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교육자의 길" 리기만 눌하현 승리대대 조선족소학교 전 교장으로부터 듣는다
얼마전“조선족100년실록” 편집팀으로부터 흑룡강성 눌하지역에서 한평생을 조선족교육에 헌신한 리기만 눌하현 승리대대조선족소학교 전 교장을 인터뷰를 부탁한다는 요청을 받았다. 리 전교장이 심양시 아들집에서 로후를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 리기만선생의 아들인 리홍광씨가 심양지역에서 유명한 조선족기업가인지라 그를 통해 쉽게 찾을수 있었다. 리홍광씨 사무실에서 차 한잔과 함께 마주한 1921년생 백발의 리기만선생은 점잖고 사유가 조리있는 교육자기질이 다분한 로지식인이였다.아래 그의 이야기와 함께 조선족산재지역인 눌하현 조선족교육을 들여다보자.
항일전쟁이 처절하던 1943년 만주땅, 일본에서 학업을 마치고 가족을 찾아 온 21살 청년이 있었다.생계를 찾아 지금의 흑룡강성 눌하현에 안착한 가족들과 상봉한 젊은 리기만은 이 땅이 자신이 평생 교육자의 삶을 살아올 땅일줄은 꿈에도 생각지도 못했다.
1943년 5월, 지식인이 귀하던 시절이다. 갓 만주땅에 정착한 리기만은 현지 조선족협화회 회장의 간곡한 요청으로 얼떨결에 눌하지역 조선족중심학교였던 계림국민우급학교에 취직해 교편을 잡게 된다. “그때는 일제정부밑에서 일한셈이지요. 일본어로 수업을 해야만 했어요. 별로 애착은 없었고 언젠가는 접고 고향에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였어요.” 교사직을 탐탁치 않게 여겼던 리기만을 바꾸어놓은것은 일제투항과 함께 맞은 광복이였다.
1945년 오매불망 기다리던 광복이 찾아왔고 만주지역 정권이 중국공산당으로 바뀌였다. 진보적인 지식분자였던 리기만은 오래전부터 중국공산당을 동경해왔다고 한다. 때마침 정부는 현지 100여호 조선족들을 집중시켜 신한농장이라는 생산대대를 만들고 리기만에게 조선족학교를 만들것을 요청했다. “공산당정부의 요청도 있었고 현지 조선인들이 자식들의 교육을 간절하게 원했지요. 공산당의 령도하에 공작한다고 생각하니 열정도 생겼구요.” 리기만은 농장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학교를 세우고 손수 교재를 편찬해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수업은 전부 우리말과 우리 글, 불타는 열정으로 2년간 신한농장에서 글을 가르치던 리기만은 학교가 없던 린근의 하동농장으로 전근해 새로 조선인학교를 만들었다. 이곳이 그가 반평생 교육사업에 헌신한 승리대대조선족소학교 전신인 하동농장조선학교이다. (1968년 하동농장이 이가전(二柯?)공사로 이전해 승리대대로 이름을 바꾸었고 학교도 승리대대조선족소학교로 바뀌였다.)
“우리 민족은 본래 교육을 중시하는 민족이지 않습니까. 주민들이 힘을 합쳐 학교부지를 건설했고 정부에서 교사들의 월급을 책임졌습니다.” 리기만의 기억에 따르면 그때 조선족가정이 45호좌우에 가구당 학생이 1명정도로 50명 안팎을 유지했다고 한다. 교사는 교장이였던 리기만을 포함해 3명, 1,2학년 3,4 학년 5,6학년 매 2개 학년을 한명 교사가 맡아 수업을 가르쳤고 리기만은 5,6학년 수업을 맡았다. 교재는 전부 리기만이 손수 편찬했다. “지식분자가 귀한 그때는 지금처럼 과목별로 교사를 찾을수 없었지요. 더우기 산재지역 자그마한 소학교에는 상상도 못합니다. 심지어 2개 학년이 동시에 수업해야 했는데 교수안준비가 여간 어려운게 아니였습니다. 웬만한 책임감 없이는 어려운 일이였지요.” 리기만이 가장 자랑스러워 하는 일은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문화교육은 물론 음악, 체육 ,미술 교육도 견지해온 일이다. 교원들은 공부를 가르치는 한편 악기도 다루고 그림도 그리고 공도 차고 달리기도 해야 했다며 우스개소리로 만능인재라고 소개했다. 박봉인 교원노릇이지만 이들한테는 열정과 책임감이 있었기때문에 견지할수 있었다.
