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로고
왕과 창녀의 피가 뒤섞인 조르주 상드, 어머니는 누구?
조글로미디어(ZOGLO) 2019년5월3일 22시07분    조회:627
조글로 위챗(微信)전용 전화번호 15567604088을 귀하의 핸드폰에 저장하시면
조글로의 모든 뉴스와 정보를 무료로 받아보고 친구들과 모멘트(朋友圈)로 공유할수 있습니다.
[더,오래] 송동섭의 쇼팽의 낭만시대(22)
할머니가 그린 6살의 조르주 상드(George Sand). 상드의 할머니는 음악과 미술, 계몽사상 등에 조예가 깊었다. 파리 Musee dela Vie romantique 소장. [그림 Wikimedia Commons(Public Domain)]

조르주 상드(George Sand)는 작가로서 질과 양 모든 면에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프랑스 근대문학에 기여한 바가 컸다는 것이 상드 연구가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그녀의 문학적 성과는 과소평가되었다고 한다. 그녀가 근대 프랑스 사회에 미친 영향은 어느 여성보다 컸다. 그녀 이후 남성 필명을 사용하는 여성 작가도 유행처럼 생겨났다. 

상드의 출신과 가족에 대해서는 많은 말이 떠돌았다. 특히 그녀가 갑자기 세상에 알려졌고, 그녀 작품의 소재가 당시로써는 파격적이었으며, 공개적으로 펼쳐진 자유로운 삶에 반 규범적인 모습도 있었기 때문에 그녀를 둘러싼 억측과 근거 없는 소문이 많았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논란을 잠재울 생각이었는지 상드는 일찍부터 비망록을 써왔는데 그것은 1855년에 출간되었다. 

그 책, ‘내 생의 이야기(Histoire de ma vie)’에서 그녀는 자신의 가계에 대해 상세하고 솔직하게 서술했다. 그녀는 이것을 위해 여러 곳의 도서관과 고문서를 스스로 뒤졌다고 한다. 그녀의 선조를 훑어보다 보면 적어도 그녀 바람기의 기원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상드의 본명은 아망딘 오로르 루실 뒤팽(Amandine Aurore Lucile Dupin, 1804~1876)이었다. 

그녀는 폴란드 왕족의 후손이었다. 쇼팽 가족의 첫 번째 바르샤바 거주지는 색손(폴란드 이름은 Saski) 궁이었고, 그 궁을 쇼팽이 태어나기 약 100년 전에 폴란드의 왕이었던 아우구스투스 2세가 건축했다는 것은 앞서 서술했었다. (본 시리즈 6편 참조) 

필자는 독자들에게 이 왕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했었다. 조르주 상드는 바로 그 아우구스투스 2세의 핏줄을 이어받았다. 조르주 상드의 선조가 건축한 궁에서 쇼팽이 자랐으므로 두 사람의 인연은 아주 깊다고 할 수 있다. 힘이 장사였다는 아우구스투스 2세(1670~1733)는 바람둥이로도 유명했고 350명 이상의 자식을 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적법한 아들은 왕위를 이어받은 아우구스투스 3세뿐이었다. 

아우구스투스(Augustus) 2세. 폴란드의 왕, 조르주 상드의 선조이며 쇼팽이 살았던 색손 궁을 건축했다. 루이 드 실베스트르(Louis de Silvestre)의 원그림을 헨리크 로다코브스키(Henryk Rodakowski)가 가필. 우크라이나 Lviv National Art Gallery 소장. [그림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혼외 자식 중 극소수만이, 적법하지는 않더라도, 왕의 후손으로 인정을 받았다. 극소수 중 하나가 나폴레옹 이전에 프랑스군의 최고의 장군으로 꼽히는 모리스 드 삭스(Mauricede Saxe, 1696~1750)였다. 모리스 장군의 어머니는 백작 가문 출신이었다. 아버지 아우구스투스를 닮은 모리스는 힘이 장사였고 급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하는데 성년이 되어 프랑스로 왔다. 

모리스 장군은 용맹하기로 유명했다. 신속한 기동력으로 적을 기습하여 치명적 타격을 가하는 작전으로 명성이 높았다. 전쟁에서 연전연승을 이끈 모리스는 1743년 프랑스군의 대원수(大元帥)가 되었다. 그도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은 여러 명의 아이를 두었다. 그중 마지막 아이가 마리-오로르(Marie-Aurore, 1748~1821)였고, 바로 조르주 상드의 할머니였다. 

