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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 방천에서의 아버지의 벅찬 나날들
조글로미디어(ZOGLO) 2020년11월17일 08시25분    조회: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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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기]
방천에서의 아버지의 벅찬 나날들
김정일


10월 3일은 아버지가 저세상으로 가신지 벌써 8년째 되는 날이다. 지금도 나는 아버지가 어디론가 외출 갔다가 얼마후면 돌아올 것이라며 기다리는 마음이다. 그럴 때면 아버지를 위하여 뭘 써야 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버지에게서 들었던 이이야기며 내 눈으로 보았던 아버지의 일들을 곰곰히 되새겨보군한다.

큰아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남긴 아버지

아버지 김완석은 1954년도에 연변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훈춘2중에 배치받아서부터 반석중학교, 경신중학교, 방천학교 교장, 경신중학교 교도주임, 공사문교 조리, 경신중학교 교장, 훈춘5중 부교장 , 훈춘 6중 부교장 이렇게 옹근 37년간 교육전선에서 일해왔다. 그러니 명실공이 교육자라 할 수 있겠다. 그 와중에 아버지께서 방천에서 간고하게 나날을 보냈던 일들을 적어본다.

1970년 가을의 어느 일요일, 해빛이 쨍쨍 내리 쬐는 날이였다. 나와 동생 정화가 아버지를 도와 뜨락에서 한창 땀 흘리며 김치움을 파고 있을 때였다. 새로 공사당위서기로 부임된 김성화 (후에 부주장, 주당위 부서기, 주인대 부주임 력임)동지가 아버지를 찾아왔다. “이 집이로구만 김선생 잘 보내십니까?” 워낙 인자하신 김성화서기는 선생님을 존중하여 몇살 아래인 아버지에게도 경어를 썼다. “예, 김현장동지께서 어떻게 우리 집까지 찾아오셨습니까?” 하긴 김성화동지는 워낙 문화대혁명전에 훈춘현 현장으로 있었는데 문화대혁 기간에 주자파로 투쟁 맞고 갇혔다가 금방 ‘해방’ 되여 경신공사당위서기로 발령받은 것이다. 아버지는 현장으로 있던 그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돌연 집까지 찾아오니 무슨 큰일이라도 있는 것이 아닌가고 놀란 마음이였다. 김성화서기는 이것저것 집 형편을 묻더니 “내가 오늘 김선생을 찾아온 것은 다름 아니라 현위 상무위원회의 결정을 가지고 왔습니다.”, “예?” 아버지는 한낱 농촌중학교의 일반 교원 (그 때 아버지는 학교 공회주석을 맡았음)한테 현위 상무위원회의 결정을 가져왔다니 잘못 듣지 않았나 하는 당황한 눈길이였다. “현위 상무위원회에선 김선생을 방천에 파견하여 중학교를 세우도록 결정하였습니다. 김선생도 아시겠지만 방천은 마을이 작고 학생도 적지만 수정주의를 반대하고 방지하는 최전초입니다. 지금 이 마을에 6, 7명 중학생들이 있는데 공사중학교에 다니자니 교통과 여러가지가 불편한 점이 많아 부모들의 제일 큰 근심거리 랍니다. 하여 현위 상무위원회에서는 방천인민들이 안착하여 최전초를 굳게 지키게 하기 위하여 원래의 소학교 기초 우에서 중학반을 설치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교장은 여러가지 조건을 고려하고 또 방천인민들의 요구를 존중하여 현위 상무위원회에서는 김선생을 방천학교 교장으로 파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당시 방천은 아주 중요한 지역으로서 당중앙의 매우 큰 중시를 받게 되면서 방천대대의 당지부서기 강태원이 대표로 1969년에 열린 ‘중국공산당 제 9차 대표대회’에 참가하게 되였다. 9차 당대회가 끝난 후 일시에 강서기는 전성의 명인으로, 방천은 각급 당위의 중점 배려 대상으로 되였다. 성, 주, 현 각급 주요 지도동지들이 앞다투어 방천에 내려와 조사연구하면서 곤난과 요구를 료해하였다. 그 때마다 강서기는 방천에다 중학교를 세워줄 것을 요구하고 교장도 우리 아버지 김완석선생을 이름 찍어서 보내줄 것을 요구했다. 성과 주에서는 이 일을 훈춘현위에 맡겼고 훈춘현위에서는 전문 현위 상무위원회를 열고 방천에 중학교를 세우기로 결정 짓고 방천인민들의 요구대로 아버지를 교장으로 임명했던 것이다. 아버지를 이름 찍어 요구하게 된 것은 그 때 이 마을에 아버지의 학생 둘이 있었는데 그들이 강서기께 교장은 경신중학교의 김완석선생이 제일 좋다면서 아버지를 추천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너무 돌연적이여서 한참 지나서야 머뭇거리며 말하였다. “현장동지 조직에서 저를 믿어주는 것만은 감사한데 제 능력으로 되겠습니까? 저는 이때까지 지도사업을 못해봐서 아무런 경험이 없는 데다 교장하라니 더우기 저더러 중학교를 새로 세우라니 이건 안 될 말입니다. 조직에서 다시 고려해주십시오.” 김서기는 “그러잖아도 내가 요즘 학교에 가서 김선생의 정황을 알아봤습니다. 교장선생도 그렇고 여러 선생님들도 선생에 대한 평가가 아주 좋습니다. 교수도 잘하고 공회사업 조직 능력도 있어 교장사업을 얼마든지 잘할 것이랍니다. 선생이 방천으로 가는 것은 현위의 결정이니 당원인 만큼 견결히 집행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김서기는 “김선생이 방천에 가서 딱 2년만 수고해주십시오.” 고 했다. 아버지는 한참 고려하더니 “네, 그럼 좋습니다. 령도에서 더구나 현위에서부터 저를 믿어주신다니 저는 있는 힘껏 잘해보겠습니다. 그럼 언제 떠나야 합니까?” 라고 물으니 김서기는 “빠를수록 좋습니다. 요즘 학교와 가정의 일을 인계하고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떠나도록 하시오.”

