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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 떠도는 배위의 그 마을의 이야기
조글로미디어(ZOGLO) 2017년10월3일 15시03분    조회:2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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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건너 천년을 잇는 그 사람들] 1-
바다에 떠도는 배위의 그 마을의 이야기

위동(威東) 페리가 도착한 위해(威海)의 부두에는 고동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국제항운터미널에 나타난 인파가 더구나 갑작스러운 것 같았다. 배에서 내린 탑승객은 거개 산더미 같은 큰 짐짝을 들고 있었다. 이 짐짝은 곧바로 부두 왼쪽의 화물 위탁소에 옮겨지고 있었다. 미구에 탑승객들은 가벼운 배낭만 든 채 시내로 사라진다.

날마다 이맘때면 부두에 벌어지는 정경이다. 예전에는 한국인도 있었다고 터미널 부근의 식당 여주인이 밝힌다.

"그때는 우리 식당에 혹간 한국인들이 와서 밥을 먹기도 했지요."식당 여주인은 벌써 오래 전의 일이었다고 말한다.

"따이공(代工)이라면 현지인밖에 없어요. 현지인들이 자주 우리 식당을 찾지요."

언제부터인가 한국 따이공은 바다에 잠적한 듯 더는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식당에는 아직도 그들을 부르듯 그냥 한글 이름의 간판이 걸려있었다. '스낵'을 '스색'으로 잘못 적은 간판이 뭔가 이상한 뉘앙스를 주고 있었다.

따이공(代工)은 중국말로 '물건을 대신 전달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농산물과 화장품, 의류 등을 거래하는 보따리상을 말한다. 중국과 한국 여객선이 운행하면서 이런 작은 무역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 중국과 한국에 생겼다.

페리는 위해에서 처음 개통될 때부터 이 민간무역의 추형을 만들고 있었다. 페리의 주요내원은 친척방문으로부터 노무 그리고 다음은 관광 이런 순서로 발전했다고 위해 위동(威東)항운유한회사 판공실 주임 장천민(張天民) 씨가 말한다.

"처음에는 동북의 조선족들이 우리 페리의 주요한 여객 내원으로 되고 있었지요."

1990년 9월 15일, 중국과 한국 항로가 위해에서 처음으로 개통되었다. 아직 중국과 한국 수교 보다 2년이나 이른 시점이었다. 그때까지 중국에서 한국행은 바다 건너의 일본이나 대륙 남쪽의 홍콩을 경유하는 등 우회노선을 걸어야 했다. 직항운행을 하는 위해의 페리는 중국과 한국의 거리, 시간, 비용을 단번에 크게 절감하고 있었다. 배는 또 항공편에 비해 물품을 훨씬 많이 소지할 수 있는 우점이 있었다.

필경 페리는 탑승객 숫자와 출항 횟수가 모두 한정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배표는 한때 '별 따기'처럼 되었다. 배표 한 장을 얻으려면 밤부터 매표소에 줄을 서야 했다. 배표 하나의 구매권이 50달러의 가격으로 시중에 나돌기까지 했다. 배표를 구매하기 위해서는 장장 한주일이나 멀쩡하니 위해에 머물려야 했다.

사실상 페리를 통한 민간인의 작은 무역은 이때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따이공은 첫 탑승객 조선족으로 출마했고 또 한국인의 신분으로도 나타났으며 이어 현지 한족으로 파급되었던 것이다. 따이공이 탑승하던 페리도 나중에 북방의 대련(大連), 천진(天津) 그리고 남방의 연운항(連運港), 상해(上海) 등 십여 개의 항구로 부쩍 늘어났다.

그때 그 시절, 신라의 사절과 무역인, 유학생, 구법승들도 이처럼 바닷길을 통해 당나라에 입국했던 것이다. 그때도 바닷길은 육상의 도로보다 가까워 역시 시간과 거리, 비용을 많이 줄일 수 있었다. 옛 신라인이 다녔던 이 바닷길은 중국 대륙과 조선반도, 일본을 잇는 해상 '실크로드'로 되고 있었다.

