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문화를 말하다-41](채영춘편-6)
1968년 10월 24일은 제가 인생행로에서 첫 고개를 오르는 날이였지요. 제가 열여덟살이던 그해 초중2학년까지 밖에 못 다닌 주제에‘지식청년'이란 월계관을 쓰고 15명(남학생 5명, 녀학생 10명) 동창생들과 함께 농촌에 내려갔어요.
1975년 아동저수지련결경축의식에서 청년단 대표로 발언하는 채영춘.
화룡현 룡문공사 연풍 7대로 떠날 때 저의 어깨에는 이미 버거운 짐이 놓여져 있었지요. 하나는 정치적인 압력이였어요. 제가 빈하중농의 자식도, 로동자의 자식도 아닌 중농출신의‘우파자식'이였던 것이지요. 다른 하나는 렬악한 경제난이였죠. 아버님이 해외로 망명가신 후 저의 집 경제명맥은 어머님에 의해 겨우 지탱되고 있었죠. 제 밑에는 어린 동생 셋이 있었구요.
농촌에서 시작된 저의 인생행로는 그야말로 산이 첩첩, 물이 겹겹이였어요.‘촉도난'이였죠. 시골의 힘든 일도 버거웠지만 생활일상에서 동창생들과의 여러가지 대비가 생기고 그보다도 정치상에서 동창생들과 동등한 코스에 설 수 없기에 아무리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뛴다 해도 거리감을 좁힐 수 없다는 것이 속상했지요.
그때는 무슨 등록표가 그렇게 많았던지 쩍 하면 등록표를 써 바쳤는데 저한테는 엄청난 곤혹이였지요.‘가정출신'과 ‘사회관계'라는 멍에는 저를 완전히 기 죽게 하였어요.‘애비가 반동이면 자식도 망나니'로 백안시당하던 세월이라 그냥 앞이 캄캄하고 억울하였지만 어디 가 하소연할 수도 없었죠. 그저 아버님이 원망스럽고 제 자신이 한스러웠지요.
1969년 중학교 동창생들과 함께(뒤줄 오른쪽 첫사람이 채영춘).
엄청난 번뇌와 고통에 모대기며 지어는 절망의 변두리까지 갔던 적도 여러번 있었죠. 그때 저의 눈에 비친 한동네의 두 젊은이가 있었어요. 나이는 모두 저보다 썩 우였어요. 한 젊은이는 부농의 아들이였지요. 성분 때문에 일찌기 중학교를 중퇴하고 고향에 돌아와 농사를 지었는데 아주 성실한 감농군이였어요. 그는 밭머리쉼을 할 때면 늘 한쪽 켠에서 줄담배를 피우면서 탄식만 했고 저녁 사원모임 때면 구석 쪽에 앉아 머리를 푹 숙이고 있더라구요. 인물도 훤한 사람인데 장가도 못 갔어요.
나와 비슷한 가정배경을 가진 사람이라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였는데 어느 날인가 뒤산에 올라가 목을 매고 자살했어요. 그가 목을 맨 나무 밑에는 담배꽁초가 무득하였지요. 생사의 갈림길에서 얼마나 갈등하였는지를 잘 보여준 장면이였죠. 성분이 부농이라는 단 하나의 리유때문에 아까운 나이에 목숨을 끊은 젊은이가 저에게 준 충격은 너무 컸어요.
또 다른 한 젊은이는 이른바‘나쁜분자'의 아들이였죠. 부친이 약간의 력사문제가 있다 하여 씌운 감투였죠. 그런데 이 젊은이는 아주 당당했어요. 사원대회랑 할 때도 전혀 기가 죽지 않고 하고 싶은 롱담을 다 하군 하였으며 늘 뼈대 있는 말을 쏟아내여 저를 놀래웠지요. 알고보니 그는 책을 그렇게 많이 읽었더라구요. 제 또래들이 아직 그 근처에도 못갔는데 그는 이미 맑스의 경전저작 《공산당선언》을 통달하고 조선어로 번역하여 자체로 제본까지 한 수재였지요.
(시골에 어쩌면 이런 사람도 있단 말인가?!) 나는 무척 놀랐지요.
그래서였는지 세상사 이야기가 나올 때면 그는 당연히 사람들 중심에 있었지요. 그는 언제나 떡 먹은 속이였어요. ‘나쁜분자’자식인데 할 말을 다 하면서 여유있게 사는 그 배짱과 자세는 앞에서 일찌감치 삶을 포기한 그 젊은이와 너무나 대조적이였죠.