가족들과 함께 있는 아버지(앞줄 오른쪽 세번째)

1970년 11월의 어느날, 아버지는 중임을 떠메고 방천에로 떠났다. 공사 마을인 이도포에서 방천까지는 60여리 거리나 된다. 걸어서 권하대대까지 20여리이고 이곳에서 방천까지는 40여리인 데 방천을 가자면 두갈래 길이 있다. 한갈래는 수로(水路)즉 주둔부대의 후근 보장을 맡은 뽀트(그 때는 다른 교통도구가 없어 방천을 오가려면 이를 리용)를 타고 두만강을 따라 가는데 대략 20분 가량 걸린다. 다른 한갈래는 륙지로 걸어서 가야 했다. 지리적으로 보면 방천은 한개 륙도다. 다시 말하면 방천은 우리 나라 국토와 떨어져있는 외딴 섬이다. 원래는 방천까지 땅이 이어져있었는데 양관평이라는 곳의 우리의 땅을 두만강물이 자주 지면서 다 뜯어가는 바람에 방천은 결국 륙도로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방천으로 가자면 반드시 로씨야 땅을 빌어가야 했다. 남의 땅을 밟고 다니기 때문에 번마다 오갈 때면 심양군구의 비준을 거쳐야 했다. 그것도 한번에 꼭 행인이 5명 이상이 돼야 하고 안전을 위하여 군대 두명 이상이 호송해야 한다. 형세가 긴장할 때면 아무리 큰 일이 있어도 다니지 못했다. (지금의 길은 80년대에 두만강에 많은 돌을 처넣어 제방뚝을 쌓아올려 길을 만든 것이다).

