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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시리즈 21] 오도구골의 〈노랑녀〉
조글로미디어(ZOGLO) 2019년10월10일 13시43분    조회: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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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문화를 말하다-21](김영금 편-1)

중국조선족문단의 녀류작가이며 기자였던 김영금녀사는 어린 시절부터 강경애와 같은 녀류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의악스레 노력하여 지금까지 소설, 수필,동화, 실화문학 등 다양한 쟝르의 문학작품집 24권을 출판하였습니다. 특히 정년퇴직후 그가 우리 나라 조선족과학자들의 사회주의 건설과 발전에 기여한 마멸할 수 없는 성과를 이야기로 집대성한 실화작품들은 독자들에게 무궁한 민족적 자부심을 안겨주며 주인공들의 정신과 위업을 계승하여 조국의 번영과 창성, 중국꿈 실현에 힘과 열을 이바지하도록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가 '별들을 찾아 수만리'길을 답사하면서 사명과 책임, 헌신으로 엮어낸 문학창작이야기 또한 감동이 없이는 읽을 수 없는 한편의 드라마를 방불케 합니다.

프로필 《 》    ‘ ’

1938년 4월 16일 길림성 훈춘현 오도구 출생

1961년-1964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 졸업, 훈춘제2고급중학교 교원

1964년- 30여년간 《연변일보 》, 《중국조선족소년보》에서 30여년간 기자 편집 주임 력임

1993년 정년퇴직, 중국조선족자연과학자들에 관한 실화문학 집필  

중국작가협회 회원, 연변작가협회 회원으로 활약

주요작품

1962년 단편소설 〈조약돌〉 발표, 소설집 《바다가에서 만난 녀인》,(1988년 료녕인민출판사 출판), 《마지막 질투》(2004년)

수필집 《푸른 바다 빨간 노을》 (1993년),《머나먼 초행길》 (1995년), 《돌아보는 옛날》(1997년), 《세월이 흘러 락엽도 지고》(1998), 《구라파기행 》(1999년), 《아이들과 함께 성장하는 부모》 (2004년 도서 출판 배움과 나눔),《인생길 굽이굽이》(〈흘러간 세월의 흔적을 지우고 싶지 않다〉(보고사 출판)

실화집 《단풍시절》 ( 1991년), 《유혹의 세계 》(1995년),《청산처럼 창공처럼》-1995년,《한세대의 별》1998년 중국조선족자연과학자실화집, 《빛나는 탐구의 길》(상, 하 2003년 료녕 출판 ),《灿烂的探求之路 》중국소수민족문학발전프로젝트 번역출판지원대상 2019년초 《중국작가》 출판사 출판

수상 경력

연변조선족자치주 ‘진달래’문예상, 연변작가협회 문학상 공헌상 등 20여차 수상

1987년 중공연변주위로 부터 ‘우수소년아동신문사업자’칭호 수여받음

실화집 《한세대의 별》 - 1999년 제6차중국소수민족문학‘준마상 ’수상, 동북3성 우수도서 1등상 수상

〈별들을 찾아 수만리〉- KBS 사회교육 해외동포체험수기 장려상수상

〈청출어람〉 –KBS 제10회 〈자녀교양수기공모〉 해외부 금상 수상 .한국월간 아동문학상 등 다수

 

오도구골의‘노랑녀’

나는 1938년 4월에 훈춘에서 다섯번째 골이 되는 오도구에서 태여났어요. 여덟살에 해방을 맞고 중화인민공화국의 탄생과 함께 우리 나라 모든 력사단계를 겪어오게 되였지요.

기자들의 취재를 접수하고 환담을 나누는 김영금 작가

내가 없는 가족 사진

우리 집에는 〈내가 없는 가족 사진〉 한장이 있어요. 그 사진은 1938년 훈춘에서 사진사가 와서 콩 두말을 받고 찍어준 사진인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찍은 가족사진이라고 했어요.

사진은 우리 가족들이 산지 50년이 된다는 초가집을 배경으로 하고 찍었어요. 앞줄에는 아이들과 녀자들이 섰는데 그때 어머니는 만삭이였어요. 따져보니 나는 그때 엄마의 배속에 있었더군요.

