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특별기획 - 문화를 말하다(2)
우리는 연길역에 내려 연변지위에서 보낸 양마차를 타고 시내로 들어왔어요. 하남다리에 이르니 세상에 이렇게도 큰 다리가 있다는 것에 얼마나 놀랐는지. 그리고 강가에서 흰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은 우리 어머니들이 빨래질을 하는 장면은 너무나 인상깊어 지금도 눈앞에 선히 보는듯 해요.
변강의 국제도시
우리가 중공연변지위 초대소(지금의 향양유치원자리)에 이틀 있을 때 주덕해동지, 최채동지 그리고 주덕해어른의 경호원 겸 유일한 통신원인 오해동동지가 와서 “어이유 김문보 비서장네 가족이 왔네요”하며 반겨주었어요.
이튿날 오해동통신원이랑 와서 우리의 이사를 거들어주었어요. 오해동통신원은 나를 자전거에 앉혀 중앙소학교에 붙여준 아저씨예요. 지금도 생전이라고 들었어요. 참 한번 찾아뵙고 싶네요.
그때 지금의 원 국제무역청사 동쪽에 3층집이 있었는데 그 곳이 ‘동북조선인민서점'(원 민주조선서점)이였어요. 당시‘연변일보’도 ‘동북조선인민보’였거든요. 그 서점 길 건너 가두머리에 라지오수리부가 있었는데 바로 그 뒤 울안에 우리가 집을 잡은 거예요.
후에 알고보니 후날 연변텔레비방송국의 부국장(副台长)인 리종휘라는 분이 그 수리부에 계셨어요. 그분이 바로 해방전 지하당조직의 무전수였어요.‘디디다-디디다’하는 무전이였어요. 해방난 다음 이 부근에 역시 일본, 국민당 무전들이 있었단 말이예요. 그러니 이곳은 겉으로는 수리부였지만 떠나지 않은 세력들이 있는 걸 감찰하는 곳이였어요.
연길에 온 첫날 점심에 국수를 먹으라 해서 난생 처음 먹었는데 면발이 질기고 고명은 매웠지만 소고기편육과 꿩고기완자는 너무나 맛있었어요. 또한 얼음을 띄운 육수물은 너무 시원해서 켜도 켜도 더 켜고싶었지요.
50년대 연길중심거리 일경
그때 연길에 ‘인천랭면옥'(仁川冷面屋),‘삼천리랭면옥',‘평양랭면옥’등 랭면집이 대여섯집 있었어요. 처음에는 일제시대 한자로 간판을 달았지요. 사람들은 영화를 보고 나와서는 랭면집에 들러 소주 둬잔씩 마시고 꼭 랭면 한그릇씩 들고 집으로 돌아갔어요. 어쩌면 그것이 하나의 연길풍경인 것 같았어요.
그후 사람들이 거리에서 기대를 흔들고 다니는데 나팔소리가 ‘쾅! 쾅!’울렸어요. 알고보니 연변대학 학생관악대가 ‘5.1국제로동절’경축행사를 하면서 서광장으로 오고 있었어요.
서광장이 어디냐 하면 지금의 ‘백리성’자리였어요. 왜 서광장이냐? 한족들이 동쪽에 살면서 그 곳을 서쪽이라고 했어요. 그때 연길의 개념은 ‘아래개방지'와 ‘웃개방지'였지요. 그 계선이 어딘가 하면 국자가라. 옛 연길은 국자가 동쪽을 말하고 우리는 ‘아래개방지'라고 불렀어요.
‘웃개방지'는 바로 공원다리부근이였어요. 일본사람들이 강옆에 와 살면서 공원다리 거기가 지세가 낮아 연집강물이 그곳으로 해서 백화동문쪽으로 흘러갔는데 무지개다리까지 강뚝을 해 이어놓고 연집강물을 부르하통하로 흘러들게 만들었어요.
국자가가 소년궁길을 선으로 해서 흥안까지예요. 아래개방지가 한족들이 주로 살던 옛 연길이예요. 후에 일본사람들과 조선인들이 들어와 살면서 ‘민항가',‘건설가'가 생기고…지금 롯데 쪽에는 일본병원도 있었어요. 해방 후 돌아가지 않은 일본사람들도 많았어요.
1954년에 주은래총리가 일본과 담판해서 중국에 남아있는 일본인들을 귀국시켰어요. 그래서 천진강에 모여 배를 태워 한기한기 보냈지요. 우리 반에도 김광수라는 일본아이가 있었어요. 엄마하고 둘이 남았는데 연길에서 조선인 남편을 해서 살았어요. 그 집이 연길의 유일한 파마집이였는데 “신생미장원”이라는 2층집이였어요.
1952년 9월 3일, 동북조선인민서점 앞을 지나 동쪽으로 서광장을 향해 행진하는 연변대학 학생대오
그렇게 연변대학 관악대들이 지나가는데 엄청 큰 나팔을 어깨에 멨더라구요. ‘붐빠 붐빠’하면서 서광장 5.1 경축대회에 오더라구요. 한 3년전만 해도 쏘련홍군이 서광장활동에 참가했다고 했어요. 쏘련홍군들이 연변을 해방했거든. 쏘련홍군이 1945년 8월 18일, 왕청 라자구로 들어와서 왕청, 이란, 연길, 룡정, 화룡을 해방했어요. 그래서 유명한 이스크라극단(로어로 '홰불'이라는 뜻)에서 쏘련홍군을 환영하는 극도 공연했어요. 1950년 그때도 이스크라극단이 있었어요.