아버지가 방천에 가는 날엔 공교롭게도 뽀트가 부서져서 갈 수 없었다. 아버지가 방천에 중학교를 세우러 간다는 것을 알게 된 주둔부대에서는 갈 사람이 아버지 한사람 밖에 없었지만 련장은 특수 정황이라면서 직접 심양군구에 전화를 걸어 정황을 설명했다. 심양군구에서도 특별히 비준해서 아버지 혼자서 두명 군대의 호송을 받으며 도보로 방천으로 출발했다. 길이 험악하여 걷기가 아주 불편했다. 강역을 따라 가는데 길은 해마다 강바람에 모래가 쌓여 온통 모래 언덕이였다. 게다가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아 길이라곤 알아볼 수 없었다. 반나절이 걸려서야 방천에 도착하니 강서기를 비롯한 전체 지부 성원들, 주둔부대의 련장과 지도원, 그리고 학생들과 마을사람들까지 5, 60명이나 마을 동구 밖까지 마중 나와 있었다. 아버지는 60여리 되는 모래 길을 걷다보니 지친 몸이지만 이 장면에 너무 감동되여 가슴이 울컥하였다. 아버지가 얼른 강서기와 악수하면서 내가 오는 걸 어찌 알았는 가고 물으니 강서기는 “김교장이 오신다는 부대 통지를 받고 우리 지부 성원 두세명 만 마중 나오려 했는데 마을분들이 어떻게 알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마중 나왔군요. 이 마을에는 워낙 뒤집(쏘련)과 관계가 긴장한 데다가 교통까지 몹시 불편하여 사람이 아주 귀합니다. 그래서 누가 오신다면 다들 모여나와 구경하군 한답니다. 오늘은 교장선생님이 오신다니 더구나 많이 모였습니다. 이만하면 전 대대군중들이 거이다 모인 셈입니다. 아예 여기서 환영식을 합시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군중들을 향해 돌아서더니 “여러분, 김교장께서 오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중학교가 이제 곧 개학하게 되였습니다. 이는 상급에서 우리에 대한 크나큰 관심입니다. 앞으로 우리 다 같이 김교장의 사업을 지지합시다. 아래에 김교장께서 말씀하시겠습니다. “여러분, 이 간고한 곳에서 변강을 지키느라 얼마나 수고하십니까? 또 이 악렬한 조건에서도 아이들의 공부를 걱정하시니 제가 오히려 더 고맙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분들이 저를 영접해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이번에 현위에서 방천에 중학교를 세울 것을 결정짓고 저를 교장으로 파견한 이상 저는 꼭 현위와 여러분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학교를 잘 꾸리고 학생들을 잘 가르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부터 저도 방천대대의 한 성원인 만큼 저를 손님으로 대하지 말기를 부탁합니다.”

주숙은 대대 초대소에 들게 하고 식사는 집집이 돌아다니며 하기로 하였다. 아버지에겐 마을의 정황을 료해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이였다. 저녁에 강서기는 당지부 회의를 열고 공사당위 결정 즉 아버지를 대대당지부 선전위원으로 임명한다는 것을 공포하였다.

학교 조건은 말이 아니였다. 학교건물이라는 것이 지은 지 오래된 흙집이고 그것도 상점과 붙어있는 ‘어부렁’ 집이였다. 교원은 아버지까지 4명, 전교 학생은 30명도 안되였는데 그중 중학생은 6명이였다. 우선 건물부터 개선해야 했다. 아버지는 학교사업을 포치해놓고는 공사당위, 현위를 찾아다니면서 새로 학교 건물을 지어줄 것과 교원 3명을 더 배치해줄 것을 신청했다. 얼마 후 학교를 지을 자금이 락착되고 교원 두명도 전근해왔다. 또 한명은 당지 집체호 지식청년중에서 채용했다. 전 학교를 중학부와 소학부로 나누고 중학부는 아버지까지 3명이 각 과목을 맡고 소학부는 4명이서 복식반을 꾸려나갔다.

몇달이 지나니 학교사업이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였다. 아버지는 집 이사를 고려했다. 하긴 아버지가 방천에 온지 몇달이 지났는데도 가족이 이사 오지 않으니 군중들은 아버지가 인차 돌아가려는 것이 아니냐고 뒤공론이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갈 가봐 근심하는 것이였다. 기실 초대소에 있으니 손님들이 드나들어 조용할 새 없어 시끄러웠고 그 보다도 집집이 돌아다니며 식사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사하려고 강서기를 찾으니 즉시로 집 한채를 보여주었다. 강서기는 집이 낡기는 하나 손질하면 들 수 있다면서 몇명 사원을 동원하여 이틀 만에 집을 다 수리하였다. 그리하여 1971년 가을에 우리 집은 방천에 이사왔다. 그 때 나는 고중생이였으므로 이도포 친척집에 주숙하면서 학교다녔다.

