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문화를 말하다-22](김영금 편-2)
뻐스도 기차도 구경 못한 산골에서 그것도 녀자가 고중 가고 대학 가는 일은 신화와 같은 일이였지요.
옛날 고학의 년대를 행복한 추억으로 떠올리는 김영금 작가.
까치가 울던 날
내가 고중 다날 때는 정말 어렵고 힘들었어요.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공부에만 매달리다 보니 강의를 듣다가 두번이나 까무러쳤댔어요. 숙소를 여덟 번 옮기고 꼬박 1년동안 점심을 굶으며 살던 나날은 정말 하루가 삼추 같았어요.
마지막 반학기가 남은 방학 때였어요. 남들은 학교에 남아 대학입학시험준비를 대대적으로 하는 때 나는 개학준비를 위해 집으로 돌아왔어요. 나보다 한 살 어린 고모와 함께 날마다 푸름해서 가마니틀에 새끼날을 메워놓고 가마니를 짰어요. 음력설 전으로 가마니를 50개는 짜야 그걸 팔아 설에 먹을 고기를 장만하고 거기서 좀 떼여 학습장을 맬 백로지 20장을 살 수 있었어요. 설이 지난 다음엔 또 보름까지 어떻게 하나 가마니를 60장은 짜야 학잡비를 마련할 수 있었지요.
학비 4원, 책값 1원, 잉크 원료와 철필촉, 학잡비 6원, 반달식비 4원, 방학전에 꾼 식비 3원…
나는 고방에 들어가 손베개를 하고 고민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문밖에서 까치가 요란하게 울어댔어요. 문을 차고 나가보니 돼지굴 옆에 있는 앙상한 나뭇가지에 까치가 올라앉아 꽁지를 달싹이고 있었어요. 옛날 시골에서는 까치가 울면 좋은 소식이 오거나 귀한 손님이 온다고 했어요. 나는 무슨 기쁜 소식이 생길 것 같아 은근히 기다리는데 우편배달이 내 앞에 와 편지 한통 내밀었어요.
내가 제일 싫어하는 남학생이 보낸 련애편지였어요. 세상의 미사려구는 죄다 끌어다 써놓았어요. 남은 보리고개를 넘기에 골이 아파 죽을 지경인데. 나는 화김에 갈기 갈기 찢어서 변소에 활 던져 버렸어요. 그리고 발치에 있는 흙덩이를 주어들고 애매한 까치를 쫓아버렸지요.
고중시절 친구들과 함께.
한참 후에 훈춘시내에 잎담배를 팔러 갔던 주정뱅이 할아버지께서 긴 백발수염을 휘날리며 헤벌죽해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어요. 할아버지는 하루 건너 어딘가에서 술을 마시고는 큰길이 좁다 하게 비틀거리며 대문에서부터 “농부 일생이 무한이로다…에헤야 …얼씨구 좋다” 하며 노래 같지 않은 노래에 춤 같지 않은 춤을 너풀너풀 추면서 들어왔어요. 그러다가 누구든 달려나가 마중해 드리지 않으면 아주 야단이 일어나지요. 그날 할아버지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연길 의약공사 종업원으로 일하는 우리 집 유일한‘공작원’큰오빠가 훈춘에 와 일보고 래일 집으로 온다고 전하면서 기뻐하시는 것이였어요.
“까치가 울더니 이런 소식이 왔구나!” 할머니는 이마의 주름살을 펴면서 기뻐하였어요.
“어제부터 오른 눈이 자꾸 웃길래 웬 일인가 했더니!” 말수 적은 어머니도 머리를 훔치며 부산을 떨었어요.
어머니는 두부콩을 불군다 떡쌀을 불군다 들락날락하고 할머니는 사랑칸에 매달아놓은 주머니를 꺼내 들고 말린 고추며 버섯, 고사리 등을 끄집어냈지요.
큰오빠가 오니 자연 우리 집 ‘우환'인 나를 두고 이야기가 오갔어요.
“아주 무서운 년이다! 말 못할 계집애다! 부모 형제 생각은 않고 제 욕심만 차리는 년이다!” 아버지는 언성을 높여가며 나를 욕하였어요.
“지금은 녀자들도 공부를 시켜야 합니다. 대학에서는 조학금을 주기에 집에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가까이에서 돌봐주겠으니 몇 년 기다리면 저 애는 출세하게 될 것입니다.”오빠는 극력 아버지를 설득하려고 하였어요.
1959년 큰오빠의 결혼식에 아버지를 모시고.
