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 대형구술시리즈[문화를 말하다-116](박용일편1)
박용일프로필
1955년 12월 20일 룡정시에서 출생. 선후로 하향, 참군, 직원, 대학, 편집 등으로 전전.
원 연변민간문예가협회 부주석, 연변작가협회 회원, 연변민간이야기위원회 주임, 연변생태문화협회 회장 력임
작품:
1974년 7월 《연변문예》에 처녀작을 발표 . 소설, 이야기, 가사 등 수백편 발표.
《중국조선족전통문화 풍속이야기》,《고향으로부터 윤동주를 찾아서》,《두만강변의 첫동네》,《중국조선족추석》, 《중국조선족전통음식》, 《중국조선족전통민속놀이》, 《조선족세시풍속이야기》(총 6권) 등 30여권 출판
2015년부터 연변방송국 문학살롱 현재까지 300여회방송, 2017년 중앙조선말방송 50여회 방송.
수상경력:
제8회 연변주정부 ‘진달래문예상’수상. 제8회‘해외동포윤동주문학상’수상.
작가 박용일(朴勇一).
제가 민간이야기 수집에 흥취를 가지고 수십년간 사업을 해오면서 듣고 보고 한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다 알고 있는‘옛말'이라는 이 민간이야기가 어떤 특점이 있는가를 먼저 말하겠습니다.
우리 조선족의 조상들은 살길을 찾아 조선반도로부터 중국 땅으로 올 때 쪽지게에 가지고 온 것이 몇알의 씨앗과 민간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서 민간이야기는 우리 조상들이 남겨놓은 언어유산으로서 아주 귀중한 재부입니다.
인간은 세상에 태여나기 전부터 어머니 배 속에서 이야기를 들으며 성장합니다. 하기에 민간이야기는 모든 사람들의 ‘모어'가 형성되는 가장 원초적인 과정이며 문학예술의 원형이자 ‘모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잎이 무성한 나무일지라도 뿌리가 썩으면 나무가 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풍부한 민간예술을 토대로 하지 않은 문화예술은 감화력이 없으며 하나의 공중루각에 불과합니다.
구비문학의 범주에 속하는 민간이야기는 독특한 매력으로 한 세대 또 한 세대를 거쳐 지금까지 전해지면서 정신생활에 무성한 생기를 부여하였습니다. 하여 수많은 작가들은 어렸을 때 들은 민간이야기가 창작할동을 하는데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합니다.
민간이야기는 대중들에 의해 생겨났으며 대중들 속에서 대를 이어 구전되여 왔기에 계발적, 교육적 의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력사와 민속교육을 진행하는 중요한 도구의 하나로서 그 민족의 력사를 연구하고 민속을 접목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창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민간이야기 특점을 보면 어느 한 개인의 창작물이 아니라 민족적 집단생활 속에서 공동의식에 의하여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문자기술(记述) 이전의 구전문학(口传文学)으로서 일정한 구도를 갖추고 있습니다. 민족의 력사, 신앙, 관습, 세계관 및 꿈과 랑만, 웃음과 재치 또는 생활을 통해서 얻은 교훈이나 역경을 이겨내는 슬기와 용기 등이 문학적으로 형상화되여있습니다.
민간이야기는 보통 설화, 신화, 전설로 구분하는데 전승자가 진실하다고 믿고 실제로 있었다고 주장하며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가 제시되고 특정된 개별적 증거물을 갖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물의 관계를 설명하는 이야기, 인간의 좌절된 의지나 비극적 상황을 말해주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그것을 여러 가지로 분석해 보면 첫째로 진실성입니다. 이야기의 년대, 사건발생의 장소, 주인공 등이 명시되여 있고 사람들의 경험과 사건의 진실성이 표현되며 구체적으로 증거물을 가지고 있는 만큼 구술자나 청자가 다 진실로 믿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력사성입니다. 이야기는 스스로 력사화함으로써 자기를 합리화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입니다. 례를 들어 어느 효녀이야기가 나오면 그 주인공이 누구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고 그 당사자를 력사적인 인물로서 효심이 지극하였던 사람이 있으면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또 한 암석에 어떤 흔적이 있으면 이야기에서는 처음 “옛날에 난리가 나서 장수가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남긴 말발자국”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그 다음에는 그 장수가 누군가 하면 어느 년대의 누구였다는 식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이야기는 이렇게 력사화하여 향토애를 키우는 구실을 합니다.
