한번 내지 않았고 내 빨래를 자주 해주면서도 군소리 한마디 없었다. 하루에 세번씩 주방에서 돌아치면서도 무슨 흥이 나는 지 코노래까지 흥얼대는 남편이였다.
나는 남편이 바로 이같이 노래로서 집안의 그늘지고 침침한 정서를 몰아내고 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 노래는 또 나에게 모든 걸 이겨내라는 돌격의 나팔소리가 아닌가 싶었다.
남편은 또 무릇 뼈에 좋다는 것이라면 할 줄도 모르면서 애써 그 음식을 만들어주었고 병원으로 다니던 날에는 업고서 아래우층을 오르내리면서 “내가 하도 현명하길래 당신 같은 약한 녀자를 선택한거요.”하며 우스개 소리로 나에게 미소를 만들어주었다.
그번 아픔을 통해서 나는 남편은 그 어떤 험난한 현실이라도 넉넉한 마음으로 받아둘 줄 아는 남자라는 걸, 세찬 비바람에도 휘청대지 않고 꿋꿋한 자태로 맞받아 나아가는 그런 강의한 남자라는 걸, 가족을 위해서라면 모든 걸 아끼지 않고 헌신하는 그런 책임감이 있는 남자임을 절실히 느끼게 되였다.
몇년전 봄빛문인회의 한 회원이 수재로 큰 피해를 입었을 때의 일이다. 그 때 문인회 회장인 나는 그 회원을 방문했다. 방문갈 때 나는 남편과 동행했다. 왜냐하면 홍수로해서 그 회원이 꾸리는 가게로 가는 길이 다 망가져서 택시도 못 들어가서 도보로 백여메터 걸어야 했기에 남편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다.
위문을 마치고 집에 올 때 길에 자갈이 어찌도 많은지 수술했던 나의 발가락이 아파서 한발자국도 걸을 수 없게 되였다. 그 때 남편이 날 업으려고 했는데 자존심이 무척 강한 나였지만 그런 상황에서는 속수무책인지라 업히고 말았다.
내 마음을 헤아린 남편이 유모아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허허. 병아리처럼 가벼워서 업히웠는지 안 업히웠는지 아무 감각도 없네.”
아픈 상처의 편린들이 이렇게 남편을 통해서 조용히 무마되였다. 그래서 친구들 날 보고 “남편복이 있다”느니 “전생에 덕을 많이 쌓았길래 이렇게 좋은 남편 만났다.”고 말하는 데는 그 리유가 당당하다.
남편은 또 사위라는 그 이름으로 해서 나의 엄마에게도 너무도 잘하고 있다.
어느 날 새벽에 달콤한 꿈나라에서 헤여나와 돌아눕다가 어망 결에 눈을 떠보니 시계가 새벽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런데 남편이 보이지 않았다. 이른 새벽에 어디로 갔을가 하고 생각하는데 문득 전날 밤에 한 말이 떠올랐다.
“래일 새벽에 엄마네 집 물 길으러 가야 겠어”
낮이면 샘터에 사람이 많아서 늘 새벽에 다니는 남편이다.
머지 않아 칠십 고개를 바라보는 남편이 이렇게 장모님을 돌보기까지 장장 10여년 된다.
우리는 17년전에 재혼으로 만났다. 내가 남편을 엄마에게 소개했을 때 엄마가 나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면서 낮은 소리로 말씀했다.
“겉보기 안보기라고 사람이 아주 좋아보이는구나.”
엄마는 자식 여섯인데 2008년도에 큰 남동생 부부가 한국에 간 후로 이어서 함께 살던 막내남동생도 한국에 간 바람에 엄마는 혼자서 살게 되였다.
그 때로부터 장모님을 돌보는 일은 남편이 맡아나섰다. 솔직히 말해서 남편이 안 나서도 되는 일이였다. 한 시내에 녀동생이 셋이나 있으니 말이다.
동생들이 엄마를 돌보겠지하고 수수방관해도 되겠지만 남편은 그렇지 않았다.
장모님에게 샘물을 길어드리고, 집안에 무엇이 고장 나면 도맡아 했고 맛나는 음식이 있으면 가져다드리는 것이 굳어진 일상으로 되였다.
엄마는 5층 아빠트에서 사는데 남편이 어떤 때는 하루에 몇번씩이나 갈 때도 있었다.
어느 한번은 아침에 액화가스를 바꿔드리고 왔는데 조금 후에 텔레비죤 화면이 나오지 않아서 다녀왔고 또 조금 후에는 벽에 걸어놓은 시계가 돌아가지 않아서 전지 바꿔넣어드리고 왔다. 오후에는 또 화장실문 손잡이를 바꿔주고 저녁녘에는 수도꼭지를 수리해주고 밤에는 위가 아프다고 해서 약을 사다드렸다. 이렇게 하루에 여섯번이나 5층을 오르내리다보니 다리가 시큼할 정도였지만 원망의 소리 한마디도 없었다.