아버지의 음성은 점차 낮아졌고 나중에는 코 고는 소리가 들렸어요. 나는 사이문에 귀를 바싹 대고 엿듣다가 아버지의 코 고는 소리가 들리자 왈칵 설음이 북받쳐올라 헌 이불 속에 머리를 파묻고 실컷 울었어요. 압력과 역경에는 벋디디는 힘이 생겨 이를 사려물었지만 오빠의 동정에는 그만 마음이 녹아내려 어깨를 들먹이며 울고 또 울었지요.
오빠는 한 겨울에도 솜옷을 입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며 다니는 나를 데리고 상점에 가 솜을 사고 천을 사서 솜옷 한벌을 해 입혔어요. 난생 처음 입어보는 솜옷이였어요. 오빠는 출장길에 집에 들렀다가는 늘 입었던 속내의까지 다 벗어 동생들에게 주고 갔지요.
그후 개학을 앞두고 고급사 강고금 녀사장이 반년 조학금 소개신을 떼여가지고 찾아왔어요. “고향마을에 녀대학생이 생기겠는데 많이 부추겨주어야지”하면서 고급사명의로 돈 10원을 보조해 주는 것이였어요. 그때 세월에 정말 하늘 같은 돈 10원이였지요.
개학이 되였어요. 대학시험까지 버틸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관건적 시각에 소학교 담임이였던 김규렬 선생님이 훈춘중앙소학교에 전근되여 오면서 나를 찾아왔어요. 그토록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우등생으로 공부를 잘한다는 학교측의 소개를 듣고 꼭 대학으로 보내 주겠다면서 나를 자기 집으로 데려갔어요. 김제 김씨 동성동본인 김선생님은 나를 한집식구로 보살펴주었지요. 사모님도 집의 로인분도 모두 '공작'하는 분들이라 생활이 유족한 그 집에서 나는 처음 이밥도 먹어보고 1전 한푼 내지 않고 근심걱정 없이 공부를 하여 대학시험을 치르게 되였어요.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 학생으로
1957년에 나는 드디여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부에 입학하게 되였어요. 대학교에 와 보니 우선 도서관이 있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몰랐어요. 게다가 대학에서는 학생당 13원 50전씩 발급해 주었어요. 7원 50전이면 밥 먹고 나머지로는 생활용품을 사 쓰면서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었어요.
국가의 신세로 대학공부를 하게 된 우리 세대들은 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강하고 사명감이 있었어요. 그때로부터 나라에 보답하겠다는 마음을 굳게 다지였고 우리 민족을 위하여 무엇이든지 하겠다는 각오를 가지게 된 것이였지요
대학을 다니는 동안 첫 반년은 공부를 제대로 하였는데 반우파투쟁이 시작되면서 공부를 못했어요. 우리가 그토록 숭배하던 리욱선생님이랑 김창걸선생님이랑 다 교수를 못하였어요. 몇몇 젊은 교원들만 교단에 섰어요. 쏘련류학을 마친 정판룡 교수도 60년대 초에 모교로 돌아왔으나 우리는 그의 교수를 받아보지 못했어요.
대약진, 인민공사 시기에 들어서면서 학생들은 공부는 하지 않고 쇠가마를 걸고 콕스를 태우면서 강철을 만드느라 헛된 일들을 많이 했어요. '4해를 소멸하라'는 상급의 지시를 받들고 연길 흥안 지역에 나가 허공에 그물을 늘이고 참새를 잡느라 애를 썼지요. 참새들이 그 넓은 하늘 공간을 날지 않고 학생들이 쳐놓은 그물에 걸릴 리가 만무했지요. 이렇게 우습고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많이 벌어졌어요.
우스운 일들 중에는 정말 빼놓을 수 없는 일이 따로 있어요. 우리 연변대학의 학생들은 대부분 한어를 잘 못했어요. 글은 읽을 수 있으나 말이 잘 안 되였지요. 그때 연변대학에 한족 교원 2명 외에는 모두 조선족들이였어요. 한어수준을 높이기 위해 ‘한어대약진'을 벌리기도 하였지요.
우리 학급의 한 학생은 식당에 가서 명란반찬을 먹어야 하겠는데 한어로 어떻게 말해야 할 지 몰라 “명태 아들을 달라”(明太儿子给吧!)고 소리치여 큰 웃음거리를 만들었어요. 지어 연변대학 제1기 졸업생으로 북경대학의 첫 연구생으로 입학한 유명한 유기화학 교수인 강귀길선생도 처음에는 한어를 잘하지 못해 당소조회의를 한다는 말도 알아 듣지 못해 못 참가했다고 했어요.