셋째로 우리가 말하는 체험성입니다. 이야기에서 나타나는 사상(事象)들은 생활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형성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선인들의 옛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네번째로는 설명성입니다. 전설은 산천, 마을, 섬, 사찰, 교량 등의 형성과 유래 등을 그 진부(真否)에 관계 없이 설명하려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그러한 설명은 사실이상으로 과장되거나 허구적인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다섯번째로는 비약성입니다. 이야기는 시간과 공간적인 면에서 구체성을 띠면서도 이야기의 서술이나 사건의 결과에서는 비약이 많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남한테 말할 때에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어느 장면을 무의식중에 특히 과장할 때가 있는데 그러한 결과 이야기는 비약의 세계로 이끌어갑니다. 례를 들면 주인공의 능력을 설명할 때 축지법을 쓴다든지 하는 것은 하나의 비약으로 사건을 더욱 인상 깊게 전달하며 흥미를 가지게 합니다.
여섯번째는 화술의 자유로움입니다. 이야기의 서술절차가 일정하지 않고 자유로우며 소박하게 이야기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야기의 구술자들은 이야기가 진실하다고 믿고 증거물을 제시하며 그것이 사실이라고 주장하면서 전승시켜왔습니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구술자의 태도에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야기의 내용을 사실이라고 믿는 측도 있지만 믿지 않는 부류도 있습니다. 이런 현상을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보면, 틀림 없다고 확신하는 사람, 반신반의하는 사람, 의심하는 사람, 믿지 않는 사람, 전혀 믿을 수 없다고 반대하는 사람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민간이야기는 이 다섯부분에 속하는 구술자와 청자에 의하여 대물림을 계속하며 전승되여왔습니다. 즉 구술자가 청자에게 전설을 들려주면 다음에는 그 청자가 구술자로 되여 그것을 이야기하는 과정이 반복되여 왔기에 오늘날까지 전승되여온 것입니다. 이러한 특성을 지닌 이야기는 그 기능을 수행하면서 전승되여왔고 지금도 전승되고 있습니다.
민간이야기가 어떤 기능을 하고 있으며 지역문화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사람들에게 자부심과 긍지를 일깨워주기도 합니다. 또 력사사실이나 민속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주기도 하고 새로운 해석의 시각을 보여주면서 사람들의 단결을 강조하고 향토애를 키우는 사회통합기능을 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민간이야기의 일부 내용들은 교육자료로 활용될 가능성을 열어놓고 유람업이 흥기되고 있는 오늘날에 와서는 유람객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는 해설문으로도 되고 있습니다.
례를 들어 말하면 요즈음 무수한 유람객들이 찾아가고 있는 룡정 비암산유래 같은 이야기들입니다. 아늑하게 펼쳐진 서전벌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아름다운 기상을 자랑하는 산봉우리 세개가 바라보이는데 이 산들은 별도로 비암산, 말발굽산, 삼봉동산이라고 합니다.
이를 두고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멀고 먼 옛날에 구척이나 되는 한 장수가 말을 타고 다니면서 장백산아래에 사는 여러 민족과 백성들의 안녕을 지켜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장군은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서전벌에서 서쪽으로 바라보이는 말안장처럼 생긴 봉우리가 있는 산기슭 즉 지금의 룡정시 삼봉동산까지 왔다가 말에서 내려 휴식하게 되였습니다. 장군은 너럭바위에 앉아서 확 트인 동쪽벌을 바라보면서 “저 벌은 상서로운 기운이 넘치는 벌로서 ‘서전벌'(瑞甸)이 틀림이 없거늘 장차 거창한 변화를 가져올 것이로다.”라고 하면서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 때로부터 이 벌을‘서전벌'이라고 부르게 되였는데 지금의 룡정시 동성용벌을 두고 한 말이라고 합니다.
그 날 장군은 길을 재촉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장군이 앉았던 자리에 말안장 같은 자국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하여 사람들은 그 산을‘장군산',‘마안산'이라고 부르게 되였다고 하며 지금은 그 산을‘삼봉동’산이라고 합니다. 장군이 마안산에서 떠나려고 말우에 올라 고삐를 채니 앞발을 내디디던 말이 좀처럼 움직이지 않고 앞만 쳐다보더랍니다. 장군이 말의 눈길을 따라 앞을 내다보니 푸른 절벽이 내리 선 름름한 산이 서있었답니다. 이 때 멀리 바라보이는 남쪽 산우에서 파르스름한 불광이 떠오릅니다. 그리하여 장군은 “저 불광은 지장보살님의 불광이구나! 저 산은 천지신명이 점찍어 놓은 명산 벽암산이 틀림 없구나!”라고 하였습니다.