지금의 중관촌 맞은 켠에는 ‘쓰딸린극장’이 있었구요. 해방 전에는 “간도극장”이라 하고 해방 후에는 ‘인민극장’이라 하였지요. 1946년도 년말에 영화관으로 되였어요. ‘쓰딸린 극장’은 그때 연길시내에서 유일하게 네온싸인으로 반짝거리던 곳이였지요.
“노래는 인간의 령혼에 가장 가까운 문화형태라고 생각해요”
5.1절이 지난 후 저는 무난하게 중앙소학교를 다니게 되였어요. 그때 연길에는 중앙소학교, 공원소학교, 하남소학교 3개 조선족학교가 있었어요. 학생들은 반짝반짝 빛나는 모자채양에 모자띠를 둘렀어요. 중앙소학교는 모자띠를 빨간바탕에 흰줄 두개 띄우고 구리로 한 ‘모표'에 ‘중앙'이라고 썼어요. 하남소학교는 흰줄 두개, 공원소학은 파란줄을 띠웠어요. 운동대회를 할 때면 ‘홍군'은 중앙소학교,‘백군'은 하남소학교,‘람군'은 공원소학교였는데 학생들은 이렇게 부르면서 서로 응원을 하군 하였지요.
1952년 8월 연길에서 열린 연변조선민족자치구 제1차인민대표대회 회장으로 들어가는 각족 각계 인민대표들
1952년 2월에 중앙소학교에서 처음 소선대가입식을 했어요. 그리고 9월 3일, 연변조선민족자치구(1955년 전국인구조사이후 ‘연변조선족자치주’로 개칭) 인민정부 성립대회가 서광장에서 열리게 되였어요.. 그땐 소학교 3학년부터 경축대회에 참가할 수 있었어요.
오전에 인민극장에서 대회를 하고 오후 세시쯤 되자 연변의 3만 여 명에 달하는 각족 인민들이 서광장에 모여들었어요. 우리는 저마다 초롱불을 밝혀들고 서광장에서 해방로 길을 따라 올라가면서 연변조선민족자치구 창립 경축행사를 벌렸어요.
“에루화 어절씨구 좋구나 좋네/ 해란강도 노래하고 장백산도 환호하네…연변조선민족 자치주 세웠네’사람들은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며 ‘자치구 창립 경축의 노래’ (차창준 작사 김성민 작곡, 후에 ‘연변조선족자치주 성립 경축의 노래’로 제목을 바꿈)를 목청 다해 부르고 또 불렀어요.
어찌 그렇지 않겠어요. 쪽박차고 두만강을 건너 이땅의 주인으로 되기까지 우리 민족 인민들은 얼마나 많은 피와 땀을 흘렸겠어요. 그날로 또 민족자치까지 실현할 수 있게 되였으니 그 감격과 행복 어디에다 비할 수 있겠어요.
나는 어린 시절에 할머니한테서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하며 ‘고향의 봄’노래를 배웠어요.그 노래는 우리 겨레들이 한세기를 거치면서 부르고 또 부르는 노래로 된거예요. 참, 노래라는 것은 인간의 령혼에 제일 가까운 문화형태라고 생각해요.
1952년 9월 3일 오후 연길 서광장의 경축인파
1954년 여름 방학에 연길 력사상 처음으로 공원소학교에서 하령영이 열렸어요. 각반에서 우수학생, 특장생들을 뽑아보냈는데 우리 반에서 나하고 김항성이 뽑혔어요. 선생님은 “너희들은 시 랑송도 잘하고 문학에 흥취가 있다.”며 우리 둘을 보냈지요. 연길시 소년하령영 문학써클(로어)에서 삐오네르(넥타이뜻로어) 문학소년으로 인정받은거예요.
하령영에서 미술선생님이 쏘련의 명화를 보여주었고 ‘금도끼와 은도끼’라는 동화를 지도하여 공연을 한 것이 얼마나 인상이 깊었던지. 지금도 그 미술선생님을 찾아뵙고 싶은 마음이 지워지지 않아요. .
소학교 졸업을 앞둔 1954년 겨울에 농촌견학을 갔어요. 그때 학교에서는 ‘하나의 붉은 마음으로 두가지 준비를 해야 한다’고 학생들에게 선전했지요. 1반부터 6반까지 ‘새벽농장’으로 집단농장 체험을 갔어요. 김시룡 사장이 나와 쏘련농장에 가본 경험을 들려주었어요. ‘새벽농장’에서는 중국의 첫 초급합작사를 세웠고 후에는 농업대학도 세웠어요. 김시룡은 전국 로력모범으로서 우리들에게 앞으로 농촌에 전도가 있다고 하면서 우리더러 농촌으로 올 의향이 있는가고 물으셨어요. 그때 우리는 목청을 돋구어 너도나도 큰소리로 대답했어요.
이 영성초급사의 농민이 꾸린 대학이 바로 려명농민대학이였고 그것이 연변농학원의 전신이 되였던 거예요.
그때 해란촌의 청년농민 여근택이 연길시2중을 졸업하고 농촌에서 동네처녀와 결혼하고 농촌에 뿌리박은 전형이였어요. 그때 지식청년들이 농촌에 내려갈 것을 많이 선전동원했지요. 그런 배경 속에서 《산간마을에 드리는 노래》(김경석 작사 동희철작곡)가 생겨난 거예요.
해맑은 하늘가에 꽃구름 피고
전야엔 푸른 물결 넘실대누나
우리가 지나온 길 몇백리런가
이 산골 언덕 찾아 마음은 꽃 피네
아 간곡한 나의 념원
내 마을이여
영원히 그대 품에 돌아왔노라
...
길림신문/ 글 김청수 사진 김성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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