마리-오로르의 어머니는 ‘군부대를 따라다니며 병사들을 위해 춤을 추고 미소를 팔던 미천한 여인’이었는데, 유명한 장군 모리스의 눈길을 받으려고 애를 썼었다. 자신의 아이가 태어났지만, 모리스 장군은 세례식에 참석하지도 않았다. 아이의 이름 마리-오로르는 자신의 어머니에게서 따왔지만, 성은 멋대로 지어낸 가짜를 주었다. 장군은 아이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고 2년 후 세상을 떠났다. 장군의 도움으로 팔자 좀 고치려던 18세의 아이 엄마는 실망했다. 

모리스 드 삭스(Maurice de Saxe). 폴란드 왕 아우구스투스 2세의 사생아로 조르주 상드의 증조부. 나폴레옹 이전에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장군이었다. 모리스 쿠엔틴 드 라 투어(Maurice Quentin de La Tour) 그림. Old Masters Picture Gallery Dresden 소장. [그림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그녀 주위에는 아무도 책임감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는 아이를 데리고 여러 남자를 거쳤다. 그러던 중 프랑스의 왕세자비가 나타났다. 모리스 장군은 그 전에 프랑스 왕세자의 비로 자신의 이복형이자, 아버지 아우구스투스 2세의 유일한 법적 아들인 아우구스투스 3세의 딸을 추천했다. 프랑스 왕 루이 15세는 정략적인 이유로 그 추천을 받아들였었다. 장군의 질녀인 왕세자비가 소식을 듣고는 7살의 마리-오로르를 친모에게서 떼어내 수녀원과 왕립학교에서 교육을 받게 했다. 

누추한 곳을 전전하던 아이가 어느 날 왕실에서 보낸 궁중 복장의 시종들에 의해 화려한 마차를 타고 집을 떠날 때 어떤 생각이 들었을지 궁금하다. 마리-오로르는 고전과 계몽사상가들을 읽었고 음악과 미술에도 교양을 쌓았다. 왕세자비의 남편은 왕이 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의 자식 3명은 뒤에 왕이 되었다. (루이 16세, 루이 18세, 샤를 10세) 

왕세자비의 보호를 받고 있었기에 마리-오로르를 둘러싼 사람들은 그녀를 왕실의 사람으로 받들었을 것이다. 10대의 마리-오로르는 자신이 왕위 계승자들과 가족이라고 생각하며 보냈을 것이다. 왕세자비는 마리-오로르가 모리스 장군의 정식 후손으로 인정받도록 도와주었다. 그리고 선왕의 사생아와 결혼도 시켰는데, 신혼부부는 첫날밤도 치르지 못했고 남편은 결투에서 죽었다. 그때 마리-오로르는 18세였고 남편은 44세였다. 이듬해 그녀의 후원자 왕세자비도 세상을 떠났다. 

갑자기 의지할 곳이 없어진 마리-오로르는 여기저기 발붙일 곳을 찾았지만, 여의치 않아서 친모에게 돌아간다. 사창가에 있던 그녀는 딸에게 노래와 춤을 강요했다. 고결했던 10대의 삶은 꿈인 듯 날아갔고, 20대를 밑바닥에서 보내게 되었지만, 마리-오로르의 인격은 이미 굳어져 있었다. 비천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흠 없는 생활을 했다. 마리-오로르가 27살 때 친모는 세상을 떠났다. 

마리-오로르(Marie-Aurore). 조르주 상드의 할머니. 모리스 드 삭스 원수의 사생아로 태어났지만 교양 있는 여인이었다. 아델레이드 라빌 가이드(Adelaide Labille-Guiard) 그림. 파리 Musee de La Vie romantique 소장. [그림 Wikimedia Commons(PublicDomain)]

어머니를 잃은 마리-오로르는 수녀원에 들어갔다. 그때 루이 뒤팽(Louis Dupin deFrancueil, 1715~1786)이 찾아 왔다. 왕실의 재정 보좌관 출신인 그는 전부터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부유했고 유명한 사상가 장 쟈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의 친구이기도 했다. 마리-오로르는 그의 청혼을 받아들였다. 마리-오로르는 33살 위의 남편을 아버지라고 불렀고, 남편은 신부를 딸이라고 불렀다. 한해 뒤에 아들이 태어났고 친숙한 이름, 모리스(1778~1808)라고 불렀다. 