그 시기에 우리는 한어를 그렇게도 못했어요. 한 간부는 추도식을 사회하면서 묵도를 그치라는 말을 해야 하겠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말이 떠오르지 않아 “거둬치워라”라는 식으로 “拉倒吧”라고 하여 울지도 웃지도 못했던 일이 지금까지도 전해 지고 있어요.
연변대학 한어연수졸업기념(1961).
우스운 일 허망한 일들이 많이 벌어지는 그때 나는 두 친구와 함께 저녁이면 도서관에 붙박혀 책이란 책은 닥치는 대로 다 읽었어요. 지어 헤겔의 변증법, 포유르바하의 유물론과 같은 철학책도 의미를 잘 모르면서 읽고 쓰고 하였는데 후에 맑스주의를 배우면서 맑스가 헤겔의 변증법과 포유르바하의 유물론을 결합하여 맑스주의를 만들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였지요.
그리고 력사책이란 력사책도 다 찾아 읽었어요. 워낙 고중시절부터 나는 력사에 각별한 흥취를 가지고 있었지요. 우리는 고중시절에 력사교과서만도 24권이나 배웠어요. 중국 고대사, 현대사, 근대사, 세계력사, 조선통사도 다 배웠어요. 그런데다 연변대학에서 보다 많은 력사도서들을 접하면서 민족의 력사와 운명에 대한 고민도 하게 되였지요.
후에는 력사탐방도 즐기면서 청나라 유적지들도 돌아보았어요. 300년을 통치하며 흥성했던 한개 민족이 어떻게 되여 마지막에는 성도 없고 문자도 없고 언어도 없게 되였을가. 우리 민족은 어디로 어떻게 발전해 가야 할 것인가 하는 사색을 하게 된 것이였지요.
그때 대학교에서 다방면의 책들을 많이 읽으면서 지식면을 넓힌 것이 후에 기자로 되고 작가로 되는데 큰 도움을 주었어요.
부모들의 별세
1961년에 나는 연변대학을 졸업하고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모교인 훈춘고중으로 돌아가게 되였어요. 그때 동생 둘이 훈춘 고중과 중학교에 다녔는데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꼭 동생들을 맡아주겠노라고 아버지와 약속을 했더랬어요.
그런데 아버지는 내가 대학을 졸업하는 그해에 병으로 49세를 일기로 세상뜨셨어요. 증조할아버지네가 오도구에 정착하여 장쾌손이라는 만족집 밭을 소작짓던 데로부터 아버지대에 와서는 황무지를 일구고 돌밭을 개간하여 그 많은 대가정 식솔들이 배 고픈 고생울 하지 않게 되였지요. 나도 일곱살이 될 때부터 소수레에 앉아 십리 밖에 가서 돌밭의 돌을 주어내는 일을 도왔지요. 그런 아버지는 해방 후 ‘상중농'이라는 모자를 쓰고 빈하중농의 비판을 받았지요.
우리 아버지는 대단히 건강했고 부지런 했어요. 새벽부터 일어나 일하셨는데 나는 아버지가 누워 주무시는 것을 한번도 본적이 없어요. 아버지는 남의 집 암소를 맡아 기르며 반작이를 하였지요. 새끼를 낳으면 이번에는 주인집, 다음번에는 아버지가 가지면서 소를 네마리나 늘였어요. 그런데 생명처럼 아끼던 소를 고급사에 바치고 나니 너무도 아쉬워 아예 우사를 맡아보는 일을 하며 하루 밤에도 몇번이고 일어나 소에게 여물을 주었지요.
인민공사때에는 일을 많이 할수록 빚을 많이 지게 되였어요. 아버지는 늘 얼굴기색이 굳어있었고 농민에게 땅을 가꿀 자유를 주고 공량을 바치고 나머지를 배불리 먹을 수 있기를 기대했지요.‘인민공사 만세'를 부르는 세월에 아버지는 “야-이밥 한 사발을 랭수에 시원히 먹었보았으면 좋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저세상으로 가셨어요.
미처 아버지의 신세를 갚지도 못하였는데 아버지는 영영 떠나가신 것이였어요. 너무도 애달프고 안타까와 나는 가슴을 치며 통곡했지요. 아버지의 유전이랄가 아버지의 정신을 대물림했다고 할가 나도 후에 아이들 셋을 키워 대학에 보내면서 애들이 잠들기 전에 한번도 먼저 자본적이 없어요.
1961년 대학을 졸업하는 그해 겨울, 연변에는 한어교원이 모자라 조선언어문학학부의 절반이상 학생들이 학교에 남아 한어연수를 하였어요. 그러던 어느 날, 연수를 마치면서 학교에서는 석달로임 130원을 한꺼번에 발급하였어요.
