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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94] 문물발굴의 간고한 나날들(김철수편3)
조글로미디어(ZOGLO) 2021년1월27일 09시57분    조회:1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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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 대형구술시리즈[문화를 말하다 –94](김철수 편3)

박물관사업이 보기에는 야외를 다니고 현지를 답사하고 하는 것 같지만 매우 힙듭니다. 어떤 때에는 거리를 재이게 되는데 어떤 곳은 자로 재일 수 없어서 발걸음으로 재이다보니 많이 걸어야 합니다. 이전에 박물관에 차가 없을 때에는 공공뻐스를 리용하였고 그전에 1950년대에는 공공뻐스도 없습니다보니 소수레를 리용하기도 하였다니 로동지들이 얼마나 수고하였는지 모릅니다. 김하석, 엄장록 등 분들이 문물수집을 위해서 많은 수고를 하였습니다. 이런 로문물사업자들이 사료를 열람하고 많은 현장을 답사하고 발굴하여 많은 문물과 자료를 남겼다. 내가 박물관에 온 후에 이분들을 따라다니면서 많이 배우고 여러 발굴에 참가하면서 옛말도 많은데 하나는 위험할 때가 많았습니다.

2012년 12월 8일, 《불멸의 투사 김명주》 출간기념회에서.

1999년11월이였습니다. 연변대학에서 요청해서 무슨 일을 함께 하기로 하여 안도로 다녀오게 되였습니다. 송강까지 가기로 하였는데 눈이 많이 내려서 돌아오게 되였습니다. 원래 화룡으로 가면 안전하겠는데 답사코스에 따라 명월구를 들려 가기로 하였습니다. 소형뻐스에 여러 사람이 탑승했는데 안도현에서 교통이 제일 험하다는 황구령을 넘을 때 가파로운 굽이길에서 뻐스가 고장이 생겼는지 길옆 웅덩이에 곤두박혔습니다. 마침 절벽이 아닌 3, 4메터 되는 웅덩이여서 큰 사고는 면했지만 나는 세사람한테 깔리면서 갈비뼈를 상했습니다. 후에 알게 되였지만 갈비에 금이 갔던 것입니다. 그날 저녁 가슴이 아파 밥도 먹지 못했습니다.

로문물사업자들이 항일로전사들과 함께 혁명유적을 조사(1960년).

깊은 밤이라 불을 지피고 언 손을 녹이면서 지나가는 차량을 세워서 나를 먼저 돌려보냈습니다. 그때 50이 넘다보니 거기서는 나이가 많은 축이였습니다. 그 동무들이 그때 수고가 많았습니다. 온 저녁 현장을 지키다가 아침에 기중기를 불러 차를 들어올리고 그랬다고 하니 말입니다. 현지답사를 다니면서 이러루한 일은 많이 겪었습니다.

이런 일을 하면서 부딪치는 문제가 많았는데 하나는 교통문제고 다음 하나는 당사자가 없는 문제였는데 어떤 때에는 훈춘에서 발생한 사건의 당사자를 연길에 와서 찾을 때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당사자한테서 확인하고 다시 그를 모시고 다시 현장에 가서 확인하고 그랬습니다. 텔레비죤방송국에서 다큐멘터리 <연변아리랑>을 촬영할 때 서봉학주임이랑 함께 훈춘의 삼도구에 간 적이 있습니다.

답사길에서 생길을 헤치며.

삼도구 설대산부근에 갔는데 15년전에 갔던 곳이 나무가 크게 자라면서 몰라보게 변했습니다. 한 곳에 도착해보니 아닌데 또 비슷해 보이기도 하고 그래서 겨우 걸어서 북쪽으로 갔습니다. 거기는 훈춘현위 서기 서광렬사가 사망된 곳이고 로씨야인들이 도랑을 파고 농사를 짓던 곳인데 렬사들이 피를 흘리면서 싸운 곳입니다. 그렇게 유적지를 찾긴 찾았는데 15년 자란 나무가 어찌나 크게 들어앉았는지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번마다 현지답사를 할 때마다 우리는 낮에는 답사하고 저녁에는 돌아와서 피곤을 무릅쓰고 정리합니다. 농민의 집에서 밥상을 빌려다가 재료를 다시 확인하고 정리하고 그림(도표)을 다시 그리고 하면 열두시가 인츰 됩니다. 그때가 되면 배가 촐촐해 나는데 지금처럼 상점이 많았더라면 달려가서 과자나 사오련만 그시기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과자를 사려면 귀한 량표가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술은 있었는데 뜨거운 물을 안주해서 마시고는 밤잠을 자군 했습니다.