남편의 전처와 하나뿐인 자식이 일찍 세상을 떠났기에 마리-오로르는 이 두 번째 남편에게서 큰 재산을 물려받았던 것 같다. 그녀는 남편의 사후 프랑스 중부에 있는 시골 마을 노앙(Nohant-Vic)에 저택과 넓은 토지를 샀다. 아들 모리스는 할아버지를 따라 군인이 되었다. 그러나 조부의 용맹스러운 점보다 바람둥이 기질을 더 많이 이어받았다. 모리스는 정식 결혼 전에 하녀에게서 아들(이폴리트 샤티롱, Hippolyte Châtiron)을 두었고 다른 여인에게서는 딸을 낳았다. 

그리고는 군 생활 중 새 장수의 딸로 ‘군부대를 따라다니며 병사들을 위해 춤을 추고 미소를 팔던 미천한 여인’, 소피(1773~1848)를 만나 아이를 가졌다. 그녀 또한 모리스를 만나기 전 아비 모르는 아이를 여럿 낳았다. 둘은 상드가 태어나기 4주 전에 파리에서 식을 올렸다. 고상한 사랑을 통한 것이 아니었기에 모리스는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그 결혼을 자신의 어머니에게 숨겼다. 

상드와 그녀의 할머니는 이렇게 출생배경의 유사점을 타고났다. 자신의 출생에 대한 콤플렉스 탓에 유일한 아들의 아내는 좋은 가문에서 찾고 싶었던 할머니의 열망은 산산이 조각났다. 할머니가 며느리에게 얼마나 실망했을지 쉽게 짐작된다. 모리스는 어머니를 피해 전쟁터를 떠돌았고 어린 상드는 어머니와 파리에서 3년을 보냈다. 시골 노앙의 할머니는 전쟁터의 아들이 걱정이었다. 

모리스 뒤팽(Maurice Dupin). 조르주 상드의 아버지. 군인이었던 그는 상드가 4살 때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화가 미상. 조르주 상드 생가 소장. [그림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그러던 어느 날 새로운 아이의 출산을 앞둔 상드의 어머니는 어린 상드를 데리고 스페인 전쟁터의 남편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남자아이가 태어났는데 아이는 눈이 멀어있었다. 상드의 가족은 힘겹게 할머니가 있던 노앙으로 돌아왔다. 아들을 전쟁터에 보내고 노심초사하던 할머니는 마음을 놓았다. 그러나 힘든 여행 탓인지 얼마 후 아이는 사망했다. 아이 엄마는 아이를 묻자마자 다시 파내서 옆에 두고 하루를 지켜보았다. 차가운 아이의 체온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로부터 8일 후 상드의 아버지 모리스도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즉사했다. 소식을 들은 할머니는 맨발로 뛰어가서 아들의 시신 위에 쓰러졌다. 사고를 친구에게 전하는 할머니의 편지에는 눈물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각자의 아들을 잃은 두 여인은 화합할 수 없었다. 손녀 상드는 할머니의 모든 삶의 희망이자 이유가 되었고, 할머니의 한(恨)은 며느리에 대한 원망이 되었다. 할머니는 며느리에게 돈을 주고 노앙에서 떠나 보냈다. 상드의 어머니는 가끔만 딸을 보는 것이 허용되었다. 

할머니는 하녀의 아들 이폴리트 대신 비천한 여인의 딸 상드에게서 아들의 어린 모습을 발견했다. 그래서 손녀를 상속자로 결정했고 아들의 모습을 보기 위해 남자아이의 옷을 입혔다. 음악과 그림, 라틴어, 희랍어, 역사 그리고 계몽사상까지 폭넓은 교육은 상드와 이폴리트가 같은 가정교사에게 받았다. 상드는 자유 시간에 노앙의 숲과 들판을 뛰어다녔다. 상드와 할머니는 깊은 애정을 나누었다. 

자신의 과거에서 그렇게도 지우고 싶었던 것을 어쩔 수 없이 타고난 손녀에게 할머니는 엄격함 속에 애틋함을 쏟았고 손녀도 그 마음을 잘 알았다. 상드가 17살이었을 때 할머니는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의 마지막 말은 “너의 가장 친한 친구를 잃는구나”였다. 가장 높은 곳과 가장 낮은 곳을 오갔던 할머니는 자신의 정체성을 높은 곳에서 찾았고, 손녀도 같은 모습을 갖기를 원했다. 다음 이야기는 조르주 상드가 성장, 결혼을 하고 홀로 파리로 가는 과정에 관한 것이다. 