사실 아버지는 학교 일보다 대대 사무가 더 바빴다. 아버지는 대대 당지부 선전위원을 겸했기에 대대사무를 몰라라 할 수 없었다. 그 시기 방천은 변경지역이여서 사원들이 낮에는 일부가 농사 짖고 일부는 주둔부대 군인들과 같이 변경순라를 하고 밤에는 늦게까지 회의하고는 소조를 나누어 변경선을 지켰다. 그것도 전호(战壕)에 들어가 두세시간씩 엎드려 지켰다. 즉 눈이 내리는 날이나 비오는 날이나 가리지 않고 매일 전호에 두세시간씩 잠복해있어야 한다. 게다가 가을이면 메돼지들이 옥수수밭을 해치기에 옥수수밭까지 지켜야 했다. 당시 방천에 36호만 있었고 집체호 지식청년까지 합해서도 청장년들이 도합 5,60명 밖에 안되였다. 그러니 사람이 모자라 순라할 때는 가정부녀들도 참가했다. 장기 환자인 우리 어머니도 실탄을 재운 자동보총을 메고 순라 길에 나서야 했다.

1971년 방천대대당지부서기 강태원의 보고를 듣고 있는 아버지(앞 첫줄)와 방천민병들

당연히 아버지는 낮에는 학교 일을 보고 저녁과 일요일에는 사원들과 함께 변경순라와 메돼지 보초에 나섰다. 강서기가 극구 말렸지만 아버지는 “나도 지부위원이고 민병인 데 순라는 나의 임무입니다. 더군다나 사람이 이렇게 부족한 데 내가 어찌 가만 있는 단 말입니까?”하면서 기어코 순라 길에 나섰다. 순라로선은 삼국지대인 만큼 두갈래이다. 한갈래는 쏘련과의 변경선인 데 10여리 되고 두번째 로선은 조선과의 변경지역인 두만강변을 따라 순라하는 데 역시 10여리를 순라해야 했다. 순라가 끝나면 다른 사람들은 인차 잠자리에 들 수 있지만 아버지는 또 이튿날 수업준비를 해야 했다. 그 때는 방천에 전기도 없어 조선 전기를 쓸 때였다. 시간 제한이 있어서 밤 9시 후에는 등잔불을 켜야 했다. 학생들의 숙제 검사를 하고 교수안을 짜고 학교 운영에도 심열을 기울여야 했다. 그러니 아버지가 얼마나 피곤했으랴?

하루 저녁, 아버지가 순라를 마치고 지친 몸으로 금방 책상에 마주 앉자마자 쿡 소리나며 아버지께서 책상에 꼬꾸라졌다. 놀란 동생들이 급히 맨발의사를 불러오고 강서기를 비롯한 대대 몇몇 간부들도 달려왔다. 혈압을 재여보니 혈압기의 최고선을 넘어섰다. 맨발의사는 즉시 혈압 안정제를 놓고는 빨리 공사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차가 있어야 하는 데 당시 차라곤 주둔부대 찦차 밖에 없었다. 그날따라 찦차가 임무 집행하러 외지로 떠났다 한다. 급해난 강서기는 서성거리더니 “뜨락또르!” 하고 소리쳤다. 뜨락또르로 가자면 6, 7시간이 걸려야 했다.

서둘러 뜨락또르를 몰고 공사병원으로 출발했다. 다행히 길에서 별 사고 없이 아침에야 공사병원에 도착했다. 저혈압이 160이고 고혈압이 200선을 넘었다. 소식을 들은 공사 김성화서기가 지도 성원들을 데리고 달려왔다. 온 하루 여러가지 치료방안을 대서야 점차 혈압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공사병원에서 1주일간 치료 받고 회복되지 않은 채 방천으로 돌아왔다. 이튿날부터 전처럼 낮에는 학교에 나가고 저녁이면 순라하고 잠복하군 했다. 그뿐이 아니였다. 강서기는 아버지를 믿고 자기가 처리하기 힘든 일부 대대의 일을 아버지에게 맡겨 처리하도록 했으며 군중들도 아버지가 공정하게 일을 처리한다면서 무슨 일이 있으면 아버지를 찾아 얘기하군 했다. 밤낮 바삐 보내다니 아버지의 병은 점점 더 심해졌다. 혈압이 그냥 180을 넘었고 위경련도 자주 발작했다. 상급에서는 아버지의 신체를 고려하여 전근시키로 했다.

1975년 2월, 아버지는 공사중학교 교도주임으로 전근되였다. 이렇게 아버지는 당시 김서기와 2년만 방천에 있겠다던 약속을 4년 4개월 동안 있으면서 방천에서 벅찬 나날들을 보냈다. 나도 1973년 1월에 경신고중을 졸업하고 귀향하여 방천에서 2년 남짓이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고 1975년 6월에 강서기의 소개로 영광스럽게 입당하고 집을 따라 공사마을에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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