중,로 변계비 옆에서.

훈춘의 변경선을 조사할 때의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그때는 쏘련과의 관계가 썩 좋지 않아 까딱하면 군대들끼리 맞불질할 가능성이 있을 정도로 화약냄새가 날 때였습니다. 그러나 성에서는 기어이 이것을 조사하라고 명령했습니다. 변경선에 문물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고대사 유적이 있고 고대유물이 많은 동시에 근현대사문물도 많았습니다.

1860년에 청나라 흠차대신 오대징이 연변에 와서 짜리로씨야와 변경담판을 한 사적지가 있었는데 토자비, 라자비, 사자비 등비석의 토, 라, 사자는 다 오대징이 쓴 글씨였습니다. 지금은 중, 로 두가지 문자로 된 국경비로 바뀌였지만 그때는 원래 청나라 때 세운 비석이였습니다. 이런 비석들은 지금 훈춘문관소에 보관되여 있습니다. 이것을 현지조사하고 비석의 치수를 재이는데 저쪽은 쏘련땅이기에 밟으면 안됩니다. 그래서 사진을 찍는데 촬영사가 사진을 찍을 때면 우리가 비석의 좌우에 서서 쏘련쪽 풍광이 사진에 잡히지 않도록 막아주어야 했습니다. 토자비를 할 때 우리가 옆에서 막고 촬영사가 옷으로 사진기를 감아쥐고 찍었는데 어떻게 쏘련쪽에서 렌즈를 발견하고 항의를 해왔습니다. 그래서 담판을 하고 그렇게 해결했습니다.

사적지답사후 표적을 남기다.

내가 훈춘 방천으로부터 춘화분수령에 이르기까지 변경선을 한고패 다 돌았는데 어떤 곳은 걷고 어떤 곳은 길이 없습니다.그러다보니 차를 타고 돌아와서 다시 들어가 조사했는데 주요하게 해방군들의 순라선을 따라서 돌았습니다. 그래서 연변의 변경구라는 책자도 나오고 문물지도 나오게 되였습니다.

한번은 젊은 동무들을 데리고 청산리 베개봉 아래 직소라는 곳에 갔는데 저쪽으로 가려면 물을 건너야 하는데 하마트면 사람이 죽을번 하였습니다. 직소를 건너 바위옆에 앉아 손을 씻는데 젊은이가 미끌어 물에 빠져 급물살에 떠내려가는 것이였습니다. 마침 내가 어망결에 손을 뻗친 것이 면바로 그 동무의 손을 잡아 그를 뭍에 끌어올려 구했습니다. 이렇게 차가 번져지고 물에 빠지고 위험한 경우가 참으로 많았습니다. 어떤 때에는 또 산골에 들어가서 진디에 물릴 때가 많습니다. 삼도만에 갔을 때 옷에서 8마리를 잡은 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박물관 동무들은 해마다 진디뇌막염을 방지하는 주사를 맞아야 했습니다. 이것을 맞지 않고 진디에 물리면 뇌막염에 걸려 생명이 위험할 수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어려움을 딛고 현지를 조사하고 기록하고 하는데 경비가 문제였습니다.

남호두에서.

하여튼 박물관사업은 재미도 있지만 여러가지로 간거한 사업입니다. 현지에 내려가서 낮에 시간이 있으면 고기잡이도 하고 저녁이면 로인들을 모셔다가 좌담회도 하고 하였는데 로인들을 많이 접촉하였습니다. 나는 지식청년으로 농촌에 내려가서 몇해 있으면서 단련하였는데 거기에 대해 지금까지 하나의 후회나 원망이 없습니다. 박물관사업을 하면서 농민들을 접촉하여 농촌의 농사를 말하고 하면 농민이 아닌데 어떻게 농촌일을 아는가 하면서 쉽게 어울릴 때가 많았습니다.