뒤줄 가운데는 할아버지가 서계셨지요. 할아버지가 7살 될 때 쯤 그러니 1880년대에 증조할아버지가 아들 셋, 딸 하나를 거느리고 조선에서 두만강을 건너왔답니다. 훈춘에서 산을 넘고 넘다가 다섯번째 골에 발을 붙이고 집을 짓고 살게 되였는데 그곳에는 워낙 만족 집 몇호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증조할아버지네는 처음 장씨 성을 가진 만족집 밭을 붙이며 생계를 유지하였고 점차 밭을 일구기 시작하였지요. 수림이 무성하여 논은 일구지 못하고 주로 피낟과 조, 감자를 심어 먹으며 살았는데 나중에 우리 가문의 후손들만도 100여명으로 뻗었다고 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이곳에 정착해 살면서부터 박씨네며 리씨네들이 줄레줄레 모여들다 보니 오도구는 점차 큰 부락으로 되였지요. 거기에다 일본군대들까지 쏘련을 진공하려고 주둔하고 있었고 일본학교도 있었는데 학생이 300명 정도 되였답니다.

할아버지 오른쪽 옆에는 독립운동을 하느라 떠돌다 가정도 못 이루고 만년에 우리 집에 얹혀 사셨다는 할아버지의 삼촌이 계셨고 왼쪽 옆에는 우리 집 기둥인 아버지 그리고 털보삼촌이 서 계셨어요. 아버지는 만족들이 꾸리는 학교에서 학급장까지 하는 우등생이였는데 할아버지께서 중도에 결혼을 시키는 바람에 16살부터 가문의 중임을 떠메셨습니다. 대가정의 기둥이 된 아버지는 황소처럼 일하셨고 새벽부터 식구들을 인솔하여 묵밭을 일구고 돌밭을 개간하였지요. 털보삼촌은 일제놈들의 부역에 나가 목재판에서 일하다가 큰 나무에 치여 37세에 네자식을 우리 집에 맡겨놓고 세상뜨셨습니다.

지은지 50년이 넘는 초가집을 배경으로 1938년에 찍은 가족사진

그리고 다시 찬찬히 여겨보면 뒤줄 맨 옆자리에 흰 치마저고리에 흰 머리수건을 두른 할머니가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입니다. 할머니는 열두살이 되던 해 야속한 친정부모들이 동산을 넘어 쏘련으로 이주해 가면서 할머니를 우리 할아버지한테 주고 갔답니다. 열두살에 할아버지와 결혼한 할머니는 평생을 살아오면서 친정이야기를 한마디도 입에 올린 적이 없고 친정소식조차 알려고 하지 않으셨답니다.

할머니는 낫 놓고 기윽자도 모르지만 따로 현명한 분이였어요. “밖에 나가서는 남부터 생각하고 집에 들어와서는 참고 두리뭉실 살아라”고 늘 자손들을 일깨워주며 가족화목을 도모했지요.

자그마한 키에 미모를 가진 우리 어머니는 량반집 딸이였답니다. 4대, 5대 대가정의 식사준비, 옷 짓기를 혼자서 하셨고 날마다 들이닥치는 친척들의 시중도 군소리 없이 조용히 해나갔지요. 엄마는 하루종일 쉴새 없이 돌아쳤고 ‘바보’처럼 일만 하였어요. 어린 나이에도 그러는 엄마가 불쌍했고 나는 엄마품에 한번도 따뜻이 안겨보지 못해 심술을 부리기도 했지요.

할머니와 어머니는 그렇게 사이가 좋았답니다. 할머니는 굵은 베를 짜고 어머니는 열새베를 짜면서 집안 살림을 맡아 하였지요. 나의 할머니와 어머니는 14살 차이밖에 안 난다고 했어요. 어머니가 부엌 앞에서 나를 낳으니 할머니가 받았고 이듬해 할머니가 뒤 울안 오얏나무 밑에 짚을 펴고 넷째 고모를 낳으니 어머니가 받았답니다. 그런데 앞줄 어머니의 옆자리에 서있던 꽃 같이 고왔던 셋째 이모는 병원도 없는 골안에서 아이를 낳다가 난산으로 27세에 저 세상으로 갔습니다.

그때 우리 집에는 열세식구가 있었는데 할아버지는 날마다 미투리를 삼고 삿자리를 결으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아무리 삼고 삼아도 마지막 사람의 것을 만들 때면 첫 사람의 미투리는 언녕 해진지 오래 되였지요. 그래서 우리 녀자들은 아예 신을 신을 념을 못했고 여름이면 맨발바람으로 다녔어요.