그 때 50전이면 생일집 떡을 먹을 수 있던 세월인데 그렇게 큰 돈뭉치를 손에 쥐고 보니 가슴이 후들후들 떨렸어요.‘고진감래'의 함의를 철두철미하게 느끼는 순간이였지요. 나는 그 돈을 1전도 다치지 않고 파란 꽃종이에 싸서 고스란히 할머니 손에 쥐여드렸어요.
우묵한 할머니의 두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어요. 우는 할머니의 모습을 종래로 본적 없는 나는 더럭 겁이 나기까지 하였어요. 할머니는 그 돈을 손에 꼭 쥔 채 말 한마디 없이 멍하니 창 밖만 내다보고 계셨어요.
아글타글 고생하다가 딸자식한테서 술 한잔 받아 마시지 못하고 일찍 세상 뜬 아들- 나의 아버지를 생각하시는지. 잎담배묶음을 들고 다니며 판 푼돈을 큰손녀인 나한테 쥐여주던 주정뱅이 할아버지를 생각하시는지…
60년대초 증손자 보러 온 할머니를 모시고.
몇년 후 감기 한번 하지 않던 할머니는 저녁밥까지 지어놓고 가마목에 곱게 누운 채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추운 겨울날, 아버지와 함께 파리에 소를 메워가지고 도로기에 새를 펴고 땔나무 하러 떠나시던 할머니, 감발을 하고 노루가죽바지를 치마우에 입으시고 아버지의 큰 개털모자를 쓰시고…
훈춘거리 하천 뚝 밑에 있는 헌‘일본집'을 수리하여 구들도 다시 놓고 흙을 파다 벽도 바르고 구새도 바로 세워놓고 가마 한짝 걸어놓고… "이만하면 훌륭한 집이로구나! 가져온 쌀에다 풋나물을 섞어 먹으면 둬달은 글공부를 할 수 있겠구나.‘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다. 애만 써라. 어떻게 하나 대학까지 마쳐야 하지!” 하시며 내 운명을 바꿔주신 할머니.
나보다 어린 고모가 시샘 한번 안 내고 나의 공부 뒤바라지를 해주는 것이 미안하고 고마워 늘 고모부터 챙기느라 신경 쓰시던 나의 엄마, 아버지는 가정살림 때문에 내가 고중 가고 대학가는 것을 반대하였지만 엄마는 좋다 궂다 말 한마디 없이 침묵으로 나를 지지해 주었지요. 엄마는 한번도 “녀자가 공부를 해선 뭐해? 그만하면 됐지”하는 소리를 입밖에 낸 적이 없었지요.
“난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나는 왜소한 체구의 엄마가 자기 보다 더 큰 가마 옆에서 맴돌며 많을 때는 30명, 40명씩 되는 대가정 식솔의 시중에 눈코 뜰 새 없이 보내는 것이 하도 불쌍하고 화가 나서 그렇게 크게 내쏘았어요. 그 말이 칼이 되여 엄마의 가슴을 찌르고 엄마를 슬프게 했을 지도 모르겠지만 엄마는 딸은 자신의 인생을 배반한 다른 삶을 살기를 바랐던 것이였어요.
내가 고향의 첫 대학생이 되였을 때 엄마는 슬그머니 뒤울안에 들어가 소리 없이 눈꿉을 찍었지요.얼마 후 엄마는 나에게 털 탄자 하나 부탁하였어요. 회색바탕에 붉은 무늬가 난 그 탄자는 하나에 7원이였어요. “엄마, 조그만 기다리세요. 내가 돈을 모아 더 가볍고 좋은 걸로 사드리겠어요!”
나는 돈을 모아 먼저 할머니한테 털실쟈케트를 떠드리고 다음 어머니한테 탄자를 사드릴 돈을 모으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어머니는 병원에 실려갔고 내가 모으던 돈은 병원비로 들어갔어요. 그 걸음으로 엄마는 56세를 일기로 1966년 5월 5일에 슬프고 고달픈 인생을 마쳤어요.
“엄마, 미안해요! 죄송해요!”나는 가슴을 집어 뜯으며 울고 불고 통탄을 했지요. 부모한테 진 빚은 영원히 갚지 못하는 것이 자식된 인생인가 봅니다.
1962년 2월 20일부터 나는 모교에서 조선어문교원으로 교편을 잡았어요. 그리고 과외로 소설, 수필 등 문학창작을 시작하였지요. 혈육들과 고향사람들은 나의 문학창작의 주인공이였고 모델이였으며 변함없는 주제였습니다.
길림신문 글 구성/ 김청수 영상사진/ 김성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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