지장보살이란 안휘성 구화산에 제일 처음 사찰을 세운 신라의 왕자입니다. 장군은 이 산을 푸르다는 벽(碧)자에 암석 암(岩)자를 붙여서‘벽암산'이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한어로‘벽암산'이라고 발음하면‘비암산'이 되기에 사람들은 어음적으로 부르기 좋게 그냥 지금까지도 ‘비암산'으로 부르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불광은 또 남쪽으로 날아갔습니다. 하여 장군은 비암산 쪽으로 돌렸던 말머리를 지장보살의 불광이 사라진 천불지산 쪽으로 돌려가게 됩니다. 그제야 말은 발을 움직이면서 자리를 떴는데 그때 말이 밟았던 자리가 지금의‘말발굽산'으로 불려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스스로 력사화함으로써 지명유래를 합리화시키려는 목적에 도달하면서 향토애 양성과 유람객들에게 궁금증을 풀어주고 인상을 깊게 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우리들 일상생활 음식들인 김치거나 된장, 랭면, 찰떡 등등에도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째서‘김치'나 ‘된장'이라는 이름을 달게 되였는가 하는 등 조선족의 세시풍속과 관련되는 이야기들이 아주 많습니다.
례하면 지금 조선족은 세시풍속으로 ‘농부절'이라는 민속명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농부절은 옛날 조상들이 쇠던 ‘백중절'을 현시대에 맞춰‘농부절'이라 개칭한 명절입니다. 개산툰에서 농부절을 쇤다고 하니 제가 여기에 관련한 이야기를 수집정리하였습니다. 그 유래는 다음과 같습니다.
먼 옛날 백중이라는 소몰이군 아이가 있었는데 하루는 소를 몰고 방목을 합니다. 그런데 늪옆으로 거부기 한마리가 기여나오길래 그 거부기를 보는 순간 하늘에서 옥황상제가 하는 말이 “얘 거북아, 오늘 저녁에 그 곳에 바람이 세치를 불게 하고 비가 세갑 높이 오게 하거라.”라고 합니다.
거부기는 바로 “네-그렇게 하겠습니다. 옥황상제님!’라고 대답합니다.
백중이 그 얘기를 들어보니 이것은 재해를 주게 하라는 뜻이라 이 고장 농민들은 곡식을 망치면 해를 입는데 어떻게 하면 이를 방지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옥황상제의 목소리를 다시 본따서 말합니다.
“얘 거북아, 비를 세치만 내리게 하고 바람은 불지 않게 하거라.”
“네 그렇게 하겠나이다.” 거부기는 인차 대답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과연 그날 밤 비가 세치만 오고 바람은 불지 않았습니다. 한창 가뭄철이라 비가 세치만 오니 농사에 알맞춤하게 물을 준 셈이 되였습니다. 그러나 이튿날 옥황상제가 그것을 알게 되고 도대체 누구의 작간인가를 알아보게 합니다. 바로 백중이라는 아이의 작간이라고 하니 그 애를 당장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백중은 이를 미리 간파하고 물에 뛰여 들어 자살하게 되였습니다.
농부절 행사 장면.
그러나 그 해 그 고장에 대풍작이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농부들은 백중의 덕분에 대풍이 들었다고 백중을 기념하는 행사를 벌이자고 하였습니다. 백중이 자살한 날이 곧바로 음력 6월 15일, 우리가 말하는 ‘백중날'입니다. 그 때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백중을 농신으로 간주하고 거부기는 재앙을 주는 재신으로 간주하면서 백중을 기리고 추모하는 활동을 벌리는 명절을 가졌습니다.
지금 우리는 농민들을 ‘농부'라고 부르는데 현시대에 맞게 그 이름을 변이시켜‘농부절'이라고 개칭하였습니다. 그러니 백중을 기념하는 기념행사로 우리는 지금까지 10회를 치러왔습니다. 행사에서는 장원을 선발하고 민속표현도 하고 농악놀이를 위주로 민속축제를 크게 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조선족의 전통과 문화는 부단한 발전과 변화를 거듭해왔습니다. 민간이야기도 그 력사 속에서 풍속을 이어오면서 삶을 싣고 세세대대로 전해져 내려왔으며 오늘날 관광업을 추진하는 데도 안받침이 되고 있습니다.
우에서도 민간이야기 특점에 대하여 말했지만 민간이야기는 민간에서 구두로 전해지고 구술자의 구연과 기록인의 정리 등으로 이루어진 문학현상으로서 주로는 구연자가 견문한 사서의 내용이거나 기성의 설화를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따라서 이야기의 전달과정에 구연자의 기호에 의한 선택 또는 구연자의 기성감정이 개입되여 이야기 치중점이 달라지거나 골격은 같지만 일부 세부적인 부분이 변모할 수도 있으므로 자연스럽게 구연자의 심미관이나 의식경향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길림신문 글 구성/ 김청수 기자
영상 사진/ 김성걸 김파 정현관 기자
파일 [ 1 ]