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청년은 시를 사랑했고, 다른 청년은 세상을 사랑했다. 시대와 불화를 겪었던 청년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자신을 사랑했다. 이준익 감독의 '동주'(18일 개봉)는 스물여덟, 청년인 채 삶을 마감한 시인 윤동주(강하늘)와 그의 사촌 송몽규(박정민) 이야기다. 소박하지만 가볍지 않고, 조용하지만 울림이 작지 않다.
이준익 감독은“저예산 영화를 또 찍을 수도 있다, 확신이 생기는 작품만 만난다면. 확신이 의심으로 변하는 영화는 망한다. 원래 인생은 확신과 의심 사이의 줄타기 같은 거니까”라고 했다. /이진한 기자
지난 3일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대뜸 "윤동주의 시 좋아해요?"라고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한국인은 윤동주의 시를 좋아하지만, 그의 삶과 죽음은 잘 모른다"고 했다. 이준익 감독은 4년 전 영화제 참석차 교토에 갔다. 그는 도시샤(同志社)대학에 들러 윤동주 시비를 보고 정지용 시에 등장하는 압천(鴨川)을 걸었다. 일본에 윤동주의 시를 사랑하는 이들의 모임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이준익 감독은 이때 윤동주에 대한 영화를 만들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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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안 소설' '프랑스 소설처럼'을 연출한 신연식 감독이 각본과 제작을 맡았다. 영화는 흑백으로 만들었다. 이준익 감독은 "사도가 250년 전 이야기, 왕의 남자는 500년 전 이야기다. 그땐 사진이 없으니까 컬러로 찍으면 그 시대 사람을 현재로 데려오는 느낌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72년 전 윤동주의 흑백사진을 봤다. 그걸 컬러로 살려내면 오히려 사실성이 떨어질 것 같았다"고 했다. 영화 제작비는 5억원. 그는 "이렇게 제작비가 적은 영화는 난생처음이다"고 했다. 전작(前作) 사도(2015)의 총제작비는 약 95억원이었다. "상업적 부담감이 없다는 게 어찌나 어마어마한 장점이 되던지. 자유분방했고, 본질에 몰입할 수 있었죠. 제작비가 많이 들어가면 성공과 실패에 대한 부담이 얼마나 큰데요. 그래서 '평양성' 망했을 때 은퇴 선언까지 안 했습니까, 하하!"
이 영화는 윤동주의 전기라기보다는 비극적인 시대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간 윤동주, 송몽규 두 청년을 그렸다. 3개월 차이로 만주 명동촌의 같은 집에서 태어난 두 사람은 사촌 형제이자 친구, 라이벌로 자랐다. 영화에서 윤동주에게 '그림자'란 표현을 썼듯이 그는 언제나 송몽규보다 한발 뒤처졌다. 송몽규는 19세에 신춘문예에 당선이 됐고, 10대에 이미 독립운동단체에 가입했다. 윤동주는 송몽규를 따라 연희전문학교와 교토제국대학 시험을 봤지만, 교토제국대학 입시에는 낙방했다. 윤동주가 '남의 나라 육첩방'에서 시인의 천명(天命)을 다하고 있을 때, 송몽규는 유학생들을 규합해 혁명(革命)을 도모했다. 두 사람은 한 달 차이로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죽었다.
어두운 시대, 가볍지 않은 삶을 다루면서도 '동주'는 투명할 정도로 말갛다. 감정이나 사건이 고조될 때마다 그 상황에 어울리는 윤동주의 시가 내레이션으로 삽입된다. 시를 읊는 강하늘의 단정한 목소리가 영화 밖으로 흘러넘칠 뻔한 감정을 주워 담는다.
"모든 인간에겐 열등감이 있습니다. 윤동주는 그런 감정을 과대 포장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부끄러움의 미학으로 승화시킨 거고. 그런 시인을 주인공으로 영화를 찍는 감독이 영화에 멋대로 의미 부여를 하고 감정 과잉을 하면 그건 (영화) 끝장나는 거예요. 윤동주를 영화적 도구로 사용해서 과도한 신파나 주의(主義)를 강조하지 않으려고 했죠. 그것이 그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어요."
