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줍은 소녀와 폴폴 날리는 꽃잎들. 마치 동화 속 그림처럼 순수하다. 작가의 설명을 듣고 나서 그림을 다시 보면 어딘가 에로틱해진다. 최한동식 에로티시즘이다.
한마디로 그림이 간드러진다. 훅 불면 폭하고 날아갈 것 같다. 야들야들한 선으로 한 소녀를 그려놨는데, 눈은 감고 있고 눈두덩과 볼에는 홍조가 걸쳐 있다. 배경은 화사한 핑크빛이고 은은한 음영이 있다. 소녀 앞에는 포슬포슬한 꽃잎이 드리워졌다. 살짝 바람을 탄 것 같다. 아무도 소녀의 얼굴이 붉어진 이유를 모른다. 무슨 일이 있었을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그래선지 뭔가 에로틱하다. 최한동 작가는 은유적으로 에로티시즘을 표현한다.
“시대가 역동적일 때는 에로티시즘이 직설적이었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70~80년대. 여인의 둔부, 가슴이 그대로 드러난 직설적인 누드가 그때 많았죠. 사회가 안정기로 접어들면서 간접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심장에서 가장 먼 곳. 그러니까 손톱, 발톱, 머리카락에서 에로티시즘을 표현하는 겁니다.”
에로티시즘의 발전인 셈인데, 그는 한층 더 나아가서 이를 ‘대기(大氣)’에서 보려 했다. 몽롱한 봄날, 불어오는 바람에서 오는 에로티시즘. 작품 제목으로는 <어쩐지…봄바람>을 자주 쓴다.
어둠을 깨고 빛으로
처음엔 여릿한 여류작가의 그림인 줄 알았다. 하지만 작가는 50대 남성. 여성스럽다기보다는 걸걸한. 화풍이 여성스럽다는 얘기는 워낙에 많이 들었다.
“재밌는 에피소드도 있어요. 어떤 주부가 작은 인물화를 사 갔는데, 어느 날 ‘그림을 풍경화로 바꿔주면 안 되겠느냐’고 물어요. 왜 그런가 했더니, 남편이 술만 마시면 그 그림에 나온 여인과 부인 얼굴을 계속 번갈아가면서 본다고요.”
여인뿐만이 아니다.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는 또 있다. 해바라기와 매화, 말과 초원이다. 그간 수천 점의 그림을 그렸지만 그는 그중 해바라기 그림이 가장 좋다고 했다.
“해바라기를 그리기 시작한 건 우연이었어요. 워낙 대학교 시절 봤던 소피아 로렌의 <해바라기>가 인상적이기도 했지만요, 언젠가 터키를 간 적이 있습니다. 호텔방에 들어가 창문을 열었는데 바다 앞이 온통 해바라기였어요. 끝도 안 보이는. 압도적이었죠.”
동양적인 관점에서 해바라기는 다산을 상징하기도 한다. 씨가 많아서다. 해를 따라다닌다고 해서 서양에서는 일편단심을 의미한다.
“어두운 꽃, 밤에 피는 꽃도 있지만 저는 밝고 화려하고 긍정적이고 사랑스럽고 탐미적인 게 좋습니다. 그게 해바라기예요.”
1987년에 첫 개인전을 열었고, 현재까지 약 50회 개인전을 치렀다. 그러면서 화풍도 몇 번 바뀌었다. 처음부터 ‘핑크빛’은 아니었다. 한때는 어두운 배경과 직선들로 이뤄진 그림도 그렸다. 그는 “혹자는 예전 화풍이 더 좋다고 하지만 나는 요즘이 훨씬 좋다”고 했다.
“20대 후반, 30대 때 제 그림은 완전히 시커멓습니다. 당시에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어두울수록 진실에 가깝다. 말없고 과묵한 사람이 더 진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데 나이가 들다 보니까 아니더라고요. 밝은 게 더 진실할 수밖에 없어요. 숨길 수 없이 환하니까.”
한국화의 정체성
그의 그림은 얼핏 서양화 같다. 색이 워낙 화려해서다. 보통 한국화라고 하면 흰 바탕에 검은 묵, 그리고 그 중간 어디쯤 되는 회색빛을 떠올린다. 한국화는 곧 수묵화라는 공식이 깊이 자리 잡은 게 사실. 이 같은 현실에 대해 최 화백은 할 말이 있어 보였다.
“한국화는 원래 채색화부터 시작됐습니다. 고구려 벽화나 고려 불화를 보세요. 조선 중기에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백색주의, 유교적 개념에 의해 채색화가 배척된 겁니다. 천하다는 이유였죠. 그때부터 수묵화가 많이 퍼졌고요. 해방 이후에는 일본의 그림을 의도적으로 배척하려는 현상이 있었고, 채색은 무조건 일본적인 거라고 오해를 했죠.”
그는 “한반도 역사 중 4천7백 년 동안은 채색화가 주류였다”면서 “대학원 시절, 역사를 알고 나서 ‘아, 이건 아닌 것 같다’ 싶었다”고 했다.
“우리만의 정말 아름다운 채색화가 있는데, 이를 살려야겠다 싶었습니다. 제가 그리고 있는 그림도 다 한국화입니다. 하긴, 그림 좀 안다는 분들도 헛갈려하긴 하죠.”
그렇다면 한국화와 서양화의 구분, 어떻게 할까. 그는 “한국인의 눈으로 한국인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면 한국화”라고 했다.
“제 오랜 스승이 이런 말을 했어요. ‘밀가루로 외국 사람이 빵을 만들면 서양 음식이다. 그러나 한국 사람이 수제비를 만들면 한국 음식이 된다’고요. 재료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박수근 화백의 유화 그림을 보세요. 유화인데, 한국화란 말예요. 이중섭의
<소>는 어때요. 그걸 누가 서양화라고 합니까. 유화를 써도 한국인의 정서가 담겨 있다면 한국화인 겁니다. 더 나아가서 한국 사람이 그리면 한국화인 거예요. 정서는 묻어나는 거니까요.”
아름다움에 대한 희구
그는 타고난 그림꾼이었다. 유치원 때부터 그림을 그렸단다. 집안 내력도 한몫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가 탐미주의자였어요. 학창시절, 아버지 일기장을 본 적이 있는데, 아름다움을 감탄하는 글들이 종종 눈에 띄었습니다. 펜글씨도 빼어나게 잘 쓰셨죠. 아무래도 그 영향을 받았나 싶습니다.”
그 또한 탐미주의자가 됐다. 최 작가는 “예술은 기본적으로 아름다워야 한다”고 누차 강조했다.
“현대미술의 경향을 보면, 요즘은 감동보다 충격에 초점이 맞춰진 것 같습니다. 무언가를 고발하려 하고, 굉장히 자극적이죠. 이럴 때일수록 순수 아름다움을 중시하는 전통기법이 중요합니다. 예컨대, 1970년대 월남전의 영향으로 쏟아진 할리우드 영화가 <디어 헌터>(1979년작), <7월 4일생>(1989년작)과 같은 겁니다. 인간이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을까를 보여주죠. 그 시대, 그런 자극적인 영화들 속에서도 가장 제 마음을 울린 건 <러브스토리>(1970년작)였어요.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그런 순수한 아름다움, 그런 미학이 인류에게 더 필요하다는 방증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