식사를 할 때면 할아버지네는 작은 둥근상을 하나씩 차지하고 음식을 드셨고 아버지랑 삼촌네는 네모난 나무밥상에 마주앉아 식사를 했어요. 엄마랑 고모랑 우리 녀자들은 밥함지를 가운데 놓고 빙 둘러 앉아 먹었는데 누가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도 몰랐지요.

그렇게 우리 녀자들은 자리가 없었어요.

해방을 맞다

여덜살 되는 해 1945년도 8월에 나는 코가 크고 머리, 눈이 노란 〈마우재〉(마을 사람들은 쏘련사람들을 마우재라고 불렀음)들이 동산쪽으로 넘어오고 왜놈들이 서산쪽으로 도망치는 것을 보았어요.

이 여름 뜨락의 꽃밭에서

그때 마을사람들은 어느 쪽이 좋은 사람들인지 몰라 피난을 간다는 것이 일본군들이 빠져간 서산쪽으로 몰켜 갔지요. 그러니 일본놈들은 마을사람들에게 총을 쏘아댔어요. 그때 쏘련으로 자주 나들던 기만이라는 마을청년(지하당원)이 달려와 쏘련군은 우리를 해방하러 온다고 알려주었어요. 그러면서 빨리들 돌아가 〈우라〉를 웨치며 마우재들을 영접하라고 했지요.

과연 마우재들을 가득 실은 트럭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신작로로 올라오고 있었어요. 마을사람들은 팔을 흔들며 〈우라! 우라!〉하고 웨쳤지요. 나도 베치마를 입고 할아버지곁에 붙어서서 웨쳤어요.

“우라- 우라-”

“할아버지, 〈우라〉라는 것이 무슨 뜻이예요?”

나는 〈우라〉를 웨치다 말고 할아버지 베적삼깃을 당기며 물었어요.

할아버지는 머리를 가로 저으며 말씀하셨어요.

“나도 모른다. 그저 남들이 하는 대로 하면 랑패 없느니라.”

그러는 우리 앞으로 마우재들이 사탕봉지며 과자봉지를 내리뜨렸어요. 그때 나는 처음 과자라는 것을 먹어봤어요. 저녁에 아버지는 어디서 들었는지 〈우라〉라는 것이 〈만세〉라는 뜻이라고 알려 주어 우리 식구들은 모두 배를 그러안고 웃었어요.

해방을 맞은 뒤 마을에서는 일본학교 간판을 떼고 조선족학교간판을 달았어요. 하지만 나는 그전부터 수토관계로 심한 관절염을 앓으면서 밖으로 나가려면 벌벌 기여다녀야 하였어요.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산에서 캐여온 독활이라는 약초로 술을 고와 나에게 먹였어요. 나는 걸어서 학교로 가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그 술을 두달 정도 먹었는데 과연 걸을 수가 있게 되였지요. 그런 시골에도 다 살아가는 방법이 있더군요.

나는 그 해 학교에 입학하였는데 10살짜리도 있고 지어 열여덟쌀 짜리도 다 한 반급에 다녔어요. 그때는 학생들이 가난해서 자기로 짠 베옷을 입고 맨발 바람으로 다녔어요. 걸상도 등발을 놓고 그 우에 올라앉아서 기다란 널로 만든 책상에 마주 앉아 공부를 했어요. 교원도 없어 마을의 지식있는 로인들을 모시고 〈나아가자 나가자〉 하는 〈총동원가〉 노래부터 배웠어요. 후에 훈춘중학교 졸업생들이 오면서 정식으로 공부를 배웠지요.

소학교 5학년이 되였을 때 나는 또 륵막염에 걸려 심하게 앓았어요. 마을에는 병원도 없어 아버지가 나를 파리에 싣고 45리 떨어진 춘화병원에 데리고 가 치료를 해주었어요. 병치료를 받으면서도 나는 배보에다 책을 싸가지고 가 틈만 있으면 공부를 했어요. 그리하여 졸업시험에 우리 반급 50명 학생 중 내가 1등을 했지요.