연변 뿐만 아니라 통화지구도 한고패 돌았습니다. 1981년 성에서 항일련군제2군 답사조가 통화지구에 내려온다는 정보를 수집하고 이런 사실을 연변대학력사학부 교수들한테 말했더니 그분들이 이런 좋은기회를 놓지면 안된다고 하면서 동행하자고 하는 것이였습니다. 그래서 연변대학력사학부 주임인 박문선생이 나를 데리고 주위문교서기 김성옥을 찾아가서 이런 사연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김성옥서기는 당장 “성에서 하는데 우리가 앉아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도 조사를 합시다.”며 우리의 건의를 비준하였습니다.

그 당시 기층에는 찌프차가 없어 교통이 불편하였는데 김성옥서기가 말해서 주위와 주정부에서 차를 한대씩 두대를 내주어 통화를 돌게 되였습니다. 이렇게 1980년대 전 연변을 다 조사하고 통화의 양정우묘소가 있는 정우현도 가고 휘남과 화전에도 갔습니다. 이렇게 많이 돌고 많이 조사하면서 사진도 많이 남겨 1982년에 혁명투사 력사전람을 올릴 적에 많은 자료를 제공하였습니다. 제가 촬영사는 아니지만 갈매기표 사진기로 찍은 사진이 전람에 많이 올랐어요. 지금 연변박물관에 있는 절대 대부분의 문물과 사진재료들은 다 이렇게 온 것입니다. 나는 문물수집이나 사진 수집에 있어서 수단을 가리지 않습니다. 어떨 때에는 주제넘고 어떨 때에는 양심이 나쁜 사람처럼 말입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박물관에 경비가 부족하여 좋은 문물이 있어도 사들일 방법이 없을 때였습니다. 연길시 어느 집에 갔는데 위만주국 시절에 찍은 연길시의 사진이 열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진을 내 좀 보자.”고 하면서 얼마를 받겠는가 했더니 그분이 “군자란을 열개만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군자란이 비쌀 때였으니. 그래서 박물관에 가져가 령도들한테 보이고 토론해 보자하고 박물관에 가져왔습니다. 박물관에 와서 촬영사들한테 시켜 복제시키고 다시 가져가서 령도들이 동의하지 않더라 이렇게 돌려주었습니다. 량심의 가책을 받았지만 경비가 없습니다보니 할 수 없는 노릇이였습니다. 지금 연변의 모든 전람에서랑 사용되는 위만시기 연길시 사진은 모두 이사진들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각 현에 내려가 문물수집하고 사진수집을 많이 하였는데 이러는 가운데서 무슨 수집을 하나 첫째로 지식분자라면 과학성을 앞세워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였습니다. 무엇이나 대강대강 하고 챗임성이 없이 하면 안됩니다. 이 사업을 하려면 문물이라는 게 머리가운데 환하고 또 책임성이 있어야 합니다. 문물 사업을 하면서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고 연구한 것을 책이나 써먹고 이래서는 안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쓴 책에 남이 인용한 재료를 다시 인용할 때가 있는데 그럴 때면 그것을 다시 고증하고 인용합니다. 다시 말하면 글의 내용에 근거하여 원본을 찾아서 확인을 거치고 다시 인용하여 쓰지 절대로 그대로 옮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력사연구에서 이렇게 얼렁뚱땅 넘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훈춘현 회룡봉촌을 답사하던 나날에.