집체호시절 독서는 채영춘의 유일한 락이였다(1969년).
각이한 삶을 선택한 두 젊은이는 제가 인생행로의 첫 고개를 넘는데서 모델로 되여 저의 인생좌표를 새롭게 정립시키는 계기가 되였어요. 늘 아버님 문제로 주눅이 들어 있는 자신을 뉘우치고 분발할 수 있는 내적동력이 생겼던거죠. 새로운 출발을 해야 겠다고 맘 먹었지요.
우선 작식표를 세웠어요. 그리고 일기 쓰기에 게을러진 자신을 반성하고 매일 일기를 썼지요. 고민이 있거나 속 탄 일이 있으면 일기에다 터놓고 토로하군 하면서 울분도 풀고 스트레스도 해소하면서 삶의 의욕을 불살라 나갔죠. 지금도 그때 일기책을 번져 보면 정말 감회가 깊어요.
그 다음 생산대 회계를 찾아가 돈 20원을 꿔달라고 했어요. 그때 20원이면 큰 돈이였는데 그 돈으로 뭘 했냐 하면 《인민일보》와 《붉은기》잡지 1년치를 주문했어요. 그때 중앙급 필독간행물로 《인민일보》, 《해방군보》, 《붉은기》잡지를 ‘량보일간(两报一刊)’이라 지칭했었어요. 그리고 나머지 돈으로 《혁명문예》라는 그 당시 중국의 유일한 월간 문예잡지를 주문했지요.
경제형편이 최악인 제가 통 크게 20원을 꿔서 《인민일보》와 잡지들을 주문한 것은 그 어떤 거창한 목적이나 동기에서가 아니라 한어관을 돌파해야겠다는 단 하나의 집념 때문에서였지요. 그때 낮에는 밭에 나가 생산대 일을 하고 저녁이면 사원대회까지 마치고 집체호에 돌아오면 보통 밤 9시가 넘었어요. 그래도 피곤함을 참고 매일 신문과 잡지를 읽었어요.
처음에는 정말 힘들더라구요. 소학교부터 중학교까지 줄곧 조선족학교를 나왔고 또 조선족동네에서 살다 보니 한어기초가 형편없었죠. 한어 사전을 펼쳐놓고 모르는 글자나 단어에 병음과 성조를 달고 뜻을 소화하면서 참빗질하였지요. 그리고는 소리를 내여 랑독했어요. 처음에는 신문 한면을 아주 어렵게 넘겼는데 여러 날 견지하니 생소하던 단어와 문구들이 머리에 담겨지더군요.
그리고 일기도 한어문으로 쓰면서 배운 한어를 익혀갔어요. 아무리 힘들어도 새벽이면 일어나 마을 동구밖으로 장거리 달리기를 견지하였지요. 어떤 때는 너무 힘들어 새벽 달리기를 빼먹으면 일기로 자신을 비난하고 자책하면서 인차 바로잡군 하였죠. 달리기와 일기쓰기는 저의 의지력의 시험대였지요.
제가 남보다 모든 조건에서 못하니 남이 하나를 하면 저는 열개를 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소박한 생각이였지요. 당시는 대학교입시라는 것도 없었으니 그저 매일 뜻있게 살아보자는 것이 목적이라면 목적이였지요. 그같은 노력이 서서히 저를 키웠다고 생각해요.
아동저수지공사현장에서 로동장면을 스케치하고서(1971년).
제가 집체호로 내려갈 때 집에서 소묘습작을 할 때 쓰던 석고상을 신주 모시듯 해서 가지고 갔지요. 아버님께서 선물로 남겨주신 책 《이른 해돋이》의 주인공 천재적인 소년화가를 본보기로 소묘습작도 게을리 하지 않았지요. 아무튼 나름대로 집체호에서 제법 질서 잡힌 생활을 해 나간거죠.
새벽에 일어나 달리기를 하고 그 다음 저녁에 신문잡지를 열독하고 그날 일기를 꼭 쓰고 다음 소묘습작에 들어가는거죠. 집에서 쓰던 미술회구들을 갖고 와 포스타 유화그림도 그려 집체호벽에다 걸어 놓기도 했죠. 신문잡지를 통한 한어문공부도 상당히 진전된 것 같았어요.