마침 내가 소학교를 졸업하는 그해 1951년에 춘화마을에 중학교가 섰어요. 정작 중학교로 가자니 금방 륵막을 앓았지 관절염으로 바로 걷지도 못하지 나는 안타깝기만 하였어요. 이때 나를 특히 귀여워하는 할머니께서 나를 들춰 업고 길을 떠났어요. 〈녀자도 공부를 잘하면 출세할 수 있다〉고 하시면서. 할머니가 힘들어 하면 반주임 선생님이 또 바꿔 업으며 나를 춘화중학교에 입학시켜주었어요.

신체검사를 해보니 키가 1메터 32센치메터이고 체중이 23키로그람도 안 되였어요. 소학생들이 중학교대문을 지나가며 들여다 보고 “야 –조런 것이 다 중학생이다야!” 하고 골려주기도 하였지요. 워낙 어릴적부터 작고 여위고 머리가 노란 나는 '노랑녀'이라는 별명을 달고 다녔어요.

내가 하숙을 정한 집은 또 생활이 곤난하여 계속 감자에 좁쌀밥만 먹으니 견디기가 힘들었어요. 토요일 교학이 끝나면 집생각이 나서 우리 오도구 13명 학생들은 함께 45리길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오군 하였어요. 떠날 때는 해가 있었지만 먼 길을 걷다보면 늘 밤이 깊어지 군 했지요.

그런데다 대륙도구 마을을 지날 때면 산어구에 늘 범이 나타났어요. 로인들의 말에 의하면 범은 불을 무서워한다고 하여 겨릅대를 묶어서 불을 달아가지고 다니기도 하였지요. 또 누군가 범은 한가운데 사람을 물어간다고 알려주었어요. 그러니 누구도 가운데 서지 않겠다고 하여 남자고 녀자고 빙 둘러서서 손에 손을 잡고 밤중에 집으로 돌아왔지요. 그리고 월요일 새벽이면 또 학교로 떠나왔어요.

그때 교사라야 폭격을 맞은 일본영화관을 수리하고 거기서 공부를 했어요. 후에 점차 교사도 짓었지만 책도 없고 도서관도 없었어요. 내가 3학년이 되였을 때 훈춘중학교를 졸업한 선생이 춘화중학교 교원으로 왔어요. 그 선생한테서 우연히 강경애의 〈인간문제〉라는 책을 보게 되였지요. 그 책이 나에게는 일생의 동력으로 되였어요. 그 책을 본 뒤로 작가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나는 강경애와 같은 녀자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게 되였지요.

고중으로 가는 험난한 길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는 해 또 행운이 찾아왔어요. 훈춘에 연변 제4고급중학교가 선다고 교장선생님이 선포를 하였어요.

해방후 처음 룡정에 연변 제1고중이 서고 연길에 제2고중, 제3고중(한족학교)이 서고 1954년에 훈춘에 제4고중이 서게 되는 것이였지요. 그러니 나는 꼭 고중에 가야겠다고 이를 옥물었어요.

올 6월 연변단풍수필회에서 조직한 문학창작 좌담회에서의 김영금작가

그런데 공교롭게도 졸업하는 해 고중시험을 훈춘에 가 치게 되였어요. 시험을 치러 떠나려 하는데 마침 홍수가 져서 훈춘으로 가는 사람과 차량을 실어나르던 배가 물에 밀려가고 없었어요.

선생님은 방법이 없어 학생들을 데리고 산을 넘었어요. 3일안에 들어서지 못하면 시험자격이 취소된다고 하셨어요. 그때 춘화중학교 졸업생이 100여명이 되였는데 고중시험 치러 떠난 학생은 50- 60명이였어요. 집생활이 구차하여 포기한 학생도 있고 시험치러 가던 도중 되돌아간 학생도 있었지요.

꼬박 이틀동안 산을 에돌아 걸어온 녀학생들은 산비탈에 쓰러져 더는 걷지를 못하였어요. 우리를 데리고 떠난 백선생은 ‘물병아리’가 된 학생들을 하나하나 끌어다 너럭바위우에 앉혀놓고는 길 아래우를 훑어보며 안절부절 못하였어요. 나는 가뜩이나 아픈 다리를 끌고 비를 맞으며 산길을 톺아 오르고 나니 일어설수 조차 없게 되였지요. 너무도 안타까와 닭똥 같은 눈물을 똑똑 떨구었어요.