문물 사업을 하면서 위치와 기록이 명확해야 한다는 것을 깊이 느꼈습니다. 력사유적지 같은 경우 지형 가운데서 불변참조물로 표적을 만들어야 합니다. 몇해 후거나 몇십년 후에 다시 가도 찾을 수 있게 말입니다. 나는 사적지를 답사할 때 답사가 끝나면 주변의 나무에 이게 무슨 사적지라고 글을 새겨두었습니다. 동만특위가 있던 곳이면 ‘동만특위’라고 새기고 항일련군제3방면군이면 ‘제3방면군회사지’라던지 이렇게 여러가지 유적지이름을 간단하게 새겨두었습다. 나는 원래 미술체 글씨도 잘 썼는데 남길바 하고는 멋있게 미술체로 새겨남겼습니다. 다니면서 이런 표적을 많이 남겼는데 적지 않은 표적들은 후에 림업국 범위에 들면서 나무를 자르고 그러면서 많이 없어졌습니다. 1987년도에 젊은 동무들과 함께 소왕청 리수구에 가서 문물조사를 하고 중공동만특위가 있던 집터를 발견하였는데 이곳은 지금도 기초돌이 남아 있습니다. 그곳의 나무에 내가 ‘동만특위’라는 네글자를 새겨 두었었습니다. 2017년도에 관광부문에서 홍색관광코스에 관해 참모삼아 한번 같이 다녀보자고 해서 함께 그 곳에 갔었습니다. 나이도 들고 해서 가파른 올리막을 올라가기가 힘들었지만 입에 약을 물고 올라갔습니다. 가는데까지 가보자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런데 가보니 소왕청골안을 아주 잘 만들어놓았었습니다. 동만특위자리는 돌비석을 세웠고 원래의 자리를 평평하게 공구고 나무와 풀을 깎아 평평하게 만들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1987년도에 나무에 새겨놓은 ‘동만특위’라는 글씨는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같이 간 동무들에게 “이게 내가 새겨놓은 글입니다.”고 말했더니 그들은 30년전에 새겨놓은 글이라고 매우 놀라는 것이였습니다. 30년이라는게 나한테는 껌버덕 하고 지나간 순간인데 그 동무들에게는 매우 오래된 시간인 모양이였습니다. 그 동무들은 큰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거기서 사진을 찍는 것이였습니다.

사적지로선을 더듬으며(1984년 6월 안도현 량강향초대소에서).

내가 <연변항일사적지연구>라는 책을 쓴 주요한 목적은 후세사람들을 위한 것이였습니다. 후세사람들이 이 책을 보고 다시 그 자리를 찾을 수 있게 만든 것이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적지 않은 유적지는 산을 막 깎고 길을 내고 하니까 좀 찾기 바쁜 이런 점이 있습니다. <연변항일사적지연구>라는 이 책은 내가 문물조사를 하고 사적지 답사를 한 후에 만든 책인데 이미 출판한 지 20년이 되지만 아직도 찾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재판하라고 하지만 재판하려면 돈이 들어야 합니다. 내 생각에는 한어로 번역하여 재판하면 좋을 듯 싶어서 출판사와 토론하고 궁리중입니다. 문물수집을 하면서 날이 가면 갈수록 할 일이 많아 짐을 느꼈습니다. 원래 력사계를 졸업한 분들은 할 일이 없어서 노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나는 할 일이 너무 많아서 힙듭니다. 요즘 들어 홍색관광과 홍색문화는 력사지식과 사적지를 떠나서는 운운하기 어렵습니다. 나는 이때까지 내가 한 일들에 대해 보람을 느낍니다. 정령 퇴직한 지도 벌써 10년이 넘어 되지만 편안하게 앉아 놀 사이가 없습니다. 책을 편집하고 문물조사를 하고 어느 부문에서 초청하여 홍색관광에 참모를 해달라는 등 여러가지 일들이 많아서 좋습니다.

이렇게 몇십년동안 문물수집과 사적지 답사를 하면서 나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연변의 거의 모든 산과 골짜기를 다 다닌 연변통이 되고 심지어 통화지구도 많이 다닌 전문가가 되였습니다. 그래서 력사 뿐만 아니라 지리적으로도 나한테 묻는 사람이 많습니다. 물론 어떤 것은 나이가 들고 시간적으로 오래되기 때문에 희미해 진부분도 있습니다.

길림신문 글 구성/ 김태국 기자

사진 영상/ 김성걸 김파 정현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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