/영화 '동주'
이준익 감독은 "영화 30%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극 중에서 윤동주가 호감을 갖는 '여진'이란 여학생도 허구의 인물이다. 스물여덟에 죽은 윤동주가 연애를 했거나 여자를 만났다는 기록은 없다. "윤동주가 소풍 가서 찍은 사진을 봤어요. 두 명의 여자 사이에 윤동주가 있는 걸 보고 거기에 상상의 여지를 넣었죠. 그가 여진을 이화학당의 기숙사에 데려다 주는 길에 묘한 감정이 싹트는 정도까지만 그렸어요. 스물여덟에 세상을 떠난 그에게, 그런 삶의 순간, 청춘의 순간을 선물해 주고 싶었습니다."
이 영화로 윤동주와 송몽규의 젊음은 거기 오래 남아 있을 것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2015년 2월 22일 오후 일본 도쿄(東京) 릿쿄(立敎)대학교 예배당. '윤동주 시인 70주기 추모 낭독회'에 참석한 일본 시민과 한국인 유학생 등 400여명은 일본어와 한국어로 번갈아 낭독되는 '쉽게 씌여진 시'를 지긋이 눈을 감고 경청했다. 이 시는 윤 시인이 릿쿄대 영문과 유학 시절 썼던 작품이다.
윤동주 70주기 추모 낭독회에서 김대원 릿쿄대성공회 주임사제가 '쉽게 씌어진 시'를 한국어로 낭독하고 있다. /양지혜 특파원
이날 낭독회에서는 초등학생부터 원로 배우에 이르기까지 국적과 세대를 초월한 이들이 '햇비' '풍경' '십자가' '참회록' '쉽게 씌여진 시' '서시' 등 윤 시인의 시 6편을 낭독했다. 섬유 예술가 가와이 미쓰코씨는 곱게 차려입은 한복에 쪽진 머리를 하고 '풍경'을 암송했다. 이 밖에도 '윤동주 장학생'으로 선정된 릿쿄대 유학생, 직장인, 배우 등이 낭독자로 나섰다. 대표작 '서시'는 참석자 전원이 한국어와 일본어로 함께 낭독했다.
박춘희(19)양은 "재일교포로 자라면서 윤동주 시인의 시는 많은 위로가 됐다"며 "오늘 낭독회에서 다시 용기를 얻었다"고 말했다. 요네무라 쇼지(米村正治·69)씨는 "종전(終戰)을 몇 달 앞두고 유명을 달리한 시인의 작품을 보며, 요즘 전쟁을 향해 치달아가고 있는 듯한 일본 사회 분위기를 반성하고 싶다"고 했다.
이 행사는 '시인 윤동주를 기념하는 릿쿄의 모임'이 주최했다. 야나기하라 야스코(楊原泰子·68)씨를 주축으로 릿쿄대를 졸업한 일본인들이 결성한 단체로 매년 2월 윤 시인의 기일에 맞춰 추모 낭독회를 열고 있다. 야나기하라씨는 "나 같은 전후 세대는 일본이 과거에 저지른 만행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윤 시인의 작품을 통해 일본의 역사 교육을 바로잡고, 생명과 평화의 메시지가 널리 알려지길 염원한다"고 말했다.
윤동주 生家 비석엔…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중국이 중국 옌볜에 있는 시인 윤동주 생가(生家)를 관광지로 개발하며 '중국 조선족 애국 시인'이라고 소개하고 윤동주 시를 중국어로 번역해 홍보하고 있다.