그러면서도 기어이 학생들을 따라 시험장까지 갔는데 온통 흙투성이 된 학생들이 시험장에 들어서니 시험관들은 모두 놀라하였지요. 우리가 품에 품고 간 연필은 비에 젖어 다 갈라졌고 책은 수세미처럼 되였어요. 시험관 선생들은 부랴부랴 연필을 얻어다 우리에게 나눠주었지요. 어떤 학생들은 시험을 치다 말고 책상에 엎드려 잠에 곯아떨어지기도 하였지요.

나는 도정신하고 시험을 쳤는데 그 번 시험에서 춘화중학교 졸업생중 유일한 녀학생으로 연변제4고중에 입학하였던 것이였어요. 그런 나를 두고 아버지는‘악귀신 ’(의악스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칭찬 삼아 욕 삼아 하였지요.

내가 고중을 다닐 때는 우리 나라가 가장 곤난한 시기였어요. 이모네 집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였는데 삼실을 멀건 고량미 (수수쌀) 죽을 먹었어요. 그렇게 죽을 먹으며 단칸집에서 사는 데 나까지 끼이게 되니 사돈할머니는 나를 집으로 빨리 돌아가라고 잘 때면 제일 추운 창문 밑에 끌어다 놓았지요. 그때는 그 할머니가 그렇게 무섭고 미웠지만 나중에는 사돈할머니가 얼마나 힘들었겠는가를 리해하게 되였지요.

그래도 이모는 이모대로 고량미죽을 〈변또〉(일본식 밥그릇)에 담아서는 내가 학교가는 길옆 창고우에다 몰래 올려 놓군 하였지요. 나는 그 걸 가져다 점심을 먹군 하였는데 그만 사돈할머니한테 들키는 바람에 점심도 매일 같이 굶었지요. 그러면서도 끝내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어요.

그렇게 여섯달 있다가 할머니가 비여 있는 일본집을 수리하여 가마를 걸어줘서 2년 넘게 자취생활을 하였어요. 두번이나 가스중독에 걸려 쓰러지니 아버지가 와서 번마다 가마를 빼가군 하였어요. 그때는 중학교를 졸업해도 공작할 수 있었으니 여느 상점에라도 들어가 일하면 되지 않느냐 하는 것이 아버지의 주장이였지요. 아버지가 가마를 실어간 뒤에도 나는 집으로 돌아갈 념을 않고 옆집에 가 〈쟁개미〉를 빌어다 할머니가 숨겨놓은 좁쌀을 꺼내 끓여먹으면서 계속 공부를 견지했지요.

아버지가 가마를 빼가면 할머니가 도로 실어왔어요. 할머니는 농한기에는 산나물을 캐다가 반찬이랑 해주면서 나의 하숙집에 와 밥을 해주었어요. 춘화중학교를 다닐 때도 할머니는 3년동안 하숙집에 바치는 쌀과 남새를 몇 달에 한번씩 실어다 주었지요. 할머니는 늘 호랑이가 내려오는 그 무서운 산길을 오르내리면서 “녀자도 공부를 잘하면 출세한다”는 그 말을 자주 되뇌이군 하였지요. 할머니도 나도 〈출세〉가 무슨 뜻인지는 몰랐지만 아무튼 공부를 계속 하면 산골을 벗어날 수 있다는 뜻으로 리해했고 나는 할머니의 그 〈명언〉을 가슴에 명기하였어요.

온 나라에 고급사가 일떠서던 때 아버지는 숱한 자식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훈춘에서 20리 떨어진 신화촌으로 이사를 왔어요. 산밑으로 가면 15리가 되니 나는 저녁 먹으러 집으로 가군 하였지요. 고급사때는 집식구들도 마을식당에서 집체화식을 하였어요. 내가 가면 할머니는 뭐라도 먹이려고 마을식당에 가보면 가마가 땅땅 말라 있더라고 했어요. 그래서 저녁도 못 얻어 먹고 돌아올 때가 많았지요.

당시 7원 50전을 내면 숙소에 들 수 있었으나 나는 그 돈을 낼 수 없어 계속 자취생활을 하였지요. 그때 한 친구가 자기는 위가 아파 밥을 못 먹겠으니 나더러 대신 타다 먹으라고 밥표를 건네주던 일이 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요.

나는 굶기를 밥먹듯 하면서도 꼭 대학으로 가고 작가가 되겠다는 일념을 버리지 않았지요.

/길림신문 김청수기자, 영상사진 김성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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