송동섭 스톤웰 인베스트 대표
중앙일보

파일 [ 1 ]

Total : 1576
  • ‘여인의 초상’ 도난 22년만에 햇빛   도난당한 줄 알았던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이 원래 전시됐던 미술관 벽 틈에서 22년 만에 나타났다. 이탈리아 안사(ANSA)통신은 10일(현지 시간) 피아첸차의 리치 오디 현대미술관에서 1997년 분실됐던 클림트의 ‘여인의 초상’(사진)으로 추정되는 작품이...
  • 2019-12-13
  • 조선언어문자의 법제화, 규범화, 과학화추진을 위한 중국조선어사정위원회 제31차 실무회의가 동북3성조선어문협의령도소조판공실의 주최로 12일 10일, 장춘에서 개최되였다. 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 김명철 부주임이 회의에 참석해 축사를 하고 동북3성조선어문협의령도소조판공실 책임자 박문수가 회의를 사회했다. 북경, ...
  • 2019-12-13
  •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문화를 말하다-29](림원춘 편-1)국단편소설상을 수상한 조선족작가 림원춘 고향의 옛집터에서(2016.7.5) 중국조선족 대표적인 소설가의 한사람인 림원춘은 1936년 12월 15일, 길림성 연길현 덕신향 안방촌 즉 지금의 숭민촌에서 태여났습니다. 그가 창작한 , 등 단편소설들은 근 ...
  • 2019-12-12
  •         연변가무단이 조선민족무용의 정수를 선보이기 위해 내한한다.   무용 '해란강의 여령들- 그 70년의 여정'이 오는 18일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 추계예술대 콘서트홀에서 열린다고 뉴스1이 전했다.   연변가무단은 73년의 역사를 가진 대표적인 동포예술단체이자 중국 100대 예술...
  • 2019-12-05
  •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문화를 말하다-28](김영금편-8)문화 올해초 실화집 《빛나는 탐구의 길》(灿烂的探求之路)중문번역작품집이 출판되였어요. 이는 우리 조선족자연과학자들의 성과와 업적을 전 중국에 알리는 일대문학거사라고 모두들 축하를 보내오고있어요. 올해초 작가출판사에서 출판된...
  • 2019-12-05
  • 조선족사회 주류 매체들, 중국 조선언어문학—신문학 교육에 건의 제기 “중국 조선언어문학—신문학 교육과 연구 70년” 학술 세미나 신문학부 분조토론회의 거행  신문학부 분조로톤회 현장 11월 30일,‘중국 조선언어문학—신문학 교육과 연구 70년’ 학술 세미나가 연변대학에...
  • 2019-12-02
  •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70돐 기념 특별기획-[문화를 말하다-27](김영금 편-7) 중국조선족자연과학자 계렬 실화집 《빛나는 탐구의 길》 연변대학 정판룡 교수는 암으로 세상 뜨기 몇 달 전 병상에 누워계셨는데 그때 우리 집 남편도 암으로 옆 병실에 입원해 있었어요. 내가 교수님 병실에 방문을 들어가니 ...
  • 2019-12-01
  • 장백산 기슭에 자리 잡은 조선족로인분회의 이야기 장백산 기슭에는 퇴직 후 한자리에 모여 신문을 읽는 로인들이 있는데 벌써 3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이들중 년세가 가장 많은 로인이 96세이며 나이가 적은 분이라 해도 65세 된다. 이들은 장백산 지북구로인협회 조선족로인분회의 분들이다. 2019년 10월 29일, 75...
  • 2019-11-28
  • 11월 25일, 연변홍보팀은 중앙텔레비죤방송국 재정경제채널(cctv-2)대형도시문화관광브랜드 경연종목인 《매력중국성》제3시즌 두번째 라운드경연종목 록화를 완수했다. 프로그람에서는 관광보석코스, 도시마음, 도시이야기 등 3개 방면으로 더욱 깊이 있게 연변문화관광자원을 추천, 소개했으며 연변인민들의 고마움을 보...
  • 2019-11-28
  • 홍보대사 연변조선족자치주 부주장 박학수(朴学洙)가 말하는 화면 뒤의 이야기  '매력있는 중국 도시' 방송을 탄 여흥을 안고 홍보대사로 나선 감흥을 이야기 하는 박학수 부주장. 11월 17일 19시, 중앙TV 제2채널에서 ‘매력있는 중국 신신한 연변'(魅力中国 鲜到延...
  • 2019-11-28
‹처음  이전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