신라인과 일본인은 대륙 연해의 항구에 이른 후 다시 서울 장안으로, 또 오지의 불교 성지(聖地)로 향했다. 대륙의 육상 교통도로 연선에는 그들을 접대하던 장소가 따로 생기고 있었다. 산동성 등주(登州)에 사절이 숙박하던 신라관(新羅館)이 있었고, 청주(靑州)에는 구법승이 머물던 신라원(新羅院)이 있었다. 구법승들은 많은 경우 이 신라원처럼 사찰에 기거했다. 위해 부근의 영성(榮城) 신라사(新羅寺)가 바로 그러하다. 당나라 때 일본의 고승 원인(圓仁)이 구법의 길에 이 신라사에 들렸었다고 그의 여행기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가 전한다.

어쩌면 옛날의 그 바닷길 이야기를 다시 떠올리고 있는 듯 했다. 페리는 중국과 한국 교류의 교두보로 되었다고 장천민 씨기 거듭 말하고 있었다. 페리를 통한 양국의 인적, 물적 교류는 종국적으로 양국의 국교 정상화를 추진했다는 것이다.

장천민 씨를 동행한 직원 손(孫)씨는 지어 페리가 없으면 위해의 개혁과 개방이 없었다고 일축했다. "페리의 운행은 이곳 현지의 지방 경제를 활성화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위해의 많은 식당과 상점, 가게는 이 때문에 운영되었지요."

한때 위해의 옛 국제항운터미널 부근은 언제나 흥성했다. 따이공 등 탑승객을 상대한 여인숙과 식당, 가게, 물류업체 등에 수천 명 심지어 1만여 명의 인원이 직간접으로 종사했다는 불완전한 통계가 있다.

위해와 이웃한 연태(連臺)도 마찬가지였다. 1990년대 중반 연태 북마로(北馬路)의 옛 국제부두 부근에는 페리의 탑승객을 상대하여 먼저 식당이 일어섰고 뒤미처 농산물 가게와 물류와 무역 업체가 따라 나섰다. 마트와 직업소개소 등 서비스업체도 북마로에 진출했다. 북마로는 나중에 일명 '한국동네'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날 점심 무렵 위해에 도착한 페리는 인천편이었다. 인천편은 일요일과 화요일, 목요일 도착, 평택은 월요일과 수요일, 금요일 도착이라고 한다. 따이공이 찾아간 화물 위탁소에는 한글이름의 가게가 따로 있었다. 따이공을 기다리는 인원과 차량이 그곳에 대기하고 있었다. 따이공의 물품은 지역별과 상품별 행선지가 다르기 때문에 이곳만 전문으로 하는 가게라고 한다.

일부 가게는 농산물을 특별히 진열하고 있었다. 인제 물건을 인계하고 다시 배에 오르는 따이공을 위해 준비한 것이었다. 따이공은 페리가 출발하는 오후 7시까지 갖고 온 물품을 처리하고 다시 갖고 갈 물품을 모두 배에 실어야 한다. 물건을 인계한 후 현지의 집에 다녀와서 다시 배에 오르려면 일정은 더구나 빠듯하다. 지인이나 친척이 따이공의 도우미로 터미널까지 나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페리에는 약 7백 명 탑승할 수 있었지만 이날의 탑승객은 300명 미만인 것 같았다. 와중에 따이공은 수십 명 정도밖에 보이지 않았다. 따이공은 열이면 열 모두 짐짝이 유달리 커서 탑승객들 속에서 금방 가려낼수 있었다. 따이공은 거개 배를 대륙과 반도를 오가는 숙박소로 삼는다고 한다. 페리는 말 그대로 바다 위에 떠도는 '이동식 마을'로 되고 있는 것이다.

따이공이 위탁소에 풀어놓은 짐짝에는 화장품과 밥통, 의류가 나오고 있었다. 일부 짐짝에는 부피가 작은 스카프 뭉치도 있었다. 인제 그들이 위해의 출항 페리에 가져갈 짐에는 이를 대신하여 중국의 농산물이 들어가게 된다.

여느 따이공처럼 짐을 하나 만들고 싶으니 어떻게 해야 하냐고 위탁소의 가게 주인에게 진지하게 문의했다. "페리를 타고 여행을 가려고 하는데요, 배표 값이라도 만들려면 뭘 갖고 가야 될까요?"

가게 주인은 대뜸 마른 고추와 녹두, 땅콩, 참깨, 흑두 등을 권장했다. 이런 물품은 가게에 각기 5㎏짜리 비닐포장으로 되어 있어서 내용물을 쉽게 선별할 수 있었다. 한국에 들여가는 품목은 총량 50㎏, 품목별 5㎏으로 한정되어 있다고 한다.