그래서 이번에는 한어문 소설정독에 들어갔어요. 그때 한어문 소설책 한권을 완독한다는게 어찌나 힘들던지. 이건 신문이나 리론잡지 차원이 아니라 문학작품이여서 한페지를 소화하는데 처음에는 며칠씩 걸렸지요. 그래도 사전을 뒤지며 이를 악물고 읽어 내려갔지요. 맨 처음 한어로 된 장편소설 한권을 읽는데 몇달 걸리더라구요. 그런데 첫 한어문 장편소설 한권을 깨끗이 독파하니 두번째, 세번째가 슬슬 내려갔지요. 저 절로 탄성이 나오더라구요! 그때 읽은 한어문 소설이 《검》(《剑》), 《련심쇄》(《连心锁》), 《강반의 아침해》(《江畔朝阳》), 《찬란한 길》(《金光大道》), 《맑은 하늘》(《艳阳天》) 등과 같은 책들이였죠. 그리고 책에서 배운 것은 일기쓰기에 적극 활용했어요. 지금 보면 그 당시 애쓴 흔적이 알리거든요. 한달 전후가 눈에 띄게 달라져 있죠. 단어 사용이나 성어 삽입, 문장력에서 무언가 보이는 것 같았어요.
1972년 아동저수지공사 청년단지부 서기들과 함께(앞줄 가운데).
하늘은 자기를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있죠. 그렇게 필사적으로 노력하니 뭔가 서광이 보이는 것 같았어요. 그러다가 어느 해인가 룡문공사에서 모택동사상학습활용적극분자대표회의를 소집했는데 제가 생산대 지식청년대표로 참가하게 되였어요.
회의 마지막 날 분조토론을 하는데 공사의 (한 령도간부)가 연풍대대 분조토론장소로 찾아왔어요. “여기 채영춘이 어느 동문가요?” “네, 제가 채영춘입니다 ?!” 저는 신경이 곤두섰지요. 알고 보니 오후 세시 페막식에서 전 공사 5.7간부와 지식청년들한테 드리는 발기문을 선독하게 되여 있는데 발기문이 한어로 돼 있다는거죠. 회의참석자 대부분이 조선족인데 그렇다고 당장 조선문으로 번역하여 프린트한다는 것도 시간적으로 불가능하니 즉석에서 한어문을 조선문으로 번역해서 선독할 수 없겠느냐 그런거였죠. 누군가 이 일을 채영춘이 할 수 있다고 귀띔한거였어요.
우선은 숨이 열리더라구요. 그리고 그 령도간부가 들고 온 한어 발기문을 대충 훑어보니 별로 어려울 것 같지 않았어요. 하지만 제가 400여명 되는 사람들 앞에 나선다는 것은 있어 본 적 없는 일이였죠. <우둔한 놈 범 잡는다>고 한번 부딪쳐 보리라 맘 먹고 수락했지요. 페막식이 열리고 제 순서가 되여 주석대 앞으로 나가 그 자리에서 발기문을 조선문으로 번역하면서 선독해 내려 갔죠. 그런데 잘 읽어내려가다가 한 대목에서 떠듬거리게 됐어요. 지금도 그 구절이 기억난다만…
“즉석 번역이다 보니 실례하게 돼서 미안합니다” 제가 송구한 변명을 했지요. 그렇지 않아도 사람들은 제가 조선문을 읽다가 생긴 실수로 넘겨 보냈겠는데 이런 '해명'을 하자 “저 애가 조선문이 아니라 한어문을 들고 조선말로 번역해 읽었구만” 하고 감탄들을 했지요. 아무튼 마지막까지 줄땀을 흘리면서 쭉 읽어내려갔어요.
제 스스로도 어떻게 끝냈던지 제 정신이 없었어요. 회의 끝에 공사의 (령도분들과) 간부들이 저의 손을 잡아주며 “참 잘했다.”고 칭찬해 주었어요.
이 일은 저에게 그 어떤 전환점이 된 것 같았어요. 주변에서도 저에 대해 많이 격려해주고 하여 공청단에도 가입했지요. 남보다 늦게 가입했지만 얼마나 격동되였는지 몰라요. 나도 노력하면 이룰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들더라구요. 물론 그 나날에 명문대 추천, 군부대 번역고급인재 선발, 성급 문예단체 배우모집에 뽑혔다가 ‘우파아들'이라는 정치문제로 무산됐지만 실망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어느 때인가는 해 뜰 날이 있으니 신심을 가지라는 청신호로 인식되더라구요.
하향한지 30년이 되는 해 다시 연풍촌을 찾아 촌민들을 방문하는 채영춘.
1998년 연풍촌을 다시 찾은 옛 집체호 동창생들.