이렇게 하루에 수차나 오르내리던 일이 어찌 한두번이랴!
엄마는 특히 사위라면 무척 어려워하신다. 하물며 후사위인데야. 엄마의 얼굴에서 미안해하는 눈치를 보면 남편은 늘 푸짐 좋게 말한단다.
“어머님, 곁에 아들이 없으니 날 아들이거니 하고 어려워 마시고 시킬 일은 다 시키세요.”
특히 나의 감동을 자아내는 일은 재작년에 길림문학협회의 초대로 내가 송화강 구경을 가게 되였을 때 남편도 함께 초청한다는 전화를 받은 것이다. 그 날 전화기를 놓고 밥상에 마주 앉았는데 남편이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 엄마 모시고 가는 게 좋겠소. 다시 전화로 엄마 모시고 가면 되는가고 말해보오. 내야 아직 나이 그닥 많지 않으니 앞으로 갈 기회가 있겠지만 엄마야 언제 이런 기회가 있겠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에 감동되지 않을 수 없었다. 남편도 송화강 구경을 간적이 없어서 무척 가고 싶겠는데 장모님에 대한 효성이 얼마나 크면 이렇게 할가?
남편의 이런 고마운 마음을 전해들은 엄마는 눈물이 글썽했다.
어느 한번 아침에 일어나보니 남편이 이미 아침밥을 지어놓았다. 밥상 우에 놓여있는 명태국을 보노라니 엄마 생각이 나서 남편과 말했다.
“오늘 내가 안 먹을테니까 내 몫을 엄마에게 가져갔으면 해요.”
나의 말에 남편은 두말없이 일어서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엄마 몫까지 하려했는데 랭장고에 명태 두마리 밖에 없더군. 우리 차라리 대가리만 남기고 몽땅 가져가기오. 엄마 언제 손수 끓여드시겠소?”
말을 마친 남편은 옷을 갈아입고 밖에 나섰다. 그날은 간밤에 눈이 많이 내렸고 날이 아직 채 밝지도 않았다. 아침전이여서 아직 눈길도 나지 않았겠는데⋯ 나의 귀가에는 눈 속을 타박거리며 걷는 남편의 발자국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조금 후 돌아온 남편과 함께 아침밥상에 마주 앉아 식사할 때 명태대가리밖에 없는 국물을 맛 있게 드는 남편을 본 나는 감격에 목이 메였다.
어느 한번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시계를 쳐다보던 남편이 우산을 들고 밖에 나서더니 조금 후에 들어와서 이렇게 말했다.
“금방 엄마를 택시에 태워보냈소.”
아, 밖에서 비가 내리는 줄은 알았지만 엄마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한 나는 남편 앞에서 부끄러워났다. 남편은 이렇게 자상했다. 뿐만 아니라 남편은 늘 독보조에서 들놀이 갈 때면 음료수거나 사탕같은 걸 지원해왔고 유희에 쓰는 여러가지 도구도 만들어주었다. 로인들을 위해 그 무언가 하는 것이 그토록 즐겁다고 한다.
엄마 앞에 나서는 남편은 언제나 얼굴에 미소가 어려있다. 그래서 엄마는 늘 동네사람들을 보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세상에 우리 맏사위 같은 사람이 없을게요. 하루에 열번 만나도 그냥 얼굴에 웃음이 푹 어려있다오. 내가 전생에 무슨 좋은 일을 많이 했길래 이런 좋은 사위를 만났는 지 모르오.”
엄마는 내가 네살 때에 지체장애자로 된 그날부터 무수한 세월 속에서 겹겹이 아픔을 덧칠한 몸으로 지친 인생을 살아오셨다. 그러나 남편이 연출해내는 감동으로해서 엄마의 지친 심령은 조용히 세탁되고 아픈 상처의 편린들도 무마되였다.
효는 무엇이며 왜 중요한가? 효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의 가장 으뜸이 되는 덕행으로 되여왔다. 효는 이미 사회의 없어서는 안되는 하나의 기풍으로 되고 있다.
효는 부모님을 잘 섬긴다는 뜻으로 우리 주변에는 효를 실천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있다. 하지만 한두번 효를 실천하는 사람은 많지만 긴긴 세월을 두고 하는 사람은 그닥 많지 않다.
부모에 대한 공경(恭敬)을 바탕으로 한 자녀의 행위, 효행(孝行), 이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해왔으며 인륜의 중요한 덕목이다.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건 쉬우나 남의 자식으로 태여나 안해를 만나서 긴긴 세월 속에서 장모님에게 효도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장모님에게 이토록 효도하는 남편을 만난 것이 내 복이고 이토록 훌륭한 사위를 만난 것도 엄마의 가장 큰 복이리라!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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