가게 주인은 뭐가 아쉬운지 연신 한숨을 짓고 있었다. "예전에는 가게에 수십 가지의 농산물을 진열할 수 있었는데…지금은 장사가 잘 안됩니다."

그때는 귀향길에 오르는 한국인들도 배에 오르기 전 가게에 들려 귀국선물로 특산물을 구매했다고 한다. 실제 페리를 이용하는 한국인은 지금도 중국행 관광객이 적지 않았다. 1백명 지어 그 이상으로 헤아리는 단체는 항공편보다는 페리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위해에는 '해신(海神)'으로 불리는 신라인 장보고(張保辜, ?~846)의 유적이 있어 한국인들이 산동에 와서 관광하는 주요한 목적지로 되고 있다.

최초에 페리의 탑승자 명단에 등장한 한국인들은 기업인들이 적지 않았다. 페리가 개통했던 1990년대 초 위해와 부근 연해의 연태, 청도 지역에 한국의 제조업체가 많이 들어오고 있었다.

"(한국인들은) 한국과의 근접성과 물류 이동의 편의성 때문에 페리를 선택하는 거죠

연태한인상공회 사무국장 강경욱 씨의 말이다. 현재 연태에 진출한 한국 제조업은 연태 한국 기업의 거의 반수 정도인 450개를 차지한다. 와중에 일부 한국인은 아직도 페리를 자주 이용하고 있었다. 밤에 출발하여 아침에 도착하는 페리는 여전히 항공편에 못지않은 우세를 갖고 있었다.

"(예전에는) 한국행 배편에 인원이나 물류가 모두 꽉꽉 찼습니다. 수출은 페리 같은 선박 노선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2008년 북경올림픽 이후 인건비가 상승하면서 한국 제조업체의 대량 이동이 시작되었다. 현재 연태에서 살고 있는 한인들은 약 1만 5천명으로 10년 전보다 반 정도 이상 줄어들었다.

언제부터인가 페리를 이용하던 탑승객 역시 반 토막이 나고 있었다. 중국 산업구조의 변화와 한국의 경제위기에 '습격'을 받았고 이어 한국발 '사드'의 '직격탄'을 받았다. 또 중국과 한국 세관의 통관물품에 대한 엄격한 관리도 가세했다. 탑승객의 일원이었던 큰 단체는 올해 거의 사라졌고 탑승객의 반수 지어 대부분을 차지하던 따이공은 날이 갈수록 급격히 줄어들었다.

"양쪽의 세관에 어느 품목이 걸릴지 몰라요. 퇴짜를 받아 돌아올 수 있습니다." 가게 주인은 관광을 떠난다면 아예 여행 소지품만 들고 배에 오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일상처럼 배를 타는 따이공도 자칫하면 적자를 볼 수 있다. 예전에는 페리에 편당 400명이나 500명에 이르던 따이공이 지금은 100명 정도로 줄어들고 있는 원인이었다.

가게 주인의 이 말은 부근의 식당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식당 여주인은 반년 전부터 식당에 들리던 따이공이 눈자리 나게 줄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예전보다 식당에 늘 비는 식탁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때는 하루에 스물이 넘었는데요, 지금은 일여덟밖에 안돼요."

대륙과 반도에 갑자기 찬 기운이 불어치는 듯 했다. 인적, 물적 내왕이 급격히 줄어들고 이에 따라 그 '마을'도 바다에 얼어붙고 있었다. 페리는 개통된 약 30년 만에 보기 드문 난국의 상태에 처하고 있었다.

장천민 씨는 인터뷰 도중에 내일이라도 불편하고 힘든 현 상황에 변화가 있길 바란다고 거듭 말했다. "인원과 물류는 우리 페리에 큰 역할을 하는데요, 지금은 배에 근심이 첩첩합니다."

대륙과 반도의 냉각된 바다에 페리가 또 한 번 물꼬를 틀 수 없을까…

그날 바닷가를 지나는데 닻을 내린 어선이 온 해만을 뒤덮고 있었다. 뒷이야기지만, 북위 35도 이북의 위해 해역에서 얼마 전의 5월 1일부터 어로 금지조치가 시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어로작업은 며칠 후인 9월 1일 곧 다시 시작된다고 했다.

[특별취재팀 조설매, 권향화, 김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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