1971년도에 아동저수지공사가 가동되면서 정공조에 발탁되여 갔지요. 공사장의 구호며 표어들을 맡아 썼어요. 공사장 입구에 40메터 길이의 선전란을 만들어 세우고 정기적으로 내용을 바꾸면서 꾸려나갔고 현장속보 《장인강》도 출간했죠.
그때는 등사원지에 한글자씩 새겨 쓴 다음 프린트하던 시절이였는데 저는 축적했던 밑천을 십분 살렸지요. 그밖에 현장의 사진촬영사로도 뛰였고 가끔은 방송소 한어 방송원도 해보았으며 후에는 청년단위 서기까지 맡아하였죠. 아무튼 왕성한 정력으로 자신의 능력을 여러 모로 키워갔어요.
그 시절 화룡현 문화관에 림시 차출되여 현 농업전람관 개관준비사업에 참여하기도 하고 전 주 미술작품전시회에도 작품을 선보이면서 시야를 넓히다가 1973년도에 연변인민출판사에 1년간 차출근무를 떠나게 되였어요. 미술편집실에서 주로 도서장정설계와 삽화창작 같은 것을 했는데 어쩐지 따분하더라구요. 스무나문살 되는 때라 닥치는대로 무엇이나 해보고 싶을 때였지요.
그러다가 어릴 때부터 이웃으로 살며 형님처럼 따르던 김봉웅선생(그때 정치리론편집)이 저를 보고 번역을 해 보겠느냐 해서 다짜고짜 대답하여 시작한 것이 《맑스 엥겔스 레닌 쓰딸린이 학습한 이야기》단행본이였어요.
1973년 채영춘의 첫 번역 단행본.
낮에는 미술편집실 일을 하고 저녁이면 방에 엎드려 번역에 착수했지요. 부탁한 시간 안에 번역원고를 출판사에 교부하였어요. 책임편집 서명준선생님의 손을 거쳐 깔끔하게 편집되였어요. 저에게는 첫번째 도서번역이였는데 책임편집의 수개고를 보고 정말 많이 배웠지요. 이 책의 내용번역부터 표지디자인, 표지문자, 책속의 삽화 모두를 제가 석권했다는 점에서 저한테는 특별히 의미가 컸던 책이였지요.
책이 출판된 후 뒤표지에‘채영춘 역'이라는 제 이름 석자가 박힌 것이 너무 신기하여 자꾸만 들여다 보게 되더라구요. 책이 서점에 나갔다는 것을 알고 어느날 사가는 사람 있나 서점안의 한쪽 켠에 숨어서 지켜보았어요. 사람의 마음이 참 요상한 데가 있더라구요.
그런데 마침 저의 중학교 담임선생님인 김정헌선생님이 면바로 책매대에서 제 책을 손에 쥐는 것이였어요. 속이 두근거렸죠. 그냥 달려가 선생님한테 인사를 드리고 제가 번역한 책이라고 말씀드렸어요. 선생님께서 그렇게 기뻐하시는 것이였어요. 당신 제자의 번역작품이라는데 어찌 기쁘지 않았겠어요.
입당기념 (1975년).
1년간 연변인민출판사에서의 차출근무를 마치고 아동저수지공사장으로 돌아왔지요. 참으로 수확이 많은 한해였어요. 돌아와서 계속 공청단위 서기로 열심히 활약하여 1975년 6월에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어요.
입당하던 날 최해당, 리광명 두 분 입당소개인을 비롯하여 많은 이들이 저를 찾아와‘우파아들’채영춘이 끝내 역경을 뚫고 입당한 걸 축하해 주었어요. 그날 저녁 저는 숙소에서 뜨거운 눈물을 맘껏 흘렸어요. 제가 입당한 몇년 후 저의 동생 성춘이도 모든 난관을 헤치고 입당했더군요.
1973년 아동저수지를 찾아온 동생 채성춘(오른쪽)이와 함께.
그 이듬해 5월 16일, 저는 연변인민출판사에 정식으로 전근되여 농촌집체호와 아동저수지공사장에서의 ‘촉도난'이라는 8년 세월을 마무리하게 되였습니다.
사람이란 진취심과 의지력을 가지고 스스로 갈고 닦는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면 기회는 꼭 찾아오는거죠. 그래서 저는 젊은 세대들에게 누구를 원망하거나 객관을 탓하지 말고 자기 스스로 기회를 만들라고 말하고 싶어요.
/길림신문 글 구성 김청수 기자 영상 김성걸 안상근 김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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