이들의 노력과 열정을 엿볼수 있는 다른 사건이 있다. 눌하지역 문맹퇴치가 가장 빠른 농장이 이들 하동농장이였다. 1947년 학교를 갓 세운뒤 리기만은 저녁에는 야간학교를 조직해 대대의 청장년들을 불러모아 조선어와 한어를 가르치며 문맹퇴치에 나섰다고 한다. 하여 새중국이 성립되고 정부에서 문맹퇴치를 중시할즈음 이들 농장은 이미 문맹퇴치가 기본상 끝나있었다.
“그 당시야 뭐 글을 가르친다고 하니 젊은이들의 학구열도 높았지요. 아니면 저 혼자 힘으로 됩니까.” 리기만은 그 공로를 겸손하게 사양하며 말길을 다시 학교교육으로 돌렸다.
“저희 학교가 작고 여건이 어려웠지만 교수질은 꽤나 호평을 받았습니다. 이건 제가 떳떳이 항상 자부심을 가지는 일입니다.” 여건상 2개 학년 동시수업인 복학년수업을 하는 작은 조선족학교였지만 이들의 진학률은 항상 눌하지역을 포함한 당시 서만지역이라고 칭한 치치할지역 1위였다. 당시 이 지역 조선족소학교 졸업생들은 치치할조선족중학교로 진학하는데 9년의무교육인 지금과는 달리 입시를 거쳐 중학교에 진학해야 했다. 자그마한 하동농장에서 서만지역 입시 1등도 나왔고 진학률도 단연 1위였다. 1978년 리기만이 우수한 교학능력을 인정받아 흑하에 있는 흑룡강사범전문학교로 전근갈때까지 쭉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다고 한다.
우수한 학업성적이 그의 첫번째 자랑거리라면 두번째는 항상 사상교육을 놓지 않은것이다. “학생들이 학업이 우수한것보다 제가 더 보람을 느끼는것은 우리 학생들의 사상교육을 잘 틀어쥔것입니다.” 리기만의 기억속에 그의 학교에는 진보적인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항미원조가 갓 시작되면서 지원군을 모집할때였지요. 저희 학교 6학년 학생 3명이 자진해 입대신청을 했습니다. 입대신청이 접수되여 심양군구에까지 갔었는데 당시 군구책임자께서 돌아가 공부해 더 큰 인재가 되라고 돌려보냈습니다. 학생들의 각오가 높으니 교장인 저까지도 체면이 서더라구요.” 승리대대조선족소학교에서 30여년 수많은 학생들을 가르쳤지만 단 한명도 삐뚤어진 길로 나간 학생이 없었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문화교육에서 사상교육까지, 어느 방면 하나 빠질데 없이 학생들을 가르친 리기만교장의 평생 교육자의 길은 그의 자식들의 현재에서 성과를 엿볼수 있다. 심양현지에서 유명한 기업가로 알려진 리홍광 레드기업(瑞德企?) 사장이 7남매중 다섯째, 큰아들인 넷째는 현재 중앙민족대학 부서기로 재직중이며 기타 다섯남매 모두 이들 못지 않은 성공인사들이다. 7남매 모두 승리대대조선족소학교 졸업생들이다.
“자그마한 농촌에서 글을 가르친다는것이 쉬운 일은 아니였습니다. 어쩌면 고달픈 일이였지요. 하지만 저의 학생들이 저를 통해 지식을 배우고 세상을 알아간다는것, 그리고 자그마한 모퉁이에 자리한 조선족지역이 저희 학교로 인해 민족교육을 이어갔다는게 지금에 와서는 더없이 뿌듯한 일입니다.”인터뷰하는 동안 옛 추억에 잠겨 잔잔한 웃음속에 이야기를 해나가는 리기만선생의 주름진 미소안에는 고달펐지만 열정과 동경으로 가득했던 산재지역 민족교육의 옛모습이 보이는듯 싶었다.
료녕신문 김탁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