윤동주 생가 주변 곳곳에는 중국어로 번역된 윤동주의 시비(詩碑)가 놓여 있다. 중국어로 번역돼 돌에 새겨진 윤동주의 시 ‘십자가’. 윤동주가 짓고, 리융이 번역했다고 적혀 있다. /이미지 기자
중국 옌볜 조선족자치주 룽징(龍井)시 밍둥촌(明東村)에 있는 윤동주의 생가에는 그전에 없던 시멘트 벽과 문이 생겼고, 가로 약 4m, 세로 약 2m 크기의 경계석에 '중국 조선족 애국 시인 윤동주 생가'라고 적혀 있었다. 윤동주 생가는 룽징시가 우리 돈 9억여원을 들여 4개월간 공사해 정비했으며 2012년 8월 준공식을 열었다. 윤동주의 외숙인 김약연이 세운 명동교회에서부터 윤동주 생가까지의 흙길이 대리석으로 바뀌어 말끔해졌지만, 이 과정에서 명동교회 옆 십자가가 옮겨지고 곳곳에 중국어로 번역한 시비(詩碑)가 세워졌다.
룽징시는 작년 2012년 8월 준공식을 열고 윤동주 생가를 관광지로 개발했다. 시멘트로 된 담벼락과 문이 생겼고, 경계석엔‘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 생가’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미지 기자
조선족의 국적은 중국이다. 윤동주는 룽징에서 태어났지만 모든 작품을 한글로 썼으며, 대부분의 작품은 그가 평양 숭실중학교에 다니던 시기와 서울 연희전문학교에 다니던 시기, 일본 교토에서 유학 생활을 하던 시기에 썼다. 윤동주의 육촌 동생으로 매년 이곳을 찾는다는 가수 윤형주씨는 "윤동주 시인의 원적은 함경북도 회령이며, 북간도로 이주한 것일 뿐 이민을 간 것은 아니기 때문에 중국 국적의 시인이라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집안 어르신들이 알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실 일"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연세대 사회학과 류석춘 교수는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라는 구절이 있는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시인은 중국 국적의 소녀들을 '이국 소녀'라고 일컫는 등 자신을 중국인으로 생각한 적이 없다"며 "도리어 한글로만 시를 쓰는 등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조선DB
중국이 시인 윤동주의 생가를 관광지로 개발한 것과 달리 윤동주의 묘지는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있다.
옌지(延吉) 시내에서 차로 1시간 거리인 룽징(龍井)시 동산교회 기독교인 묘지에 있는 윤동주 묘지는 별도의 관리 주체가 없어 방치되고 있는 실정이다. 승용차로는 쉽게 접근하기 힘들 정도로 노면의 요철이 심하던 길은 최근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길의 초입까지만 시멘트로 포장됐다. 하지만 포장 도로가 끝난 지점부터 30여분 정도 광활한 옥수수밭 사이에 난 흙길을 걸어가야 한다. 최근 내린 비로 흙길은 뻘밭이 돼 있었다.
묘지 위치를 알고 있다는 근처 마을 노인과 윤동주 묘지를 찾아 나섰다. 차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 들어가고 난 후 오른쪽 풀밭 사이에서 '시인 윤동주 묘지'라는 작은 팻말을 발견했다. 풀밭을 헤치고 5분 정도 걸어가자 윤동주 묘지가 나타났다. 겨우겨우 찾아낸 묘지는 돌보는 사람이 없어 봉분 위에 풀이 웃자라 있었다. 윤동주 묘지는 1984년 유족과 윤동주 연구가인 일본인 오무라 마스오 와세다대 명예교수가 20여 차례 중국을 오가며 묘지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을 탐사해 발견했다. 1945년 사망 당시 유족들이 세워둔 '詩人 尹東柱之墓(시인 윤동주지묘)'라는 비석 덕분이었다. 유족들은 "한국의 대표 시인인 윤동주의 묘지가 이렇게 방치된 것이 속상하지만 한국에서 묘지를 제대로 관리하는 것도 어려움이 많아 고민"이라고 말했다./이미지 기자
동아닷컴 [취재=변희원 기자] [편집=뉴스큐레이션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